[1912년] 손기정(孫基禎) 마라톤 선수 출생
←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의 우승 순간
1912. 5. 29 평북 신의주~2002. 11. 15 서울.
1937년 3월 양정고등보통학교, 1940년 3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하여 점원, 인쇄공 일을 하면서도 달리기를 계속했으며, 16세에 일본 고학길에 올랐고 20세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만학의 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마라톤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1935년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1차 예선대회에서 우승한 후, 같은 해 4월과 5월 서울에서 열린 국내 마라톤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그해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대회 최종예선을 겸한 전(全)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잘 견디어내 숱한 스포츠 일화를 남겼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세계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으로서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자발라, 영국의 하퍼, 핀란드의 타미라 등 쟁쟁한 우승후보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2위를 차지한 영국의 하퍼는 레이스 도중 손기정에게 "서두르지 말라"는 충고를 보내주기도 하여 스포츠맨십의 귀감으로 전해졌다. 3위는 한국의 남승룡이 차지했다. 경기 후 한 기자가 반환점부터 그토록 스피드를 낸 이유를 묻자, "인간의 육체란 의지와 정신에 따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대답하여 그의 스포츠맨십은 후배선수들에게 교훈으로 남았다. 그러나 시상식 게양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국가가 연주되자 우승자의 모습에는 치욕의 표정이 역력했다. 또 그는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했는데,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는 일장기를 없앤 사진을 실어 민족혼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그러나 스포츠는 예외였습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꼭 1등을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전세계인은 '손기정은 한국인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라고 그때를 회고해 그의 애국심에 고취된 정신력을 엿볼 수 있게 했다.
1947년 선수생활을 마친 후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한 제5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감독으로 참가했고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 및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 임원으로 참가하는 등 육상지도자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51~55년 조선방직주식회사 상무이사, 1956~70년 서울제분주식회사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6년에는 제5회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 한국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하여 한국이 종합 2위를 차지하는 데 공헌했다. 1948년 새로 조직된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서 체육행정에 관여하기 시작하여, 196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1966년 대한 올림픽 위원회 상임위원, 1970년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을 지냈으며, 1985년까지 대한 올림픽 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1년에는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위원, 서울 올림픽 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81년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국제 올림픽 위원회 제84차 총회에서 서울 올림픽 대회 유치를 위한 교섭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국제 스포츠 지도자들과의 긴밀한 접촉으로 대회를 유치하는 데 공헌했다. 1982년 마라톤 강화위원장을 지냈으며, 1992년 대한육상경기연맹 상임고문, 한국 올림픽 위원회 상임고문으로서 체육발전을 위해 힘썼다. 세계적인 체육인으로서 제20회 뮌헨 올림픽 대회 및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등에 특별초청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공로로 미국 헬무스 체육상을 아시아 지역 대표자격으로 수상했으며, 마라톤을 비롯한 국내 육상계 발전과 한국 체육 발전에 대한 공로로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공로상(1968) 및 특별상(1982), 일본 오시마 스포츠 문화상 등을 받았다. 자서전인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우승 당시의 일화와 소감을 기록한 〈아 월계관에 눈물〉 등의 저서가 있다.
[1895년] 소설가 이기영(李箕永) 출생
1895. 5. 29 충남 아산~1984. 8. 9 평양.
개요
20세기에 활동한 우리나라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된다.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민촌(民村). 필명은 민촌생(民村生)·성거산인(聖居山人)·성거(聖居)·양심곡인(陽心谷人)·양심학인(陽心學人)·기영생(箕永生).
생애와 활동
아버지 민창(敏彰)과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7년경 생계를 위해 가족이 천안으로 이사하자 그곳에서 자랐다. 1910년 천안의 사립 영진학교를 졸업하고, 빈궁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고전소설을 많이 읽었다. 여러 곳을 방랑하다가 1917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뒤로 교단에서 세운 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했고, 1919~21년 천안면 보조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저축했던 약간의 돈을 가지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해 4월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해 고학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25년에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의 편집기자가 되었고,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해 중앙위원 및 출판부 책임자를 지냈다. 1931년 KAPF 제1차 검거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고, 1934년 KAPF 제2차 검거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시국인식간담회에 참석하거나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출되는 등 일제에 순응했으나, 이에 환멸을 느끼고 1944년 강원도 철원에 은거해 8·15해방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 평양에서 강원도 인민위원회 교육부장, 북조선예술동맹 명예위원장,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장,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1946. 2), 친선사절단 단장 등을 지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오른 뒤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1953년 9월 조선작가동맹 상임위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지냈고, 그밖에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등 북한에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1966년 12월 이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했으며, 사망 직전인 1984년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조소문화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문학세계
1924년 〈개벽〉 현상모집에 단편 〈오빠의 비밀편지〉가 3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그 이후의 문학활동은 크게 4기로 나뉜다. 1기는 1924~26년에 발표한 초기 작품들로서 주인공이 대부분 영웅적으로 그려져 있고 계급사상에 입각한 계몽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자전적 소설 〈가난한 사람들〉(개벽, 1925. 5)을 비롯해 〈농부 정도룡〉(개벽, 1926. 1~2)·〈민촌〉 등의 농민소설과 〈쥐 이야기〉(문예운동, 1926. 1)·〈외교원과 전도부인〉(조선지광, 1926. 9) 등의 풍자소설이 이에 속한다. 2기는 1927~34년에 발표한 작품들로 계급의식이 없던 인물이 각성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생산현장에 뛰어든 진보적 지식인에 의해 제지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종이 뜨는 사람들〉(대조, 1930. 4)과 빈농 출신의 노동자가 귀향해서 고향 농민들에게 계급의식을 일깨우는 〈홍수〉(조선일보, 1930. 8. 21~9. 3) 외에도 〈박승호〉(신가정, 1933. 1)·〈서화 鼠火〉(조선일보, 1933. 5. 30~7. 1) 등이 이에 속한다. 또한 한국 근대소설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는 〈고향〉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는데, 〈고향〉은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원터마을을 무대로 식민지적 근대화에 따라 분해·재편되는 농촌을 고도의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3기는 1935~45년에 발표한 작품들로서 KAPF 검거사건으로 투옥되어 감옥에서 구상해낸 장편 〈인간수업〉(조선중앙일보, 1936. 1. 1~7. 23)을 비롯해 〈신개지 新開地〉(동아일보, 1938. 1. 19~9. 8)·〈봄〉(동아일보, 1940. 6. 11~8. 10) 등이 이에 속한다. 4기는 월북 후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들로서 이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땅〉(1948~49)·〈두만강〉(1954~61)이다. 〈땅〉은 1946년에 실시된 북한의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처음에는 '개간편'·'수확편'의 2부작으로 꾸몄으나, 뒤에 이를 1부로 하고 이어서 2·3부를 썼다. 〈두만강〉은 7년간에 걸쳐 완성된 3부작으로서 대한제국 말기부터 50년간의 한국사를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소설집으로 〈민촌〉(1927)·〈고향〉(1936)·〈이기영 단편집〉(1939)·〈인간수업〉(1941)·〈봄〉(1989)·〈두만강〉(1989) 등이 있다.
[1910년] 시인 피천득(皮千得) 출생
910. 5. 29 서울~.2007. 5. 25.
시인·수필가·영문학자.
호는 금아(琴兒). 1937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후장대학[滬江大學]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고 해방 직후 경성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46~74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4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고〉와 1932년 〈동광〉에 〈소곡〉을 발표해 등단했다. 사상과 관념을 배제하고 아름다운 정조와 서정을 읊었는데, 첫 시집 〈서정시집〉(1947)에는 동심과 자연을 노래한 시가 상당수 실려 있다.
그의 문학세계는 시보다 오히려 수필을 통해 진수가 드러나는데, 일상의 정감을 섬세한 필체로 그려 산문화된 서정시처럼 곱고 아름답다. 그의 대표작인 〈인연〉을 비롯하여 〈수필〉,〈플루트 플레이어〉 등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며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루 사랑을 받고 있다.
대표적 수필로 1933~34년에 발표한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기다리는 편지〉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금아시문선〉(1959)·〈산호와 진주〉(1969)·〈삶의 노래-내가 사랑한 시, 내가 사랑한 시인〉(1993)·〈생명〉(1993)·〈꽃씨와 도둑〉(1997) 등이 있다. 번역시집 〈소네트의 시집〉(1976) 등이 있으며 영문판 시 수필집 〈A Skylark〉(2001)이 있다. 수필집으로는 〈금아문선〉(1980)·〈인연〉(1996) 등이 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1991), 인촌상 문학부문(1995)을 수상했다.
[1898년] ‘언덕 위의 뾰족집’ 명동성당 6년 만에 준공
명동성당(明洞聖堂, 사적 제258호) 중구 명동 2가 1-8번지에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主敎座)성당으로 종현(鐘峴)의 이름을 따서 종현성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945년 이름이 종현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뀌었다. 고종 29년(1892) 8월 5일 착공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1898년 5월 29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평면 길이 약 69m, 너비 28m, 종탑 높이 47m, 건축면적 약 1,500㎡이다. 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1784년 당시 역관 김범우의 집으로 이승훈, 정약전의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모여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기도 하다. 설계와 공사감독은 프랑스인 신부 코스트가 담당하였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벽돌조 교회당이며, 평면은 라틴 십자형 삼랑식이고, 국내 유일의 순수한 고딕식 구조를 갖춘 건물이다.
[1909년] 소설가 김내성(金來成) 출생
1909. 5. 29 평남 대동~1957.
호는 아인(雅人). 일본 와세다대학교[早稻田大學校]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35년 일본에서 〈후로후이루〉에 일본어로 된 탐정소설 〈타원형의 거울〉을 발표했다. 1939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마인 魔人〉을 연재하면서부터 일련의 탐정소설을 발표했다. 〈백가면〉·〈태풍〉·〈비밀의 문〉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때부터 그는 문단에서 탐정소설의 귀재로 평가를 받았다. 〈마인〉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도록 한 뒤 최초의 피해자인 연약한 여성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한 수법으로 당시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탐정소설은 상업주의를 배경으로 1935년 이후에 등장한 통속소설이 저널리즘에 영합해가는 가운데 대중적 기반을 확보해나갔다.
한편 그는 단편소설 〈시유리 屍琉璃〉·〈백사도 白蛇圖〉·〈광상시인〉 등을 발표하여 순문학 쪽으로 진출하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는 대중소설을 계속 썼다. 대표작 〈청춘극장〉과 〈인생화보 人生畵報〉는 소설의 대중성과 예술성의 통일을 추구한 것으로 당시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청춘극장〉은 일제강점기 말기 청춘남녀의 애정과 독립투쟁상을 그린 것이다. 그밖에 여성의 허영심과 행복의 문제를 다룬 장편 〈행복의 위치〉, 트릭을 설정하여 결국은 결혼하게 되는 과정을 흥미있게 그린 〈인생안내〉 등이 있다. 그는 탐정소설에서 익힌 치밀한 구성력과 통속적 흥미를 융합시켜 본격적인 대중소설을 개척했다. 1957년 〈경향신문〉에 〈실락원의 별〉을 연재하던 중 뇌일혈로 죽었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을 쫓는 의지와 거기서 오는 윤리적 파탄을 묘사하여 참된 인생의 낙원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이런 대중소설과는 성격이 다른 〈유곡지 幽谷誌〉(1946)는 해방의 감격과 그에 얽힌 슬픔을 화전민부락을 배경으로 그렸다. 해방은 감격만이 아니었던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탐정소설가의 살인〉·〈연문기담 戀文綺譚〉 등이 있다.김내성 소설의 뚜렷한 특징은 대중성에 있다. 문단에서는 그의 소설의 대중성을 높이 인정하여 내성문학상을 제정했다.
[1592년] 임진왜란중 사천포해전, 거북선 첫 참전 (5월 29일~6월 1일)
사천포해전(泗川浦海戰)은 이순신(李舜臣) 함대가 두 번째로 출전해 치른 첫 해전이다. 전투로는 1592년(선조 25) 5월 7일부터 8일까지 치른 세 번의 해전에 이어 네 번째이다. 같은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치러졌다. 함대 규모는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정예함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의 함대 3척 등 총 26척이다. 이순신 함대에는 새로 창안된 전함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사천포해전이 처음이다.
일본 수군은 이전에 치러진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이러한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5월 29일 노량(露梁)으로 나아가 사천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류하였다. 이어 해안선을 따라 사천 선창으로 도망치는 왜군 척후선 1척을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선창에는 왜군 대선 12척이 매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아군 함대는 작전상 후퇴하며 적군 일부를 먼 바다로 유인하였다. 왜선이 아군의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 따라오자, 이순신 함대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다시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이순신은 아군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들여보내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사자총통(四字銃筒)과 각종 함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에 놀란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해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조가 되었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포구에 도착한 판옥선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자, 왜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수많은 왜군이 죽고, 포구에 있던 왜선 가운데 10척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나머지 2척은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갈 때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 둔 채 함대를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毛自郞浦)로 옮겨 그 곳에서 밤을 지냈다.
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왜군 패잔병은 원균에 의해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해전에서 왜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아군 측은 거북선 건조의 책임자이자 군관인 나대용(羅大用)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사천해전은 이순신이 치른 다른 해전과 마찬가지로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해 그 성능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종 함포로 무장한 최전방 돌격선으로서 적선 격침은 물론,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거북선은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상징하는 전선으로 위용을 떨치게 된다.
[1953년] 힐러리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
← 1953년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정복에 성공한 힐러리경(왼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1953년 5월29일 오전11시반, 전인미답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인간이 첫 발을 내디뎠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그 주인공.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를 연결한 로프를 풀지도 않은 채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힘차게 껴안았다. 산소통을 확인해보니 정상에 머물수 있는 시간은 15분 뿐. 둘은 영국ㆍ네팔ㆍ인도ㆍ유엔의 국기를 피켈에 매달고 사진을 찍은 뒤 힐러리는 십자가를, 텐징은 초코렛과 비스켓 등을 눈에 묻고 하산을 서둘렀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사흘 앞두고 전해진 낭보에 영국 전역은 열광과 환호의 물결로 넘쳐났다. 그도 그럴것이 영국은 그동안 대영제국을 자부하면서도 북극은 미국의 피어리에게, 남극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에게 ‘최초’ 자리를 빼앗겨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었다. 1921년이래 16회나 정복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래서 영국인에게는 더더욱 값진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50년간 1200여명의 사람들이 힐러리의 뒤를 이었다. 에베레스트는 1865년에 높이가 8848m임을 처음 측정한 측량기사 조지 에베레스트에서 딴 이름이지만 2개의 이름을 더 갖고 있다. ‘세계의 여신’이라는 뜻의 티베트 이름 ‘초모랑마’와 ‘하늘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네팔 이름 ‘사가르마타’가 그것이다.
[1994년]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 사망
← 옛 동독의 최고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칠레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이 1994년 5월 29일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했다. 81세였다. 에리히 호네커는 1960년대 동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장본인으로 동서간의 냉전을 주도해 온 당사자 중 한사람이다. 그는 18년 간 구 동독을 통치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나 통독 이후에는 재판정에 서는 등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거나 이국에서 떠돌다 결국은 망명지에서 최후를 맞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1912년 서독 지역에서 태어난 호네커는 14세 때 공산당 청년단체에 가입,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1935년 나치당국에 체포 돼 10년 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나 2차대전이 끝나면서 동독 공산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8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그는 동독인들의 서독 행 탈출이 줄을 잇자 이를 막기 위해 1961년 8월부터 베를린장벽 구축에 나서 이를 총지휘하다시피 했다. 1971년 공산당 서기장이 된 호네커는 1989년까지 18년 간 막강한 권력으로 동독을 통치했으나 동독인들의 서독 탈출이 절정에 이르는 등 소요가 일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인 그 해 10월 축출됐다.
이후 그는 동독 당국에 반역 혐의 등으로 체포됐다 풀려나 1991년 3월 모스크바로 망명을 떠났다가 1992년 7월 독일 당국에 소환돼 베를린 장벽 탈출자들에게 총살을 명령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러나 1993년 1월 베를린 법정은 그가 간암을 앓고 있어 더 이상 재판을 진행시킬 수 없다고 재판 중단을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그는 부인 딸과 함께 칠레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었다.
[1990년] 러시아, 옐친 대통령 선출
1990년 5월 29일 러시아 의회는 급진적이고 광범위한 개혁을 공공연하게 주장해온 보리스 옐친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옐친은 스베르돌로프스크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를 역임하고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모스크바 시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고르바초프와의 갈등이 표면화되자, 시장 자리에서 사퇴했으나 1990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옐친은 관료주의를 공격하고 시장지향적인 경제체계로의 변환을 주장했다. 1991년 8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했으나 옐친은 이들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이 쿠데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러시아 제1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1917년]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출생
1917년 5월 29일 태어남 / 1963년 11월 22일 죽음
"미국인들이여,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세계 시민들이여,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지 묻지 말고, 우리가 함께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 보십시오." - 존 F. 케네디케네디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가이다. 명문가 출신의 수재로서 하버드대학교의 학부 졸업 논문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학자나 언론인이 되려 했으나, 형의 전사로 인해 정계 진출에 대한 가문의 기대를 이어받게 되었다.
1946~53년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 1954년 상원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노동개혁에 앞장섰으며 민권보호에도 힘썼다. 1961년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제치고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에는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고 포괄적인 민권법안을 상정하는 등 이른바 뉴프런티어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소련의 총리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협상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했으며, 핵실험금지조약을 성사시켰다. 1964년 차기 대통령선거 유세를 위해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가두행진을 벌이던 중 리 하비 오즈월드에 의해 암살당했다.
[1869년] 한말 의병장·독립운동가 이세영[李世永] 출생
1869. 5. 29 충남 청양~1938.
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유흠(維欽)·천민(天民)·세영(世榮). 자는 좌현(佐顯), 호는 고광(古狂)·고광자(古狂子). 아버지는 내금위장(內禁衛將) 민하(敏夏)이다. 양헌수(梁憲洙)에게 수학한 뒤 1889년(고종 26)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이봉학(李鳳學)과 함께 유회(儒會)를 설립해 농민군을 막았다. 1895년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찰사 이승우(李勝宇)를 대장에 추대했으나, 이승우의 배신으로 김복한(金福漢) 등이 체포되자 정인의(鄭寅義)와 같이 공주를 공격했으나 패하고 홍산으로 피신했다. 이듬해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패했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7등군공부(七等軍功簿)에 오르고 육군참위가 되었으며, 1902년 헌병대장 서리를 지낸 후 제대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홍산에서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붙잡혀 종신유형(終身流刑)을 받고 황주로 유배되었다. 그뒤 철도(鐵島)로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1908년 동생 창영(昌永), 이상린(李相麟)과 함께 후진 교육을 위해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설립해 교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대한협회 은산지회를 조직했다.
한일합병 후 일제가 군참사(郡參事)를 시키고자 회유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1912년 임병찬(林炳瓚)이 고종의 밀칙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자 1913년 3월 함경도·평안도·황해도의 3도사령이 되었다. 그해 6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소장서리가 되었다. 1917년 11월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로 개칭되자 교장이 되었다. 1919년 2월 여준(呂準)·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39명 명의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건립운동의 일환으로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만들어지자 참모차장에 선임되었으며, 8월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노동부차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7월 환런 현[桓仁縣]에서 손극장(孫克章)·윤세용(尹世茸) 등과 함께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조직했으며, 뒤에 특무부(特務府)라 개칭하고 특무부장이 되어 일제의 침략기관을 습격하고 친일 주구들을 처단했다. 1921년 주만통군부(駐滿統軍府) 사령관이 되었고, 1922년 2월 한교교육회를 조직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자 참모부장·군사부장을 지내면서 만주의 일제기관 파괴와 주구배 숙청에 주력했으며 군내진공작전도 벌였다. 그뒤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자 1925년 5월 이를 규탄하는 교정서(矯正書)를 발표했다. 1930년 2월 베이징에서 조성환(曺成煥)·손일민(孫逸民) 등과 함께 한족동맹회를 조직했으며, 그해 7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했다. 1932년 6월 조성환·김원봉(金元鳳)·김규식(金奎植) 등과 같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후원을 얻어 중한항일의용군을 조직하여 간부훈련 및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1933년 충칭[重慶]에서 신사회(新社會)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이 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56년] 미국 북감리교 계통의 한국 의료선교사 스크랜턴 (미국 선교사) [Scranton, William B.] 출생
1856. 5. 29 미국 코네티컷~1922 일본 고베.
한국 이름은 시란돈(施蘭敦). 1878년 예일대학교, 1882년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결혼한 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하고 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고 1884년 미국 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 4일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3일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같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G. Appenzeller)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했다. 부녀자들의 입국이 어렵자 어머니와 부인을 일본에 두고 그해 5월 3일 감리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서울에 도착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북장로의 선교사인 알렌(H.N. Allen)을 도와 제중원(濟衆院)에서 의료사업을 하다가 1885년 9월 10일 정동에서 민간의료기관으로 진료소를 열어 1886년 6월 15일 시설을 갖추고 병원 이름을 시병원(施病院)이라고 했다.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설치했으며,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는 특히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를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다. 스크랜턴의 선교병원은 부녀자와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여의사들의 도움으로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그밖에 한글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서 성서사업에도 큰 공헌을 했다.
[2001년] 올림픽대교 조형물 설치 작업중 헬기 추락사고
2001년 5월 29일 오후 4시55분 서울 송파구 올림픽대교 중간부분 상공에서 대형 조형물 설치 작업을 하던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소속 CH-47 헬기가 추락했다.
헬기는 강으로 추락하면서 몸체가 두동강 났고, 헬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 전홍엽(전홍엽·44) 준위와 부조종사 남인호(남인호·40) 준위, 승무원 김우수(김우수·26) 중사 등 3명이 모두 숨졌다. 그러나 작업 당시 경찰이 올림픽대교 교통을 완전 통제해 일반인의 피해는 없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날 헬기는 광진구 광장동과 송파구 풍납동을 잇는 올림픽대교 주탑(88m) 위에 ‘올림픽 성화’ 모양의 13m 높이의 조형물을 설치하던 중 로터(프로펠러)가 조형물 끝에 부딪치면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헬기는 교각 사이 난간으로 추락해 두동강 나 조종석 부분은 한강으로, 뒷부분은 다리 위로 떨어졌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윤동구 교수의 작품인 조형물은 작년 10월 서울시가 10억원에 발주한 것으로, 스테인리스 파이프 600여개로 만들어졌으며 상단부 불꽃모양(6.3t)과 하단부 접시형 받침(4.5t)을 합쳐 10.8t이다.
민간 항공기로는 운반이 불가능해 서울시가 육군에 지원을 요청해 군 헬기가 동원됐다. 사고 헬기는 당초 28일 조형물을 상판 위에 올릴 예정이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포기했으며, 29일에도 몇차례 시도 끝에 조형물을 상판에 올린 다음 사고를 당했다. 육군은 특전사 스쿠버팀 46명을 동원해 구조작업을 벌여 이날 밤 시체 3구를 인양했다.
CH-47은 지난 87년부터 우리 군에 도입된 대형 수송헬기로, 33명의 완전무장 병력을 태울 수 있다.
한편, 서울시는 사고 후 조형물과 올림픽대교에 대해 긴급 안점점검을 실시한 결과 모두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했다. 또 추락한 헬기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주변 5개 취수장으로 유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취수장 주변에 오일 펜스를 설치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긴급수질점검에서도 일단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200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중국 방문(~31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29일)
김 위원장은 2000년 5월29∼31일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는데,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북한 최고 지도자에 오른 후 첫 나들이였다.
그는 장 주석과 회담한 데 이어 중국 지도자들과 만나 남북정상회담과 개방문제 등에 관해 논의했으며 중관촌(中關村)의 컴퓨터생산공장 등 산업시설을 시찰했다.
이 방문에는 조명록 군총정치국장, 김영춘 군총참모장, 김국태. 김용순 노동당 비서, 김양건 노동당 국제부장 등이 수행했다.
이어 이듬해 1월15일부터 20일까지 5박6일간 또다시 중국을 찾은 그는 4일 동안 개혁.개방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상하이의 첨단산업시설을 둘러본 후 ‘천지개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중국의 개혁.개방 성과를 눈으로 확인했다.
[1981년] 중국의 정치가.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1890~1981] 사망
쑹칭링 [宋慶齡, 1892.1.27~1981.5.29]
언니는 쿵샹시[孔祥熙]의 부인인 쑹아이링[宋靄齡], 여동생은 장제스[蔣介石]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남동생은 재벌인 쑹쯔원[宋子文]이다.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미국 웨슬리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 난징[南京]임시정부 대총통(大總統) 쑨원의 비서가 되었다. 1913년 제2혁명 실패 후 쑨원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1914년 일본에서 쑨원과 결혼하였다.
쑨원이 죽은 뒤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노력하다가 국 ·공이 분열하자, 모스크바 ·베를린 등에 가서 머물렀다. 1929년 귀국 후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국민당 좌파에 속하여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국민당 정권의 부패를 공공연히 비판하면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루쉰[魯迅] 등과 함께 민권옹호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에 노력하였다.
항일전쟁 중에는 홍콩[香港]과 충칭[重慶] 등에서 활약하면서 내외의 반(反)파시스트 운동을 지원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국가 부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하는 등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 스탈린평화상을 받았고, 1952년 이후 소련 ·인도 ·미얀마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에 친선 방문여행을 하였다. 저서에 《쑹칭링선집[宋慶齡選集]》 등이 있다.
[1979년] 산악인 고상돈, 알래스카 매킨리봉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길에 사망
고상돈(高相敦, 1948년.12.9 ~ 1979.5.29일)은 1948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산악인이다.
청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71년 네팔정부에 입산허가서를 제출한지, 6년만인 1977년에 등반할 수 있었고, 그해 9월 15일 낮 12시 50분 에베레스트 산을 한국인 최초로 등정하였다. 당시 고상돈이 한 말은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였다. 정상의 눈을 손으로 파헤친 뒤 성서와 사진 석 장을 묻음으로서 먼저 간 동료들을 추모했다고 한다.
1979년 알래스카산맥의 매킨리산(6194m) 원정대에 참가하여 1979년 5월 29일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하산도중, 이일교와 함께 1,000m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하였고, 박훈규(현재 58세)는 목숨은 건졌으나 10개의 발가락과 7개의 손가락을 잃는 중상을 입었다. 이로써 그는 지금도 존경받는 영원한 산사나이로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한편 박훈규는 퇴원 후 방황하다가 6년후 한라산 등반, 제주산악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산악인의 삶을 다시 시작하였다.
1977년에 청년대상, 체육훈장 청룡상을 받았고 한라산 해발 1,100m 고지에 묘소가 있다. 그가 죽은 후, 고상돈대원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해마다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2년 6월 에베레스트 산에서 청소활동을 벌이던 단체에 의해 고상돈 원정대의 깃발이 발견되었는데, 깃발에는 '77 K.E.E(77: 등반연도, K.E.E: Korea Everest Expedition)'라고 씌어 있었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 하와이로 망명
전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同夫人 프란체스카 여사는 29일 상오 8시 45분 CAT항공사 소속 전세기편으로 김포국제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일로망명의 길을 떠났다(號外再錄).
이날 공항에서 허정 수도국무위원과 이수영 외무차관, 그리고 그의 운전수와 경호원 수명이 전송할 뿐 16년전 그가 국부로 추앙받으며 동포의 환호성에 묻혀 환국했을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파란 많은 그의 생애를 말하는 듯 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기자 질문에 李박사는 “지금 내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겠소. 얘기를 하면 내 생각하는 일이 달라질지 몰라. 다 이해해 주고 그대로 떠나게 해 주오”라고 말했으며 프란체스카 부인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낫딩… 아이 러브 코리아”(아무것도 없소…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41개의 좌석이 있는 CAT상의 104호기는 이날 아침 7시반 臺北으로부터 飛來하여 李박사 내외와 그들의 휴대품인 4개의 중형 보스톤백, 2개의 양산과 李박사가 10여년래 애용해 온 타이프라이터 1개와 短杖 1개를 실었을 뿐 아무도 따라가는 이가 없었고 승무원으로는 기장 K.R.락웰씨, 부조종사 티턴 및 핀카바씨의 3명 외에는 한 사람의 스튜디어스(案內員)도 없었다. 락웰 조종사는 이날 기상 등 비행조건이 好適하다고 말하면서 순조로우면 21내지 22시간 후에 하와이 호놀룰루 비행장에 닿을 것이며 도중 웨이크島에 기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許 首席국무위원은 정비 관계로 이날 예정보다 2시간여 연발하게 된 기내에서 李박사와 얘기하였는데 그것은 “別 얘기도 아닌 이런저런 얘기였다”고 말하였다. 許 首席은 李 박사부처가 “休養次하와이로 떠났다”는 것을 공보실을 통하여 발표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날 경향특종 1면은 이 박사 망명 톱기사와 맥카나기 주한 미대사의 ‘暫定査證으로 출국’했다는 코멘트 이외에는 일체 함구했다는 사실, 張 勉박사의 ‘의외의 놀라운 일’이란 코멘트, ‘당연히 잘 떠났다'는 재야인사의 반응, ‘도망시킨 자는 심판 받아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 등 각계의 반응도 골고루 실었다.(경향신문)
[1913년] 스트라빈스키 발레음악 ‘봄의제전’ 공연
1913년 5월 29일 파리 상젤리제극장은 쇼크에 빠졌다. 목관 파곳 선율로 발레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은 술렁댔다. 술렁임은 야유, 발장구, 고함으로 번져갔다. 야수적이며 충동적인 리듬, 긴장과 짜증을 강요하는 불협화음…. 우아한 음악에 익숙했던 대부분 청중은 낯선 음악과 도발적 퍼포먼스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피에르 몽퇴 지휘, 니진스키 안무로 이날 초연 무대에 올린 작품은 러시아 태생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Igor, 1882~1971)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1913). 스트라빈스키는 이날 광경을 ‘자서전’에 적었다. ‘첫소절이 흐르고 이내 조소가 터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연주장은 야유로 술렁댔다. 야유하는 청중을 비난하는 고함소리도 높아가면서 혼란상태에 빠졌다.’ 20세기 현대음악 서곡은 이렇게 소란, 혼돈으로 시작한다.
‘봄의제전’은 개벽이었다. 특히 리듬은 혁명이었다. 스트라빈스키에 한 세대 앞섰던 드뷔시같은 인상파 계열도 화성이나 선율의 창의성에 비해 리듬쪽은 둔감했다. 음이 안맞는 악기를 겹친듯한 다조성 불협화음, 목-금관을 키운 관현악의 색채감각과 파괴적 에너지. 제1부 ‘대지 예찬’, 제2부 ‘희생물’로 짠 35분짜리 ‘봄의제전’은 음악적 구질서를 뒤짚는 반란이었다. ‘이교 러시아의 풍경’이란 부제 그대로 ‘봄의제전’은 이교적 주술, 낯선 자극이었다.
‘봄의제전’은 전통적 조성과 주조를 흔들었다. 다른 조성들을 동시에 사용했다. 르네상스 이래 원근법에 기대던 공간인식을 깨고, 공간을 보는 여러 시점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낸 피카소 방식과도 닮았다. 스트라빈스키 ‘봄의제전’은 인상주의까지 포함한 낭만주의적 잔영을 음악사에서 쓸어냈다. 이후 전통 조성마저 해체한 무조음악, 전자음악, 미니멀리즘 등 온갖 전위적 사조가 만개하면서 스트라빈스키 ‘봄의제전’도 ‘고전’이 됐다.
[1736년] 미국 독립혁명의 지도자 헨리(Henry, Patrick, 1736~1799) 출생
버지니아 식민지 출생.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1763년 '목사사건'의 소송에서 당시 영국 국왕 보호하에 특권을 지닌 목사 봉급을 담배의 최저가격으로 묶어 두는 데 성공하여 명성을 떨쳤다. 1765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의원이 되어 식민지의 입법권을 주장하고, 영국의 인지조령(印紙條令)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가결하게 함으로써 전식민지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
1774년의 제1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 각 식민지의 급진파를 대표하여 식민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할 것을 강조하였다. 1775년 3월 버지니아 의회가 해산되자 리치먼드에서 개최된 비합법 민중대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연설을 하고 영국 본국과의 개전(開戰)을 주장하였다. 1776년 버지니아가 혁명을 일으키자, 초대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787년 헌법제정회의에는 강력한 중앙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참석을 거부, 헌법 초안의 승인에는 맹렬히 반대하여 헌법 수정 10개조를 추가시켰다.
그밖에
2005 한국인 첫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 고상돈씨 동상 제막
2005 중견 사진작가 김영갑씨 루게릭병 악화로 별세
2005 산악인 엄홍길씨가 이끄는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고 박무택씨 시신 수습 후 안치
2004 ‘워터게이트 특별검사’ 콕스 사망
2004 울진 앞바다서 리히터 규모 5.2 지진 발생
2004 재미동포 2세 강진씨 미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2003 줄기세포서 심장ㆍ간ㆍ피부 만드는 ‘마스터 유전자’ 발견
2003 힐러리경 에베레스트 정복 50주년 기념, 네팔서 축제
2003 ‘보브 호프의 날’ 선포
2002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에 재선
2002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선임
2000 이승만 전대통령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타계
1998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사임
1990 옐친, 소련내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
1989 나이지리아에 첫 ‘원화 차관’ 제공
198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결성
1986 유엔(UN) 아프리카 전체에서 1790만인이 기아에 직면하고 있다고 발표
1984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1982 서독의 축구영웅 베켄바우어 은퇴
1982 산악인 허영호 마카루봉 정상 정복
1979 카터 미국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동결 결정
1979 아프간 반군, 정부군과 전투 3개주 점령
1977 카터 미국 대통령 한국피침때 핵무기사용 언명
1974 남북적십자 7차 실무대표자 회담 판문점서 개최
1974 북한, 만국우편연합(UPU) 가입
1972 파리서 고려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 발견
1968 향토예비군법 법률 제2017호로 전문개정
1968 김수환 주교,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
1966 KAL기, 서울-오사카간 운항시작
1963 동파키스탄 태풍으로 1만여명 사망
1962 파주에서 미군의 한국인 린치사건
1957 이효정 여사 한국 최초로 ‘나이팅게일’ 기장 받음
1956 한국전 참전 16개국 휴전감시위 해체 결의
1952 김성수 부통령 국회에 사임서 제출
1952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일본의 가입을 승인
1946 신문, 정기간행물의 허가제 실시
1942 미국 연극배우 존 배리모어 사망
1941 가수 빙 크로스비 ‘화이트 크리스마스’ 녹음
1934 국제연맹 주최 제3회 군축회의 시작
1933 미국 스탠다드오일사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화학 60년 기한으로 획득
1914 미국-멕시코 강화조약 체결
1914 캐나다 여객선 엔플레스호 침몰 1012명 사망
1911 포르투칼 헌법제정 국회의원선거서 공화당 승리
1905 형법대전 공포
1894 미국의 영화감독 슈테른베르크 츨생
1880 독일의 철학자 슈펭글러 출생
1877 중국 신강지역 무슬림 정권 통치자 야쿱 벡 사망
1875 대한제국 첫 주일(駐日)사절 횡빈 도착
1453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사망
1453 오스만 투르크의 모하메드 2세,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 비잔티움 제국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