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압독국 무덤서 순장 흔적 발견 죽음 후 현재 삶 이어진다고 생각해 지배층 죽으면 거느리던 사람도 묻어
중국은 17세기 淸 강희제까지 유지
얼마 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서 약 2000년 전 고대국가였던 압독국(押督國)의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됐어요. 참나무로 짠 나무 널(목관)무덤 안에는 사람의 뼈와 청동거울 등이 발굴됐답니다.
압독국은 경산 일대를 지배했다가 2세기쯤 신라에 함락된 소국(小國)인데요. 올 6월에도 이와 비슷한 압독국 지배층 무덤이 발굴됐지요. 당시 유골의 발 근처에는 금 귀걸이를 착용한 어린아이 뼈가 함께 발견돼 고대 순장(殉葬·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 뒤를 따라 다른 사람을 함께 묻던 일)의 흔적을 보여줬어요. 오늘은 고대국가와 순장 풍습에 대해 알아볼게요.
◇사로국, 압독국 항복 받아내다
기원전 100년 무렵부터 약 300년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마한·진한·변한이라는 세 나라로 연합해 세력을 펼치고 있었어요. 이 시기를 '삼한(三韓) 시대'라 해요.
▲ /그림=정서용
진한 가운데 한 나라였던 사로국은 경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강하게 키워나가고 있었어요. 사로국 제5대 임금 파사 이사금(尼師今·재위 80~112년)은 경주 인근 여러 소국(小國)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지요. 102년에는 음즙벌국을 정벌했고 뒤이어 실직국과 압독국도 정복했어요.
이렇게 영토를 넓힌 사로국은 제22대 지증왕 때인 503년 '신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고구려·백제와 함께 '삼국(三國)시대'를 이끌었어요. 사로국에 복속됐던 압독국은 146년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해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지요. 이후 신라의 지방행정구역 중 하나가 됐는데,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덕왕 때 김유신 장군이 압독주를 다스리는 도독(都督·관직 중 하나)이 되었다든가, 원효대사가 압독 출신이었다는 기록이 전해져요.
그렇다면 압독국은 어째서 어린아이를 무덤에 함께 묻는 '순장'을 한 걸까요? 순장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신분제가 엄격했던 고대 문명국가에서 광범위하게 볼 수 있어요. 주로 지배층이 죽으면 후궁과 노비, 군인을 죽여 왕이나 귀족과 함께 묻는 방식이었지요.
고대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현재의 삶이 그대로 이어질 거라 여겼어요. 그래서 살았을 때 거느리던 사람들을 함께 무덤에 묻어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라는 의미에서 순장을 치렀지요. 우리 역사에서는 고조선에서 순장 풍습이 있었고 부여와 고구려, 가야 남쪽 지방과 신라 등지에서 순장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져요.
고대 중동 지방에선 왕이 죽으면 군인과 여성들을 함께 묻었고, 이집트도 후궁과 노비 수십~수백 명을 순장했어요. 고대 켈트족·아일랜드인, 동유럽 슬라브족들이 사는 일부 지역에도 순장 관습이 있었어요.
인도에는 19세기 초반까지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분신해서 죽는 순장 풍습이 있었고, 중국의 경우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죽자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후궁 등 30여명이 순장됐다는 기록이 나와요. 17세기 후반 청나라 강희제가 이를 '잔혹하다'며 금지할 때까지 순장 풍습을 유지했지요. ◇순장을 금지한 지증왕
502년, 신라 지증왕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어요. "이제부터 온 나라에 순장을 금지하겠노라! 만약에 순장을 치르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지증왕은 64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체제를 정비하고 개혁 정책을 실시했어요. 나라 이름도 '신라'로 바꾸었고, '마립간'으로 부르던 왕 칭호도 '왕'으로 고쳐 부르게 했지요. 지방을 주(州)와 군(郡)으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해 왕의 명령이 전국 곳곳에 제대로 전달되도록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도 했어요. 농사를 지을 때 소를 이용하는 우경(牛耕)도 도입했고, 이사부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벌하게 하고 신라 영토로 삼기도 했지요.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걸로 보여지는데요. 하나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종교적인 이유, 다른 하나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이유이지요.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그가 살던 모습으로 그다음 세계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어요. 이에 따라 죽은 뒤 세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순장을 금지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지요.
순장을 하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줄고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금지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많아요. 다만 지증왕 때는 불교를 공식적인 국가 종교로 인정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순장을 금지한 실질적인 이유일 거라고 보고 있지요. 불교가 신라에 전파된 건 5세기 안팎이지만, 국교(國敎)로 인정한 건 그다음 왕인 법흥왕 때(527년)랍니다.
[순장 대신 인형을 넣다]
순장은 삼국시대 후기쯤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후 신라 사람들은 산 사람 대신 사람처럼 생긴 인형을 무덤에 넣어주었답니다. 흙으로 빚어 만든 10~20㎝ 크기의 토용(土俑)이지요. 이처럼 무덤 안에 시체와 함께 넣는 물건을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라 해요. 통일신라 시대 무덤인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는 남성 토용 15점, 여성 토용 13점, 토제(土製) 말 3점, 청동제 12지신상(像) 등이 출토되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