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수도원
도스토예프스키 묘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 성화벽, iconostasis
강 건너 보이는 이삭 성당
이삭 성당 돔 천장의 비둘기 조각
이삭 성당의 성화벽, iconostasis
피의 구세주 성당
피의 구세주 성당의 실내
-광야에서 (25)-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당들
Cathedrals of St, Petersburg 이신웅
오후에 벨리키 노브고로드를 떠나 180km의 복잡한 도로를 3시간 동안 달려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왔다. 여전히 아름답고 붐비는 도시다. 거리 끝에 보이는 곳마다 성당의 금빛 돔이 보인다. 이보다 더 그리스도교적인 도시가 세계에 어디 있을까? 나는 이 도시가 참 좋다.
넵스키 대로의 중간에 있는 호텔에 들었다. 옛 왕궁을 개조한 호텔이라는데 고풍스럽다. 6층 호텔 라운지에서 청새치 요리를 먹고 바람은 불지만 날이 좋아서 네바 강에 배를 타러나간다. 저녁 바닷바람을 쏘이며 배에서 들려주는 음악을 듣는다. 한국 사람이면 러시아 사람들은 ‘백학, Crane'을 들려준다. ’모래시계‘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 러시아 노래다.
‘가끔 병사들 생각이 나는구나
그들은 피로 물든 벌판에서 돌아오지 않았지
언젠가 그 때, 그들은 우리 조국 땅에서 죽지 못 했어
그 대신 하얀 학이 되었던 것 같아‘
좁은 운하를 다니며 유서 깊은 장소와 건물들을 본다. 다리 밑을 지날 때에는 “다리는 500개인데 머리는 하나뿐이니 조심하라”고 한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넵스키 대로에 있는 호텔을 나선다.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ct)는 구 해군성본부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km의 큰 거리를 말한다. 하루 300만 명이 이 거리를 걷는다고 한다. 고골리, 차이코프스키, 니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주변에서 살았고 카잔 성당, 고스티니 드보르 백화점, 예카테리나 대제의 동상이 이 거리에 있다. 상점들은 사치스런 아르누보 양식으로, 단순한 아르테코 풍으로 만들어져 이어진다.
먼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의 예술가 묘지(The Necropolis of Art Masters)에 간다. 이 수도원은 표트르 대제의 명으로 건설했고 1240년 스웨덴과 전쟁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공(1221-1263)에게 헌정했다. 묘지는 울창한 숲속에 아름다운 조각들로 꾸며져 조각공원 같다. 내가 아는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무소르그스키, 쇼스타코비치, 루빈스타인 등의 묘가 있다. 묘 사이를 걷는 것은 오히려 상쾌하고 싱그럽다. 우리에게 친근한 도스토예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묘비 곁에서 사진을 찍는다.
묘지를 나와 페트르 파블로프스크 요새(Petropavlovskaya, Peter and Paul Fortress)에 간다. 네바 강의 하류에 있는 티니 자야키(Tiny Zayachy) 섬에 1703년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만들었다. 이곳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이 요새는 1917년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하기도 해서 도스토예프스키, 고리키, 트로츠키,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번째 수감자는 표트르 대제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했던 그의 아들 알렉시스였고 그는 끝내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공산혁명 후에는 이곳에서 수천, 수만 명의 정치범이 학살되어 매장되었다.
이곳에는 유명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성당( Peter and Paul Cathedral)이 있다. 1712-1733년에 만들었고 122.5m의 황금빛 첨탑이 도시의 어디에서나 보인다. 이 성당에는 로마노프 왕가의 지배자들이 묻혀있다. 표트르 1세부터 알렉산드르 3세까지 대부분의 짜르가 이곳에서 안식을 누린다. 볼셰비키에 의해 학살당한 마지막 짜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은 그들이 죽은 지 80년 만에 1998. 7. 17일에 이곳의 한 예배실에 안장되었다. 안장식에 참석한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엘친은 "오늘은 러시아의 역사적인 날이다. 여러 해 동안 이 가공할 범죄에 대하여 침묵했으나 진실을 말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첨탑이 있는 베드로 성당 안에 들어가 사진도 찍는다. 이콘 스크린(Iconostasis)은 온통 황금빛으로 눈부시다.
네바 강가에 오래된 회색 전함이 한 척 있다. 오로라 전함인데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 전함의 대포가 강 건너 황제의 겨울궁전 화이트 룸을 조준하고 있었고 포를 발사하자 봉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실제로 30발을 쏘았는데 2발이 맞았고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현재는 해군 중앙 박물관이다. 작은 자동차를 타고 네바 강가의 고르시카 레스토랑에 가서 조지아식 식사, 샐러드와 돼지 샤스릭을 먹는다. 긴자프로젝트에 속한 식당이라고 한다. 긴자프로젝트(Ginza Project)는 러시아의 외식 문화가 형편없어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식당 체인을 만들어 성공한 모양이다.
이제 오늘의 가장 중요한 여정인 이삭 성당(St. Isaac's Cathedral)에 간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이다.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1818년부터 1858년까지 40년 동안 지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표트르 대제가 성 이삭(St. Isaac of Dalmatia)의 축일인 5. 30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성당을 성 이삭에게 헌정했고 이삭 성당으로 부른다. 성 이삭은 표트르 대제의 수호성인이었다.
성당의 높이는 101.5m, 그리스 십자가 모양의 바닥 위에 세웠고 중앙에 큰 돔이 있고 주위 네 곳에 작은 돔이 있다. 거대한 성당을 짓기 위하여 바닥에 25000개의 파일을 박았다고 한다. 네 면의 파사드가 회색 화강암으로 되어있고 총 112개의 붉은 화강암 기둥이 받히고 있다. 파사드의 통돌 큰 기둥이 48개, 큰 돔을 받히는 기둥이 24개다. 돔은 순금 판으로 덮여있고 12 천사 상으로 꾸며져 있다. 도시의 어디에서나 이삭성당의 황금 돔이 빛나게 보인다. 회색 화강암 벽과 붉은 화강암의 거대한 원주가 외관에서부터 장엄한 모습으로 기를 죽인다.
내부에 들어서면 러시아에서 가장 인상적인 신(scene)을 보게 된다. 이콘 스크린(Iconostasis)은 8개의 청록색 기둥으로 꾸며져 있는데 6개는 공작석(malachite)으로, 이콘 스크린의 중간 성스러운 문의 양측 작은 기둥은 청금석(lapis lazuli)으로 되어있다. 이 문이 열리면 안의 지성소가 보이는데 붉은 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이콘이 있다. 성화벽이 어마어마한 보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앞에 서면 나는 감동한다. 통치자들은 왜 이렇게 그리스도의 전을 화려하게 꾸미려 했을까? 돔 아래의 네 개의 박공벽(pediment)에도 많은 이콘이 있다. 내부의 이콘들은 습하고 찬 기온 때문에 훼손이 심해져 점차 모자이크로 바꾸고 있다고 한다.
큰 돔 천장의 한가운데에는 흰색 비둘기 조각이 매달려있어서 성령을 의미하고 있다. 공산혁명 이후 종교적인 구조물을 모두 벗겨버리고 ‘종교와 무신론 역사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돔 꼭대기에서 비둘기 조각을 없애고 푸코 진자(Foucault Pendulum)를 매달았다. 푸코 진자를 달아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증명했다. 종교의 미몽에서 벗어나 과학적 사고의 시대를 열 것이라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소비에트가 무너진 후 대성당의 위치를 회복했지만 미사는 왼쪽, 곁의 예배실에서만 드리고 본당은 축일에만 사용한다.
밖으로 나와서 남쪽 입구에서 나선형 통로의 계단을 210개 올라가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주위를 조망한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2차 대전 때 독일 폭격기로부터 성당을 보호하기 위하여 돔을 회색으로 칠하고 꼭대기에 빛을 쏘아서 위치를 측정하기 어렵게 하여 성당을 지켰다고 한다.
이제 피의 구세주 성당(The Church of the Saviour on spilled Blood) 또는 피의 성당(Church on the spilled Blood)에 간다. 1881년 3월, 알렉산드르 2세가 이곳을 지나갈 때 무정부주의자 둘이 수류탄을 던져서 치명적 부상을 입고 겨울궁전으로 옮겼으나 수 시간 만에 사망했다. 2년 후 1883년에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그 피 흘린 자리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907년 니콜라이 2세 때 완공했다.
이 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른 성당과는 달리 17세기의 야로슬라브의 성당들과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과 같은 모양으로 중세 러시아의 건축양식으로 지었다. 예배실의 각 기둥이 각각 다른 모양으로 솟아있고 그 위에 양파 모양의 큐폴라가 있다. 또 특이한 것은 성당의 외벽, 내벽, 천장까지 총 7500평방미터의 모자이크가 덮고 있다. 모든 이콘, 장식 등이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그 아름다움을 말할 수가 없다. 주 돔의 천장에는 ‘전능하신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의 이콘이 내려다보고 있다. 또 외부 파사드 중앙 상부에도 Christ Pantocrator가 좌정하고 계신다. 실내는 자연광으로 조명되어 모자이크를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공산혁명 이후 성당은 샅샅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그리고 1932년에 성당은 폐쇄되었다. 2차 대전 때는 전투 중에 죽은 사람, 아사자, 병사한 사람들의 시체저장소가 되었고 대전 후에는 채소창고로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곳의 감자를 ‘구세주’라고 비아냥댔다. 1970년부터 보수를 시작하여 1997년에 문을 열었다. 현재는 ‘모자이크 박물관’이고 정기적인 예배는 없다. 혁명 이전에도 공적인 예배는 없었고 추도미사만 드렸었다고 한다. (201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