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평촌마을에 관하여는 2014년 갑오보인 경주김씨감사공파세보 권지일 의 202페이지에 평촌시거선조 및 후손과 화수계의 연혁 제하에 302페지에서 312페이지까지 11페이지에 걸치어 상세히 기록 등재한 바 있고 경주김씨감사공파 카페에도 2015.1.7.자로 위 족보에 등재된 글과 2014.9.2. 현재 평촌의 양달 마을 음달마을 사태마을의 주요사진을 여러장 등재하고 당시 방서 도시개발과 인근 동남지구 도시개발의 전망을 추기 사항으로 간략하게 언급하였던바
2. 그간 방서 도시개발은 거의 마무리가 된 상태로서 평촌마을의 개발된 2020.4.14.현재 상태를 사진에 담아 다음과 같이 등재하는바 천지개벽이란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말로서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고 옛 마을이 그리워 안타까운 마음 측량할 길 없으나 변천하는 시속에 따라 더욱 많이 발전되고 복된 지역으로 길이길이 이어가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2020. 4. 15.
김 용 욱 근기
1. 2014.9.2. 현재 청원군민회관에세 내려다본 큰 도로 4거리와 평촌마을 사진
위 (1. 2014.9.2. 현재 청원군민회관에세 내려다본 큰 도로 4거리와 평촌마을 사진) 지점 의 2020.4.14.현재 개발 변화된 사진
2. 2014.9.2.현재 양달마을 음달마을 중간에 있는 월운천 사진
위 (2. 2014.9.2.현재 양달마을 음달마을 중간에 있는 월운천 사진) 지점 의 2020.4.14.현재 개발 변화된 사진
3. 2014.9.2.현재 양달마을 일부 사진
위 (3. 2014.9.2.현재 양달마을 일부 사진) 지점의 2020.4.14.현재 개발 변화된 사진
4. 2014.9.2.현재 음달마을 일부 사진
위 (4. 2014.9.2.현재 음달마을 일부 사진) 지점의 개발 변화된 사진
5. 2020.4.14.현재 기타지역
.....추기(追記).....
평촌마을의 토지는 현재 청주시당국에서 인가된 방서도시개발지구내에 속하여 있고 방서도시개발지구는 방서사거리를 중심으로 467.242㎡로서 북쪽은 용암동과 영운동 일부와 남쪽은 방서동일부와 평촌동일부가 포함되어 있으나 평촌동은 인가 주택이 있는 양달마을 음달마을 사태마을 전부가 해당 지구에 속하여 있고 공군사관학교 방향 남북 간 큰 도로 평촌마을 위 동쪽 방향은 청주동남지구택지개발사업 지구에 귀속되어 현재의 평촌동 토지가 잔존하는 곳은 음달마을 동서 간 우회 큰 도로 앞 남쪽방향의 옛 복수들만이 잔존 될 것으로 예상되나 옛 복수들도 동서 간 우회 큰 도로와 인접되어 불원 개발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바 방서도시개발지구와 청주동남지구택지개발사업 지구는 금년 내에 토목공사가 착공이 될 시점에 있다 위와 같이 개발된 후로는 평촌동의 옛 모습은 서쪽의 무심천과 마을 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월운천만이 남고 마을 인가주택의 옛 모습은 모두 사라져 현재 평촌동의 개괄적 모습이나마 사진으로라도 남기는 것이 현대인의 도리로 생각되어 나는 2014.9.2. 평촌동의 이곳저곳 사진을 50여장 촬영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710년경부터 우리 선조가 살아오시고 현대인 우리가 살던 평촌마을의 사적을 길이 보전하여야 할 것인바 화수계원은 물론 목사공 후 집의공 후손들은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후세에 후회가 없는 사적 보존관리 창출(創出)에 머리를 맞대고 보다 좋은 방향을 모색하여 우리 후세들이 옛 평촌동의 선조사적을 기리고 추념하며 보다 많이 번성하고 발전함에 일조(一助)의 기틀이 되도록 모두 성심 참여하여 주실 것을 바라고 이일은 금후 목사공 종중에서 주도적으로 기획하여 좋은 안을 모색 종의를 도출하여 강력 추진 할 것을 당부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1.7. 평촌 용욱 근기.
위 글을 연하여 1914. 1. 30. 우리 경주김씨감사공파 카페에 등재한 다음의 글을 소개합니다
제목 : 설날은 눈이 와야 재미있고 멋지다.
내가 출생하고 성장한곳이 충북 청원군 남일면 평촌리 지금은 청주시 상당구 평촌동이다 마을 경계 내에 산이 없는 평평한 들 가운데 마을이라 하여 들말 벌말이라는 옛 마을이름도 있다 1940,1950년대 50여호에서 10여호의 보성오씨 외는 거의 다 우리 경주김씨가 자자 일촌 사는 농경지가 많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 이었다.
설날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거운 큰 명절이지만 아이들한테는 더 큰 명절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무명 솜 바지저고리 그리고 장에서 사 오신 설빔 옷 과 신발을 입어보고 신어보고 좋아도 하였다. 아침 일직 가까운 3종 내의 집안 분들이 사당 제사를 모시는 우리 집부터 시작 차례로 집 집 마다 서열에 따라 돌아가며 차례 제사를 올리고 음복하며 떡국을 네다섯 번 조금씩 먹어도 배가 부르다 차례를 마치면 집안 분들 또는 또래끼리 몰려다니며 마을을 누비다 싶이 세배 다니는 행렬이 열 두어서넛 되어 서로 교차하며 여러 집을 다니면서 어른들께서 주시는 음식 먹고 덕담도 듣고 더러는 세뱃돈도 받고 다니다 보면 한나절이 훨씬 넘어 해가 기울기도 한다. 회고하면 어린 시절 성날 눈이 오면 재미있고 더욱 멋지다. 펑펑 쏟아지는 눈 속을 휜 강아지 그리고 누나와 달리고 넘어지고 뒹굴어 새 옷이 젖어도 재미있고 소복이 싸인 눈에 새 발자국도 남기고 글씨도 쓰고 새와 강아지 인형등의 그림도 그리고 친구들과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햇빛 드는 날에는 연도 날리고 윷도 놀고 늘도 뛰고 제기차기 공기놀이 딱지치기 좌치기 팽이 돌리기 썰매타기 눈사람 만들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어른들의 풍물놀이 돼지돌부리(돼지 잡아 고기를 나누다) 밤에는 짚 불 놀이 등 정말 헤아릴 수 없이 온 마을의 명절 축제가 정월 보름까지 이어저서 끊이지 않았다. 한겨울 날에도 햇볕이 좋은 따뜻한 날에는 뒤 월운천의 내가에 양지바른 이끼 풀숲에서 얼기미(어레미) 가지고 새뱅이도 잡고 앞 복수들 봇도랑과 연계된 둠벙(웅덩이)에서 친구들과 같이 떡메로 어름을 깨고 물 두레박으로 물을 품어내고 바닥 진흙에서 미꾸라지를 참으로 많이 잡기도 하였다. 가는 세월은 고장도 없어 어언 미수(米壽)에 근접한 이 몸 옛 어린 시절이 참으로 뜨겁게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