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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4 - 정치에 참견해 나라를 망하게 한 상나라의 달기와 주나라의 포사!
1,2,3 편에서는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여성으로 카르타의 디도 여왕과 프랑스의 잔다르크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에 그리고 주나라를 세운 여제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와 3만 5천 대군을 한반도에 보내 백제를
재건하려 했던 왜국 여왕 스이코와 베트남 쭝짝 자매에 대해 썼는데 이번에는 나라를 망하게 한 여성들 입니다.
(1) 상( 商, 은) 나라 주왕의 폭정에 동참한 달기
상(商) 나라 왕비인 달기 (妲己) 는 기 (己) 성 소 (蘇) 씨로 중국 상왕조 말에, 주왕을 타락
시킨 장본인이니.... 중국 4대 팜므파탈로 팜므파탈이자 경국지색의 사례 중 하나
인데, 화술에 능하고 기교가 극에 달하여 주(紂)왕의 애를 태우는데 능숙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녀는 포락 같은 형벌을 스스로 만들어낼 위치는 아니었으니 주 (紂) 왕이 공포 정치를 펼치고
주지육림 (酒池肉林) 을 만들면서 세금을 올리고 향락에 빠져 살던 것은 왕의 선택인데, 다만
주왕에게 목숨을 걸고 바른 정치를 할 것을 간한 숙부 비간을 죽일때 채근질한 것은 달기라고 합니다.
비간은 은 (銀 주(紂) 왕의 숙부로 성인 (聖人) 이란 소리를 듣자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7개라던데." 확인해
보자고 부추겼다고 하고, 죄인을 숯불 위에 기름을 발라 달궈진 구리 원통 위를 걷게 했다는 포락지형까지
시행했으며 열이면 열 기둥에서 미끄러져 숯불로 낙하하는 모습을 보며 주왕과 달기는 박장대소했다고 합니다.
주 (紂) 왕에게 아양을 떨면서 부추겼기에 악녀로 평가받고 있는데, 주 (周) 나라가 상나라를 멸망
시키기 위해 달기를 보낸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으니... 달기의 달 (妲) 이 계집 녀 (女) 와
무왕의 동생인 주공의 이름 단 (旦) 으로 이루어져 있는 글자라는 점에서 이런 발상이 나왔습니다.
갑골문을 제외한 다른 기록 속의 달기가 주왕의 그런 막장 행동을 즐거워하지 않았다면
주왕이 그렇게까지 막장은 아니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을법한데.... 사실 주왕의
성격을 보면 즐거워하지 않는 순간 본인 목이 먼저 달아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다만 상고시대의 역사라는 특성에다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인지라 주나라의 정당성을
위해 꾸며낸 설화일 수도 있고..... 작은 사례가 확대된 것일 수도 있는 것인데
결국 주나라 무왕이 상 (은) 나라를 멸망시킨후 그녀는 요부로 찍혀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사기 상(은) 본기에는 무왕이 달기를 처형했다는 언급만 나오고, 열녀전에는 무왕이 달기의 목을 벤 후에
그 머리를 소백기 (小白旗) 에 매달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처형하려던 자 들이 그녀의
외모에 홀려 춤을 추며 뒤로 물러서는지라 처형을 못하자 섬불구 늙은이를 참수인으로 시켰다고도 합니다.
그녀가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사료는 상서 중 주서 (周書) 목서편 (牧誓篇) 이니 주 무왕은 달기를 가르켜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며 상왕 제신이 그녀의 간언 외에는 다른 말을 듣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상서 태서 (泰書) 에서 "상왕은 기이한 기술과 교묘한 물건을 만들어 달기를 기쁘게 하는데만 빠져있다." 고
언급되는데 주 무왕이 그녀를 여러번 지목하였음을 고려할때, 국정에 깊숙하게 관여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상나라 왕비 역할을 짐작할수 있는 사례가 있으니 21대 상왕이었던 무정은 첫째 왕비로 부호를 두었는데 능이
발견되었으니 제사장으로써 무정을 충실히 보좌했고 국정 일부를 단독으로 처리했음이 밝혀졌는데,
그녀는 군을 이끌고 군공을 세우기도 했으니 상나라에서 고위층 여성 지위는 낮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신은 후대인 27대 상왕이었고, 그 사이에 여성의 지위가 달라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달기가
제사장이나 부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으니.... 상나라의
국정에서 제사는 극히 중요한 행위였기에 이에 관여하는 자는 핵심 권력자였다는 뜻입니다.
주(周) 나라는 고대 상(商) 나라 다음 왕조이며 기원전 1046년~ 기원전 256년간 존재 했으니
상(商, 은) 나라를 이었으니 그 이전의 하(夏)· 상(商) 과 더불어 삼대(三代) 라고 하는데...
공자의 말처럼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 의 치세(治世) 라고 일컬어집니다.
주(周)나라는 왕실 일족과 공신을 요지에 두어 다스리도록 하는 봉건제도로 유명한데
봉건이란 말의 원래 뜻은 주나라의 국가체제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BC 11세기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호경(鎬京: 西安 부근)에
정하여 주왕조를 건설하였을 때... 나라의 기초를 굳히기 위하여 실시한 제도 였습니다.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주 왕실은 점차 영토가 확대되면서 주민을 효율적
으로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는데.... 당시의 기술 수준이 낮아 간접
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하여 봉건제도를 창안했으며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에 혈연적 특색을 가미한 종법제도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원전 800~700년 경이니 고조선이 발달하고 송화강 유역에 부여,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에 삼한(三韓)에 의한 진(辰)이 성립하는데, 상(商) 나라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쪽의
주(周) 족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마침내 상(商, 은)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주나라의 청동기 문화가 강소, 안휘, 호북 등 양자강 유역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상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의 영향력이 주나라에 이르러 양자강까지 확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주나라 때에 중국 중심의 천하관과 화이(華夷)의 관념이 생겨
나고 천명사상이나 혈연 중심의 예(禮)문화가 자리 잡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주(周)나라는 서주(기원전 1046~ 770년)와 동주(기원전 770~ 256년)로 구분되는데
이는 견융(犬戎) 의 침입으로 수도를 호경 (鎬京, 서안) 에서 동쪽의 낙읍
(洛邑, 낙양) 으로 옮긴 것을 기점으로 나눈 것이니.... 즉, 도읍이 서쪽의
호경에 있었던 시기가 서주 시대아고, 동쪽의 낙읍에 있었던 시기가 동주 시대 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니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위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는데.... 그는 어려서 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으니 놀랄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 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고 하니 농업 생산력이 풍부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 입니다.
주족은 섬서성 서안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으니 농경에 적당
할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 방면으로 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니 전국을 통일한 진(秦)도 이곳에서 성장했으며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 (周原) 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주(周)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하니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는 곳인데, 3개의 담장과 뜰로 이루어진 왕궁 유적도 발굴되었습니다.
갑조궁실터는 섬서성 치산현 봉추촌에 있으니 서상실 남쪽 두번째 방의 고실에서 갑골이 발견
된 것으로 보아 이 방은 종묘였던 것으로 보이니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때 주의 국력은
성장하여 상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으니 계력은 상 왕실에 살해되었지만.... 아들 문왕은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하였으니 상나라는 서백의 칭호를 주고 회유
하려 했지만 문왕은 상나라 정벌계획을 수립했고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행됩니다.
마침 상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으니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기원전 1046년에 갑사
45,000명과 결사대 3,000명을 이끌고 출진해 맹진을 건너 여러부락의 군대와 합세해
“목야의 결전” 에서 상의 대군을 격파하자,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조가(朝歌)의 궁전을
불사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주왕은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상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고 봅니다.
목야대전(牧野大戰) 이전의 상황을 보자면 사기(史記)에는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은
흉악한 폭군이었다고 하는데.... 제신은 주지육림·포락지형 등의 혹형을 만들며,
주(周)나라의 제후인 희창을 잡아 가두고, 그의 장자 백읍고를 요리해서 먹게
하는 등 잔악한 행동을 벌였으며 또한 각지를 정벌하여 원성이 가득해졌다고 합니다.
희창은 상(商)나라에서 풀려나 주(周)나라에 돌아온 후에 인근 나라를 병탄하여 국력을 강화
하고, 또한 상나라에 원한이 깊은 제후들에게 손을 써서 교유하며 주나라의 국력을
강화시키지만 상나라를 공격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는 풍(豊)으로 천도한후
행정을 개혁하고 위수 남쪽에서 낚시하는 범상치 않은 인물을 찾았으니 바로 강상 이었습니다.
문왕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인 태공 계력도 현인을 목마르게 찾았기에 “태공이 당신을 기다린지
오래도다!” 라고 말했다니, 여기서 유래해 강상은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
으로 불리었다는데.... 희창은 스스로 “문왕” 이라 칭해 상나라를 타도할 생각을 비쳤지만 이미
노령이었으니 그가 죽은 뒤 아들인 발(發)이 주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무왕(武王) 입니다.
주(周) 무왕은 혁명(革命)을 선언하니 오늘날 “혁명”이란 단어의 유래인데..... “아! 우리 우방의
총군(冢君), 어사(御事),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장부
(千夫長), 백장부(百夫長) 와 용(庸), 촉(蜀), 강(羌), 무(髳), 노(盧), 팽(彭), 복(濮)의 사람들아.
너희 과 (戈) 를 들고 너희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너희들의 모 (矛) 를 세워라. 내 맹세할지어다.”
혁명을 선언한 무왕의 군대는 상나라의 허를 찔러 공격을 시작하고 여러 제후들이 가세하여 순식간에
대군이 되었으니 상나라는 곧 멸망할 듯이 보였지만 무왕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한 차례 군사를
물렸다가 몇년후, 무왕은 다시 상나라를 공격하니 주원(周原, 중국 섬서성 푸펑(부풍)현에서 시작해
풍호(豊鎬, 시안)를 통해 관중 분지를 지나고 중원으로 들어가 낙양을 지나 맹진(孟津) 에 도달합니다.
주나라 군대는 맹진(孟津)에서 황하를 건너려 했으나 폭풍이 불어 강을 건널수 없었으니 무왕은 분노해
황하의 신 하백에게 "천명은 이미 내려졌다, 어째서 방해하는가"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신에게
호통을 친 탓인지 폭풍우가 멎어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배 안에 뱅어가 뛰어들어 왔는데 흰색인 뱅어는
상나라를 상징하는 색이니 상서롭게 여겨졌으며 무왕은 하북 평원을 따라 진군하며 목야에 이르렀습니다.
주 무왕은 최소 900km 이상을 대군을 이끌고 행군했는데... 기원전 1000년경 상고시대에 청동기
무기를 들고 숲과 습지로 가득했던 북중국의 자연조건을 행군해야 했으니 사서에 따르면
상나라의 요새나 저항군을 만나면 깨뜨리고, 중간 중간에 합류하는 제후들도 다독여야 했습니다.
그 고생이 말도 못했으리라 여겨지는데 이렇게 주(周)나라 군대와 상(商)나라 군대가 기원전
1046년 2월 5일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 에 가까운 목야(牧野) 에서 마주치자
또 다시 폭풍우가 불었지만....... 무왕은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무찌른 명조
(鳴条) 전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이것은 상서로운 일' 이라고 군사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사기 주(周) 본기에 상나라는 70만을 동원했으며 주나라는 동맹국의 군대를 더해 40만이었다지만
많이 과장된 숫자로 여겨지는데, 실제로는 십수만에 이르는 상나라 군대에는 비전투요원과 복속
된 작은 국가의 군대에 노예까지 섞여 있어 질이 나빴으니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주나라 군대에게
길을 열어주거나 도주하며 또 아예 창을 거꾸로 들고 뒤에 있던 본진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문학가인 궈모뤄(郭沫若)는 이 병사들 가운데 노예들 까지 섞여 있었다고 추측
하며 제신은 이런 병사들을 앞에 세우고 자신이 믿는 상나라의 정예병은 뒤에 배치
했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당연히 평소 불만이 많았을 노예나 항병(降兵)들은 주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상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주나라 군대는 제신을 쫓아 조가(朝歌) 까지 쳐들어 가자 제신은 왕궁에 불을 지르고
녹대에 올라 불속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무왕은 제신의 시신에 세개의 화살을
쏘고 도끼로 목을 쳐서 잘라 벌했다고 하며.... 이로서 상(商) 나라는 멸망
하고 이후 혁명군의 맹주였던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어 제후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2) 거짓 봉화에 망연자실한 제후들을 보고 웃은 주나라 포사
기원전 779년에 중국의 주 (周) 나라에서 궁열이 즉위하니 유왕으로, 아첨꾼 괵석부로
경사를 삼으니 백성을 분노에 빠트리고 미인 포사 (褒姒) 를 총애하여 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하고는 포사를 황후에 책봉한후 그녀의 아들 백복을 태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황후 포사 (褒姒) 는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고심끝에 유왕이 웃기려고
적이 침입하지 않은데도 봉화를 올리니.... 허겁지겁 달려온 제후들이
허탕을 쳤다는 사실에 모두들 망연자실하니 그런 모습에 비로소 포사가 웃었습니다.
제후들은 분노했으니 이후로는 봉화가 올려져도 도우러 달려오지 않았다는데 유왕 9년에 신나라 왕은 서융
및 주나라 제후인 회나라 왕과 연합해 반란을 준비해 기원전 771년 주나라 수도 호경을
침범하니, 봉화를 올려도 제후들이 오지 않는지라 크게 패하고 유왕은 도망쳤다가 리산산에서 잡혀 죽습니다.
융족은 주 (周) 나라 수도 호경을 약탈한후 포사등을 잡아 돌아가니 신나라, 노나라, 허문공은
원래의 태자 의구를 왕으로 옹립했으니.... 의구는 견융을 피하기 위해 동쪽 낙읍으로
천도하니 주나라 (平) 왕으로 동주 (東周) 시대라! 왕의 권위가 추락해 한낱 제후와 같아집니다.
하기사 일찍이 주무왕은 900km 이상을 대군을 이끌고 행군해 상(은) 나라 수도 조가에 이르러
제신의 상나라 군대를 격파하니 목야의 전투로 주 무왕은 제후들과 맹약하면서......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상나라 군주는 여자 말만 듣고 현명한 사람의 말을
멀리하고…" 라는 발언을 했으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여기서 기원한 것입니다.
주(周)의 지배는 제사 의식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으나, 상나라 처럼 대규모 피의 제물 을
바치는 일은 사라졌는데, 이는 주의 문화가 보다 합리적으로 발전했다는 얘기가 되니
주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가 도읍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가운데, 주가 정복한 상의
제사도 중시되어 그들의 후손을 제후국에 봉하여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