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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esús dijo a sus discípulos: «Habéis oído que se dijo: ‘Amarás a tu prójimo y odiarás a tu enemigo’. Pues yo os digo: Amad a vuestros enemigos y rogad por los que os persigan, para que seáis hijos de vuestro Padre celestial, que hace salir su sol sobre malos y buenos, y llover sobre justos e injustos. Porque si amáis a los que os aman, ¿qué recompensa vais a tener? ¿No hacen eso mismo también los publicanos? Y si no saludáis más que a vuestros hermanos, ¿qué hacéis de particular? ¿No hacen eso mismo también los gentiles? Vosotros, pues, sed perfectos como es perfecto vuestro Padre celestial».
«Sed perfectos como es perfecto vuestro Padre celestial»
Rev. D. Iñaki BALLBÉ i Turu
(Rubí, Barcelona, España)
Hoy, Cristo nos invita a amar. Amar sin medida, que es la medida del Amor verdadero. Dios es Amor, «que hace salir su sol sobre malos y buenos, y llover sobre justos e injustos» (Mt 5,45). Y el hombre, chispa de Dios, ha de luchar para asemejarse a Él cada día, «para que seáis hijos de vuestro Padre celestial» (Mt 5,45). ¿Dónde encontramos el rostro de Cristo? En los otros, en el prójimo más cercano. Es muy fácil compadecerse de los niños hambrientos de Etiopía cuando los vemos por la TV, o de los inmigrantes que llegan cada día a nuestras playas. Pero, ¿y los de casa? ¿y nuestros compañeros de trabajo? ¿y aquella parienta lejana que está sola y que podríamos ir a hacerle un rato de compañía? Los otros, ¿cómo los tratamos? ¿cómo los amamos? ¿qué actos de servicio concretos tenemos con ellos cada día?
Es muy fácil amar a quien nos ama. Pero el Señor nos invita a ir más allá, porque «si amáis a los que os aman, ¿qué recompensa vais a tener?» (Mt 5,46). ¡Amar a nuestros enemigos! Amar aquellas personas que sabemos —con certeza— que nunca nos devolverán ni el afecto, ni la sonrisa, ni aquel favor. Sencillamente porque nos ignoran. El cristiano, todo cristiano, no puede amar de manera “interesada”; no ha de dar un trozo de pan, una limosna al del semáforo. Se ha de dar él mismo. El Señor, muriéndose en la Cruz, perdona a quienes le crucifican. Ni un reproche, ni una queja, ni un mal gesto...
Amar sin esperar nada a cambio. A la hora de amar tenemos que enterrar las calculadoras. La perfección es amar sin medida. La perfección la tenemos en nuestras manos en medio del mundo, en medio de nuestras ocupaciones diarias. Haciendo lo que toca en cada momento, no lo que nos viene de gusto. La Madre de Dios, en las bodas de Caná de Galilea, se da cuenta de que los invitados no tienen vino. Y se avanza. Y le pide al Señor que haga el milagro. Pidámosle hoy el milagro de saberlo descubrir en las necesidades de los otros.
<원수를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3-45).”
‘사울’이 교회를 박해할 때,
교회와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박해자 사울은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마스쿠스에서 살고 있는 ‘하나니아스’ 라는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습니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사도 9,11-12).”
이 말씀은, “사울에게 가서 안수 기도로 그를 치료해 주어라.” 라는 뜻인데,
“박해자이고 원수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여라.” 라는 지시입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사도 9,13-14).”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사울은 박해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겠습니다.”입니다.
주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니아스를 설득하셨습니다(사도 9,15-16).
그래서 결국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 기도를 해 주었고(사도 9,17),
앞을 못 보고 있었던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사도 9,18).
(사울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인데,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박해자를 회개시키고 개종시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니아스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린 일은,
남들은 모르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니아스가 스스로 사울에게 가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만 보면,
비록 박해자였지만 사울은 곤경에 빠져 있는 불쌍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니아스가 실천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일이기도 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실천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니아스가 실천한 사랑의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대단히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니아스는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결과를 알고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가 생기기를 ‘기대만’ 하면서 실천합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의 계명이니
주님께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원하는 대로 좋은 결과가 생기지 않더라도 너무 쉽게 실망하지 말아야 하고,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면서 미리 포기해도 안 됩니다.
사랑 실천도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과 하나니아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원수를(원수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원수 같은 사람’도 이웃이고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찾아간 하나니아스는 사울을 ’형제’ 라고 불렀습니다(사도 9,17).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사실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원수 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5).
사랑 실천의 목적은 ‘하느님 뜻’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그래서 사랑 실천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박해자가 회개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이고,
우리는 박해에서 벗어나는 일이니까,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도와주는 것도 한 방법이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꾸짖고 타이를 때 화풀이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몹시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특히 어떤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가해자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옆에서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서 평생 원한과 증오심 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원한과 증오심은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계명만 내려 주시고
그 실천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시는 분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당신이 내려 주신 계명이니 우리가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무면허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 네 사람의 상인이 똑같이 돈을 투자하여 구입한 목화를
창고에 쌓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는 쥐가 많아 목화를 상하게 하므로 고양이 한 마리를 사 놓되
고양이 값을 4등분하여 지불하고 각자 고양이 다리 하나씩을 맡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가 왼쪽 다리를 다치게 되어 그 다리의 주인이 기름 묻은 붕대를 감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난로에 너무 가까이 있다가 붕대에 불이 붙게 되었고,
심하게 뛰어다니다 결국엔 목화더미를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세 사람의 상인은 붕대를 감은 다리의 주인을 고소하였습니다.
붕대 감은 다리 때문에 불이 난 것이니 그 다리 주인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재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붕대를 감은 다리에 불이 붙었을 때 나머지 세 다리가 움직였기 때문에
목화더미로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 세 다리의 주인이 배상해야한다.”
이 예화는 사람들이 서로 남의 탓을 하지만,
실상 남의 탓이 확실한 때라고 판단이 들 때도 실제로는 자신의 탓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운전습관 중 저를 가장 열 받게 하는 것은 추월차선으로 천천히 가는 차들입니다.
추월을 하려면 왼쪽차선으로 해야 옳은데 우리나라는 언제부턴가 오른쪽으로 추월을 하는 편이
속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왼쪽도 오른쪽도 천천히 가면서 길을 막아버리면
저같이 성질 급한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차를 뒤로 바짝 붙여도 그런 분들은 앞만 보며 운전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칠순이 넘으신 어떤 자매님의 차를 타고 어디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님이 바로 그러한 운전습관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매우 천천히 운전하시지만 거의 항상 일 차선을 고집하셨습니다.
제가 뒤에 오다가 오른쪽으로 추월하는 차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칠순이 넘어 운전하는 것도 대단한데 거기다 운전습관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만나면 아무 말도 못할 이런 운전자들을 탓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을 탓할 수는 있는 걸까요?
요즘은 교통사고가 나면 거의 쌍방과실로 난다고 합니다.
누가 조금 더 잘했고 잘못했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책임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골목에서 나오는 자동차에 받힌 적이 있습니다.
저는 큰 길이었고 옆에서 나오다가 저를 친 것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차를 몬 사람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에는 건장한 건달들이 그러나 저는 그 사람에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면허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누구도 남을 심판할 수 있는 면허가 없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나는 상대를 심판할 처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원수가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원수는 내가 남을 판단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이전에 나에게 원수가 생겨서는 안 됩니다.
원수가 생기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남을 미워하게 된 모든 것 안에는
반드시 나의 탓도 들어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탓이요!’ 하면서 남을 원수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을 심판할 자격증은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심을 명심합시다.
우리는 어떤 큰 사고를 당해도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증이 없습니다.
사고가 났는데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방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남의 탓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항상 나의 잘못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원수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나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학부 2학년 땐가 중세 철학사 시간이었습니다.
교수 신부님이 아오스딩의 어떤 이론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제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저희 반이 제출한 리포트 중에 제 것을 찾아 확인해 보셨습니다.
르네상스에 관해 쓰는 것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은 4~5장씩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장 썼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을 보더니, 공부도 안 하고 성실하지도 않다면서
저의 리포트를 찢어 버리고 ‘넌 재수강이야~’ 라고 말씀하시고 수업을 끝내셨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이었지만, 마음은 아팠습니다.
그래서 은밀한 장소(?)에 숨어서 많이 울었는데,
그 사이 동기 몇몇이 신부님을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벌이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저에 대해 이것저것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후 늦게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신부님은 왜 공부를 안 하는지,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대답을 했고, 신부님은 다시 열심히 해 보라며 벌을 조금 낮춰서
재시험을 보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시험을 못 보신 다른 두 수사님과 재시험을 봤는데, 다행히 셋 다 통과 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3년간 휴학을 했고, 다시 3학년으로 복학했습니다.
그 때 다시 그 신부님 과목을 듣게 되었습니다.
형이상학이라는 과목이었는데, 마지막 철학 과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신을 못 차렸는지, 그 과목을 또 소홀히 했던 것 같습니다.
기말 시험을 봤는데, 결과는 재수강이었습니다.
4학년 때 그 수업을 다시 듣지는 않았지만, 신부님이 내 주신 과제를 해야 했고,
시험을 다시 봐야 했습니다.
그렇게 과제를 하고 시험을 다시 준비하면서 제 삶에 전체적으로 부족했던 ‘성실함’을
조금씩 배워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신부님이 나를 싫어하시나, 내가 찍혔나...’ 라는 생각과 함께
부정적인 마음도 많았지만, 그 때 신부님이 나의 불성실함을 강하게 지적해 주지 않으셨다면,
변화된 모습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아합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느님의 길을 알려주는 엘리야가 없었더라면,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엘리야가 방문하자, 왕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 왔소?
우상숭배와 죄와 교만함에 빠져있던 왕은 엘리야의 말이 듣기 싫었던 겁니다.
자기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의 말이 하느님의 말이 아니라 원수의 말로 들렸던 겁니다.
그런 그가 오늘 독서에서야 엘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를 거두시고, 그를 살려주십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아합 왕처럼 나의 잘못을 들춰내고 바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야처럼 바른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끈기 있고 성실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