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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구휼 제도
진휼(賑恤)과 환곡(還穀)
조선시대에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진휼정책으로서 대표되는 것은 환곡제였다. 환곡은 국가가 춘궁기(春窮期)에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하였다가 추수 후에 이를 환수하는 제도로서, 흔히 환자(還上:吏讀로서 '환자'로 읽음)라고 칭하였다. 이것은 빈한한 농민을 구제하고 농업의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마련된 것이나, 한편으로는 국가 비축곡을 개색(改色:묵은 것을 새 것으로 바꿈)하기 위한 목적도 겸하였다.
환곡제는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에 제정·실시된 진대법(賑貸法)에서부터 비롯하지만, 이것을 환곡 혹은 환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성종 때부터로 추정된다. 성종은 5년(986)에 태조 때 설치된 흑창(黑倉)을 확장, 정비하면서 의창(義倉)이라 개칭하고, 여기에서 국곡(國穀)의 대여·회수뿐 아니라 진제(賑濟:飢民에게 곡식을 무상으로 분급하여 구휼하는 제도)도 담당하게 하였다. 고려 시대의 환곡은 조선 초기와 마찬가지로 군자곡(軍資穀)을 비롯한 국가비축의 미곡을 원곡(元穀)으로 하여 수도와 각 주·현에 설치된 의창에서 지방 장관의 책임 아래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신난을 전후한 때부터 의창은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선 가난한 농민들은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서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사채(私債)에 의존하였다. 채주(債主)들은 사채 이자를 받는데 그치지 않고, 채무자의 토지를 겸병하거나 그 가족의 노동력을 수탈하였으며, 나아가 이들을 노비로 삼기까지 하였다.
조선은 건국 후 농민들의 몰락을 저지하고 그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의창을 다시 설치하고, 그 운영에 큰 관심을 쏟았다. 국초에는 충분한 양의 의창곡을 확보할 수 없어 그 기능이 발휘되지 못하였으나, 세종 5년(1423)에 군자곡을 의창에 첨가하면서 그 규모가 약 107만석 가량 되어 이 때부터 의창이 제대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의창곡을 분급하는 방식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분급한 후 이자없이 원곡만을 받아들이는 환곡이고, 다른 하나는 무상으로 분급하는 진제(賑濟)였다.
환곡은 흉년뿐 아니라 평시에도 양식이나 종자(種子)가 부족한 농민들에게 분급하는 것으로, 가을에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을 우선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그 분급의 주 대상은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갖춘 중소토지소유 농민들이었다. 이와 달리 진제는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농민들을 돕기 위해 적은 양의 미곡을 분급하는 것으로, 주 대상은 무전농민(無田農民)이나 유이기민(流移飢民)들이었다 [자료3]. 환곡과 진제의 비율은 시기와 지방에 따라서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환곡으로 분급한 양이 훨씬 많았다. 또 환곡 가운데서는 식량보다 종자로 지급한 양이 많았다. 극심한 흉년에는 수백만명의 기민(飢民)이 환곡·진제로 연명하였으며, 절반 이상의 농민들이 국가에서 분급하는 종자에 의존하여 농사를 지은 적도 있었다.
춘궁기에 분급한 환곡은 가을에 이자없이 원곡만 수납하도록 하였으나, 경제적 처지가 열악한 농민의 경우에는 평시에도 환곡을 갚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흉년이 들면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많은 양의 미납 환곡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정부에서는 잇따른 흉년 등으로 미납 환곡이 누적되어 농민들이 도저히 상환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이것을 탕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납 환곡이 늘어가고, 탕감이 시행됨에 따라 환곡으로 다시 대여할 수 있는 의창곡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세조 7년(1461)에는 의창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진휼기구로 사창(社倉)을 설치하였다.
사창제는 두 가지 점에서 의창과 전혀 달랐다. 2할의 이자를 수취한다는 점과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사장(社長)이 되어 그 운영을 주관한다는 점에서 였다. 전자가 미납환곡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의창의 곡식이 줄어들었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었다면, 후자는 관(官)에서 진휼기구를 운영하는 데 따른 문제점을 해소한다는 방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창제도 시행한지 얼마되지 않아 각종 폐해를 드러내어 성종 원년(1470)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이후 환곡은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그 이자의 10분의 1을 호조에 회록(會錄:국가회계에 편입시키는 것)하게 하는 일분모회록(一分耗會錄) 제도가 실시되어, 환곡의 이자수입이 국가 세입의 일부가 되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왜란과 호란을 치르면서 국가재정이 극도로 어렵게 된 17, 18세기에 이르러 크게 확산되어갔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는 1,000만석에 달하는 환곡은 수다한 관청에서 각양각색으로 운영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경비를 적지 않게 보조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환곡은 점차 부세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해마다 일정한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서 강제적 대여와 이자획득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환곡은 농민 생활을 안정케 하는 진휼보다는 세입에 치중하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고, 수탈양상을 띠게 되었다 .
의창 (義倉)
농민 구제를 위하여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 이 제도는 중국 수(隋)나라에서 유래하여 고구려에서는 194년(고국천왕 16)부터 매년 3~7월 사이에 가구수(家口數)에 따라 관곡(官穀)을 대여하고 10월에 회수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이를 흑창(黑倉)이라 하여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 후에 이를 회수하는 진대법(賑貸法)을 마련하였는데, 986년(성종 5)에는 흑창의 진대곡을 1만 석 더 보충하여 이를 의창이라 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의창이었으며, 의창은 여러 지방으로 확산 설치되었다. 1023년(현종 14)에는 연호미(煙戶米)라 하여 일과 공전 일결(一科公田一結)에서는 조(租) 3두(斗), 이과(二科) 및 사원전(寺院田)·양반전(兩班田)에서는 조 2두, 삼과(三科) 및 군호(軍戶)·기인(其人)으로부터는 조 1두를 거두어 주·현(州縣)의 의창에 충당하였으며, 충렬왕과 우왕 때에도 연호미를 거두어 의창의 재원으로 하였다. 의창은 무신(武臣)의 집권과 몽골의 침략 등으로 쇠퇴하였으나 창왕 때에는 양광도(楊廣道:경기 남부·강원 남서부·충남북의 대부분)의 주현에 다시 의창을 설치, 수재와 한해에 대비하였고, 1391년(공양왕 3)에는 개성의 5부(部)에도 의창을 설치하였다. 조선도 고려의 의창제도를 계승하여 개국년인 92년 9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건의에 따라 봄에 식량과 종곡(種穀)을 무이식(無利息)으로 대출하고 가을에 회수하도록 하였다. 초기의 의창은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운영도 활발하였으나 백성의 낭비와 관리의 농간으로 점차 폐단이 생겼으며, 대출되는 환자(還子)도 잘 회수되지 못하였고, 또 진제곡(賑濟穀)이라는 명목으로 무상배급되기도 하여 의창의 원곡은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1406년(태종 6)에는 고려와 같은 연호미법(煙戶米法)을 발동, 상호(上戶)·중호(中戶)·하호(下戶)로 구분하여 민간에서 곡식을 거두어 의창미로 충당하였는데, 이러한 조세 외의 수렴(收斂)은 민원이 높아 10년에 폐지되었다. 23년(세종 5)에는 군자곡(軍資穀) 106만 9615석을 의창에 이관하여 주자사창모미법(朱子社倉耗米法)에 의하여 대여곡 1석(石)에 3승(升)의 모(耗)를 보태어 수납하게 하였으나 일단 대출되면 흉작 등으로 그 곡물의 전량을 회수할 수 없어 새로 발생하는 기민(飢民)의 구제나 빈민에 대한 곡물의 대여가 어려웠다. 의창곡은 이식이 싸서 빈민뿐만 아니라 부호(富戶)도 대출해가는 실정이었으므로 빈민구제라는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48년에도 진대(賑貸)한 곡물은 회수되지 않고 진대곡의 청구만 증가하여 군자곡 125만 7048석을 의창에 가급(加給)하여 의창 원곡은 총 242만 2134석에 이르렀지만 해마다 늘어나는 진대곡의 청구에도 회수는 되지 않아 바닥나는 의창곡을 군자곡으로 메우는 악순환은 여전하여 당시 의창 원곡의 90 % 이상은 군자곡이었다. 이러한 군자곡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개선책으로 사창(社倉)제도로 전환할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의창 제도는 구휼(救恤)사업의 성격 때문에 대여곡의 환수에 강제수단을 쓸 수 없지만, 사창은 민간 주도로 운영하기 때문에 이식도 더 받을 수 있고 대여도 가려서 하므로 환수의 어려움도 없었다. 48년 대구(大邱)에 처음 설치된 사창은 의창곡 200석을 원곡으로 하여 매석의 대출에 3두의 이식을 추가하여 환수하였는데 이식의 저축에 성적이 좋은 사장(社長:사창의 관리자)은 논상(論賞)하였다. 51년(문종 1)에는 경상도의 10현에 시험적으로 사창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도 의창곡을 200석씩 지급하여 매석 3두의 이식을 부가하되 흉년에는 이식을 면제하고, 이식의 곡식이 500석에 이르면 의창에서 지급한 200석은 반납하고 사장은 9품 산관(散官)에 임명하여 500석씩 증가할 때마다 1계급씩 승진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의창곡의 부족으로 군자곡으로 대출하였으나 《경국대전》에서 군자곡의 이식을 폐지하여 사창의 원곡을 마련하기 어려워 70년(성종 1) 사창도 폐지되었다. 그 후 의창의 부활이 요구되었으나 원곡의 감소로 규모가 축소되어 1525년(중종 20) 의창을 폐지하고 일체의 구제사업을 구휼청(救恤廳)에서 관장하였다.
상평창 (常平倉)
중국·한국에서 곡가조정(穀價調整)을 위하여 국가에서 설치한 창고. ‘상평’이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약어이다. 즉 풍년이 들어 곡가가 떨어지면, 국가는 곡물을 사들여서 곡가를 올리고, 흉년이 들어 곡가가 폭등하면 국가는 상평창의 곡물을 풀어서 곡가를 떨어뜨린다. 또는 수확기에 사들여서 단경기(端境期)에 방출하는 방법 등으로 곡가의 부당한 변동을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정책의 배후에는 곡가의 변동에 따라 생활을 위협받는 일반농민을 보호하고, 반대로 그에게서 부당한 이윤을 취하는 상인의 활동을 억제하려고 하는 의도, 즉 중농억상사상(重農抑商思想)이 깔려 있다. 이 이름의 창고가 설치된 것은 BC 54년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때에 대사농중승(大司農中丞) 경수창(耿壽昌)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것이 최초이다. 그 후 상평창은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의 부정 등으로 개폐(改廢)가 거듭되면서도 역대 왕조가 이 정책을 답습하였으며, 수(隋)·당(唐) 나라 때에는 각 주(州)에 설치되었고, 청(淸)나라 때에는 각 주현(州縣)에 설치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 때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곡물을 중심으로 하여 물가를 조절하던 기관으로 ‘흉년에는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고(구휼하고), 풍년에는 농민들을 손해보지 않게 한다(饑不傷民 豊不損農)’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官)에서 시가보다 비싼 값으로 곡물을 사들여 비축하였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싼 값으로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절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제도는 993년(고려 성종 12) 처음으로 양경(兩京:개성·평양)과 12목(楊·黃·海·忠·淸·公·全·羅·昇·尙·晉·廣)에 두었는데, 포(布) 32만 필로 쌀 6만 4000섬을 사들여, 그 중 5,000섬은 상경의 경시서(京市署)에 비축하여, 대부시(大府寺)와 사헌대(司憲臺)에서 시기를 보아 방출하게 하였다. 나머지 5만 9000섬은 서경과 주군창(州郡倉) 15개소에 나누어 보관하였다가, 서경의 것은 분사(分司)의 사헌대에, 주군창의 것은 각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 제도는 그대로 존속 시행되었는데, 1608년(선조 41) 선혜청(宣惠廳)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창 (社倉)
조선시대 각 지방의 사(社:행정단위로서 현재의 면)에 두었던 곡물 대여기관(穀物貸與機關). 의창(義倉)과 같은 기관이나, 의창은 각 읍에서 관장하는 국영이며 사창은 민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두고 흉작에 대비하는 제도로서 출납도 민간에서 관장하였다. 그러나 모자라는 일부의 원곡을 의창에서 배당하여 주었기 때문에 관의 감독을 받았다. 사창의 운영은 ① 묵은 곡식을 대출하고, 무이식으로 신곡을 받으며, ② 곡물을 대여하여 이자만 받아들이고, ③ 춘궁기에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아들이는 등 곡식으로 빈민을 구호하였다. 사창제도는 중국 송나라 때 주자(朱子)의 제창으로 실시되었다. 조선에서는 1436년(세종 18) 충청감사 정인지(鄭麟趾)가 의창의 원곡(元穀) 감축과 그 보충으로 인한 군자곡(軍資穀)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상평창(常平倉)과 함께 민영의 사창을 설치할 것을 주장한 것을 비롯하여, 39년 호조참판 이진(李)이 사창을 설치하여 군자곡 대출을 금할 것을 건의하였다. 사창은 민간의 곡식으로 민간이 관리하기 때문에 사창의 취식(取息)은 국가와 관계 없는 농민을 위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정책 입안자(立案者)의 목적은 사창의 취식을 통하여 의창 원곡의 부족으로 인한 군자곡의 감소를 방지하려는 데 있었다. 44년 7월 의정부에서 사창법을 건의하여 집현전에서 연구하게 하였으나 반대의견으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48년 대구군지사(大邱郡知事) 이보흠(李甫欽)에게 명하여 대구군에서 사창제도를 시험하게 하여, 이보흠은 군내에 13사창을 설치해서 200섬의 본곡을 의창곡으로 배당하여 주고 1섬(15말)의 대출에 3말의 이식을 부가하게 하였으며, 취식에 성적이 좋은 사장(社長:사창의 책임자)에게는 상직(賞職)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51년(문종 1) 경상도관찰사 이인손(李仁孫)에게 명하여 금산(金山)·거창(居昌)·영천(永川)·경산(慶山)·인동(仁同)·신녕(新寧)·산음(山陰)·지례(知禮)·하양(河陽)·군위(軍威) 등에 사창을 시험하게 하였다. 대개 사창마다 원곡 200섬을 지급하여 1년간의 1섬 대출에 3말의 이식을 부가하지만 흉년에는 이식을 면제하였고, 이식이 500섬에 이르면 원곡 200섬은 의창에 반납하였다. 사창을 관장하던 사장은 9품산직(九品散職)에 임명하며, 이로부터 500섬 증가 때마다 일자(一資)를 올려 주기로 하였다. 52년 대구군지사로부터 장령(掌令:종4품 사헌부의 관직)으로 승진된 이보흠은 48∼51년 3년간 대구의 사창곡을 연산하여 이식이 모두 2,700여 섬이 되고, 각 사창은 모두 원곡과 이식을 합하여 400여 섬이 저축되어, 앞으로 5,6년을 계속하면 사창의 저축이 1,000여 석에 이를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57년(세조 3)경에는 군자곡의 대여에도 1섬에 4말의 이식을 부가하였고, 59년에는 군자곡의 이식도 1섬에 3말씩 부가하게 되어 사창의 이식과 같아졌다. 따라서 군자곡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한 사창의 취식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줄어 사창 폐지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창은 이미 원래의 기능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그 폐지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 70년(성종 1) 호조의 제의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적인 규모에서 정부의 지원 아래 시행되는 사창법의 혁파를 의미할 뿐, 지방 양반의 사창 실시는 있을 수 있었다. 1684년(숙종 10) 예조판서 이단하(李端夏)가 만들어 바친 7개조의 사창 절목(節目)을 반하(頒下)하고 그 실시를 권장하였으나 신통치 않았고, 1797년 북관(北關)에 사창을 실시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윤선거(尹宣擧)·이이(李珥)는 각기 고향에, 송시열(宋時烈)은 회덕(懷德)·청주(淸州) 두 곳에 사창을 실시하는 등 사적(私的) 사창도 있었다. 대원군이 집권한 1867년(고종 4) 호조판서 김병국(金炳國)의 건의에 따라 폐단이 많은 환자(還子)제도를 폐지하고 절목을 마련, 사창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각 면에 사창을 설치, 근실하고 부유한 자를 백성으로 하여금 추천하게 하여 사창을 관장케 하고, 관의 관여 없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하며 이식은 1할씩으로 하여 대전납(代錢納)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권(失權)하자 사창법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혜민국 (惠民局)
고려시대 서민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설치한 의료기관. 1112년(예종 7)에 설치하여 충선왕 때에는 사의서(司醫署)에 예속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관원으로는 판관(判官) 4명을 두었으며, 본업(本業:醫官)과 산직(散職)을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혜민서(惠民署)로 고쳤다.
대비원 (大悲院)
고려·조선시대의 구료기관(救療機關). 1049년(고려 문종 3) 개경(開京:開城)의 동·서 두 곳에 설치했던 의료 구제기관으로, 의술을 맡아보는 관리가 있어서 병자(病者)·굶주린 자·행려자(行族者)들을 치료해 주며 음식과 의복 등을 주어 구제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건국 초부터 도성(都城:서울)의 일반 병자를 구활(救活)하기 위하여 시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서소문(東西小門) 밖에 대비원을 특설하고, 병의 유행이 심할 때에는 대비원 주위에 병막(病幕)을 따로 만들어 환자들을 수용, 약과 음식을 주어 치료와 구호를 겸하였다. 대비원은 태종 때에는 활인원(活人院), 세조(世祖) 때에는 활인서(活人署)로 불리다가 1882년(고종 19) 폐지되었다. 그 뒤 활인서의 사업은 후의 혜민서(惠民署)의 업무와 통합되어 제중원(濟衆院)·대한적십자병원으로 이어졌다.
제생원 (濟生院)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 1397년(태조 6)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설치한 구료(救療) 기관으로, 서울과 지방 빈민의 치료와 서울에서 발생한 미아(迷兒)의 보호도 맡아보았다. 서울에서는 특히 동활인서(東活人署)에 수용된 빈한한 환자의 치료를 맡았으며, 창고궁사(倉庫宮司)의 동녀(童女) 수십 명을 뽑아 맥경(脈經)·침구법(鍼灸法)을 가르쳐 부인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녀(醫女)로 양성하는 한편 각 도 향약재(鄕藥材)의 수납(輸納)·비치 등의 일도 맡아보았다. 관원으로는 설치 당시에 지사(知事)·영(令)·승(丞)·주부(注簿)·녹사(錄事) 등을 두었다가, 1414년(태종 14) 지사·승·부승(副丞)·녹사·부녹사(副錄事)를 두었는데, 59년(세조 5) 혜민서(惠民署)에 병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