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_Cty1b0foY
본문 시편 77:1-20 제목 :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어제는 이 나라의 최대의 비극이었던 6.25동족상쟁 72주년이 되는 날이었지요. 전쟁을 몸소 겪으셨거나, 전쟁 때문에 크게 다쳤거나,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거나 이산가족이 되어 버린 한이 가슴 속에 맺혀 있는 분들에게는 이 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겪게 만든 북한에 대한 증오와 원한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르지요.
트라우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우리나라 말도 있는데 어떤 충격적인 아픔을 경험했을 때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부정적으로 작용해서 간혹 정상적인 삶을 어렵게 만드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트라우마는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는 좋은 기억과 나쁘고 충격적인 기억이 늘 함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트라우마는 잘 극복하면 더 강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가게 하지만 극복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엔가 삶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은 말하기를 기억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지요.
높고 영화로운 하늘 보좌에만 계셨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한번도 겪으신 적이 없는 최악의 처참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겪으셨지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평생 씻어내고 극복해 내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하신 겁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그 모진 고통과 상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으셨던가요? 그래서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유다와 베드로와 제자들에 대해서 치를 떨며 분노하셨던가요? 그렇다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고독과 치욕을 다 잊으신 건 아니지만 그 고통과 죽음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통로로 삼으셨지요.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은 과거의 고통과 치욕과 실패의 아픔을 기억 속에서 지우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기억 속에 있지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는 능력과 힘을 키워가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의 본문은 뚜렷하게 대조적인 구조를 보여 줍니다. 1절에서 9절은 부정적인 감정을 보여주고 10절에서 마지막 20절까지는 그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이겨내면서 희망과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주지요. 본문 전체를 흐르고 지나가는 한마디는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먼저 3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평안과 희망과 기쁨이 떠올라야 할텐데 이 시인은 오히려 불안과 근심과 내 심령이 상한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경험했기에 이러는 걸까요? 그리고 6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밤에 부른 노래라는 것은 어렵고 힘들었을 때 불렀던 노래인 거죠. 그 노래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비춰주실 아침햇빛을 기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면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7절에 보면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절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절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지금 이 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과거를 기억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하나님이 나에게 등을 돌리시는 것 같은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나 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셨듯이 그와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었나 보지요.
여러 성도님들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기억이 있으신지요? 좋은 기억만 있습니까? 아니면 이 시인처럼 아프고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기억만 있습니까? 예수 믿고 삶이 더 좋아지고 행복해진 기억이 많으신가요? 아니면 예수 믿어도 별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더 힘들고 더 실망스럽고 더 고통스러운 일들만 생긴 기억이 더 많으신가요?
그런데 이 시인에게는 이렇게 부정적인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긍정적인 것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고, 또 하나는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 즉 기적적인 역사들을 기억하겠다고 말하고 있지요. 이 시인이 기억하는 여호와의 일과 주께서 행하셨던 기이한 일은 무엇일까요? 14절과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즉 애굽에서의 억압과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신 출애굽사건이지요. 그리고 16절에서 19절까지는 이 세상을 능력과 권능으로 만드신 창조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출애굽 역사를 통해 나타나신 구원의 손길, 그리고 창조의 역사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권을 시인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 이 시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이고 근심스런 기억과 반대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기억이 함께 공존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은 과연 어떤 기억에 자신을 맡겨야 할까요? 어떤 기억이 자신을 지배하게 해야 할까요? 부정적인 기억이 지배하면서 하나님이 전에 나를 버리셨으니 이번에도 나를 버리실 것이라며 좌절해야 할까요? 아니면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고, 창조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창조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희망과 승리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확신해야 할까요?
11절 말씀에서 이 시인은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로다.’ 부정적인 기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긍정적인 역사를 기억하는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긍정적인 역사를 어떻게 자기 마음 속에 새기며 기억할까요? 이어지는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라.’ 큰소리도 아니고 작은 소리, 낮은 소리로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 모든 행사를 읊조리고 되뇌이겠다고 말합니다. 마치 비석에 글을 새겨넣는 석공들이 온갖 정성과 정신을 집중하면서 망치와 정으로, 또는 조각칼로 한자 한자씩 새겨넣어 가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지요. 과연 글자 한 자를 새기는 데에 몇차례의 망치질과 몇차례의 끌질과 칼질이 필요할까요?
성경 학자들이 이 12절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면 이것은 예배 때의 공동기도문이나, 찬양하는 것이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깨달은 내용이나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성경구절을 계속 내 입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할 때에만 소리를 내어 읊조리고 되뇌이지만 공동기도문도, 성경구절도, 때로는 설교 중 어느 한 문장도, 그것도 아니라면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같은 것들도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읊조리고 되뇌일 수 있는 것들이지요. 굳이 부흥회나 대형집회 같은 곳에 가서 감격적인 마음으로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이 예배에도 찬양이 있고 공동기도, 고백의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성시교독으로 성경말씀을 읊조리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읊조립니다. 주일예배 뿐만 아니라 매일 새벽기도회에도 성경봉독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도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머리에서가 아니라 내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서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겸손한 마음과 의지로 읊조리고 되뇌이는 경건의 노력들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이 시인처럼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과 기억들을 극복하고, 억압과 어둠과 죽음의 권세에서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신뢰와, 아무 것도 없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대한 찬양과 신뢰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 앞에 드리고 있는 이 한시간의 예배를 성도님들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드리고 계신가요? 찬양과 성시교독과 공동기도 고백의 기도 사도신경 주기도문 같은 공동기도문에는 본문의 표현처럼 하나하나 입을 벌려 그 내용과 의미를 읊조리고 되뇌이시기 바랍니다. 말씀봉독과 설교시간에는 그 말씀에 집중하면서 말씀이 나에게 주는 의미들을 내 안에서 읊조리며 되뇌이는 노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평상시의 삶에서도 수시로 주님의 말씀과 교훈을 읊조리며 되뇌이시기 바랍니다. 매일 새로운 말씀으로 읊조리던, 주일에 주셨던 말씀이나 기도문으로 한주간동안 읊조리던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주님을 향하여 작은 소리로 낮은 소리로 읊조리며 되뇌이시기 바랍니다. 마치 석공들이 돌에다가 한자 한자 새겨넣듯이 말이지요. 경건의 시간, 경건의 훈련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별다른 특별한 비법이나 독특한 방법이 없습니다. 예배 인도자나 설교자가 자신을 감동시켜주고 깨우쳐 주기를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 시인도 누가 나를 감동시켜주거나 크게 깨우쳐주기를 바라지 않지요. 자기 스스로 내가 하나님을 기억할 것이며, 기억한 것을 내 입으로 읊조리며 되뇌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예레미야 29장 11-13절 말씀을 오늘의 결론으로 삼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