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동 고지대와 저지대를 연결하는 서대문07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제역을 왕래하는 서대문 마을버스들은 고지대와 저지대를 연결한다. 마을버스 서대문07의 종점인 개미마을도 인왕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개미마을로 올라가다 보면 오동나무 앞, 버드나무가게, 삼거리연탄집과 같은 정류장을 지난다. 자연부락의 느낌을 풍기는 정류장 이름이 개미마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홍제동 개미마을을 내려가는 마을버스 서대문07.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홍제동 개미마을
개미마을은 달동네다. 달 뜨는 걸 가장 먼저 맞이하는 동네를 말한다. 산자락에 들어선 마을이라 산동네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달동네나 산동네는 은유하는 바가 따로 있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동네라는 뜻을 품은 것.
한국전쟁 후 생업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울로 몰리자 주택난이 생겼다. 도심의 주택가에 자기 집을 가질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이 터 잡은 데가 산이었다. 인왕산 자락의 무허가 판자촌은 그렇게 생겨났다. 홍제동 개미마을에 가면 구하기 쉬운 자재로 얼기설기 집을 짓고 살았던 도시빈민들의 옛 흔적을 볼 수 있다.
홍제동 개미마을.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개미마을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래전 이 마을은 ‘인디언촌’ 혹은 ‘인디언타운’으로 불렸다고 한다. 천막을 치고 사는 모습은 물론 수시로 벌어지던 철거에 대항하는 모습이 당시 유행하던 서부극의 인디언들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번듯한 자재를 사용해 건축한 주택이 아니라 판잣집과 천막집이 즐비한 이 동네를 비하한 표현이었다. 개미마을이라는 이름은 1980년대 서울시와 토지 불하 협상 과정에서 주민들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는 주민들’이라는 의미의 ‘개미마을’로 이름 변경을 요구해 현재에 이르게 됐다.
과거 인디언타운으로 불린 개미마을에는 토막촌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막은 땅을 파서 벽을 삼고 판자나 거적으로 하늘을 가린 주거 형태를 말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부극에 묘사된 인디언 마을처럼 보였을 것이다. 토막은 일제 강점기 도시 빈민들의 주요 주거 형태이기도 했다.
관련 문헌을 보면 1930년대 서울의 후암동과 도화동, 신당동과 북아현동에 토막촌이 형성됐고, 1940년에는 경성부에만 3만 6000명의 토막민이 있었다고 한다. 토막민이 늘어나자 조선총독부는 대책을 세웠는데 이들을 경성부 외곽이나 시외로 옮겨 살게 했다. 토막민과 토막촌이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주거지를 옮기게 한 것이다.
이때 토막민을 수용한 곳 중 하나가 홍제동이었다. 연구자들은 도심 외곽에 토막민들을 수용한 것이 오늘날 서울의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됐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정류장 이름으로 남은 옛 흔적
마을버스 서대문07을 타고 개미마을에서 내리면 뒤로는 인왕산, 멀리 앞으로는 북한산이 보인다. 개미마을은 인왕산 둘레길 입구의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경사진 좁은 골목을 따라 낡고 작은 집들이 들어섰다.
종점 바로 옆에는 공중화장실이 있다. 둘레길 입구라 등산객을 위한 편의시설인가 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개미마을 주민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철거의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던 무허가주택 중에는 화장실을 갖추지 않은 집이 많았다. 그래서 개미마을 여러 곳에 공중화장실이 설치됐다.
개미마을 종점에서 대기 중인 마을버스 서대문07. 종점 옆에 공중화장실이 있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개미마을의 주택들에는 주소 외에 다른 번호도 붙어 있다. 건물번호와 관리번호. 건물번호는 무허가 건물 확인원에 등재되는 번호이고, 관리번호는 개미마을 지역주택조합에서 관리하는 번호를 말한다. 이 번호들이 개미마을의 현 상황을 알려준다. 관리번호가 붙은 주택들은 거의 빈집으로 보였다.
서대문07 노선의 정류장 이름은 서울의 여느 정류장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개미마을 종점에 가까워질수록 특히 그랬다. 글 서두에서도 언급한 오동나무 앞, 버드나무가게, 삼거리연탄가게 같은 정류장 이름만 놓고 보면 어느 한적한 지방 마을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이 정류장들을 지나도 정류장 이름으로 붙였을 나무나 가게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종점에서 길을 내려가며 정류장 인근을 살펴봤다. 삼거리가 분명한데 연탄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한 주민에게 물어보니 삼거리의 한 집을 가리키며 “저기가 연탄 가게였는데 이제 장사 안 해요. 연탄은 공장에다 트럭 분량으로 주문하면 배달와요” 하고 알려줬다. 옛 연탄 가게는 지금 동네 어르신들 사랑방 역할을 하는 듯했다.
버드나무가게도 보이지 않았다. 정류장 인근에 사는 주민이 “오래 전 개미마을 추진위원회 간판이 달렸다”며 한 건물을 가리켰다. 한동안 뭔가를 추진하다가 지금은 조용하다고. 버드나무에 관해 물어보니 “예전에 가게 옆에 한 그루 있었는데 뽑힌 지 오래”라고도 했다.
오동나무 앞 정류장도 마찬가지였다. 오동나무는 보이지 않고 중학교와 빌라만 보였다. 개미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도 개미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의 주택들이 있었다.
개미마을의 삼거리연탄가게 터. 지금은 연탄을 팔지 않는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개미마을의 버드나무가게 터. 지금은 개미마을 추진위원회 사무실로 쓰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서울 도심에서 밀려 홍제동으로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홍제천 주변과 인왕산 아래 계곡 주변, 즉 저지대에 터를 잡았다. 나중에 온 이들은 빈 땅을 찾아 점차 산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는 개미마을뿐 아니라 산 아래 홍제동도 판자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2년 남북공동성명 후 북한 대표단이 서울에 올 때 홍제동을 지나게 됐고, 도시 미관을 위해 도로 인근 저지대의 홍제동 판자촌은 철거됐다. 조선총독부는 물론 대한민국 정부도 도시 빈민을 도시 미관을 해치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당시 철거된 구역은 학교 용지로 묶였다. 오래도록 나대지로 남아있던 그 땅에 2009년 인왕중학교가 들어섰다.
문화인(?)이 살았던 문화촌
마을버스 서대문07이 세검정로에서 개미마을로 방향으로 진입하면 ‘문화촌’ 안내판이 나온다. 홍제동은 오래전 문화촌으로 불린 시절이 있었다.
안내판 설명에 따르면 문화촌은 1950년대 말에 홍제천 변 자갈밭을 바둑판처럼 정리해 반듯한 골목과 집터를 조성한 동네를 말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의 지붕을 나란히 붙여서 지은 맞배지붕 형식의 양옥집 30여 채에 문화예술인들이 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촌 안내판.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화촌의 흔적을 갖고 있는 홍제동의 한 주택.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문화촌에 들어선 집들은 입식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서구 스타일로 일명 부흥주택 혹은 문화주택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8년 경향신문의 한 기사에는 홍제동 문화촌이 “북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이고 서편에 강이 흘러내린 곳에 자리해 외국 잡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묘사한다.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문화촌의 위치는 서울여자간호대학교 정문 건너편 주택가로 짐작된다. 지금은 새로 지은 주택과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바둑판처럼 반듯한 구획의 골목에 옛 모습을 간직한 주택을 볼 수 있다.
마을버스 서대문07의 종점 개미마을에서 내리면 문화촌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오래전에는 문화주택들이 보였겠지만 지금은 아파트단지들이 보인다. 서대문07은 윗동네 개미마을과 아랫동네 문화촌 일대를 왕래한다.
개미마을에서 내려다 본 홍제동 문화촌 일대.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첫댓글 간단히. 적어보내삼.
백수 눈깔 아푸다니께. ㅎㅎㅎㅎㅎ
인왕산 갈때 이마을버스 이용했죠
Mbc 이대호기자가 사는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