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계동 2- 8
다음 날 열 한 시나 되어서 명자는 차사장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혜숙이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 시간이었다. 명자는 메모 한 장을 혜숙의 머리맡에 적어 놓는다. ‘잠시 나갔다 올게, 일찍 들어 올
거야.’
명자가 차사장이 늘 기다리던 장소로 갔을 때 차사장은 차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요.
차사장은 명자를 보자 곧 시동을 켠다. 그리고 명자가 차에 오르자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 시킨다.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오늘 내 사무실 구경을 시켜 주려고.
웬일인가 싶다. 사무실을 보여주겠다니, 그것은 사내로서 자신의 생활 거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의미이
다. 흔히 명함을 건네주고, 그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면 통화는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녀가 라벤다
에서나 호프집에서나 손님들이 사무실까지 공개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저 명함으로 그가 어떤 직업에 종사
하는지 그 직책이 무엇인지 정도를 아는 것일 뿐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사장님. 오빠라고 부르면 되기 때
문인데, 오늘 차사장은 기꺼이 자신의 사무실에 그녀를 초대하는 것이다.
사무실은 그녀의 가게에서 차로 오 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팔 차선 대로 안쪽 골목의 허름한 삼층 건물의 삼
층에 있었다. 그녀가 차사장의 뒤를 쫓아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여자 한 명과 사내 둘이 일어서서 차사장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맞이한다. 그녀가 사무실을 둘러본다. 한 쪽으로 칸막이가 있었고 문 옆으로
책상 하나와 그 위에 서류철 꽂이가 놓여있다. 전화기 두 대가 그 앞에 놓여있고 가운데 소파가 놓여있는, 별로
큰 회사의 사무실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으나 두 사내는 그 덩치로 봐서 사무실 직원
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녀가 사내의 몸을 찬찬히 훑어본다. 한 사내는 손 등에 긴 흉터를 갖고 있었고 다른
한 사내는 오른 쪽 귀 밑으로 흉터가 있다. 만일 사무실이 아닌 술집 같은 곳에서 보았더라면 분명 어깨라고 느
낄 수 있는 분위기의 사내들이다.
-여기 앉아요.
차사장이 그녀를 소파로 안내한 후 그녀가 앉기를 기다려 사무실 안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준다.
-저기 여자 분은 우리 회사 경리부장이시고, 이쪽 남자 분은 김일태 공장장 그러고 저쪽 남자 분은 최선국 관리
부장입니다. 최부장님 차 한 잔 부탁해요.
차사장은 최부장이라고 불리는 여자에게 차를 부탁한다. 하지만 명자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어떻게 사무직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과 공장장이든 관리부장이든 조금은 억센 부서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생긴 것이 주먹 출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커피를 두 잔 타다가 그녀와 차사장 앞에 한 잔씩 내려놓는다. 그녀는 차사장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
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넣는다.
혜숙이는 핸드폰을 들어 경희에게 전화를 넣었다.
-너네 집에 명자 안 갔니?
-아침에 내가 일어나 보니 일찍 들어오겠다는 메모만 남겨두고 안 보이더라구. 그런데 아직까지 안 들어오네.
-난희도 모른다던데.
-모르겠어 무슨 일인지.
-언니는 더 모를걸.
-더 기다리기는, 시간이 벌써 아홉시가 넘었는데.
-무슨 사고는! 어디 정신없이 푹 빠져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 그 남자 자주 만나는 것 같았거든.
-아! 나중에 전화할게, 손님 들어오시네.
혜숙이 전화를 끊는데 차사장이 들어선다. 혜자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렇다면 명자는 이 남자를 만난 것이 아
니지 않는가? 그 때까지 그녀는 보나마나 명자는 오늘 이 남자를 만나서 만리장성을 쌓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을 조금 전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 혼자 계시네요?
사내가 혜자 혼자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투로 말을 걸어온다.
-오늘 사장님 만나지 않았어요?
-오늘이요? 아니요. 명자씨는 어제 만나서 점심 같이 했는데. 왜, 어디 갔어요?
오히려 되 질문하는 남자에게 혜자는 딱히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다.
-우선 앉으세요.
그녀는 남자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주방으로 들어가서 맥주와 마른안주를 준비한다. 그 남자는 다른 것을 마
시거나 먹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명자 이 계집애는 어디있는거야. 전화 한 통도 없고 전화기는 꺼져있고, 혹시 교통사
고라도 난 것은 아닌지 몰라. 아니 교통사고가 나면 경찰에서라도 연락이 왔을 텐데.’
술과 안주를 챙겨서 사내 앞에 내려놓고 한 병을 따서 잔에 따를 때 가게 전화가 울기 시작한다. 진우에게서였다.
-언니!
-모르겠어.
-알았어, 오늘은 기다려 볼게.
4
의정부에서 출발한 버스는 포천을 지나고 있었다. 진철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릴 줄 모른 것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면 오전 열시 경이면 철원에 도착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집에서 수원
역까지 걸어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 의정부까지 도착하니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잠시 철원행 버스를
타기 위해 소비한 시간까지 따지고 보면 철원에는 열두시는 되어야 도착할 것 같았다.
포천을 지나면서 들은 이삭을 펴는 벼들로 가득하다. 구월이 아직 며칠 남았는데 벌써 가을로 접어드는 것 같다.
명성보육원에 있을 때 벼 이삭을 훑어서 주머니에 가득 넣어 명혜에게 까먹으라고 건네주던 기억이 난다.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가게라고 이용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간식을 대체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것이다.
명혜는 벼를 작은 손톱으로 까서 입에 톡 넣고 씹는다. 맛은 차지하고라도 입은 심심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보육원의 아이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환영 받을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서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보육원 아이들이 지나간 밭은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다는 말이었다. 배추 포기가 차기 시작
하면 아이들은 손으로 배추 속을 뜯어 먹었고 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무를 뽑아서 먹었다. 옥수수, 수수, 마늘 대,
콩. 여하튼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피해를 주는 것이 보육원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물
론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진철이 자신이었고, 진철은 진우의 몫까지 챙겼던 것이다.
‘오빠가 떠난 후 며칠은 견딜 수 없이 힘들고 외로웠어요. 무섭기도 했고, 차라리 밤에 도망 나가 오빠를 찾아갈
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요. 하지만 오빠의 보호를 그 후로 명철오빠가 대신 해 주었어요. 오빠가 떠난 후 명철 오
빠가 그렇게 변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정말 오빠가 떠난 후 명철오빠가 나를 얼마가 괴롭힐 것인가, 하는
것이 내 두려운 이유 중 하나였거든요.’
진철은 진우의 그 말을 들으면서 명철의 업소에서 명철이 한 말을 생각했다.
‘벼엉신! 내가 나에게 이렇게 한 너를 그래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너도 명혜를 그만큼 아끼고 보호해 주려고 했
기 때문이었지만 말야. 내가 그 당시 그 나이로 명혜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방식이 그런 방식이었던 거야. 그러
니까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내게 명혜는 진지하게 가까워지고 싶
었던 아이였던 것이지.’
명철이 진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명철의 그 말 때문이었는데, 그 명철이 자신이 명성보육원을
떠난 후 진우를 그토록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언제 한 번 만나면 고맙다는 말이라고 해야겠어.’
진철은 창밖을 내다본다. 주변의 산이 조금 높아 보인다. 강원도로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벌써 점심때가
되어가는지 한 사내가 지게에 하얀 무명천을 덮은 함지박을 지고 앞서 걷는데 그 뒤에 한 여인이 머리에 함지박
을 이고 한 손에는 주전자를 들고 따르고 있었고 그들이 걷고 있는 길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논에서는 남녀 몇
사람이 허리를 펴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