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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관(安重觀)·안석경(安錫儆) 父子와 섬강(蟾江)
한국학중앙연구원 김근태(金根泰)*
안자미(安子美) - 안영유(安永儒) - 안부(安孚) - 안향(安珦) - 안우기(安于器) - 안목(安牧) - 안원숭(安元崇) - 안원(安瑗) - 안종약(安從約) - 안경(安璟) - 안인후(安仁厚) - 안성(安珹) - 안순좌(安舜佐) - 안기(安玘) - 안택선(安擇善) - 안천건(安千健) - 안광욱(安光郁,1610~1663) - 안후(安垕,1636~1710) - 안중관(安重觀,1683∼1752) - 안석경(安錫儆,1718∼1774)으로 계통을 보이는 순흥안씨(1파) 찬성공파이다.
우리 죽산안씨와의 작은 인연을 알아보면, 은봉 안방준(安邦俊,1573~1654) 선생과 교유했던 택당 이식(李植,1584~1647) 선생은 딸을 순흥안씨 안광욱(安光郁)과 혼인시켰고 안후(安垕)를 낳아, 안후는 이식 선생의 외손자가 되어, 학문을 택당 이식 선생에게 배우게 된다.
1704년(숙종 30)에 안방준(安邦俊) 선생의 대계서원(大溪書院)에 편액할때 사제문(賜祭文)을 작성했던 지제교(知製敎)가 안후(安垕)이다. 안후(安垕)는 외조부였던 택당 이식 선생과 교유했던 안방준 선생의 대계서원의 사제문을 숙종의 명을 받아 지었던 인연이 있다.
안후(安垕)의 아들이 안중관(安重觀,1683∼1752)이고 손자가 안석경(安錫儆,1718∼1774)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국빈(國賓), 호는 회와(悔窩)·가주(可洲).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에 문과 응시는 포기하였다.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받아 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가 되었고, 공조좌랑을 거쳐, 홍천·제천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보다는 성리학에 침잠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는 유학을 비롯하여 문학·경세학(經世學)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시문은 그의 6대손 안종학(安鍾學)이 편집한 《회와집 悔窩集》에 수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시·서(序)·제(題)·발(跋)·기·논·설·잡저·행록·행장·찬(贊)·명·송(頌)·서(書)·제문·애사 등이 있다.
안석경(安錫儆,1718∼1774)
순흥안씨 을유보(乙酉譜,1765)의 서문과 선조 문성공 회헌선생실기(先祖文成公晦軒先生實記)의 서문을 지은 순흥안씨(1파) 20세 / 찬성공파.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숙화(淑華), 호는 완양(完陽)·삽교(霅橋). 아버지는 안중관(安重觀)이다. 안중관은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으로 이병연(李秉淵)·민우수(閔遇洙) 등 당시 노론계 인사 및 홍세태(洪世泰)같은 중인출신 시인과도 교유한 노론계 학자였다. 1752년(영조 28)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이곳저곳 아버지의 임소(任所)를 따라 생활하였다. 당시 신흥도회가 형성된 홍천·제천·원주 등이 그곳으로 청년기를 이러한 도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낸다. 이때 그는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명예나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날뛰는 환로(宦路)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아니고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없는 사회현실 속에서 심한 갈등을 하게 된다. 결국 세 차례 과거에 응하지만 모두 낙방한다. 출세지향의 공부를 힘쓰지 않았던 그에게 낙방은 오히려 당연하기도 하다. 1752년은 과거에 응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지만, 그해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곧 강원도 두메산골인 횡성 삽교(霅橋)에 은거한다. 삽교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후반기는 도회적인 생활을 떠나 벼슬을 단념한 채 산중에 은거하는 처사적인 생활이었다. 저서로는 《삽교집》·《삽교만록》이 있다.
국문요약
본 고는 18세기 노론계 문인인 안중관·안석경 부자가 섬강유역을 배경으로 살아가면서 창작한 문학활동의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섬강은 남한강의 가장 중요한 지류로서 예전부터 영서지방의 물산을 서울로 나르는 수로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게다가 주변경관이 빼어나서 많은 시인들이 들려 풍광과 지역 주민들의 삶을 노래한 곳이기도 하였다. 안중관․안석경 부자는 섬강유역에 거처하면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특히 안석경은 섬강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 학문과 시를 논하였고, 섬강을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물정의 변화에 대하여 빠르게 인식하여 새로운 사회상과 인간상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즉 섬강은 안석경에게 있어서는 생활공간이자, 동시에 문학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제어 : 안중관, 안석경, 섬강, 문학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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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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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섬강의 풍광과 제영 Ⅲ. 안중관 부자의 문학활동과 섬강 1. 안중관 부자와 섬강 2. 안석경과 섬강 Ⅳ. 결론 |
Ⅰ. 서론
섬강(蟾江)은 횡성군(橫城郡) 둔내면(屯內面)과 평창군(平昌郡) 봉평면(蓬坪面)의 경계에 솟은 태기산(泰岐山)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횡성을 지나 원주로 흐르는 남한강의 지류이다.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와서는 금계천(錦溪川)․횡성천(橫城川)․원주천(原州川) 등과 경기도 양동, 지평 등지의 물까지 합류되어 큰 강이 형성되며, 여기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문막을 거쳐 남한강과 합류한다.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지역을 통과하므로 수량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수로교통이 발달하였으며, 섬강 하류에 위치한 흥원은 고려시대부터 창고가 설치되어 영서와 영동의 물산을 서울로 나르는 구실을 하였다.
섬강을 끼고 있는 원주는 강원감영이 설치된 곳으로 행정의 중심지이며, 남한강을 매개로 서울과 영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사대부들의 출입이 빈번하였고, 치악산 등 높은 산들이 많아 은거지로도 적당한 곳이었다.[이중환이 쓴 擇里志의 강원도 조목에 “두메가 가까워서 난리가 일어나면 숨어 피하기가 쉽고 서울과 가까워서 세상이 평안하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양사대부가 많이 살고 있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원주 지역을 읊은 한시도 또한 많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으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원주 지역 제영 한시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원주지역에 유명한 루정(樓亭)이 드물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으나[東國與地勝覽이나 道誌 등 각종 문헌에 실린 강원도 지역 한시를 조사한 자료를 보면, 삼척의 경우 407편 중 竹西樓 시가 229수를 차지하여 50%를 상회하고 있고, 강릉이나 춘천 등 다른 지역도 비슷하다.], 문학적 재능에 비하여 세상에 큰 이름을 떨치지 못한 이 지역 문인들의 작품을 고려하지 않은 점도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18세기 원주와 횡성에서 활동한 안중관(安重觀)과 그의 아들 안석경(安錫儆)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활과 문학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안중관은 문학사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었을 뿐 아직 본격적인 연구물은 없으며, 안중관이 낙향하여 충주 가흥강가에서 살았던 상황을 중심으로 기술한 이종묵의 연구(이종묵, “안중관․안석경 부자와 충주의 가흥강”, 문헌과해석 28호, 2004)만이 있을 뿐이다. 안석경에 대한 연구는 이명학의 “삽교만록 연구”(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1982)와 삽교예학록의 한시비평과 산문 수사법에 대한 정우봉의 일련의 연구(정우봉, “霅橋藝學錄에 나타난 漢詩批評論”, 한문교육연구 18권, 2002. // “삽교예학록의 산문수사학 연구”, 한국한문학연구32집, 2003. // “삽교 안석경의 비평의식”, 문헌과해석 28호, 2004) 등 단편적인 연구만이 진행되었다. 최근에 안석경의 생애와 교유관계에 대한 연구(졸고, “삽교 안석경의 생애와 시”, 문헌과해석 28호, 2004)와 안석경의 금강산 유기를 분석한 논문(윤지훈, “삽교 안석경의 금강산 유기”, 한문학보 12집, 2005), 안석경의 산문을 분석한 논문(강혜규, “霅橋 安錫儆의 散文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6) 등이 보고되기 시작하였다.] 안중관은 서울에서의 짧은 관직생활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남한강 일대에서 지냈으며, 아들들도 부친을 따라 충주, 제천, 홍천, 횡성, 원주 등에 거주하였고, 특히 안석경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둔내면 삽교리에 은거한다. 따라서 일생의 대부분을 남한강, 특히 섬강 주위에서 지냈고, 강을 따라 여러 지역을 유람하였으며, 많은 이들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안중관 일가에게 있어 섬강은 생활터전이자, 문학활동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2장에서는 먼저 섬강의 풍광과 여러 문인들이 다녀가며 읊은 제영시를 살펴보고, 3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섬강과 안중관, 안석경 부자의 작품창작 관계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Ⅱ. 섬강의 풍광과 제영
1580년 송강 정철은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남한강 뱃길을 따라 강원감영이 있던 원주로 부임하다 섬강 나루터에서 경치에 반해 ‘한수(漢水)를 돌아드니 섬강(蟾江)이 어드메뇨, 치악(雉岳)은 여긔로다.’라고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읊었으며, 조선중기 한문 사대가의 일원인 택당 이식은 원주목사로 부임하는 이를 전송하는 시에서 ‘치악산 일천 봉우리 빼어나고, 섬강의 한줄기 물은 그윽하여라(雉岳千峯秀, 蟾江一派幽)’라고 읊었다. 원주를 대표하는 산과 강이 바로 치악산과 섬강이다.[원주읍지에는 ‘동으로는 치악이 서려 있고, 서쪽으로는 섬강이 달리니 천년의 옛 나라요, 십리의 긴 강이다.(東蟠雉嶽 西走蟾江 千年古國 十里長江)’ 라고 원주의 형상을 서술하였고, 徐居正은 "치악산은 푸른 봉우리를 모아서 鳥嶺에 이었고, 蟾江은 흰빛을 끌어서 驪城에 닿았네." 라고 읊조렸다.]
섬강(蟾江)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강하류의 간현리에 병암(屛巖)이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산에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올라 앉아 있어 섬강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도 ‘병암(屛巖)’이라고 쓴 주먹크기만한 글씨가 전해진다고 하는데, 토정 이지함이 썼다고 하는 설과 택당 이식이 써서 조각한 것이라고 하는 두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곳이 섬강의 여러 풍광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병암이란 명칭은 마치 바위가 병풍을 둘러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는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고 그 아래엔 강물이 흐르는데,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머물러 가는 고개라는 의미를 가진 간현(艮縣)마을이 섬강과 삼산천이 함께 만나는 어귀에 있다. 간현마을 서쪽 영봉산 자락은 신라 말 견훤, 궁예, 왕건이 패권 싸움을 벌였던 격전장이었으며, 고려 태조의 왕사인 진공대사의 탑과 비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섬강 하류는 옛날 화려했던 불교 문화를 엿볼 수 있는데 법천사터와 정산리의 거돈사터, 안창리의 흥법사터는 신라말과 고려초의 영화를 추측해볼 수 있는 흔적들이다.
조선후기 시인이자 화가로 활동한 정수영(鄭遂榮,1743~1831)은 광주(廣州)를 출발하여 여주, 원주에 이르기까지 남한강 및 임진강의 14곳 명승을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남겼는데, 여기에도 흥원창을 중심으로 한 섬강의 하류에 대한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어 이 곳이 당시에 이름난 명승지임을 알려준다.[이수미의 「조선시대 한강명승도 연구」(서울학연구 6호, 1996)에 소개되어 있으며, 2002년도 춘천국립박물관 ‘우리 땅, 우리의 진경’ 전시 도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조선시대 시인이 섬강을 읊은 작품들을 통하여 섬강의 풍광과 흥취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君在丹崖取藥苗그대는 약초 캐며 단구 절벽에 있을텐데
客窓虛度可燐宵여관에서 헛되이 보내는 가련한 밤이로다.
蟾江水落魚龍靜섬강의 물 줄어드니 고기들도 조용하고
雉岳秋殘草木彫치악산 가을 저무니 초목도 시드는구나.
兩地爲隣音信闊지척에 살건만 서신왕래도 힘들어
一天明月夢魂勞하늘 가득 밝은 달에 꿈속 영혼만 수고롭구나.
孤吟獨立愁無賴홀로 서서 외로이 읊조리니 들어줄 이 없어 쓸쓸한데
碧海雲沈雁影遙구름 지는 푸른 강엔 기러기 그림자도 멀어지는구나.
양대박(梁大樸), <재동릉기손곡(在東陵寄蓀谷)>, 靑溪集 卷一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을 지내기도 했던 양대박(梁大樸,1544~1592)의 시로 섬강 부근의 손곡(蓀谷)에 우거하고 있던 시우(詩友) 이달(李達)에게 부친 시이다. 이달이 우거하였던 손곡은 조선초 유방선(柳方善)이 은둔하기도 하였고, 허균 형제와 자매들이 이달에게 시를 배우기도 한 곳으로 유명하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수량은 줄어들고 멀리 치악산의 초목들도 온통 낙엽을 떨구는 섬강의 늦가을 풍광이 벗을 그리워하는 작자의 애절한 마음과 더불어 더욱 황량하기만하다.
倦稅山門駕 산속 절에서 지내기 권태로웠는데
欣開渡口篷 즐겁게 강나루 배를 대었다.
半邊東岳雨 반쯤 보이는 동쪽산에 비 내리고
一陣北江風 섬강 북쪽엔 한바탕 바람 몰아치네.
翠屛蟬聲外 취병암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소리
淸流樹影中 푸른 강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超然倚棹樂 초연히 삿대에 기대 노래 부르자니
幸與數君同 여러 벗들과 함께 노니는 것이 행운이라네.
박세채(朴世采), <携李生仁甫時春諸人泛舟蟾江翠屛下>, 南溪集 卷三
윗 시의 작자인 박세채(朴世采,1631~1695)는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1680년 재등용되기 전까지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原州)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섬강의 취병 아래에서 친한 벗들과 뱃놀이를 하며 느낀 흥취를 읊은 시이다. 한바탕 몰아친 소나기가 지나가고 매미가 울어대는 시원한 섬강의 풍경을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대비시켜 묘사하였다.
一葦驪江泝上蟾 여강에서 작은 배로 섬강을 거슬러가니
名區端合散人淹 곳곳의 명승지 은거자가 머물기에 적당하구나.
波光漾月秋搖檻 물빛은 달빛에 일렁거려 가을날 난간을 흔들고
峯影隨雲晝轉簷 산 그림자 구름 따르다 낮에는 다시 처마에 머무네.
半世行藏眞自了 한평생 벼슬길 나아갔다 물러나는 일 진실로 마쳤으니
暮年閑懶也相兼 늘그막엔 한가함과 게으름 겸했네.
鄰商日有謀生事 이웃 상인은 날마다 먹고 살일 도모해
明發持船去販鹽 내일도 배를 타고 소금 팔러 가겠지.
趙泰億, <初到蟾江>, 謙齋集 卷二十
경종대에 문형(文衡)과 정승(政丞)을 지낸 소론(少論)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태억(趙泰億,1675~1728)이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섬강으로 가면서 읊은 시이다. 작자는 당쟁에 휘말려 삭탈과 재등용을 빈번하게 겪은 인물이다. 영조가 즉위하자 왕세제책봉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삭탈관직 및 문외출송을 당하였는데, 위의 시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다. 평생을 환로(宦路)에서 다단하게 보낸 작자가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힌 상태에서 바라보는 자연은 아름답고 한가롭기만하다. 작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강가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들의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西舸正東風서쪽에서 오는 배 동풍 만나
竟日猶放溜종일토록 아직도 여울에서 떠 있구나.
茅灘噴竹箭모탄은 화살처럼 뿜어지고
舟急山却走배가 빠르니 산이 도리어 달리는 듯.
湍嶮互齊汨여울과 험한 산 서로 나란히 잠겨 있고
岑巒故遷就산봉우리는 배를 따라 위치 옮기네.
蟾巖忽入眼두꺼비 바위 갑자기 눈에 들어오니
淸淑氣不瘦맑은 기운은 사그러들지 않는다네.
原田謁柔綠들판의 밭엔 새로 팬 곡식 보이고
石厓鬱森秀돌로 된 절벽엔 기이한 넝쿨 우거졌도다.
漁樵各占隅어부와 나뭇꾼이 각각 한 모퉁이 차지하고
數屋憑雲構몇 몇 집들은 구름에 기대 서 있도다.
翳然桑柘陰뽕나무 그늘 우거졌고
夕暉暎半峀저녁 햇살은 봉우리 반쯤 비추누나.
玆焉信樂土이곳이 어찌하여 참된 낙원인가
匪直山水囿단지 산수에 둘러싸여서만은 아니라네.
何當着吾居어느 곳에 내 거처 정하여
滅跡混鳥獸자취 감추고 조수와 함께 하리.
聊用慰遲暮애오라지 더딘 해 위로하며
永言頤性壽길게 읊조리며 품성과 목숨 수양하리.
素心良有然본마음 진실로 그러함이 있으니
佳處意恒逗좋은 곳에선 뜻이 항상 머뭇거리네.
홍세태(洪世泰), <섬암(蟾巖)>, 柳下集 卷一
18세기를 대표하는 여항시인인 홍세태(洪世泰,1653~1725)가 스승인 김창흡(金昌翕)과 함께 1688년 남한강 유역을 유람하다 섬암에 들려 지은 시이다. 홍세태는 안중관과 함께 김창흡에게 시와 학문을 배운 인연으로 인해 시우(詩友)로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홍세태는 관직을 그만두고 충주로 낙향하는 안중관에게 준 전별시에서 ‘영웅은 예로부터 세상과 어긋나는 일이 많은 법[洪世泰, <寄安國賓>, 柳下集 卷六]'이라고 위로하기도 하였다. 섬강 주변의 풍광과 마을 및 그 속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묘사하였고, 선계(仙界)와 같은 그 속에 노닐고 싶은 심정을 5언의 장편고시로 호쾌하고 읊었다.
春江綠如藍봄 강은 쪽빛같이 푸른데
秋江白如練가을 강은 비단같이 희구나.
江邊七十家강가의 70여채 집들은
家家江一面집집마다 한쪽은 강가를 마주하였네.
明燈過樹杪밝은 등불 켜고 나무 끝 사이로 지나가니
知是三江船아마도 한양에서 오는 배겠지.
今年煮鹽多금년에는 소금이 풍년이니
鹽價無論錢소금 값은 돈을 따지지도 않는구나.
下江楓葉疎강 하류에는 단풍잎이 성글고
上江蘆花開강 상류에는 갈대꽃이 피었구나.
明月流其中밝은 달이 그 사이로 흐르다
照見白鷗來흰 갈매기를 밝게 비추누나.
정범조(丁範祖), <섬강곡(蟾江曲) 三首>, 海左集, 卷十五
영․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남인 시인이자 정조가 당대문학의 제1인자라 극찬한 정범조(丁範祖,1723∼1801)의 시이다. 정범조 집안은 고조부인 정시한(丁時翰)이 원주로 낙향한 이래로 법천리가 대대로 세거지가 되었다.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작가들 중 섬강과 관련된 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 바로 정범조로, 관직생활 와중에도 섬강은 늘 그에게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었다.[ ‘家臨蟾江 每與韻士墨客 沿洇於蒼崖翠壁之間 或竟日忘返’, <정범조묘비문>, 원주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원향토문화연구회,] 위의 시는 죽지사(竹枝詞) 계열의 시로 섬강의 4계절과 그 속에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노래하였다. 특히 두 번째 시는 조태억의 시에서도 나타났듯이 당시 섬강 하류에는 남한강을 따라 실어 온 서해의 소금을 정제하는 공장이 있어 영서와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 소금을 판매하는 행위가 성행했음을 뒷받침하게 해주는 시이다.
蟾洲夜雨漲離觴섬강 마을에 밤 비 내리고 이별술잔 넘치는데
客子還家未敢忙나그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감히 서두르지 않네.
春帆捲來三峽勢봄 돛 말아 올리니 삼협은 기세높고
早霞蒸出百花香아침놀 피어 올라 온갖 꽃 향기롭다네.
江湖品格前遊慣강호의 품격은 예전에 노닐어 익숙한데
師友心期後世長사우와 맺은 마음속 기약 뒷날에도 이어지리라.
岐路却生兒女感기로에서 도리어 아녀자같은 감정 생겨
講壇回首足斜陽공부하던 곳 바라보노라니 어느덧 석양속이라네.
성대중(成大中), <섬강귀로지회(蟾江歸路志懷)>, 靑城集 卷二
영․정조 시대의 서얼 출신 문인인 성대중(成大中,1732∼1812)의 시이다. 성대중은 섬강 가의 점역헌(點易軒)에서 김준(金焌)에게 주역을 배운 연유로 자주 섬강을 다녀갔으며, 안석경 등 당시 섬강 주변에 거처하던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사우(師友)와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봄날 섬강의 풍광과 조화되어 더욱 진하게 드리워지고 있다.
黃鶴山頭曉放船 황학산 머리에서 새벽에 배 띄우고
仙居回首倍超然 사시던 곳 돌아보니 속세 훨씬 벗어났구나.
徐過翠壁丹厓外 붉고 푸른 절벽 아래를 천천히 지나가니
疑出瑤臺玉洞前 요대와 옥동을 가는 것 같구나.
燕子簾櫳閒日月 제비 그림 그려진 발과 들창 세월이 한가하고
棠花籬落鎖雲煙 해당화 피어난 울타리에는 구름 연기 잠겼어라.
漁郞漸失桃源路 어부는 갈수록 도원 길을 잃어버리니
春水西流入漢川 봄물이 서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가네.
정약용(丁若鏞), <汎舟至蟾江口 懷族父海左範祖宅>, 與猶堂全書 卷三
蟾江渡口日初斜섬강 나루에 해가 뉘엿뉘엿 저무니
歷亂川流漾晩華여기저기 흐르는 물 석양빛이 일렁인다.
一葉遠橫應酒艇멀리 있는 일엽편주 술 실은 배이런가
雙鳧飛過是漁家오리 쌍쌍 날아가는 데가 어부의 집이라네.
坡頭尙綠經春柳봄 지난 버들이 언덕머리 아직도 푸르게 하고
石面時紅倒水花꽃이 물에 비쳐 바위 얼굴 때때로 붉어지네.
回首疊山重嶂處돌아보니 첩첩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
海翁於此老懸車해좌옹이 벼슬 버리고 여기에서 늙어가셨지.
정약용(丁若鏞), <범주하섬강구(汎舟下蟾江口)>, 與猶堂全書, 卷三
정범조의 조카인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배를 타고 섬강을 지나며 예전에 시를 배웠던 숙부를 회상하며 지은 시로, 섬강의 풍광을 무릉도원 등 선계에 비유하여 그 속에서 살았던 정범조의 삶을 상상하고 있다.
Ⅲ. 안중관 부자의 문학활동과 섬강
1. 안중관 부자와 섬강
안중관(安重觀,1683∼1752)은 자는 국빈(國賓), 호는 회와(悔窩)로, 숙종 계해년(1683년)에 태어나 무자년(1708)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이후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후에 유일로 천거받아 신축년(1721) 세마(洗馬)를 시작으로 관직생활을 하였지만 환로는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다. 문과를 포기하여 고위관직으로의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고 호방한 성격도 벼슬생활과는 맞지 않아 출사와 낙향을 거듭하였는데, 1728년에 벼슬을 버리고 세거지인 가흥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1737년에 공조좌랑으로 복직하여 서울에서 잠시 생활을 하였고, 이듬해에 홍천현감을 제수받아 거주지를 옮겼으며, 1740년에 생활의 근거지를 원주 흥원으로 옮겼다. 1744년에 제천현감을 제수받아 부임하였고, 임신년(1752)에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관리로서는 영달을 누리지 못하였지만 안중관 가문은 대대로 문한가로서의 위상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안중관의 조부 안광욱(安光郁)이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딸과 혼인하였고, 부친인 안후(安垕,1636~1710)는 지평의 택풍당(澤風堂)에서 이식에게 학문을 배웠다. 안석경은 김창협의 외손녀인 반남박씨와 혼인하였으며 안중관은 김창흡의 고제자로 인정받았다. 명망있는 노론계열 집안과 혼인 및 사승관계를 통하여 가학을 세웠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안중관 아들대에까지 이어져, 안중관의 네 아들은 모두 시문에 뛰어났다.
먼저 큰 아들 안석전(安錫佺,1715~1785)은 자는 여화(汝華), 호는 사오당(四五堂)이다. 홍릉 참봉, 청하현감 등을 역임하고 유고가 있으며 묘소는 횡성군 국사산 아래에 있다.[字汝華號四五堂 一七一五年肅宗乙未十二月二十日生 庚午生員己丑除弘陵參奉癸巳都事佐郞甲午淸河縣監辛丑正郞 乙巳十月十六日卒享年七十一有遺稿 ○墓橫城郡東十里玉洞國司山下艮坐]
둘째 아들이 안석경(安錫儆)인데, 자는 숙화(叔華), 호는 삽교(霅橋)로, 강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김학진이 서문을 쓰고, 수당 이종원이 발문을 쓴 문집이 전해지며, 동생 안석임이 행장과 묘지명을 썼고 송와 배진환이 묘갈명을 지었다. 묘소는 둔내면 삽교리 장덕산에 있다.[字叔華號霅橋 一七一八年肅宗戊戌七月三日生 癸丑以學行薦康陵參奉不仕 甲午八月十八日卒 有文集刊行于世 判書金鶴鎭序 遂堂李鍾元跋 從第錫任撰行狀及墓誌 松窩裵縉煥撰碣銘 ○墓屯內霅橋里場德山丑坐]
셋째 아들은 안석임(安錫任,1721~1804)으로, 자는 계화(季華), 호는 석교(石橋)이다. 참봉, 도정동중추에 천거되었으며 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으며, 묘소는 횡성 정금산 아래에 있다.[生父重觀 字季華號石橋 景宗辛丑生 經行薦參奉都正同中樞 甲子卒 壽八十四 有文集 ○墓橫城鼎金山下 悔窩公三配朴氏兆下甲坐]
넷째 아들은 안석이(安錫佁,1724~1755)로, 자는 次華, 호는 肅齋이다. 通德郞의 품계에 올랐고 효성과 학식으로 유명하였으나 요절하였다. 문집 수십 권이 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으며, 묘소는 손곡의 정양산 부친묘소 근처에 있다.[字次華號肅齋 一七二四年肅宗甲辰五月十八日生 通德郞 孝有格天之誠 學有經世之術 名滿朝野 乙亥六月八日卒 從兄石橋錫任撰行狀 有遺稿數十卷 墓蓀谷考兆同里鼎陽山乾坐三位. 이상 네 아들에 대한 기록은 순흥안씨 족보에서 발췌한 것이다.]
안중관은 남한강 가의 여러 지역을 이주하며 일생을 보냈는데, 마지막 정착지는 원주 흥원이었다. 그의 네 아들도 모두 부친의 임소를 따라 생활을 하였고, 부친 사망 후에는 원주와 횡성 등지에서 정착을 하여 결국 그들의 세거지는 충주에서 원주로 옮겨진 것이다. 그들 부자는 남한강의 편리한 수로를 이용하여 일생동안 여러 지역을 다닐 수가 있었고,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남한강은 삶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섬강이 더욱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안중관과 네 아들이 모두 시문에 뛰어나 문집이 있었고,[안중관의 悔窩集에는 네 명의 아들과 차운한 시가 각각 남아 있다.] 그들의 무덤도 횡성과 원주 등지에 있다는 것은 그들 부자가 원주와 횡성을 대표하는 문인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안중관과 안석경의 문집만이 전해지고 있어 본고에서는 이 두 사람만을 다루기로 한다.
안중관 부자가 섬강에서 시를 즐겼음은 다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한 장의 시 15편은 이해 10월 보름에 한강에서 배를 타며 지은 것이다. 이 해는 임술년이니 소동파가 적벽에서 놀던 때이다. 한강에 섬암이 있는데 혹자는 적벽이 장강에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한강에 배를 띄우고 이때를 맞추었으니 이때를 맞춘 것을 또한 모방했다고 말한다. 한강에 조그만 배를 띄우고, 부친과 박상사 어른이 함께 자리잡고, 이상사 여해 어른이 또한 취병에서 이르렀다. 함께 따라간 자가 8명이니, 질찬 박돈의와 우리 형제 석전, 석경, 석임, 석이이다. 인근의 강익주가 쌀로 담근 술 몇 동이와 나물 안주를 갖추었으니 가무와 악기는 없지만 대개 나뭇잎이 떨어지는 계절에 넓고 아득한 강에서 이 차고 맑은 놀이를 하니 그 즐거움은 돌아보면 흡족하니 남음이 있었다. 이 날 엷은 비구름이 있었는데 배에 오르자 곧 개었다. 날씨는 달빛을 받아 매우 맑고 강 가운데가 넓어 하늘빛도 움켜잡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천길 섬암이 검푸르게 우뚝 넓은 강가에 임해 있으니 배에서 멀고 가까운 경치를 모두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바위에 배를 대니 오르는 자도 있었고 오르지 않는 자도 있었다. 파도치는 소리와 새의 울음소리가 낙엽 사이에서 들렸다. 밤이 깊어 봉강으로 돌아와 뱃속에서 지은 시를 이 종이에 적는다.[ ‘右詩一紙十五篇 是歲下元 泛漢水而成之者也 是歲壬戌也 卽蘇子游於赤壁之時也 漢水之有蟾巖 或謂如赤壁之臨於江也 泛漢水而適用斯時 用斯時者抑曰放之也 漢水漾小舸 而家大人與朴上舍丈同座 李上舍汝諧亦自翠屛至 陪從者八人 朴質贊敦義曁我兄弟錫佺錫儆錫任錫佁 隣近姜翊周稻酒數瓿具野肴 無歌舞無管絃之事 盖際搖落而中浩渺 作此冷淡之游 其爲樂顧肜肜洽洽 而有餘矣 是日薄有雲雨 及登舸便除 受月朗甚 中流曠然 天光可捫 蟾巖千仞蒼竦臨滉瀁 舟遠近皆見 已而泊巖 有登有不登 波鳴鳥呼 落木時有聞 夜久還鳳崗 書舟中所賦於是紙’ <壬戌十月望舟遊蟾江詩跋>, 霅橋集 甲集.]
1742년 10월 보름에 섬강 하류인 섬암 근처에서 뱃놀이를 한 기록으로, 벗들과 시에 능한 네 아들을 거느리고 뱃놀이를 하는 안중관의 즐거움을 상상할 수 있다. 안중관은 이보다 앞선 7월에 외고조부였던 이식(李植)이 1622년 임숙영, 정백창 등 벗들과 양근(楊根)의 대탄(大灘)에서 노닌 것[이식이 양근을 포함한 여강 부근에서 벗들과 교유한 내용은 김덕수, “驪江의 淸士, 水上七人”(문헌과해석 2002년 가을호.) 참조.]을 모방하여 부친 등 여러 사람들과 적벽놀이를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상을 당하고 병들어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喪疾相仍窘似囚 高江只尺繫虛舟 巧逢壬戌蘇仙月 坐失楊灘澤老遊 天下紛紛爭勝賞 山中寂寂耐孤愁 平生何事能該願 無愧魔猜劇是秋’, <初秋旣望獨坐江齋敬次先集韻>, 悔窩集 卷二 이 시에 ‘天啓壬戌七月旣望 澤風李植約任疎庵鄭玄谷諸公 作楊根大灘之遊 以繼東坡故事 其後再任戌 先子又與數公秋泛楊花江 今余又幸値玆歲 而以朞功諸戚 大江咫尺 不得出遊 此亦不肖忝先之一端 坐月空齋 不勝愾然 爲之謹次先作韻’ 라는 서문이 적혀 있다.] 소동파가 임술년에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적벽부>를 지은 이래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60년마다 찾아오는 임술년을 학수고대하였다. 60년의 주기이기 때문에 생전에 임술년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상태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와 음주에 능하여 제대로 된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시기에 임술년을 만나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모든 외부적인 여건을 충족시킨 상태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참가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3개월 후에 그렇게 고대하던 뱃놀이를 행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게다가 뱃놀이를 하는 장소가 절경을 갖추고 있는 섬암(蟾巖)임에랴!
翠崖千尺古蟾津옛 섬강 나루터의 천 길 되는 푸른 절벽
無那空齋老病身빈 집에서 늙고 병든 몸 어이할꼬.
六十年來惟此夜60년만에 찾아 온 오늘 밤 생각하니
江山月裏幾多人강산 달빛 속에 몇 명이나 노닐었던가?
橫牕曙色殘河落창으로 새벽빛 비치고 희미한 은하수 떨어지는데
依枕孤愁白髮新베개에 기댄 외로운 근심에 백발이 새롭다.
遙想楊花空俛仰멀리 양화강 생각하여 헛되이 머리 들다 내리니
只輸阿任繼淸塵다만 아들 석임이 높고 맑은 풍류 전해주겠지.
안중관(安重觀), <次錫任翠屛巖泛月倡酬軸中韻>, 悔窩集 卷二
셋째 아들 석임이 섬강의 취병암 아래에서 야간 뱃놀이를 하며 기록한 시축(詩軸)에서 안중관이 차운한 시이다. 병들고 늙어 뱃놀이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과, 아들의 시문을 통하여 시로나마 그 흥취를 느끼고 싶음을 토로하였다.
2. 안석경과 섬강
안석경은 1718년 충주 가흥에서 안중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52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마치고, 원주 손곡리를 거쳐 횡성군 둔내면 삽교리에 은거한다. 과거시험에서는 모두 낙방하였지만 그가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음은 다음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안석경은 시에 능하다. …중 략… 일찍이 말하기를, “봉록 김이곤은 시가 바른 운을 잃지 않아 촉(蜀)나라와 같고, 승지 민백순은 시가 부려하고 넉넉하여 오(吳)나라와 같고, 처사 김복현은 시가 웅건하고 분수에 넘쳐 위(魏)나라와 같다.” 어떤 사람이 “선생은 어떠합니까?” 라고 묻자, 안석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곤륜산 최고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삼국의 땅을 내려보는 것 같다.” 하였다. 그의 자부함이 이와 같다.[“安錫儆長於詩 … 중 략 … 嘗言 金鳳麓履坤 詩不失正韻如蜀 閔承旨百順 詩富贍如吳 金處士復顯 詩雄健僭竊如魏 人有問曰 先生如何 安笑曰 吾登崑崙山絶頂 俯瞰三國墟 其自負如此”(尹行恁, 方是閒輯, 安錫儆)]
안석경은 자가 아무개이고 벼슬은 참봉이었고 호는 삽교이다. 승지 안후(安垕)의 손자요, 참판 안중관(安重觀)의 아들이다. 원주에 살면서 문명을 날렸다. 기발한 시구에, “버드나무에 산들바람 부니 봄술은 방울지고, 살구꽃피고 초승 달 떴는데 새벽 강이 높다”, 또 “땅 가득한 먼지를 높은 새가 살피고, 하늘 가득한 바람과 이슬을 들꽃은 안다”가 있다. 또 남의 앞날을 잘 미루어 짐작했다.[“安錫儆 字某 官參奉 號霅橋 承旨垕孫 參判重觀子 居元州 擅文名 有驚句曰 楊柳微風春酒滴 杏花纖月曉江高 又曰 滿地塵埃高鳥見 渾天風露野花知 又善推人前程”(李奎象, 幷世才彦錄「文苑錄」)]
안석경이 은거하였던 둔내면 삽교리에는 ‘힘이 장사였다’, ‘축지법을 사용하였다’, ‘천리안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없었다’ 라는 등의 설화가 아직까지 전해지기도 하며,[횡성문화원 편, 역사에 빛나는 횡성의 인물, 1996.] 19세기 야담집인 동야휘집(東野彙輯)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어, 후대에도 안석경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침랑 안석경은 세마 안중관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소탕하고 괴퍅하여 일찍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산수간을 방랑하며 시주로 즐겼다. 늙어 횡성읍 남쪽 깊은 골짜기 안에 넓은 땅이 있어 살만하다는 말을 듣고 가서 보니 수풀이 우거져 있고 쑥이 가득하여 호랑이와 표범, 곰들의 굴로 감히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산을 둘러 지도를 만들어 관가에 인권을 내고 나무를 잘라내고 불을 질러 혹은 개간하고 혹은 밭을 만드니 양전옥토가 아님이 없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둠이 매우 많자 인근의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연이어 이르러 몇 해가 지나자 큰 마을이 되었다. … 안석경이 서울에 있을 때 한 선비와 친하였는데, 그 친구가 후에 대관이 되어 지위와 권세가 막강하였다. 안석경이 끝내 더불어 사귀지 않으니 대관이 남의 소개로 한번 보기를 원하였으나 이르게 하지 못했다. 안석경이 일이 있어 서울에 가니 대관이 물색하여 자신을 낮추어 찾아 가려고 하니 그 날로 피하여 가버렸다. 일찍이 서강의 인가에 투숙해서 하루를 묵었는데 그날이 바로 춘당대에서 과거시험 보는 날이었다. 안석경이 주인과 이웃의 몇몇 산인(散人)들과 배를 타고 놀기로 약속하였다. 시를 짓기를, ‘팔도의 문장가들이 다투는 날, 오호의 연월에 외로운 배 있도다.’ 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볼 수 있다. 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외사씨는 말한다. 안침랑은 진실로 물외의 흥취를 얻은 자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비루하고 인색함을 씻게 해 가슴속을 상쾌하게 해 준다. 저 누런 먼지 묻은 어깨를 끌고 바삐 명성과 이익의 마당에서 사냥하는 자들은 다만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속의 먼지에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사를 볼 뿐 어찌 이 흥취의 오묘함을 알리오.[ ‘安寢郞錫儆洗馬重觀子也 爲人疏宕恢詭 早謝公車 放浪山水間詩酒娛 老聞橫城治南深峽裏 有曠土可居 往視之 林樾蒙翳蓬蒿滿地 虎豹熊羆之所窟宅 民無敢入者 乃環山爲圖 出印券于官 斧松檟燔菑棘 或墾或畬 無非良田沃壤 秋成得粟甚多 隣境之民 聞風繈屬而至 過數歲成大村 … 安在京師時 與一士友善 其友後爲大官 位勢烜赫 安絶不與相問 大官因人紹介願一見 而莫能致 安適以事抵洛 大官物色之 欲枉車來訪 卽日逃去 嘗投西江人家留一日 其日卽春塘臺設科日也 安約主人及隣居數三散人 浮舟沿流上下 作詩曰 八路文章爭是日 五湖烟月有孤舟 其志可見也 除寢郞不就 外史氏曰 安寢郞是眞得物外之趣者 聽其言論 能使人盎然消鄙吝 而爽襟懷也 彼牽黃臂蒼馳獵於聲利之場者 但見滾滾焉頭塵怱怱駒隙影耳 烏知此趣之妙哉’ 東野彙輯, 卷八, 拾遺部]
안석경의 삽교 은거생활을 서술한 것이 다소 과장된 면은 있지만 안석경이란 인물의 특징을 파악해 볼 수 있는 글이다. 권력가와 타협하지 않고 과거를 보는 날 뱃놀이를 하며 시로 세상사를 비웃는 그의 행동을 통해 부친과 같은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안석경의 시는 다수가 강과 관련되어 있다. 남한강을 통하여 낙동강 유역을 유람하였고, 강화도를 거쳐 황해도 지방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가 삽교에 은거한 후에도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않고 자주 도회지로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섬강이라는 중요한 교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奄改烟雲色갑자기 물안개와 구름 걷히니
江湖又目前강호가 또 눈 앞에 있네.
鷗輕不着水갈매기 가벼이 날아 물에 닿지 않고
魚動欲浮天물고기 뛰어 올라 하늘을 날으려는 듯.
芳草纔沾屐고운 풀이 신발을 적시자마자
春山盡到船모든 봄산이 배에 이르는구나.
苦嫌詩友遠괴롭구나, 시우가 멀리 있어
無與賞新年더불어 새 해 감상할 이 없음이.
안석경(安錫儆), <江上>, 霅橋集 卷一
안석경이 29살에 지은 작품으로, 경련에서 배를 타고 가다 강가에 내리는 순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친구가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였는데, 그가 시우(詩友)를 만나는 공간도 바로 섬강이었다.
可笑窮山欲老身 우스워라, 외진 산에서 늙고자 하는 몸
乾坤回首又生春 머리 돌리니 세상은 또 새봄일세.
且開尊酒迎纖月 술자리 열어 초승달 맞이하고
强把梅花對故人 억지로 매화 꺾어 친구 대하네.
江氣渾兼詩思動 강기운이 시상과 겹쳐 꿈틀거리고
雲容自與世情新 구름모습은 절로 세상 마음과 더불어 새로워라.
巖畬秉耒眞吾事 바위밭에서 쟁기잡는 것이 진실로 나의 일이니
抛却頭邊墊角巾 머리에 쓴 점각건[墊角巾은 비를 맞아 찌그러진 두건을 의미한다. 後漢書 <郭太傳>에 ‘郭太字林泉 有盛名 曾出行遇雨 巾一角墊 時人乃故折巾一角 以爲林宗巾“ 라는 구절이 있는데, 후에는 高雅를 모방함을 의미한다.]을 던져 버리네.
安錫儆, <법천정사여문보법정동부(法泉精舍與文甫法正同賦)>, 霅橋集 卷二
법천정사에서 정범조와 만나 술을 마시며 수창한 시로, 속세를 떠나 농사를 지으며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법천정사는 섬강 가에 있던 건물로 정범조의 고조부인 정시한이 이곳에 머물면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丁時翰, <法泉精舍偶吟>, 愚潭先生文集 卷一 정시한의 부친인 丁彥璜이 이곳에서 운명을 달리하였고, 현손인 정범조가 이곳에 머무른 기록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법천정사는 정범조 집안인 나주정씨의 개인별서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정범조는 벼슬생활과 은둔생활을 반복하였는데, 안석경은 그가 낙향하였을 때 이 곳 법천정사를 비롯하여 섬강 주변의 여러 지역에서 정범조를 만나 시를 주고받았다. 관직에 있을 때도 서신교환은 끊기지 않았으며, 정범조가 귀양갈 때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전하기도 하였고, 안석경 사후 정범조는 만시를 짓기도 하였다.[丁範祖, <輓安叔華錫儆二首>, 海左集 卷五]
村鷄拍翼已三號마을닭 홰치며 이미 세 번 울었는데
點易軒中起正袍점역헌에서 비로소 일어나 옷깃 바로 하네.
楊柳微風春酒滴버드나무에 산들바람 부니 봄술은 똑똑
杏花纖月曉江高살구꽃에 초승달 걸려 새벽강은 높아라.
晩於師友知眞樂늦게야 사우 만나 眞樂을 알았으니
少也文辭哂自豪젊어서 글을 지어 비웃으며 스스로 호탕하다 여겼지.
昨意龍村成邂逅지난날 용촌에서 다시 만나자 했건만
誤拈房訣望漁舠방현령의 비결 잘못 배워 어선만 바라보는구나.
안석경(安錫儆), <安昌點易軒曉起偶占>, 霅橋集 卷二
점역헌(點易軒)은 숙종, 영조 시대의 학자인 김준(金焌,1695~1775)이 세운 건물이다.[성대중이 지은 <點易軒記>가 청성집에 수록되어 있다.] 김준은 호가 지재(遲齋)이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6세손으로 안중관에게 주역을 배워 안석경과도 친분이 있었다. 주역에 통달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원주 북쪽의 안창에 점역헌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안석경은 그를 선배이자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안창은 원주의 지정면에 위치한 마을로 영동으로 가는 역(驛)이 설치된 곳이다. 안석경은 안창의 풍경을 ‘안창은 북원주에 있는데 산을 등지고 있으며, 들 남쪽으로는 섬강을 끼고 있다. 섬강 밖의 여러 산들이 백리를 둘러싸고 있어 구름과 나무가 울창하고 마을이 탁 터져 있으니 대개 상유의 명승지이다.’[ ‘安昌在北元負山而野南帶蟾江 江外諸山環繞百里 雲木鬱然而村居明敞 盖上游之名地也’ 「安昌七柳軒記」, 霅橋集 卷四.]라고 묘사하였다. 윗 시는 봄날 새벽에 일어나 바라본 점역헌 주변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다. 버드나무 푸르고 살구꽃 핀 강가에 달까지 떠 있고 게다가 봄 술까지 익어가니 금상첨화이다. 이곳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즐거움을 깨닫고 젊은날의 오만함을 후회하는 것이다. 안석경은 이곳에서 당시 김준의 제자였던 성대중을 만나 시문(詩文)과 세사(世事)를 논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살필 수 있는 문집에서 안석경의 시에 가장 많은 차운을 남긴 이가 성대중이다. 성대중의 아들인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 부친 성대중의 교유 인물 41명을 소개한 책인 「세호록(世好錄)」에는 스승 김준을 비롯하여 안석경, 임배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성대중과 안석경은 김준을 매개로 하여 빈번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中林風雨過숲속에 비바람 지나가니
山菊半開花산의 국화 반쯤 꽃 피었다.
把酒千峰外천 봉우리 밖에서 술잔 들고
懷人一水涯멀리 떨어진 물가의 벗들 생각하누나.
日射黃犢岸누런 소 풀 뜯는 언덕으로 해 저무니
秋凈白鷗沙흰 갈매기 노니는 모래사장에 가을빛은 차도다.
共是忘機客모두 속세를 잊은 나그네이니
漁舟野渡賖고깃배로 물가 나루터에서 술 사오겠지.
성대중(成大中), <추석회섬주제공(秋夕懷蟾洲諸公)>, 靑城集 卷一
추석날 섬강의 가을 풍경을 회상하고, 같이 노닐던 여러 인물들을 그리워하며 지은 성대중의 시이다. 섬강의 여러 인물들에는 스승 김준을 비롯하여, 안석경, 민백순, 임배후 등이 포함된다. 안석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결국 모두 관직을 버리고 남한강 주변에 살며 학문에 힘쓴 사람들이다. 성대중은 그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인물이었다.
隔年軒屛喜重攀 일년 지나 찾은 집과 병풍 다시 보니 반갑고
仙鬂蒼然只舊斑 신선같은 새하얀 구렛나루 예전 모습이로다.
詎待楊雄生我後 어찌 양웅이 내 뒤에 태어나길 기대하리오
却憐諸葛出人間 제갈량이 속세로 나온 것 도리어 가련하구나.
江湖有氣先春展 강호의 기운은 봄보다 앞서 펼쳐지고
雲鳥同心未夕還 구름속의 새는 마음 아는지 해지기도 전에 돌아오누나.
小子直緣明主戀 소자는 단지 성군의 사랑때문에
行藏全負鹿門山 나아가고 숨음에 모두 녹문산[鹿門山은 湖北省 襄陽縣에 있는 산이다. 後漢시대에 龐德公이 처자를 데리고 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를 계기로 후대에는 隱士들이 사는 곳을 지칭한다.]을 저버렸구나.
성대중(成大中), <蟾洲謁遲齋先生同傲牕用安叔華韻>, 靑城集, 卷二
성대중이 섬강에서 스승 김준을 만나 안석경의 시에 차운한 시이다. 섬강의 사우(師友)를 다시 찾은 기쁨과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는 사우(師友)의 삶을 그리워하지만 자신은 임금의 은총을 외면할 수 없기에 스승의 삶을 따를 수 없음을 말하였다. 안석경과 성대중의 처세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시이다. 삽교만록에는 안석경이 성대중에게 지금 조정이 매우 어지러우니 벼슬을 버리고 배움에 힘쓰면서 멀리서 시비를 살핀 후 벼슬을 하여도 늦지 않다고 권하자, 성대중이 벼슬을 버리면 다시 하기 힘들까 두려우니, 벼슬에 발을 반쯤 넣어 두고 탈출하기 쉽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대답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안석경, <成大中>, 삽교만록 卷三]
昔歲陪遊値此辰작년에 모시고 놀던 날 오늘 만나니
先賢醉墨尙如新선현이 술 취해 쓴 시 아직도 새롭다네.
兩家子弟皆華髮양가 자제들은 모두 머리가 새었는데
黃菊盃樽又一春황국 띄운 술잔에 또 한 해 지나네.
雨霽江潭寒鏡面비 개인 강은 차가운 거울 같고
雲深松枯老龍身구름 자욱한 마른 소나무는 늙은 용 같도다.
高筵遠望增怊悵성대한 잔치 멀리 바라보니 더욱 쓸쓸한 것은
更小簪茱一兩人다시 머리에 수유꽃 꽂은 사람 한둘 적어진 것이라네.
安錫儆, <섬주구일배지재김선생차운(蟾洲九日陪遲齋金先生次韻)>, 霅橋集 卷二
중구일(重九日)에 스승 김준을 모시고 등고(登高) 놀이를 하며 지은 시로, 왕유의 <구월구일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라는 아래의 시를 용사한 작품이다.
獨在異鄕爲異客홀로 타향에 있어 나그네되니
每逢嘉節倍思親매번 중구절엔 부모님 생각 배가 되네.
遙知兄弟登高處멀리서 알겠네, 형제들 높은데 오른 곳에
遍揷茱萸少一人두루 수유꽃 꽂았는데 한 사람 적은 것을.
왕유는 부모님과 함께 형제들이 중양절에 수유꽃 꽂는 놀이를 하는 광경을 상상하고, 올해는 작자인 왕유가 먼 타향에 있어 놀이에서 한명이 빠졌음을 알리라고 하여 아쉬움과 그리움을 표출하였는데, 안석경은 이와는 다르게 작년 놀이보다 참가한 인원이 적어 쓸쓸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었다.
西船纔返北舡廻서쪽배 막 돌아가고 북쪽 배는 돌아오니
空峽翩翩一笑開빈 골짜기에서 호탕하게 한번 웃어본다.
紅樹疏籬初見雪성근 울타리 서리맞은 단풍나무에 첫 눈 내리는데
黃花破屋共含杯국화 핀 퇴락한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신다.
千峰蕭瑟溪聲集쓸쓸한 봉우리마다 시냇물소리 모여 들고
獨鶴飄揚海氣來안개 낀 강에 학 한 마리 가벼이 날아가네.
歲暮幽期何處是세모에 기약 어느 곳인가
蒼雲老桂上元臺푸른 구름 계수나무 무성한 상원대라네.
안석경(安錫儆), <심심당소작시객(深深堂小酌示客)>, 삽교집(霅橋集) 卷二
안석경이 심심당(深深堂)에서 지은 시이다. 심심당은 섬강 하류 흥원 부근에 있던 건물로, 나그네들이 유숙하던 곳이다. 안석경의 삽교만록(霅橋漫錄)엔 <심심당한화(深深堂閑話)>라고 하는 별도의 작품이 실려 있어 초기부터 야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야담의 창작은 작자가 기존의 작품집을 직접 보거나, 제보자의 구연을 듣고 변개하여 이루어지는데, 후자의 경우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 즉 야담은 18, 19세기 유통경제를 배경으로 형성된 도회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소설적 이야기가 일군의 제보자의 구연과정을 통하고 작가의 손을 거쳐 작품화된 것이다. 안석경이 비교적 초기에 야담집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수로를 통한 교통의 요지에서 생활하여 많은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Ⅳ. 결론
지금까지 섬강과 안중관 안석경 부자의 작품 창작 관계를 살펴 보았다. 안석경의 다른 형제들의 문집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였고, 안중관의 문집에도 섬강과 관련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아 안석경만을 중심으로 살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섬강은 원주, 횡성의 대표적인 강으로 남한강과 연결되어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선초부터 노론, 소론, 남인, 서얼, 중인층 등 각계 각층의 여러 문인들이 거쳐가며 풍광을 읊었는데, 원주가 고향인 정범조가 가장 많은 시를 남기고 있다. 그들은 섬강의 수려한 경치를 선계로 묘사하여 그 속에 거처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출하기도 하였고, 지역 주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기도 하였다. 섬강의 수려한 풍경은 안석경에게 작품창작에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인물들을 만나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외적 장치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초창기에 안석경이 학계에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시문보다는 삽교만록(霅橋漫錄)이라는 야담집 때문이었다. 그가 이 야담집을 창작할 수 있었던 요인도 섬강이라는 매개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음을 고려해 보면, 섬강은 안석경의 시와 산문 등 문학활동에 있어 중요한 터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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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ims of this report is to examine the Aspect of literature activity 18century literary man, Ahn Jung-Gwan, Ahn Seok-Gyoung the relation between father and son that the Sum River basin it lives with background. Sum River is the most important tributary to the Han river, from old times function as the waterway which transports the products of Young-Seo in Seoul. Besides the circumference view is outstanding and many poets come over and recite a poem scenery and the local residents. Ahn Jung-Gwan, Ahn Seok-Gyoung the relation between father and son dwelt in the Sum River basin and it was a people which distinguishes the reputation as the poet. Specially Ahn Seok-Gyoung takes advantage of Sum river and met the people who come and go Sum River he leads and against the change of world public sentiment he recognizes quickly and at the new society and at the human being a study and a poem, he manifests the many people and, it did. In conclusion, Sum River is his living space, simultaneously it is literature space.
key word : Ahn Jung-Gwan, Ahn Seok-Gyoung, Sum River, literature space
「안중관(安重觀)․안석경(安錫儆) 父子와 섬강(蟾江)」에 대한 소견
안창용(춘천고등학교)
발표자는 삽교 시 연구의 길을 밝혔던, 「삽교 안석경의 생애와 시」라는 논문을 제출한 바 있습니다. 오늘의 발표를 통해 ‘섬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삽교의 시세계를 좀더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발표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간 삽교에 대한 연구는 야담 연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로 인해 삽교는 그의 문학적 전모가 밝혀지기도 전에 이미 어떤 예단에 의해 평가된 경향이 있습니다. 그간 삽교의 비평론과 산문, 유기(遊記) 등에 대한 연구가 축적․심화됨으로써 삽교 문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의 지평이 비로소 조금씩 열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삽교 문학의 본령이라고 할 한시에 대해서는 정작 연구가 더딘 차에 김근태 선생님께서 이를 지속적으로 천착한 연구 결과를 발표해 주셨습니다.
김 선생님의 논문을 통해 자연 경관이 빼어난 섬강에 그에 어울리는 시인묵객들의 빼어난 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섬강의 자연적, 경제적 의미에 문화적 의미를 더하여 이해하게 됩니다. 김 선생님께서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확장한다면 섬강의 ‘국토산하로서의 歷史美’까지도 함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이 글은 삽교의 교유 관계,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안석경의 은거의 의미도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삽교가 원주 일원에 은거해 있기는 했지만 정범조, 성대중 등 당대의 중요 시인들과 활발하게 교유한 양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삽교의 문학적 교유에 섬강이 긴요한 교통로와 소요공간(逍遙空間)이었다는 논증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한 소견을 덧붙여 보자면, 삽교의 (섬강을 중심으로 한) 문학 창작과 교유의 양상에 그의 인간적 성품, 학문적 입장, 정치적 성향 등도 함께 긴밀하게 연관되어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발표자가 선행 연구에서 밝힌 것처럼 삽교는 “북벌론과 존명의식,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면서도 교유관계에 있어 당파와 지위를 초월하는 폭넓음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또한 발표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횡성 지역에는 그에 관한 신이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삽교의 생애와 학문에 대하여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 좀더 체계적인 연구가 뒷받침될 때 그의 시에 대한 이해도 심층적으로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성대중과 안석경의 정치적 차이, 시세계의 차이도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삽교의 시를 보면서 그의 시에는 왜 백성 혹은 민중이 등장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이번 발표가 섬강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강’이라고 해서 ‘자연’만 있고, ‘인간’이 없는 것은 아닐 터이므로 이러한 질문은 가능합니다. 섬강은 수로교통이 발달하고 흥원 지역은 창고가 설치되어 물산의 집산지였다는 점에서, 삽교가 섬강 지역을 여행(유람)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을 것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 발표자도 이미 다른 논문에서 (그의 시는) “농민들의 애환이나 관리의 수탈 등 사회 고발 성격의 시가 전혀 없이 은거 생활의 한가함과 고독감, 농사짓는 모습, 자연의 풍경 묘사, 일상 생활에서의 묘한 이치를 찾고자 하는 (「삽교만영」)” 시가 대부분이라고 논구한 바 있습니다. (삽교의 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검토가 있어야 하기는 하겠지만 현 단계의 연구를 통해 볼 때) 삽교 시에서 인간의 군상과 삶의 다양한 모습이 빠져 있다는 특성은, 그의 한문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18․9세기 봉건사회 해체기의 역사적 전환기에 탄생한 새로운 인간형들로, 도시 주변의 거지․상인을 비롯하여 벼슬길에서 제외된 사(士), 옛 주인에게 항거하는 노비 등 생명과 개성을 갖춘 저마다 시대성․현실성이 농후한 인물들이며, 부에 대한 갈망, 정통적인 윤리관에서 벗어나려는 고민 등 그 어느 것 하나 근대로 지향하려는 민중의 움직임 아닌 것이 없었다”(이명학)는 주장과 매우 대조됩니다. 야담 연구에서 삽교가 이러한 다양한 군상들을 형상화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그가 남한강을 통해 서울․가흥․원주․흥원 등 신흥 도시를 여행하며 체험한 점을 적시하는 것을 보면, 시와 야담 세계의 이와 같은 대조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두 장르의 문학 장르로서의 기본적 속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삽교가 이들 장르의 특성을 변별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문학 창작에 전략적으로 사용한 것인지, 혹은 선행 연구의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아직 삽교 문학에 대한 총체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에서 겪게 되는 과도기적 혼란인지 의문을 가져봅니다.
끝으로, 당연하지만, 연구자의 이와 같은 노고가 한국한문학의 연구의 넓이는 물론 특별히 지방문학사(강원문학사) 연구와 문화(문학) 교육에 기여하는 것임을 거론하여 두고자 합니다. 지방문학사 서술의 과제가 제기된 지 이미 오래이며, 현재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교양 교과의 일반 선택 과목으로 <강원의 역사와 문화>를 채택할 수 있도록 하고 교과서 또한 개발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교육 문제만 해도 언감생심 어느 학교도 <강원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학교 교육만이 아니라 지방문화 일반의 문제로 보아도 이러한 사정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기는 대학은 인문학 위기의 시대, 중고등학교는 (그와 불가분의 이유로) 정규 역사 교과, 한문 교과의 교육이 심히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이겠습니까? 아무쪼록 우리가 미처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던, 그러나 18세기 문학사나 강원문학사의 관점에서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한 작가의 한시 세계를, 자연 경관과 인문이라는 주제를 아우르며 독자들에게 평이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발표자의 노고가 지방문학 연구와 실제적인 문화(문학) 교육의 장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