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은사골 메아리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삶의 쉼터 스크랩 사뮈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 .새해를 맞아 가져야 할 마음가짐, ‘기다림에서 찾아 나섬으로’
ysoo 추천 0 조회 19 16.01.04 14:4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Humanities_인문학산책

 

고전에서 인생을 묻다_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새해를 맞아 가져야 할 마음가짐, ‘기다림에서 찾아 나섬으로’

 

현대극의 새 지평을 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묵시론적 선언은, 20세기 유럽의 정신적 파멸로, 니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절하게 현실이 되었다. 인간은 ‘소외’ 되었고, 그에 따라 인간 개체 와 개체 사이의 소통은 채널을 잃었다.

이성에 의해서든 신앙에 의해서든 수천 년 동안 믿어왔던 수많은 유의미한 가치들은 전쟁의 포화속에서 증발해버렸으며, 안타깝게도 새로운 가치들이 다시 움트기에는 인간존재의 정신적 토양은 너무도 황폐화되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에 가장 민감했던 작가들은 너도 나도 전통문학의 관습적 형식과 내용에 작별을 고했다.

연극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소위 부조리극(혹은 반연극)이 출현한 것이다.

부조리극이란 영국의 비평가 에슬린이 지적한 대로,“통합된 원칙을 잃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느끼는 인간존재의 우주적 상실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연극” 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런 상실감으로 인해 작가들은 극중 인물로부터 성격을 빼앗아버렸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논리적 인과 관계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났으며, 교훈이나 계몽 혹은 재미로 관객들의 구미나 돋우려는 시대 착오적인 시도를 경멸했다.

 

1950년대 유럽 부조리 문학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두 명의 전위적인 작가가 놀라운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바로 '외젠이오네스코'와 '사뮈엘 베케트'다.

“부조리란 목적이 없는 것이다. (…) 인간은 길을 잃었다. 즉 그의 모든 행동은 의미 없고 부조리하며 쓸모없게 된다"라고 말한 이는 이오네스코였고,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말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되는 작품이었다. 두 작가 모두 유럽 연극계에서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야말로 부조리극의 신화가 되었다.

 

1906년 아일랜드의 더블린 근교 폭스로크에서 부유한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베케트는 초등학생 때부터 프랑스어에 능통했는데, 오스카 와일드의 모교이기도 한 포트라 로열 스쿨에 입학해 학업은 물론 스포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수석 졸업한 그는1927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한 파리에 정착해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모국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베케트는 1952년 파리의 미뉘사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프랑스어로 출간했고, 이작품은1953년 몽파르나스 바빌론 소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프랑스에서만 300회 이상 롱런했고, 이후 세계 50여 나라에서도 공연되었는데, 이는 현대극의 새 지평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에서 초연될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가 베케트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가“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전문적인 연출자에게 조차 낯선 부조리극이었지만,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은<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틀 동안의 사건을 다룬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단 한 개의 단어로 족하다.

‘기다림’.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에스트라 과 블라디미르, 이 두 명의 부랑자가 ‘고도’ 라고 하는 인물을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 이 둘은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사건은 오직 기다린다는 사실 하나다. 작품 곳곳에서 반복되는 이 둘의 다음과 같은대사에 독자와 관객들은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에스트라공: 그만 가자.

블라디미르: 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베케트는 이 작품의 무대를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라며 무미건조하게 제시해 놓았는데, 그 어떤 적극적 선택이나 결단도 없이 오직 ‘기다림’ 만을 사건으로 하는 이 작품의 무대답다.

황량한 시골길과 이름 모를 마른 나무 한 그루는 실상 ‘무대의 부재’ 를 의미하며, 이는 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언어들의 ‘의미의 부재’,‘ 목적의 부재’를 암시한다.

한편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서 돈키호테나 햄릿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전형성을 찾는 일은 헛수고다. 독자나 관객은 이 둘이 어느 시대에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성격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몰개성적인 이 둘은 그저 나무 밑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서로 엇나가기만 하는 말장난과 광대놀이를 일삼을 뿐이다.

또한 포조와 럭키라는 불가사의한 인물 둘이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허튼 소리와 광대 짓만 늘어날 뿐이고, 이름 없는 소년은 뜬금없이 나타나 오늘이 아니라 내일 고도가 온다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기다림을 하루 더 연장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우리의 두 부랑자는 여전히 기다림에 묶여있다.

작품 말미에 “그럼 갈까?” “가자” 하고 마지막 대화를 주고받지만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하는 지문과 함께 <고도를 기다리며> 는 막을 내린다.

 

 

찾아나서는 이에게 바치는 찬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새해를 맞이한다.

작년 이맘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우리 앞에 놓인 삼백예순다섯 날을 가슴 벅차게 기다리며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기다림’ 이라고 하는 로맨틱한 3음절 단어가 아주 나약한 권태로움이 되어 우리를 낯선 시공간에 내동댕이쳤던 기억들이 악몽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새해 첫날은 여러모로 힘겨움에 버거운 날이기도 한 것이다. 하필 이렇게 버거운 날, 사뮈엘 베케트의 허무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부조리극으로 초대하는 심보라니….

 

1953년 초연되었을 때, <고도를 기다리며>의 성공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용이며 형식이 당시 일반적인 작품에 비해 지나치게 예외적이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세월이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품은 이미 수없이 많이 공연되었고 책으로도 널리 읽히고 있지만, 멋들어진 제목과는 달리 이해하기 난감한 작품으로 소문이 나있다.

 

그러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파리에서 초연되고 4년이 지난 후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생쿠엔틴 감옥에서 상연되었을 때다. 그런데 재소자들은 의외로 이 작품의 주제를 아주 명확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들은 연극 전문가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모르는 ‘고도’ 를 철장 ‘바깥 세계’ 라고 당연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천재 작가가 창조한 ‘고도’ 와 ‘기다림’은 무한한 해석 의 세계로 열린 창과 같기에, 생쿠엔틴 감옥 재소자들의 이해에 우리가 심각하게 동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철저하게 갇힌 자들, 그리하여 선택과 결단의 의지가 철저하게 박탈 당한 자들이 이 작품의 이해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는 점은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사실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누구, 그 무엇을 그저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채 막막한 권태 속에서 기다리기만한 날들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았던가!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에서 김용규는<고도를 기다리며>를 다루며, 이렇듯 깊은 권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하이데거가 그랬던 것처럼 ‘실존’ 에서 찾았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 사람’ 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김용규는 비본래적 삶보다는 본래적 삶을, 전락하는 삶보다는 실존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며, 독자에게<고도를 기다리며>의 메시지를 이렇게 시원스럽게 내던진다.

“그럼, 이제 결정하시죠!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초하루 아침 해가 밝았다.

올해는 ‘고도를 기다리며’ 가 아니라 ‘고도를 찾아 나서며’ 로 한번 살아보자.

그리하여 아무런 의지도 없이 삼백예순 다섯 날이 권태롭게 기다리기보다는 거꾸로 삼백예순다섯 날이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는 실존의 인간으로 폼나게 한번 살아보자.

고도는 결코 오지 않는다.

우리가 찾는 고도가 있고, 고도를 찾으려는 우리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찾아 나서는 이에게 바치는 찬가’ 가 되는 것이다.

 

 

글 정제원

일러스트 홍소희

 

참고도서 사뮈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 지음, 민음사 펴냄),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김용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책>(크리스티아네 취는 트 지음, 들녘 펴냄), <독서의 즐거움>(수전 와이즈 바우어지음, 민음사 펴냄), <반연극의 계보와 미학>(임준섭 지음, 살림 펴냄)

참고문헌 이은주“,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연구”, 인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WISE & GOLD

KB Premium Membership Magazine
www.kbstar.com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16.01.04 14:40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