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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아바이
박 용 숙
창살에 햇빛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여지자 갑자기 나는 박하를 입에 문 때처럼 시력(視力)이 확 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밖에서는 까치가 싱그럽게 우짖고 어느새 나타났는지 엿장수가 흥겹게 가위 장단을 치고 있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못 견디게 했다. 그럴 것이 나는 스스로 환자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결핵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그런 것이다. 막상 증세를 발견했을 때는 당장 관 속으로라도 들어갈 것 같지만 약을 먹으면서 허구한 날 자리에서 뒹굴면 괜히 생사람이 누워 지낸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간간이 있는 것이다. 더욱 병세가 호전되어갈 때쯤이면 들로 날아다니며 우짖는 새나 산짐승들처럼 마구 뛰어다니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다. 하지만 결핵이란 그때가 중요한 고비이다. 새살이 나올 때의 상처처럼, 자칫 잘못하면 피를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비죽이 열고 먼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왜 내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것이 내 욕구인 것만은 틀림없다. 멀고, 넓고, 시원하게, 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그런 기분으로 있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시선이 그렇게 오래도록 먼 곳에만 있지는 않는다. 곧 가깝고 복잡하고 답답한 곳으로 옮겨지고 만다. 아카시아 나무 위에서 우짖는 까치, 그러나 그 밑으로 다닥다닥 이어 붙은 판자촌의 지붕들은 어김없이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설혹 판잣집이 아니더라도, 그 속에 밥을 먹는 벌레들이 우글대며 산다고 생각되면 금세 구역이 일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나 자신도 남이 밖에서 볼 때는 영락없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지만, 그래도 나만은 밥을 먹는 벌레만은 아니겠거니 하고 스스로 믿어왔다. 하지만 어림이나 있는 소리인가. 허구한 날 육신이 멀쩡한 놈이 병치레랍시고 늙은 부모들이 지어주는 밥을 축내며 누워 뒹구는 자신이야말로 벌레가 아니고 무어랴.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희망이 있다. 먹고 배설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그렇게 따지고 들면 나는 또 지치고 만다. 늘 궁지에 몰리게 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싸움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이웃에서 싸우는 것이려니 하고 무심히 생각했는데 점점 귀담아듣노라니까 그것은 영락없이 집의 노인들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은 분명히 뒷마당에서였다. 나는 곧 뒷마당으로 나갔다. 창고 앞이었다. 아버지는 서 있었고 어머니는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커다란 연장궤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창고 안에 있던 것이다. 아마 내가 그들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두 노인들은 서로가 달라붙어 한바탕 치기판을 벌였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치기판이라 해봐야, 어머니는 할퀴고 꼬집고 무는 것이요, 아버지는 견디다 못해 흉기 같은 것을 들고 위협하든가 아니면 꼬집고 할퀴지 못하게 어머니를 붙잡아 두는 것이다. 대개 싸움은 그렇게 끝나는 것이지만 때로는 쌍방간에 약간의 상처를 낼 때도 있다. 그들의 싸움은 늘 발작에 가깝다. 아직 나는 분명하게 그 싸움의 원인을 알지 못하지만 싸울 때 간간이 서로 주고받는 말로는 성(性)에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나이들이 환갑 전후인데도, 아직 그런 쪽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나를 놀라게 하는 일이지만 때로는 부모를 경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때에도,
“왜들 또 싸우시요? 이웃이 챙피하지 않아요?”
하고 못마땅한 말투로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아버지는 더듬는 말로,
“앙이다! 별루 싸웅 건 앙이다!”
하고 싸움의 경위를 말하려고 했지만 워낙 더듬는 말이어서 자기의 뜻이 옳게 말로 옮겨지지 않자, 그저 입술만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런 약점을 어머니는 옳거니 하고 십분 이용하려 든다. 징징 눈물을 짜면서 빠른 속도로 거침없이 내뱉는 말은 물론 조리가 없지만 어느 누가 듣기에도 당장은 어머니가 옳다고 믿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아! 알겠어요! 어머니가 옳아요!”
하고 막아 나섰다. 그럴 것이 어머니가 사정없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결국 집 안 망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따라 어머니는 침착한 목소리로 싸움의 원인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달래(다른 것 때문에) 싸응 게 앙이다. 글쎄 저, 다 쓰지도 못하는 연장드르 엿장사한테 팔자구 항이 저렇게 사라메케 펄펄 접어드쟁인니.”
“연장을 판다구요?”
나는 부지중에 그렇게 뇌까리고 말았다. 싸움의 원인이 너무도 의외이기도 했지만, 연장을 엿장수한테 팔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연장이란 바로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연장궤를 말함이다. 꼭 아이들의 관(棺)만한 크기의 궤인데, 그 속에는 갖가지 목수연장들이 가득히 들어 있다. 아버지와 일생을 함께하여온 물건들이다.
“글쎄, 연장을 판당이 그게 언때가리나 있는(말이나 되는) 소리야. 응 글쎄.”
아버지가 더듬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질세라 펄쩍 뛴다.
“앙이? 그래, 언때가리가 없당이, 백제에 (하무짝에도) 쓰지 못할 것들을 팔아서 앓는 아이 약이라도 한 질 지어 오자는데 어찌 글른 소리요?”
“뭐이야? 백제에 못 쓸 거라구? 야, 야, 이 간나야! 이날 입때루 먹구살아온 게 무엇 가지구야? 누깔은 두었다가 어디다 쓰라는 거야, 가죽이 모자라 찢어논 줄 아니?”
싸움은 다시 시작될 기세였다. 나는 얼른 앉아 있는 어머니를 부축하여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와버렸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자,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렇지만, 그 연장들이야 어떻게 팝니까?”
“앙이, 어째 못 파니? 그러므 맨날같이 난쟁이 불알 주무르듯 주무르는 것보다야 낫쟁이겠니?”
난쟁이 불알 주무르듯 한다는 것은, 틈만 있으면 아버지는 연장들을 손질하기 때문이다. 무딘 톱은 쓸어두고, 또 무딘 끌이나 대팻날은 잘 갈아서 적당히 기름을 묻혀둔다.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은 으레 톱을 쓰는 소리나 날을 가는 숫돌 소리를 들어야 된다. 어머니는 그것이 진력이 난 것이다. 진력이 났다기보다는 이제 그나마 그 연장이 별로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노련한 목수라 하지만 환갑이 된 목수를 잘 써줄 리가 없다. 그래서 벌써 몇 년 사이에 아버지는 실업자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연장궤를 통째로 팔겠다고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하기 싫어서 저러시는 것도 아닌데, 연장궤를 팔다니요? 그건 안될 말이에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를 미워하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일하기 싫어 하쟁이탕이? 그럼, 이 식기(食口)드르 메게 살릴 생각이 있단 말이야? 앙이다! 지금두 눈만 뜨면 갇나들 생각뿐이지비, 어떻게 하거나 제 새끼드르 메게 살리겠다는 구기(생각)는 눈꼽만치도 없다아!”
간나들 생각이란 계집질이란 뜻이다.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아버지가 연장들을 손질하면서 허구한 날, 딴 계집 생각이나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런 꼴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버지는 일터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님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워낙 요샌 불경기라 일이 없대요!”
“그렇챈타!”
“또 그러구, 이젠 환갑 나이도 됐으니 쉴 때도 됐지요!”
사실 그 말은 나로서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말이다. 시퍼렇게 젊은 놈은 누워서 뒹굴면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환갑 나이를 찾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곧,
“환갑 나이가 다 무시기야? 환갑 나이에 얼라(아기)를 못 보나, 환갑 나이에 됫박 쌀바브 먹지를 못해내겐니, 어째 환갑 타령이야.”
하면서 아무개네 아버지는 내일모레 일흔 되는 나이인데도 꼭두새벽부터 연장을 메고 다니느라 땀을 뻘뻘 흘린다는 둥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아무개 타령을 해댄다. 나는 거기에서 더 할 말이 없어서 결국은 이런 말로 사태를 얼버무린다.
“어머니, 조금만 더 참아주시오. 내가 병만 완쾌되면 곧 취직을 하여 어머니 한 분만이라도 호강시켜드릴께요! 조금만 참으시오.”
그러자, 어머니는 늘 그러는 것처럼,
“앙이다! 내가 어디 호강하려구 그러능 기야? 다, 너희들이 잘되라구 그러능 기지비…….”
그러면서 어머니는 더욱 섦게 운다. 호강시켜드린다는 말, 더욱 어머니 한 분이라도라는 말에 감동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되면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젊은 날, 계집질로 해서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었고 그 보복심이 끈질기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목수가 되었는지 그 내력에 대해서는 나는 자세히 모른다. 아마 거기에 대해서 알구 싶어했다면 알 만도 한 일인 것을, 나는 거의 고의적으로 그런 일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 나는 아버지의 그런 직업에 대해서 매우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학교 다닐 때에만 하더라도 나는 곧잘 작문 시간이면,
‘우리 아버지는 목수입니다. 낡은 집을 고치고 새 집을 짓기 위해 날마다 쉴 새 없이 일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좋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착한 아버지……’
하는 식으로 글을 지어 가끔 교실 벽보판에 나붙어 우쭐대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디 그뿐인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연장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곧잘 어른들 몰래 연장궤를 열고 망치나 톱 같은 것을 끄집어내 간다. 대개는 나무권총(화약총)을 만든다거나 썰매나 나무 스케이트를 만들 때가 그런 때인데, 이런 땐 으레 나는 연장을 빌려준 덕으로 동네 아이들에게서 인기가 대단하여 으스대었다. 하지만 번번이 뒤끝은 좋지 않았다. 아무리 아버지 몰래 연장을 제자리에 갖다놓아도 아버지는 대번에 알아본다.
“이놈의 새끼! 너 왜 연장들을 밖으로 주어내가니!”
아버지는 뎅금한 눈을 부릅뜨며 그렇게 한마디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욕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단 한마디, 혹은 간헐적으로 몇 마디 하면 그만이다. 뒤에 깨달은 일이지만, 아버지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기 때문에 훈계를 하더라도 조리 있게 오랜 말을 못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는 그렇게 몇 마디 으르렁 대며 하는 말이 매우 무서웠고, 또 위엄이 있어 보였다.
아버지가 내가 연장을 쓴 데 대해서 귀신같이 알아내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가 연장들을 쓰고 궤 속에 집어넣을 때에는 기름을 묻혀놓는다.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 길이 없는 나는 아무렇게나 쓰고 그대로 집어넣는다. 그러니 그 톱이나 망치에는 기름기가 없어지고 또 더러는 톱밥들이 그대로 끼어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톱을 잘 쓸 줄을 몰라서 톱니를 떼어먹기가 일쑤다. 그런 땐 정말 두렵다.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나무랄 일을 한 번 정도, 그것도 단 몇 마디로 끝내버린다. 과묵한 것이다.
내가 아마 일본말을 제일 먼저 배우게 된 것도 아버지를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연장의 이름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혹 집에서 일을 하면서 나에게 연장 심부름을 시킬 때에도 꼭,
“야! 인치사시 (나무자)를 가져 온나!”
혹은,
“니, 여기서 작은 노미(끌)를 못 봤니?”
하고 연장 이름들을 일본말로 부르는 것이다. 때가 일제 시대였고, 또 일터에서 늘 그렇게 불렀던 까닭에 습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관계로 나는 꽤 많은 연장 이름을 일본말로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칸나(대패), 노꼬(톱), 스미쯔보(먹통),* 스이헤이(수평), 사시후리(추), 쪼오노(자귀)* 같은 연장들의 이름이다. 어디 이름뿐인가. 술이 거나해서 들어올 때는 곧잘 기소(기초)가 어떻고 야리까따(기초공사)가 어떻고 무네아게(上樑)가 어떻고 하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그중에서도 귀 아프게 들어온 것은 미나라이(조수)라는 말과 아시바(발판)라는 말이다. 왜 미나라이와 아시바의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얼마 전까지도 그 이유를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그때가 아버지로서는 미나라이 시절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미나라이였기 때문에 주로 아시바와 관계되는 일을 했으리라는 짐작이다. 하긴 그 무렵이 훨씬 지나서야, 아버지는 땔감으로 대팻밥이라든가 톱밥 같은 것을 저녁에 부대자루에 넣어 메고 왔다. 나는
그때가 즐거웠다. 그럴 것이 대팻밥이나 톱밥 속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토막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토막나무를 일본말로 키렛빠시라고 했는데, 동네아이들이 그 토막나무를 탐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나 자신도 그러한 여러 모양의 토막나무를 가지고 장난감을 만들기도 하고 또 괜히 빤질빤질하고 모가 난 그것들이 좋아서 몇 개씩 책상 위에 쌓아두기도 했다. 사실 그 토막나무는 쓰다가 잘려나간 찌꺼기들인데도 신기하리 만치 세모꼴, 네모꼴, 구형, 원추형 등으로 그럴듯하게 자기 모양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연하게 그렇게 기하학적인 꼴로 변한 그것들은 어린 나의 호기심과 꿈을 달래어주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사실 그런 우연한 것들에 홀려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시의 아버지의 수준, 말하자면 목수로서의 어느 정도의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를 알 길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재능은 상당한 것이었다고 짐작되어진다. 새집으로 이사를 한다거나 혹은 살던 집의 내부 구조를 바꾼다거나 할 때이면 아버지는 연장을 들고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데, 무슨 일이든지 어머니가 의견을 내기만 하면 자르고 깎고 하여 삽시간에 척척 해낸다. 그러면서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 뽐을 내고, 자기가 어느 일터에서든지, 제일 날쌔게 그리고 멋지게 일을 한다는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아버지는 목수 일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잡손질에도 재주가 있는 듯싶었다. 해방 이후였다. 이북에는 일상용품이 귀하였다. 신발이라고 해야 고작해서 재생 고무신인데, 그것도 찢어지면 꿰매어 신고, 뚫어지면 가죽으로 기워 신는 형편이다. 그런 때 나만은 그래도 구두를 신고 학교엘 다녔다. 공휴일 같은 때, 아버지는 몇 가지 목수 연장을 끄집어내어 재빨리 양화공이 되는 것이다. 위나 굽도리감으로는 갑바천이고 밑창은 못 쓰게 된 타이어 고무가 고작이지만, 당대에는 그런 것으로 된 구두를 신는 사람도 희귀한 판인지라, 나는 아예 공책을 들고 아버지 옆에 앉아 공부하면서 곁눈으로 연신 아버지의 손에서 구두가 되어가는 것을 신기하게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 누가 더 좋으냐?”
물론 곁에는 어머니가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참으로 난처한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얼굴이 빨개진 채 우물쭈물 하고 있노라면 어머니가,
“내가 더 좋지?”
하고 허리를 굽혀서는 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소학교 4학년쯤의 나이이니 그런 질문에 선뜻 대답해 나설 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가 더 좋지? 이것 봐! 당장 네 구두를 만들어주쟁인니?”
하고 만들던 구두를 이리저리 들어 보인다. 물론 그런 때 어머니도,
“그거야 나도 지금 네 옷을 깁고 있쟁인니?”
하고 질세라 달려든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로 발전한다. 지금에야 어렴풋이 기억되는 일이지만, 그런 때에 아버지는 으레 음담을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음담은 서로가 아들이 자기를 닮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음담인데 이를테면 철필 (펜)이 좋았느니, 잉크병이 더 좋았느니 따위의 말이다. 어린 내가 그것이 무슨 말인지 그 당시에는 알아차릴 수는 없었지만 매우 야릇한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손길은 한시도 쉬지 않는데, 구두 한 켤레가 저녁밥 먹기 전에 완성된다. 물론 빨리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맵시가 문제인데 그때에 나는 그 구두를 신고 매우 으스대었고, 공을 찬다든가 험한 길을 걸을 때에는 으레 내가 앞장을 섰다.
아마 이 무렵부터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닮아갔던 모양이다. 우선 말을 할 때 더듬는 버릇이 그러하였다. 평상시엔 그런 버릇을 느끼지 못하다가도 꼭 사람들이 많이 모인 앞에서나 혹은 마을의 친구들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할 때엔 꼭 더듬어서 제대로 의사표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한 까닭으로 나는 늘 혼자가 되기를 좋아했고, 또 혼자가 되면 무언가 손을 놀리지 않으면 못 견디었다. 아버지와 같이 손재주가 들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생각된다.
내가 늘 만지기를 좋아했던 것은 끌이나 칼, 그리고 섬세한 줄톱과 줄칼이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은 물론 모두가 아버지의 연장궤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아버지가 없는 동안은 내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꺼내가지고는 깎고 쓸고 하였다. 대개는 목각을 만든다든가 아니면 부조(浮彫)로 국장(國章) 이나 기념 메달 같은 것을 만들어 학교에 갖다 바치거나 아이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어 번은 늘 손가락을 다쳐서 봉대를 감고 다녔다. 하지만 깎고 파내는 재미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자기가 뜻했던 형태가 비슷하게 새겨지는 재미도 그러하거니와, 그것보다도 재료(나무나 고무)의 성질, 말하자면 결이나 매스를 알아내는 재미다. 어떤 미지의 재료라 하더라도 벌써 한두 번 칼질을 하고나면 칼질의 방향을 알아내고 물렁물렁함, 퍽퍽함, 깐깐함, 딱딱함과 같은 성질을 대번에 알아낸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것에 맞을 만한 도구를 택하여 한두 번 손질에 뜻한 바대로 파내거나 깎아버린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사물에 대한 나의 어린 날의 인식력을 키워준 귀중한 경험들이지만, 집의 아버지나 어머니는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하학 후에 나는 집에 돌아와 여전히 연장들을 꺼내어 무엇인가를 깎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찍 돌아왔다가, 그런 모습의 나를 발견한 것이다. 돌연히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리더니 ,
“야! 이놈의 새끼야!”
하고는 냅다 거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이리 치고 저리 치는 것이다.
그때의 아버지의 표정은 꼭 사나운 사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눈은 뎅그렁하고 입술과 턱은 격하여 연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격하여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런 표정과 손짓 외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알 길이 없는 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숨도 크게 못 쉬었고, 아버지가 연장들을 뺏어가지고 간 연후에야 비로소,
“쳇! 왜, 때려!”
하고 반발해 보였다. 하지만 당시만 했어도 나는 아버지의 그러한 분노가 결국 연장을 꺼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때, 아버지가 분격한 것은 내가 자기를 닮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그 뒤에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알았다. 아버지는 내가 목수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손재주가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다. 사실 예부터 재주 없는 사람은 남을 부려먹으면서 살아도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빌어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나에게 몇 번이고 새겨듣도록 일러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아버지를 혐오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열등감을 갖도록 된 것은 중학생이 되어서였다. 나의 학교는 당시에 흥남(興南)의 유정리(留停里)라는 곳에 있었다. 물론 그 학교는 본시 왜놈들의 학교였고, 바로 그 학교 옆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것도 왜놈들이 살던 집이다. 아버지가 비료공장에 다녔던 관계로 우리는 그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아파트에 동급생 하나가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한낮에 바이올린을 켰기 때문에 어쩌다 들러도 그의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올백을 한 머리는 포마드 기름에 번뜩이면서 향긋한 냄새를 풍겼고, 바이올린 키를 잡은 손은 가늘고 희어서 얼핏 여자의 손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가 그의 턱밑에 앉아 넋을 잃고 바이올린 연주를 지켜보노라면, 이윽고 그의 아버지는,
“오늘도 오 쏠레미오를 켜줄까?”
하고 내가 머리를 끄덕이기 전에 그의 아버지는 벌써 바이올린을 턱주가리 밑에 끼어 넣고는 키를 잡은 손을 척 치켜들더니 파도와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가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 후 소련 영화 「나타샤」를 본 후의 일이지만, 아무튼 나는 이 바이올린을 켜는 친구의 아버지를 봄으로써 나의 아버지가 얼마나 추하고 천한 일을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뿌우연 머리는 언제나 톱밥이나 대팻밥 같은 것이 묻어 다녔고, 손은 온통 매듭만 있는 것 같았고, 그 거칠거칠한 피부가 아이들의 살갗에 스치고 지난다면 영락없이 핏발이 섰을 것이다. 게다가 옷차림은 언제나 목언저리나 무릎을 기운 작업복이고, 어깨에다 목수연장을 메고 다니는 것은 흔히 보는 모습이다. 그러나 어느 것보다도 환멸을 느낀 것은 과묵하고 더듬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더듬을 때는 그 더듬는 불협화음의 찌익찍거리는 라디오의 시끄러운 소리처럼 나의 가슴을 찢어놓는 듯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켜는 동급생의 아버지는 말솜씨도 여간 아니었다. 어떤 때 그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도 기억 이 나지만 그것은 장발장(레미제라블)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나 재미있었는지 정말 침을 꼴깍꼴깍 넘기면서 모가지가 한 자나 늘어나는 판이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무슨 대학을 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나의 집이 싫어졌다. 또 나 자신도 미워졌다. 어쩌다 아이들이,
“얘, 얘, 재네 아버진 학교 선생이래!”
혹은,
“쟤네 아버진 시청엘 댕긴대!”
하는 정도의 대화만 오고 가도 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생은 물론, 시청엘 다닌다 하더라도 손에 붓대를 들고 사무를 보는 유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다 아이들이,
“얘, 너네 아버진 뭘 하는 사람이냐?”
하고 물을 때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거나, 다행히 옆에 누가 아는 아이가 있어 나를 대신해서,
“얘네 아버진 집 짓는 목수야!”
하고 말하면 그땐 빨개진 낯을 어디다 둘지를 몰라 땀을 뻘뻘 흘린다. 훨씬 뒷날이 되어서 나는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이 목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무렵부터는 목수라는 천한 직업에 대한 열등감이 다소 덜해질 수는 있었다. 예수와 같이 훌륭한 성인(聖人)의 아버지도 목수였는데, 하물며 나같이 못난이의 아버지가 목수라니 그것으로써도 얼마나 황송하랴. 그렇게 달래어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나의 열등감을 말끔히 씻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무렵부터 열심히 아버지로부터 도망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목수와 같은 천한 직업인은 되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손재주를 익히지 말아야 하고, 그 대신 말재주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손재주를 버리는 것은 쉬워도 말재주를 익히는 것은 나로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말에 대해서 신경을 쓰면 쓸수록 점점 말더듬이가 심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몰래 국어책을 소리 높여 읽으며, 웅변대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감히 그 대회에 출전이라도 할 듯이 열심히 원고를 써가지고 몰래 연습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혼자만의 웅변대회로 끝나고 만다. 나의 형성(形成)은 이미 아버지가 결정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도망하기에는 너무나도 연약한 몸과 의지를 가졌다. 아버지는 나에게서 말을 빼앗고, 나의 모든 감각을 여자의 성기와 같이 안으로 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저 햇빛 쏟아지는 들판을 달리는 야생의 쾌적함을 잊게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갇힌 것이다. 갇힌 몸으로 무리〔群〕들의 경쾌하고 우렁찬 율동을 부럽게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은 극히 잠시 동안이며 대부분의 시간은 어둠의 행진이었다. 여자의 성기처럼 안으로 향한 감각을 익히는 어둠의 행진, 그것은 홀로 파내고 깎고 다듬는다거나 혹은 만드는 일이다. 쉴새없이 그렇게 손을 씀으로써 나는 말을 통하여 무리 쪽으로 나가지 못하는 답답함을 잊는다. 아니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나는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과묵함, 좀처럼 화내지 않다가도 한번 화를 낸다면 꼭 흉기를 들고 덤비는 모습, 그리고 그가 왜 그토록 일을 잘하고 솜씨가 좋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다. 정말 아버지는 일하는 벌레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금시라도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 나는 아직 아버지가 맨송멘송하게 놀고 있는 때를 본 일이 없다. 정말 할 일이 없어서 놀게 될 때에는 그는 어린아이들처럼 종이를 접어서 새나 배와 같은 장난감을 만든다든가 아니면 철사와 같은 것으로 자전거나 손구루마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럴 때 어머니는 매우 못마땅한 듯,
“앙이, 이럴 땐 더러 책이나 보오다!”
하면서 아무개 아버지는 꼭자무식으로도 동회 사무소의 직원이 되었다는 둥, 바가지를 긁기 시작한다. 그럴 땐 물론 아버지는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정 바가지가 심해지면,
“책은 봐서 므스거 하겠음머이! 책에서 뱁이 나오!”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자리를 뜬다. 자리를 뜬다지만 그는 곧 다른 장소로 옮겨 가서 하다못해 연장궤라도 뒤진다. 아버지는 어려서 서당(書堂)을 다녔기 때문에 한글은 물론 한문도 안다. 하지만 그가 일상생활에서 책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그는 자기의 몸에 지닌 근력만을 소모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사실 아버지는 힘이 장사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공장에서 열린 운동대회에서 모래섬 오래 들기로 일등해서 상품을 탄 적이 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가 근력이 좋은 것은 할머니를 닮았기 때문이라 한다. 할머니야말로 혼자서 쌀가마니 하나쯤은 식은 죽 먹기로 들어 이는 여장부였다 한다. 허우대가 크고 팔뚝 하나가 절굿공이 만했다는 것이다. 여자가 그 모양이었으니 얼굴이야 얼마나 못생겼을까 하는 것이 그때의 내 생각이었지만, 사실 나는 아버지의 성났을 때의 사자와 같은 얼굴이 꼭 할머니의 얼굴이었으리라고 혼자 상상하곤 했었다.
내가 아버지가 힘이 세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6·25사변 때였다.
어느 늦은 여름날, 미군 비행기가 새까맣게 날아오더니 우리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다 사정없이 시커먼 폭탄을 마구 퍼부었다. 삽시간에 아파트 일대는 불바다와 피바다가 되었다. 졸지에 당한 변이라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는데, 이때에 넋을 잃은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나온다는 것이 그만 베개를 안고 나왔었다. 뒤늦게 이것을 안 아버지는 마치 사자와 같은 얼굴로 불붙는 아파트로 뛰어들어갔는데 잠시 후, 나올 때는 한 손에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 연장궤를 들고 나왔다. 사실 그 연장궤는 거의 아이들의 관만큼 큰 것으로 보통 사람들이 그냥 들기에도 어려울 만큼 무거운 것이다. 그것을 단숨에 한쪽 옆구리에 끼어들고 나온 것이다. 뒷날 아버지의 술회이지만 그땐 정말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그때의 힘도 결국 자기의 힘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하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폭음과 총성 (기총소사)이 고막을 찢고, 온통 눈에는 불과 피와 아우성이고 바로 옆에서 아내가 베개를 안고 미친 듯이 부르짖었으니 어찌 제정신이었겠는가. 하지만 그 제정신이 아닌 속에서도 연장궤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정말 이해못할 일의 하나이다. 하긴 그 난리통에 바이올린을 켜던 동급생의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건지러 들어갔다가 기둥에 깔려 죽었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연장궤가 바이올린에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즈음의 나에게는 그러한 모습의 아버지가 밉게만 보였고, 바이올린 때문에 깔려 죽은 친구의 아버지가 한없이 위대해 보였다. 대체 그까짓 쇠붙이가 무어길래, 아이를 꺼내러 들어가서는 연장궤 생각을 했을까. 도대체 미련하기가 곰 같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지금도 아버지를 머리에 떠올리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사자, 곰, 그리고 양이다. 사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에게는 양과 같은 면이 더 많다고 느껴지지만 그때만 해도 사자와 곰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는 피난민의 대열에 끼어 미국배를 타고 거제도로 갔다. 한겨울에 굶주린 창자를 끌어안고 허허벌판의 천막 속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꽃이 필 무렵이면 다시 고향 땅으로 되돌아온다는 바람에 빈털터리로 집을 떠났었다. 설사 영원히 고향 땅을 떠난다 하더라도 금은보화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이런 땐 별수 없이 빈털터리 신세가 되지만 그래도 이토록 많은 세월을 타향에서 보낼 줄 알았더라면, 하다못해 부지깽이라도 들고 떠났을 것이다.
아무튼 이 무렵 많은 사람이 허기진 탓으로 얼어 죽고 병들어 죽어갔다. 그런데 요행인지는 몰라도 우리 가족만은 그러한 참변을 면할 수 있었다. 아마 그것은 아버지와 연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피난통에도 간단하게 몇 가지 연장을, 이를테면 톱, 대패, 끌, 망치와 같은 기본적인 연장을 봇짐 속에 꿍쳐 넣어왔던 것이다. 피난지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천막 속에서 자고 나자, 아버지는 견딜 수가 없었던지 댓바람에 연장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는 하루 사이에 단칸짜리 집 한 채를 양지바른 쪽에 거뜬하게 지었다.
비록 배는 고팠지만, 뜨뜻한 방에서 누워 자니 정말 갑자기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날 밤, 아버지가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떠냐? 이만하면 집이 좋지?”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아궁이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받아 마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표정이 되어 우리들을 환히 비춰주는 듯싶었다. 우리들은 그러한 순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결같이,
“예예, 좋아요!”
혹은
“궁전과 같아요!”
하고 쫑알대자, 어머니는 퉁퉁하게 부은 얼굴로,
“정말이지비! 궁정이 별기겠니! 이럴 때, 이놀 기 바루 궁정이지비.”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었다.
아버지가 목수 아바이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하루 사이에 집 한 채를 거뜬하게 짓고 살자, 여기저기에서 주문이 들이닥치게 된 것이다. 밤만 자고 나면 네댓 명씩 문간에 찾아와서는,
“목수 아바이 계시오?”
하고는 거의 굽실대는 식으로 통사정을 해댄다. 처음에는 더러 공짜배기 일도 해주었지만, 점차 목수 아바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는 대가가 있었다. 대부분 피난민들이라 돈은 없고, 대개 물건들인데 비누, 금붙이, 천, 옷가지 등이다. 이런 것들은 곧장 원주민들에게 가져가면 쌀로 바꾸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가 목수 아바이로 세나기 시작한 것은 원주민들로부터이다. 집을 지을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떨어진 문짝, 부러진 상다리, 깨어진 찬장 등 고칠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럴 것이 거제도에는 소위 빨치산 사건이 있은 후, 일을 할 만한 장정이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탓으로, 피난민을 인간 이하로 경멸하던 그들도 아버지에게만은,
“목수 아바이 계신교?”
혹은,
“목수 아바이요, 꼭 오늘은 우릿 걸 해주이소 야아? 그라믄 꼭 후히 대접할 낍니더!”
하고 반드시 존대의 말을 썼다. 함께 피난 나온 사람들도 아버지의 목수 기술을 부러워했지만, 내가 목수 아버지를 둔 것을 처음으로 흐뭇하게 여긴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분도 결코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얼마 안 있어, 거제도에는 미군이 상륙하고 이어 대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생겼다. 물론 그것 때문에 아버지는 곧장 미군 부대에서 일을 하게 되어, 그날그날 먹고사는 생활이 안정되었지만, 그 반면에 목수 아바이의 인기는 형편없이 떨어져갔다. 육지에서 목수들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미군 부대에서 목수 연장이 새어 나오게 됨으로 해서, 새로운 목수가 많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목수 아바이의 인기를 떨어뜨린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사꾼들의 등장이었다. 미군들이나 포로들에게서 새어 나오는 물건들을 혈값에 사가지고는 육지로 나가, 곱으로 남겨먹는다. 이런 장사꾼들이 득실대기 시작하면서 점방이 생기고, 교회가 생기고, 강습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의 주변에는 부산이나 통영 아니면 하다못해 장승포와 같은 토박이 학교에 적을 두는 학생들이 생겨나고, 목사의 아들이다, 전도사의 아들이다, 통역관이나 선생의 아들,
하다못해 피난민 사무소의 서기 아들 같은 것도 부러운 것으로 등장하게 되 었다.
내가 다시 집에 대한 기피증이 생긴 것은 이때였다. 나는 이때부터 떠돌아다니길 좋아했는데, 대개는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 무렵의 불량배들이란 대체로 미군들의 군수물자를 홈쳐내든가, 아니면 그런 것들을 훔쳐내는 미군 부대의 이른바 하우스 보이들을 잡아다 족치고는 물건들을 뺏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뺏은 것을 팔아가지고서는 써지 양복에다 뻔쩍이는 가북 구두를 신고, 내로라하고 낯반대기를 들고 다니는 처녀들을 모조리 후리고 다녔다. 아마 이들이 정말 악당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만했다면 그것은 하우스 보이들을 패는 짓과 마을 처녀들을 후리는 짓, 그리고 거친 말투였다. 특히 그 거친 말투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들을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그것은 거침없는 쌍소리와 금시 사람을 때려잡을 것 같은 험악하고 증오에 찬 그런 욕설이었다. 나에게서 말을 더듬는 습관이 거의 사라진 것은 그러한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패를 부리고 지껄여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나의 행위는 아버지에 대한 기피증에서 오는 반발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럴 것이 나는 이러한
불량배들 속에서 생활함으로써 안으로 오그라들었던 감각의 세계가 서서히 밖으로 펴남으로써 드디어는 남성의 성기와 같이 햇빛이 빛나는 넓은 세계로 뻗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나의 형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의 세계는 오로지 연장과일이 전부이다. 새벽에 눈을 뜨면 그는 연장을 챙겨 들것(GI 백)에 넣고는 밥상을 물리자마자 어깨에 둘러메구 일터로 나간다. 또 저녁에 퇴근하면 여전히 연장이 든 백을 메고 곧장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연장궤 속에는 항상 무엇이 들어 있다. 간혹 새로 구한 연장이나, 혹은 미군 부대에서 얻은 통조림 같은 것이 들어 있기도 하지만, 언제나 들어 있는 것은 이른바 키렛빠시다. 세모꼴, 네모꼴, 구형, 원통형 등의 갖가지 모양의 나무토막이 들어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좋아할 때는 통조림 같은 것이 들어 있을 때이고, 어린 동생들이 좋아할 때는 이쁜 나무토막들이 들어 있을 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버지가 좋아할 때는 새로운 연장이 생겼을 때이다. 사실 그간에 아버지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일본제 연장들 못지않게 많은 새 연장들이 생겼다. 새 연장들이란 거의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美製) 연장들이다. 그래서 그런 연장을 새로 구한 날 밤에는 아버지는 마치 새 아기나 얻은 듯이 만지고 쓰다듬느라 좀처럼 잠을 못 이룬다. 어느 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얼라(아기)를 얻은 만치나 기쁘게있소!”
하고 비꼬듯이 한마디 했지만, 아버지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빙긋이 웃으며,
“이게 미제 한도루(구멍 파기)요! 코장이 꺼란 말이요!”
하고 대견스러워한다. 그럴 땐 아버지의 표정은 꼭 양과도 같다.
“데우(오죽) 좋겠소! 하긴 미제라면 똥두 달다고 합두구멍이 ―”
여전히 어머니는 연장을 신주단지 다루듯 하는 아버지가 미운 듯이 비꼰다.
“미제라구 다 좋게있소. 되레 목수 연장만은 일본놈 것을 못 당하지비!”
“그런데 어째서 미제라구 그리두 좋아하오?”
“그렇지만 코쟁이 꺼라두 이 한도루나 수평 (水平) 같은 건 왜놈의 것이 어림두 없지비! 아마 십 년은 거뜬히 쓸기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희희낙락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희희낙락 할수록 어머니는 반발심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오래오래 쓰다 죽읍새. 죽을 때 무더메까지 가지구 가기오!”
어머니가 그렇게 독설을 퍼부어도 아버지는 성을 내기는커녕 더욱 어린아이처럼 히히거린다. 고향에서도 그러했지만, 어머니는 연장에 붙어 다니는 벌레와 같은 아버지의 직업을, 어쩌면 연장밖에는 쓸 줄 모르는 아버지란 사람을 싫어했다. 다분히 어머니는 성격상으로 남성적인 데가 있다. 그녀는 늘 정치가가 아니면 활동가라고 할까, 떠버리로 남을 휘어잡으면서 무슨 일이든지 앞에 나서서 척척 해결하는 그런 외교적인 사람을 늘 꿈속에 그리고 있는 듯싶었다. 정말 그런 눈으로 보면 아버지는 완전히 보잘것없는 남자에 속한다. 그래서 간간이 아버지와 싸울 때면 어머니는 아버지더러,
“어이구, 저 언딘! 어쩌다 저런 언딩하구 만났겠니!”
하고 한탄했다. 언딘이라는 말은 머저리라는 말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더욱 상대방을 깔보는 감정이 짙어지는 말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곡절을 겪으면서 모은 연장들은 그 후 환도(還都)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전쟁에 부서진 서울을 복구하는 데는 어느 것보다도 그 연장들이 우선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덕택에 우리 가족은 판잣집이긴 했지만 당당히 수도(首都)로 이사 와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월은 거의 이십 년 가까이 흘렀다. 그 이십 년 가까이 흐르는 동안에 아버지와 연장들은 변함이 없이 우리들의 이 수도 속에서 때로는 새 건물을 짓기도 하고, 또는 헐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면서 간신히 우리 식구들의 호구를 메워왔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 닳아서 못쓰게 된 연장들은 새것으로, 그것은 국산 연장들로 바뀌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일터에서 도적맞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친구들의 연장과 서로 바뀌기도 하여 늘 변화무쌍하긴 했으나 여전히 아버지의 연장궤에는 늘 그만한 연장들이 차곡차곡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러한 직업에 대해서 처음으로 어떤 성스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오 년쯤 전의 일이다. 그땐 이미 나는 대학을 마치고 또 군복무도 마치고 나서 그림을 그린답시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때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를 말하자면, 우리 식구가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 이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야 하지만, 한마디로 그 동기를 말한다면 결국, 아버지의 그 토막나무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연히 생겨버린 그 갖가지 기하학적 모양의 토막나무의 기억에서 어떤 진리의 실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인연이 된 나는 조형(造形)에 눈을 뜨게 되고, 급기야는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을 알게 되고, 또한 추상미술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 무렵에 그린다고 덤빈 것도 몬드리안 류의 옵티컬한 그림 이었다. 아니 그림이라기보다는 거의 기하학적 도안과 같은 것이다. 아마 색채의 정서감(情緖感)을 빼어버린다면 기하학이나 다름없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무렵의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몇 사람의 동료들에게 업히어 돌아왔다. 아시바를 잘못 디디어 이층 가까이 되는 곳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한쪽 팔을 상하고 왼쪽 옆 갈빗대가 두 대 부러졌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물론 사색이다. 나는 처음으로 그들, 아버지의 동료들에게 덤벼들었다.
“아니, 사람이 일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병원엘 가지 않고 여길 업어 오다니요?”
그러나 나의 화난 얼굴을 보고서도 그들은 선뜻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이만해도 다행이오!”
“아니, 이지경이 되었는데도 다행이라니요?”
“까딱하면 죽었지 뭐요.”
아버지의 동료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건축업자를 욕해댄다. 알고 보니 건축회사 쪽에서는 아버지의 부상이 회사 측의 잘못이 아니라는 구실로 입원 치료를 거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약간의 옥도정기를 바르고, 주사 한 대를 맞은 후 곧장 병원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러니 난들 무슨 수가 있으랴. 무일푼의 환쟁이. 그러나 막상 공장에 다니는 누이동생이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했다. 병원에 갈 막대한 돈도 돈이려니와, 그는 자기의 근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끝내 병원엘 가지 않고 개똥물을 마시면서 부러진 갈비뼈를 구슬렸다. 그러나 워낙 오십이 훨씬 넘은 나이여서 완쾌되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어느 날, 나는 아버지를 부축하여 남산엘 올라갔다. 갑자기 내가 왜 그 생각하게 되었는지 지금도 그 동기가 분명치는 않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아버지가 소중하다는 느낌, 아니 이 세상에 아무 쓸 짝도 없는 그런 그림 나부랭이를 그리는 나보다도 훨씬 값있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무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와 그토록 몸을 가까이 대고 호젓이 산보를 했다는 짓은 어김없이 그것이 처음 있은 일이요,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때, 처음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방송탑이 서 있는 남산의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한여름이었다. 나는 달랑달랑하는 주머니를 털어 콜라 두 병을 샀다. 한 병을 마개를 뗀 후 내밀며,
“아버지! 콜라 한 병 드세요! 마시면 기분이 아주 시원할 겝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아버지라고 부른 것도 이때가 처음인 것이다. 아버지는,
“무스거, 돈이 없는데 이런 걸…….”
하고 몇 마디 했지만 내심으로는 여간 흐뭇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눈언저리가 불그레헤지면서 척척하게 눈물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콜라를 마셨다. 나도 아버지가 마시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콜라를 마셨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로부터 유유히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부쩍 늘어난 고층 빌딩이 무엇보다 우리들의 눈을 끌었다. 불쑥 아버지가 이런 말을 혼잣말처럼 했다.
“내 손이 닿은 집들이 훤히 눈으로 보이는 것 같으다!”
물론 이 말은 더듬는 말이므로 내가 상당히 신경을 써서 알아들은 말이다. 전과 같으면 나는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이 역겨울 것이지만, 이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치 고려자기를 보던 눈으로 이조 시대의 막그릇을 보듯, 텁텁하면서도 은근스러움을 느꼈다. 정말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버지의 그러한 거친 풍모는 꼭 자코메티의 거친 조각수법과 같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버지의 손이 닿은 집들이 얼마나 될까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뎅금한 눈. 그러나 지금은 안질로 좋지 않아서 약간 흐리멍덩해 있고 거기에다 등까지 꾸부정하게 굽어 있다. 아무튼 그런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시가지를 휘둘러보았다.
“글쎄다! 숫자로야 어떻게 말하겠니.”
하고 말끝을 흐린다. 나는 불쑥 빌딩이 모여 있는 곳을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빌딩도 지으셨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히쭉 웃었다. 그런 땐 정말 양과 같이 순해 보였다.
“비루딩이야, 뭐 어려울 게 있느냐!”
“그럼, 뭐가 제일 어려우세요?”
“그야, 역시 한식집이지!”
“한식집……”
나는 그렇게 말을 되받으며 머리를 끄덕이었다. 역시 목수로서는 한식집이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버진 얼근히 취해가지고,
“뭐니 뭐니 해도 목수야 그저 한식집을 지어야 신바람이 나지!”
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이날처럼 실감한 적이 또 없다. 나는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의 집들, 이를테면 양식집, 왜식집, 한식집, 빌딩, 판잣집들을 마치 어릴 때 보았던 그 키렛빠시의 갖가지 형태를 보듯 하였으나, 아버지의 시선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러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자기의 손이 일일이 닿은 구체적인 실감을 가지고 있는 애증의 시선일 것이다. 사실 이십여 년의 세월을 서울에서 살면서 아버지의 발길과 손길이 안 닿은 동네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서울의 건설은 아버지와 그의 연장들이
단단히 한몫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진 서울 시장님께로부터 훈장이라도 한 개 받으셔야 되겠습니다.”
나는 우스갯소리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히쭉 웃으면서,
“훈장이야 뭐, 잘난 사람들이 받아얍지·…‥”
하고 말끝을 흐렸는데 그것은 결코 비꼬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의 솔직 한 의견이었다. 훈장이나 상 같은 것이야 어머니의 말마따나 언제나 말주변이 좋고 해사스러운(사교적) 학식 높은 사람들이 받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그러한 말을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사회의 구체적 진실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후 괴상망측한 그림을 버리고 새 양식의 그림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또한 어느 개인 회사에 취직하면서 곧장 결혼한 것도 모두가 그날에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그날 남산을 내려오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래 장개를 가야 돼! 그래야 높은 데만 쳐다보는 습관이 없어지는 기랑이. 옛말에도 기는 짐승이 나는 짐승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이 있쟁이던가? 그저 장개를 가서 땅바닥에서라두 여자를 안구 자봐야 안당이깡이…….”
아버지의 이 말은 사실상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나에게 꼭 해주어야겠다고 벼르던 말이었음에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간결하고도 뼈대 있는 말이 감히 아버지에게서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는 그러하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 말은 마치 고통 속에서 키워지는 조개 속의 진주와 같이 과묵한 아버지의 가슴속에서 날이면 날마다 아픔을 견디면서 다져온 말이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높은 곳만 쳐다보는 습관이라는 말이 딱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애매하지만, 나 스스로 판단하기엔 그 뒤를 이어지는 말을 참작하여보건대, 그것은 구름을 잡아볼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버지에 대하여 할 이야기라면 대충 이러한 것이지만 내가 아버지의 바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은 물론 그런 일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사실 나로서 볼 때, 아버지가 한때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그렇게 흥미 있는 일이 못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아버지의 그러한 바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 곰과 같이 억세게 보이는 아버지의 근력이 그런 쪽으로라도 잠시 새어나가지 않았더 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지 아무도 예측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는 평생에 도박을 해본 적이 없다. 술은 간신히 하는 것을 보았지만 절대로 과음하여 실성하는 때는 없었다. 오로지 일이었다. 하지만 일을 하고도 남는 그 힘은 어이로 보낼 것인가. 그 보낼 곳이 없는 힘이 한때 다른 여자에게로 흘러갔다면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아버지를 보는 입장이다. 어머니로서는 그렇지가 않을 것은 뻔하다. 어머니는 그 일로 인해 견딜 수 없도록 고통을 받아왔고, 끝내는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지도록 마음속에 맺힌 한이 되어 그 보복심에 불타게 되었다. 사실 어머니 한 분을 두고 생각하자면 나로서도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인생은, 두 개의 발을 한꺼번에 떼지 못하듯, 약간은 절름발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바람에 대해서 애써 말하지 않으려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는 일이야 기왕지사고, 이제부터 중요한 일은 나머지 여생을 마음 편하게 사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까짓 것 이제는 훌 잊어버리시오,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내야, 그렇게 생각하지마네두 저놈의 두생이(영감) 상기두(아직도), 그런 못된 습관을 버려야지비! 아이된다! 세 살 쩍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구. 응! 어디메서 제 버릇 개르 주겠니?”
하고 열을 올린다.
“아니, 그럼 아버지가 환갑 나이에 아직도 바람을 피운단 말씀이세요?”
내가 다시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손을 떼며 시 삘건 눈으로 쏘아붙인다.
“기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아니, 어머님두, 아버지 나이 환갑이에요, 환갑!”
“넌 아직 모른다! 저놈의 두생이 이제는 환갑이구 무시기구 없당이! 니, 이제 두고 봐라! 저 연장드르 하나하나 주어내다가는 팔아서리 모두 간나더레케다 처박지 않는가. 내가 장 연장드르 팔겠다구 그런게 달래 그런 줄 아니? 그러기 전에 팔아서리 니 약이라두 사주자구 그러능기지비.”
어머니는 정말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님도 참 웃기시네요.”
내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또 진지한 표정으로,
“앙이, 내가 웃기당이! 야아두, 니 이제 두고 봐라! 내 말이 그른가!”
어머니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정말 병적인 현상이다. 하긴, 아버지가 연장들, 가령 톱 같은 것을 날을 세우기 위해 줄로 쓸고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아도 옛날의 계집들을 생각한다고 믿는 판이니 하물며 아버지가 어쩌다 마을의 술집에서 대포라도 한잔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그날은 어김없이 대판 싸움이 벌어지는 날이 된다.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붙잡고 앉았기가 민망스러워,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뒷창문 쪽으로 갔다. 꼭 아버지의 모습을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저절로 눈이 창밖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연장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연장궤의 뚜껑을 열어놓고 이것저것 연장들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는 아버지의 모습은 영락없이 연장에 붙어서 사는 한 마리의 연장 벌레와 같이 보인다. 등이 새우등과 같이 착 까불어져서 꼭 달괭이가 연장궤에 달라붙은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참 동안 연장들을 다투는 아버지를 지켜보노라면 점점 아버지의 모습은 크게 확대되면서 때로는 성난 사자와 같이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한 마리의 미련한 곰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근래에 와서는 양과 같이 순해 보이는 쪽이 더 많다. 아마 그것은 야버지가 얼마 전 그 목수 일에서부터 은퇴함으로써, 완전히 그 하루하루의 생활이 어머니에게 쥐여산다고 할까, 아무튼 그의 본래의 업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서 아버지는 목수 일에서 은퇴하는 날,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가 날이면 날마다 연장궤에 쭈그리고 앉아, 옛날을 회상하듯 연장을 어루만지는 것,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난쟁이 불알 주무르듯 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로선 죽음에 대한 버팀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목도할 때마다 견디기 어려웠다. 사실 앞에서 나는 아버지의 어느 때의 모습을 자코메티의 조각풍에 비유했지만, 이럴 때야말로 자코메티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나는 곧 그 후에 자리에 돌아와 누웠다. 그럴 것이 안정(安靜)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안정이 때로는 잠으로 바뀌는 때가 종종 있다. 이때도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왕왕거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를 잠에서 놀라 깨게 했다.
“야! 자느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며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어머니!”
“글쎄, 니 좀 일루 나와봐라!”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나서며 .
“어머니, 왜 그러세요?”
하고 귀찮은 듯이 물었다.
“글쎄, 연장궤가 없어졌쟁인니!”
나는 연장궤가 없어졌다는 말에 적이 놀랐다.
“아니 , 연장궤가 없어지다니요?”
“내 말이 틀리니? 이놈의 두생이가 깜쪽할 새에 연장드르 가지구 간나더레케 갔쟁이겠니!”
순간 나는 피식 하고 웃었다.
“어머님두, 그럴 리가 있을라구요!”
“그럴 리가 없당이? 밖에 나가 보랑이…… 거짓뿌렝인가!”
나와 어머니는 뒤뜰로 나갔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정 말 그곳에는 연장궤가 없었다.
“어데다 치웠겠지요!”
내가 흥분해 있는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힝! 데우 치웠겠다! 내, 이놈의 두상, 붙잡기만 해봐라!”
하더니 부리나케 대문을 차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어머니가 가는 곳은 뻔하다. 아버지가 갈 만한 술집과, 몇몇 아버지의 친구(목수)들의집을 뒤지는 일이다. 일이 꽤 시끄러워질 것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는 어머니를 막을 도리는 없다. 막아서 끝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혹 창고 속 어느 곳에 아버지가 연장궤를 깊숙이 감추어두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뒤져보았으나 허탕이었다. 그러나 막 창고를 나오려고 하다가 얼핏 눈길에 닿은 곳에, 몇 개의 연장이 놓여 있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못통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낮은 당반을 만들어논 곳인데, 그 못통 위에 대패와 톱과 망치가 각기 한 개씩 놓여 있었다. 나는 얼른 톱과 대패를 내려다보았다. 대패는 이른바 신팔랑(新八郎)이고 톱은 ‘히데고로’ 였다. 아버지가 제일 아끼던 연장들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것을 보자, 아버지가 나머지 연장들을 팔아버리려고 들고나간 것이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 어머니의 말대로 술과 계집을 위하여 그 연장들을 처분하리라고는 그래도 믿겨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나는 앞마당과 뒤뜰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아버지의 손길이 닿은 곳을 일일이 확인해본다. 빗자루, 고기적쇠, 칼, 도마, 쓰레기통, 나무 의자, 물통, 물지게, 슬리퍼, 똥을 푸는 국자, 신발대…… 등 대충 보아도 이런 것들이다. 아버지의 그 매듭이 굵은 손이 생활의 가장 밑바닥의 구체적 인 곳을 샅샅이 훑고 있음을 발견하자, 나는 새삼스러이 가슴이 저려오도록 절실한 충격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나무 의자는 산에서 나무뿌리를 캐다 만든 것인데, 순전히 나의 요양을 위해서 마당의 한쪽 그늘진 곳에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 나를 무심하게 만들지 않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오후에 나는 약을 먹고, 다시 한 차례 안정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집을 나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른다.
날이 어스름해지면서 심심치 않게 대문 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귀를 벌름거리며 행여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가 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아침에 집을 나간 가족들이었다. 결국 아버지 어머니가 나타난 것은 완전히 밖이 어두었을 때였다. 마지막에, 그러니까 이제 그 두 사람이 아니면 대문을 열 식구가 없다고 판정 되었을 즈음에 밖에서,
“얘들아!”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우리 식구는 일제히,
“야! 오셨다!”
하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것은 우리들 나머지 식구들이 한결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을 늘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싸움으로 인해 우리 가정은 언제나 우울하고 슬픈 분위기에 휩싸여야 했었다. 그럴 것이 한번 싸움이 있었다 하면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온 식구가 다 밖으로 뛰어나가긴 했지만, 누구나 먼저 선뜻 대문으로 다가서서 문을 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날 저녁, 대문을 먼저 연 사람은 나였다. 대문을 왈칵 열었을 때, 나는 거기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서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것이 어머니의 손에는 쇠고기가 들려 있었고,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아버지의 손에는 한약 꾸러미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싱긋 웃고 말았다. 이어 아버지도 벙긋하고 웃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나의 웃음을 대하기에는 너무도 멋쩍었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목을 길게 내밀어 마당 안에 주욱 늘어선 식구들을 한 바퀴 휘둘러보더니,
“별일 없었니? 좀 늦었다아…….”
하고 싱겁게 말끝을 흐렸다.
『창작과비평』 27호(1973 봄); 『우리들의 초상』 (일지사 1976)
박 용 숙
박용숙(朴容淑)은 1935년 함남 함주에서 태어나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59년 『자유문학』 에 「부록」 「이름 없는 훈장」 이 추천되어 등단했고, 1969년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 되어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와 동덕여대 교수로 재직했다. 「목수 아바이」 「사과」 「영웅교향악」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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