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5) 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미국의 체호프’, 리얼리즘의 대가. 1938년 오리건주 출생. 1976년 첫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발표. 1983년 그의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대성당』출간, 이 작품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정열』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시집 『우리 모두』가 있다. - 작가소개에서 편집
표제작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네 사람이 사랑을 주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된다. 등장인물은 주인인 멜과 테리, 나와 로라 이렇게 두 부부가 멜의 집에서 너무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멜은 심장 전문의로 전 부인과 이혼하고 테리와 결혼했고, 테리는 전남편 에드를 떠나 멜과 결혼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테리로 바뀌는 듯하다. 멜은 진정한 사랑이란 정신적 사랑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테리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에드에게도 사랑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p192)
나와 로라는 만난 지 1년 반이 넘었지만,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지 않아서 애틋하게 바라보고, 손을 붙잡고 있다. 멜과 테리도 만난 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이다.
테리의 전남편 에드는 테리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죽이려고 한다. 테리가 폭력에 못 이겨, 멜을 만나 떠나가자 둘을 총으로 수없이 위협했다. 에드는 쥐약을 먹고 죽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잇몸과 이가 분리된다. 권총 자살도 실패해서 3일 정도 더 살다 죽는데, 테리는 그의 마지막 병상을 지킨다. 테리는 끝까지 에드에게서 사랑을 느꼈다고 말한다.
심장 전문의인 멜은 어떤 사랑에 대해서 또 이야기를 이어간다. 노부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위기에 놓였다. 여러 의사가 달려들어 밤새 수술한 끝에 노부부는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가며 재활 끝에 일반병실로 옮겨진다. 그러나 심한 수술 탓에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았고, 눈코입만 열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눈으로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교통사고가 난 것보다 더 낙담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네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조하기도 하고, 반대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면서 여느 친구들이나 나눌 법한 이야기들 가운데서 참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이야기하면서 끝난다. 사랑에 대해서 이렇다 할 결론을 내려 주지 않는다. 모두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레이먼드 카버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작가였다.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작품을 쓰겠다” 워즈워스 이후 일상어로 작품을 쓰는 데 성공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가난으로 인해 온갖 일을 하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대학에 간다. 최초의 문학 스승인 존 가드너를 만나고, 《에스콰이어》지의 편집자인 고든 리시를 알게 된다. 무명의 카버를 알아본 시대의 편집자 고든 리시는 책 출간을 제안한다.
열린 결말과 닫힌 결말의 소설 방식을 두고 격렬하게 의견을 나누던 두 사람은 카버가 고든 리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열린 결말의 소설들로 책을 출간하기로 한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업성을 무기로 편집자의 의견이 이토록 중요한 문제였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책의 성공이 무언가를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레이먼드 카버가 쓰려고 했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걱정 안 해도 된다. 발간된 책이 있으니까.
당시 미국 중상층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정서를 간파한 고든 리시의 의도에 맞게 출간된 이 책은 대성공을 거두고 레이먼드 카버를 단편소설의 거장 반열에 고르게 만든다. 그렇지만, 카버는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카버와 고든 리시는 결별한다. 1988년 카버가 암으로 50세의 나이에 사망한 후, 그의 두 번째 부인이 카버의 원본을 재구성해서 레이먼드 카버 버전으로 『풋내기들』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첫댓글 지극히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에 대한 의견.
상업성과 문학성에 대한 견해.
이런 문제들이 새삼 떠오르게 하는 글이네요.
출판사와 저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때론 침묵해야 할 때도 있어요.
편집자의 의견에 따라 발행된 책이 큰 성공을 거둬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작가가 회생할 수 있었으니, 잘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작가의 고유한 저작이 침해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해 봤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끝내 작가의 의도대로 또 다른 책을 펴낸 유가족들의 생각도 이해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