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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수선루,영모정, 태고정
촉석루(矗石樓)와 영모정
정면 5칸 측면 4칸의 촉석루(矗石樓)는 1241년 창건되어 중건과 중수를 거듭했다.
명루 중의 명루
촉석루는 원래 용두사(龍頭寺)라는 절의 누문(樓門)이었는데 고려 고종 28년 진주 목사 김지대(金之岱, 1190~1266)가 누각으로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규모가 크고 건물이 아름다우며 주변 풍경도 절경이어서 처음부터 명루(名樓)로 꼽혔다. 즉 경복궁 경회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으로 불리고, 부벽루와 밀양의 영남루, 삼척의 죽서루와 함께 ‘한국의 4대 누각’, 영남루와 남원의 광한루와 함께 ‘남도의 3대 누각’, 영남루와 안동 영호루와 함께 ‘영남의 3대 누각’ 등으로 꼽히고 있다.
그 이름에 대해서는 하륜이 〈촉석루기〉에서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의 기문을 인용해 “강 가운데 돌이 쫑긋쫑긋 나와 있어 이름을 촉석이라 했다.”고 전하고 촉석루를 짓고 중수한 이들이 다 과거에 장원(壯元)한 사람들이어서 ‘장원루’라는 별칭도 있다고 전한다. 이후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지휘소로 남장대(南將臺)라는 이름을 겸했고 과거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진주 기생들이 논개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도 활용했다.
촉석루는 초건 이후 8차례의 중수와 재건을 거쳤는데 임진왜란과 6·25 전쟁 시에는 완전히 소실되었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전면과 남강 쪽 후면에 촉석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누 안쪽에는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과 ‘남장대’라 쓰인 대자(大字) 현판이 걸려 있다. 고려 이후 여러 선비의 시와 기문이 새겨진 현판도 걸려 있다.
정면 5칸인 촉석루의 가로 방향에는 모두 6개의 기둥이 서 있다. 그 처음과 끝 기둥에는 주련이 두 장 붙어 있어 8행의 율시 한 편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晋陽城外水東流 진양성 바깥 강물은 동으로 흐르고
叢竹芳蘭綠映洲 울창한 대숲 아름다운 풀은 모래섬에 푸르다.
天地報君三壯士 이 세상엔 충성 다한 삼장사가 있고
江山留客一高樓 강산엔 손을 머물게 하는 높은 누각 있구나.
歌屛日照潛蛟舞 따뜻한 날 병풍 치고 노래하니 잠자던 교룡이 춤추고
劒幕霜侵宿鷺愁 병영 막사에 서리 내리니 졸던 가마우지 걱정스럽네.
南望斗邊無戰氣 남으로 북두성 바라보니 전쟁 기운은 없고
將壇茄鼓半春遊 장군단에 피리 북소리 봄을 맞아 노닌다네.
— 신유한 〈촉석루〉
진주성의 풍경과 봄날의 정취를 세밀하게 묘사한 이 시를 쓴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숙종과 영조 대를 살았던 문장가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시절이라 진주성을 한껏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은근한 근심이 애처로이 스미어 있다. 함련에 나오는 삼장사는 진주성 2차 전투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패전하고 남강 물에 몸을 던진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 최경회(崔慶會) 세 장수를 말하는 것이다.
국난을 맞아 분연히 일어서 의병을 지휘하고 마침내 목숨을 던진 이들의 충성심과 촉석루의 대비가 처연한 슬픔을 자아내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촉석루의 상징이 된 논개는 바로 최경회의 여인이었고 최경회의 자결 후 논개는 촉석루에서 벌어진 승전 축하연에 기생으로 가장해 들어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둘러앉은 산 모두가 그림 같은 경치
촉석루를 읊은 시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확연히 다르다. 왜란 이전의 시는 풍경과 인심을 주요 제재로 사용했지만, 전쟁 이후의 작품들은 전쟁의 처참한 기억과 군관민의 충심 그리고 논개의 의로운 죽음 등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촉석루와 임진왜란은 일체적인 정서로 각인된 것이다. 촉석루를 읊은 가장 오래된 시는 누각 들보에 걸려 있는 면재(勉齋) 정을보(鄭乙輔, 1285~1355)의 배율육운(排律六韻)이다.
黃鶴名樓彼一時 이름 높은 황학루도 한때의 일이러니
崔公好事爲留詩 최공도 시 지어 남기기를 좋아하였네.
登臨景物無增損 올라보니 경치는 옛날 같은데
題詠風流有盛衰 시를 읊는 풍류는 성쇠가 있네.
牛壟漁磯秋草沒 소먹이고 낚시하던 언덕엔 가을 풀이 시들고
鶖梁鷺渚夕陽遲 백로와 수리 놀던 물가엔 해가 저무네.
靑山四面皆新畵 둘러앉은 푸른 산 모두 금방 그린 그림인데
紅粉三行唱古詞 분홍으로 치장한 세 행렬은 옛 노래 부르네.
玉笛高飛山月上 옥피리 소리 멀어져가는 산 위에 달이 뜨고
珠簾暮捲嶺雲垂 해 저물어 걷는 주렴에 고갯마루 구름 드리웠네.
倚欄回首乾坤小 난간에 기대어 둘러보니 시야가 좁아
方信吾鄕特地奇 우리 고을 아름다운 모습 확실하게 알겠네.
— 정을보 〈촉석루〉 판상시(《동문선》 제15권)
이 칠언율시는 촉석루가 처음 지어진 시대의 작품인데 지은이는 이 누각을 중국 양자강의 명루(名樓) 황학루(黃鶴樓)에 비견하여 전반부에 최호를 등장시키고 있다. 시 가운데 “옥피리 소리 멀어져 가는”이라는 표현에서도 황학루의 이미지를 겹쳐 준다. 촉석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의 황학루가 세워진 원인 설화를 암시한 것이다.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 한 여인이 경치 좋은 곳에 주막을 열었다. 하루는 어떤 노인이 찾아와 술을 마셨는데 돈이 없었다. 노인은 몇 달을 그렇게 외상술만 먹었는데 인심이 후덕한 여인은 불평하지 않았다. 하루는 노인이 벽에다 귤껍질로 학을 한 마리 그려놓고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와서 술을 마시면 그림 속의 학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래서 여인은 술장사가 잘 되어 돈을 많이 벌었는데 노인이 다시 나타나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 했다. 여인은 그 신선을 기리기 위해 주막 자리에 정자를 짓고 황학정(黃鶴亭)이라 했고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뒷날 황학루가 되었다.
정을보의 시는 촉석루를 황학루의 신비한 이야기까지 동원하여 그 아름다움을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촉석루의 풍경을 읊은 고려시대 시로는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 1303~1374)의 작품도 가작(佳作) 중의 가작이다.
登臨偏憶舊遊時 올라서니 생각은 예전에 와 놀던 일
强答江山更覓詩 강산에 대한 인사로 시를 지으려네.
國豈無賢戡世亂 난세를 평정할 인재 나라에 어찌 없으리.
酒能撩我感年衰 술에 휘감기니 나도 이제 늙었구나.
境淸易使塵蹤絶 맑디맑은 이 지경에 속진이 어이 얼씬
席闊何妨舞手垂 넓은 자리는 춤추기에도 아주 좋고
點筆謾成春草句 붓을 들어 시를 쓰니 춘초구를 얻었네.
停杯且唱竹枝詞 잔 멈추고 들으련다 죽지사를 불러라.
妓從坐促爲歡密 자리에 가득한 기생들은 바싹 앉아 정답고
人與時偕欲去遲 사람들은 시절과 함께 얼른 가지 않으려네.
此地高懷眞不世 이 땅의 높은 회포가 진정 속세 아니니
赤城玄圃未全奇 적성과 현포보다도 기특하다 하리라.
— 백문보 〈촉석루 시에 차운하다〉 《담암일집》 제1권
정을보의 시가 그렇듯 백문보의 시도 촉석루의 아름다움과 누각에서 즐기는 풍류의 즐거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백문보는 젊은 시절에 촉석루를 다녀갔고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찾아왔다.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며 속진의 번뇌를 씻어내고자 시를 쓰고 술을 마시며 기생들의 춤과 노래도 곁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촉석루에서 익어가는 풍류는 그냥 마시고 즐기는 풍류가 아니라 ‘춘초구’를 얻는 시창작의 즐거움이니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의 세계인 적성과 현포가 부럽지 않은 것이다. 춘초구란 깜짝 놀랄 만한 시구를 말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한 구절’ 말이다.
송나라의 사혜련(謝蕙連, 397~433)은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그래서 집안의 형뻘 되는 사영운(謝靈運, 385~433)에게 늘 칭찬을 받았다. 문장과 시가 뛰어난 이 두 형제를 사람들은 ‘대소사(大小謝)’라 불렀다.
어느 때 형인 사영운이 시를 짓다가 맞춤한 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아 온종일 끙끙댔지만 소용없었다. 그날 밤 꿈에 문득 동생인 사혜련을 만나 ‘못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는 한 구절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 구절은 사영운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영운이 항상 “이 구절에는 신공(神功)이 들어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興廢相尋直待今 흥폐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러
層巓高閣半空臨 층층바위 절벽위에 높은 누가 하늘에 닿았네.
山從野外連還斷 들 넘어 산줄기 끊어질 듯 이어 돌고
江到樓前闊復深 누각 앞에 이른 강물 깊고 넓구나.
白雪陽春仙妓唱 백설 양춘은 기생들이 즐겨 부르고
光風霽月使君心 광풍제월은 군자의 심사로다.
當時古事無認識 그때의 옛일을 뉘라서 알리오만
倦客歸來空獨吟 나그네 돌아와 홀로 시를 읊네.
— 정이오 〈촉석루〉 판상시
정을보의 증손자인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1354~1440)의 시다. 촉석루에서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 인간사의 덧없음을 절절히 느끼는 선비의 고적한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전반에서는 촉석루의 풍경을 보이고 후반부에는 인간 세상의 무상한 도리를 일깨우는 내용이다. 기생들의 풍류도 뜻을 지닌 사나이의 호연지기도 시간을 따라 덧없이 흘러가 버린다. 그러므로 미련에서는 스스로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호소한다.
누각의 흥폐(興廢)로써 인심과 세도(世道)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세도가 오르고 내림에 따라 인심의 애락(哀樂) 또한 같지 않으니 누각의 흥폐도 이를 따르게 된다. 한 누각의 흥폐로써 한 고을의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인심으로써 한 시대의 세상도리를 알 수 있다. — 하륜 〈촉석루기〉 《호정집》
하륜(河崙, 1347~1416)은 촉석루의 내력을 기록한 기문에서 누각은 한 시대의 성쇠와 인심을 비춰주는 거울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을 실은 문장은 청풍의 〈한벽루기〉에서도 그대로 차용되고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과 상처
고려 시대 촉석루에서 창작된 시들은 자연에 대한 외경적 묘사와 인생에 대한 관조적 심상으로 장식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뒤 촉석루에서 지어진 시들은 처참한 전쟁의 상흔과 진주성 전투의 영웅들에 대한 찬탄이 주를 이룬다.
龍歲兵焚捲八區 임진년 난리가 조선팔도 휩쓸 적에
魚殃最慘此城樓 재앙은 이 성루가 가장 처참했다오.
石非可轉仍成矗 구르지 못하는 돌은 촉석이 되어 섰건만
江亦何心自在流 그래도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만 가네.
起廢神將人共力 신도 사람을 도와 일으켜 주려 하는데
凌虛天與地同浮 침범을 당한 이 세상 온통 들떠만 있네.
須知幕府經營手 모름지기 알 것 같은 이 고을 다스리던 솜씨
壯麗非徒鎭一州 장하고도 훌륭한데 어찌 한 고을만 지키랴.
— 정문부 〈촉석루〉 판상시
정문부(鄭文孚, 1565~1624)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충신이다. 이 시는 전쟁이 끝난 후에 지은 것이다. 진주성이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고 마침내 피폐될 대로 피폐한 곳이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기에 촉석 아래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보는 마음이 애절하기만 하다.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려는 민생의 노력은 분주하고, 진주성의 영웅들은 그 의로운 죽음으로 온 나라를 지킨 것이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직접 의병을 일으켜 지휘했던 정문부의 입장에서 진주성을 답사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처연하고 절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도 역사의 아픔도 시간이 지나가면 아물게 된다. 그 아픔의 뿌리까지 아물지는 못해도 인간에게 부여된 망각의 장치는 지난날의 아픔보다는 새로운 날의 희망에 더 빨리 젖어들게 한다.
戰場無恙只名區 전쟁에도 아름다운 곳 그대로 남아
人世虧成百尺樓 세상 어지러워도 백 척 다락을 다시 지었네.
納納乾坤遙峀立 산들은 멀리 봉우리가 솟아있고
溶溶今古大江流 예나 지금이나 남강 물 넘쳐흐르네.
船橫官渡隨緣在 배들은 나루터에 비스듬히 메어 있고
鷗占煙波得意浮 아지랑이 속에 흰 갈매기 날려고 하는구나.
景物有餘佳況少 경치 좋아 좋은 일 어찌 없으랴
詩情寥落晉康州 시정이야 진주가 제일이리라.
— 강대수 〈촉석루〉 판상시
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에 출생한 강대수(姜大遂, 1591~1658)의 경우 전쟁 후의 피폐한 세상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51세에 진주 목사를 지냈는데 아마 이 시는 그때 지어진 듯하다.
그 처참한 전쟁을 겪고도 아름다운 촉석루는 다시 지어져(1618년 병마절도사 남이홍이 전보다 더 큰 규모로 중건함) 옛 멋을 되살렸으니 그 주변 풍경 또한 되살아났다. 그래서 시인은 촉석루의 은성하던 과거도 되살아났음을 기꺼워하고 있다. 촉석루에 판상된 하진(河溍, 1597~1658)의 시에서도 그러한 정서가 엿보인다. 전후의 시인들은 의연히 일어서 새로운 삶을 가꾸어 가는 동시대인들을 위해 하염없는 찬사를 보내며 진주 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다.
滿目兵塵暗九區 전쟁의 어둠이 온 나라에 가득하고
一聲長笛獨憑樓 홀로 누에 기대어 피리 분다네.
孤城返照紅將斂 외진 성채에 저녁 놀 잦아지고
近市靑嵐翠欲浮 저잣거리 아지랑이 걷히어 가네.
富貴百年雲北去 부귀 백년이야 구름이고
廢興千古水東流 오랜 세월 흥폐에도 물은 동으로 흐르네.
當時冠蓋今蕭索 당시의 명관들은 어디에 있는가?
誰道人才半在州 누가 나라 인재 반이 진주라 했는가.
— 하진 〈촉석루유감〉 판상시
논개의 영정
논개가 왜장을 안고 떨어진 의암(義岩).
논개, 꽃잎을 입에 물고
촉석루가 명루임엔 틀림없지만, 그 이름을 천하에 알린 배경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의 정점에 논개가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의 영웅은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장수들이었지만, 성이 함락되고 민생이 농락당하던 시간 속의 영웅은 논개였다.
촉석루에서 남강 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논개를 기리는 비각과 의암(義岩)이 있다. 의암은 논개가 적장을 유인해 함께 춤을 추다가 물에 빠져 순절한 현장이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는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채록하여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음으로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의암과 ‘의기논개지문’이란 현판이 걸린 비석은 물가에 있지만,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의기사(義妓祠)는 촉석루 오른쪽 지수문(指水門) 안에 있다. ‘지수’란 물에 뜻을 두었다는 의미다. 의기사에 앞쪽 벽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의기사기〉 현판이 걸려 있다. 정약용은 의기사의 기문을 지었을 뿐 아니라 시도 몇 수 남겼다.
蠻海東瞻日月多 동쪽의 왜놈 바다 노려본 지 얼마런고
朱樓迢遞枕山阿 붉은 누각 아스라이 산허리를 베고 있네.
花潭舊照佳人舞 연꽃 못은 지난날 미인의 춤 비추었고
畫棟長留壯士歌 단청한 기둥 이제껏 장사의 노래 남았다오.
戰地春風回艸木 전쟁터의 봄바람 초목 끝에 감돌고
荒城夜雨漲煙波 낡은 성의 밤비에 강 물결이 불어난다.
只今遺廟英靈在 오늘날 남은 사당 영령이 서려 있어
銀燭三更酹酒過 촛불 켜고 삼경 밤술 올리고 지나가네.— 정약용 〈촉석루에서 옛일을 회상하며〉(《다산시문집》 제1권)
정약용처럼 술 한 잔을 올릴 상황은 아니었지만 영정 앞에 조용히 손 모아 합장하고 나오는데, 전투복을 입은 육군사관생도들 10여 명이 의기사 안으로 들어왔다. 묘한 감동이 마음속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다.
강 건너 전망대에서 가지고 간 정동주의 장편서사시 《논개》를 펼쳐 읽는 동안에도 그 묘한 감동은 지워지지 않았다.
입술엔 꽃잎을 물고
가슴엔 칼 지닌 채,
입술에 문 꽃잎으로 악(惡)의 요정 유혹하여
가슴에 지닌 은장도로 악의 가슴 찌른 후에
그 님 혼은
진주 남강 푸른 물살에
씻기우는 바위 하나 되어 앉았어라.
— 정동주 《논개》 부분
촉석루 (경남 문화재자료 제 8호)
안중식이 1913년에 그린 촉석루
1910년대의 촉석루
체성위에 여장이 없어서 아래층 기둥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과 다른 모습이다
박경리선생의 진주여고시절 사진--박경리문학관
1930년대 진추 촉석루 축제의 날
1930년대 진주 촉석루
진주의 남강 바위 벼랑 위에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명칭을 받고 있다. 촉석루는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창건해 일곱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로 장원루라고도 불리웠다. 전란이 발생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촉석루를 포함하고 있는 진주성은 석성(둘레 1천760m)으로 축조됐고,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로 토성이던 것을 1379년(고려 우왕 5년)에 석성으로 수축했다.
조서윤 진주시 문화해설사
조서윤 진주시 문화해설사로부터 촉석루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본다.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불리웠다. 진주성은 400여 년 전인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큰 전투가 있었던 역사의 현장으로,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군을 대파한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다.
왜군과의 2차전쟁 때인 1593년 6월에는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 남강가 바위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영남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이다. 흔히 평양의 부벽루와 비교해 북쪽을 부벽루, 남쪽을 촉석루라 불리울 정도로 아름답다.
6.25 한국전쟁 전에는 촉석루가 국보였으나 전쟁 중 폭격으로 불타고 말았다. 1960년 5월 시민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진주고적보존회를 통해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진주성은 '일본군이 임진년 전쟁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고 일본 역사책에 나올 정도로 당시 왜군이 참패했던 진주성대첩으로 유명하다. 또 진주성 내 촉석루는 충의를 다한 역사적 인물로 대표적인 논개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충의와 공의현장으로 가치가 높은 촉석루는 당초에는 국보였으나 현재 문화재 등급 중에서도 가장 낮은 지방문화재자료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촉석루가 문화재자료로 등급이 하향된 것은 1950년 9월, 6.25 전쟁이 한창일 무렵 비행기 폭격으로 파괴돼 원형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현재 촉석루는 경남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나 국보급으로 승격해야 한다. 6.25때 전부 훼손된 줄 알았으나 대석(받침돌), 돌계단 등의 원형 부재를 확인했으며, 국보 환원과 보물 지정을 가로막았던 설계도(일제강점기 때 설계도 일부)도 찾아냈다.
촉석루 옛 설계도를 비교한 결과, 보수된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30개 기둥 역시 설계도대로 완공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촉석루 중건 당시인 1957년 1월 19일 제6회 국무회의록 문서에도 '촉석루 보수(補修) 관계 보고'라고 해 보수만 진행됐던 촉석루에 대한 지금의 등급은 문화재의 원래 가치보다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조서윤 해설사는 "화재로 손실됐던 국보 1호 숭례문는 재건립된 후에도 국보를 유지하고 있다"며 "촉석루도 국보 또는 보물로서의 가치는 인정받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 해설사는 논개(論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싸움에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쳐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에서 패배한 왜군이 1593년 6월 12만여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이때 진주성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성을 지키던 민,관,군 7만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촉석루 절벽아래의 의암바위로 유혹해 그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의기이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할 때 팔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가락지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 교각상부에 논개 충절의 상징물로서 만들어져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와 같이 한목숨을 던져 먼저 간 성민들의 원수를 갚은 의로운 기개를 가진 장한 여인은 우리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촉석루는 이러한 논개의 정신은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 전북 제일의 정자 수선루(睡仙樓)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1984.04.01 지정)
수선루는 월운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약 1km 남짓 거슬러 올라간 천변의 암굴에 위치하고 있으며, 숙종 12년(1686년)에 연안 송씨 4형제 진유, 명유, 철유, 서유가 선대의 덕을 추모하고 도의를 연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이들 4형제는 우애가 두텁고 학문이 높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80세가 넘어서도 조석으로 이 정자를 오르내리며 바둑도 두고 시도 읊는 풍도가 옛날 4호(四晧)의 네 신선이 놀았다는 고사와 흡사하다, 하여 목사 최철옹이 수선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고종 21년 (1884)에 후손 송석노가 중수 하였고, 고종 25년(1888)에는 연재 송병선 등이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변 암굴에 위치한 누각 수선루(睡仙樓)는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월운마을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약 1km 남짓 거슬러 올라간 천변의 암굴에 위치해 있다. 바위틈에 절묘하게 자리하고 있는 수선루는 조선 숙종 12년(1686)에 연안송씨 진유(眞儒), 명유(明儒), 철유(哲儒), 서유(瑞儒) 네 형제가 선대의 덕을 추모하고 도의를 연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崔啓翁)이 이들 사형제가 갈건포의(葛巾布衣)하며, 팔순이 되도록 조석으로 다니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 진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하여 협서성의 상산(商山)에 은거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용리선생(用里先生), 기리수(綺里秀) 등의 기상과 같다하여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자유로운 모습을 담고 있는 최고의 정자 2층에서 내려다보면 섬진강 줄기가 눈에 들어오며 아늑한 자연에 감싸인 수선루는 위층과 아래층이 엇비스듬하게 맞물린 자유로운 모습에서 전북지역 최고의 정자로 손꼽히기도 한다. 고종21년(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노(宋錫魯)가 중수하였고 1888년 연재 송병선(宋秉璿)등이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안군지]에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으며 수선루 사변(四邊)에는 '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 정자는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이층으로 세워져 있고 이층 중앙에 '睡仙樓'라는 현판이 있고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이 수선루는 지방유형문화재16호로 지정되었다. 이 누각은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절벽을 흘러내리는 물이 비단폭 같으며, 특히 봄에는 봄바람이 좋고 전망이 좋아 만물이 생동하는 것을 빠짐없이 볼 수 있다. 또한 여름에는 바람이 시원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제격이며 겨울에는 눈 덮인 산천경개가 일품이다.
수선루 편액
송병선 수선루중수기
수선루(睡仙樓)는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좌포 쪽으로 다리를 건너 물길 따라가다 보면 연안송씨의 제각인 구산재(龜山齋)가 나온다. 이곳에서 산길로 따라가면 100여미터 지점에 있는데, 절벽의 바위 틈새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지은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수선루는 1975년 지방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암벽 속의 2층으로 세워진 정자로, 숙종12년(1686)에 연안송씨 진유(眞儒) 명유(明儒) 철유(哲儒) 서유(瑞儒) 등 사형제가 건립하여 우애를 돈독히 하며 노년을 즐겨 보내던 고적이다. 수선루(睡仙樓)라는 이름은 주위의 경관이 빼어나고 신선이 노는 것과 흡사하다 하여 부사 최계옹(崔啓翁)이 건립했다 한다.
그 후 고종 21년(1888)에 그들의 후손 석노(錫魯)가 선대의 고적이 묻혀질 것을 염려하여 중수 하였고, 이에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이 중수기와 더불어 '송씨수선루'(宋氏睡仙樓)라는 다섯 글자가 암벽에 새겼고, 아울러 처사 소응천(處士 蘇應天)이 지은 시가 전해져 내오고 있다.
이곳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고 암벽 내부의 벽과 천정에도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편액으로는 송원의 행초서(行草書)편액과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예서편액 또 송원의 수선루(睡僊樓) 행서 편액 등 3점이 있으며, 송내희(宋來熙) 등이 쓴 누정기(樓亭記) 편액 등은 개성이 독특하여 서체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에 처사 소응천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仙鄕自與睡鄕連 신선의 고향이 수향과 연이어 있어
一枕三千六百年 한 번 잠들면 삼천하고도 육백년이라네.
漁笛數聲蝴蝶散 고기잡이 젓대 소리에 나비의 꿈 흩어지고
臥看東海變桑田 동해에 누운 채 뽕밭이 바다 되는 걸 보노라. (오초 역)
수선루 입구 구산재에는 박성양이 글을 짓고 유재 송기면이 쓴 퇴휴재 송보산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송보산은 연안송씨로 춘추에 조예가 깊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송춘추로 불렀으며 월광사에 배향되어 있다. 그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한헌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과는 친하게 지냈다. 그는 세종 무진년에 진사에 장원하고 이후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가선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라 도승지와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구산사에는 강암 송성룡이 쓴 구산재 편액과 송재성이 쓴 구산사 편액이 있으며, 경찰서장을 했던 거암 김봉관이 쓴 구암서원편액도 감상할 수 있다.
수선루 주변에는 마이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는 탑사와 은수사, 금당사가 있으며, 민족지도자들의 영혼이 모여 있는 이산묘를 참배하면 좋은 답사가 될 것이다. 또 마령면에는 강정모퉁이에 있는 쌍벽정을 비롯, 형남정을 둘러본다면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 같다. [출처]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
수선루 평면도
수선루라는 이름은 목사 최계옹崔啓翁(1654∼?)이 지었다고 하는데 이 이름을 지은 때는 1710년경이 아닐까 한다. 남원출신의 최계옹은 1710년 영의정 신완申琓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고 하니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가 아니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때 이곳에 들러 쉬면서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자료나 <한국의 건축문화재>에서는 수선루가 두 번 중수했다고 하고 있다. 첫 번째는 1884년에 5세손인 송석노宋錫魯가 했고 두 번째는 1888년 송병선宋秉璿이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선 수선루를 지은 송씨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그러나 두 번째 중수했다는 송병선은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연안 송씨 집안의 건물을 은진 송씨가 와서 중수했다는 것도 그렇고 1884년에 중수한 것을 4년 만에 다시 중수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 수선루에는 송병선이 썼다는 중수기문重修記文에 대한 해석본이 걸려있다. 그 중수기문에는 “...그러나 해가 오래되자 퇴락하였는데 후손 휘 석노(錫魯)가 선제 사적이 민몰(泯沒)할까 두려워하여 중수하여 새롭게 하니, 이에 산은 더 수려하고 물은 더욱 맑아져...”라고 되어있다. 즉 이 중수기는 중수한 후 기문을 올리고 4년 뒤 다시 송병선에게 중수기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1888년은 중수한 해가 아니라 송병선이 중수기를 쓴 해인 것이다.
수선루는 자연동굴에 지은 집이다. 이런 형식의 집으로는 이 수선루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동굴이 깊지도 높지도 않아 건물규모는 작다. 1층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마루 아래를 지나야 누마루에 올라가게 되어있다. 문은 그런대로 높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허리를 완전히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낮다.
문득 고고한 갓 쓴 분들이 어떻게 지나갔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수선루는 방과 누마루가 각각 한 칸인 집이다. 누마루도 높지 않아 키가 큰 사람은 도리에 머리가 닿는다. 누마루도 넓지 않아 대여섯 명이 앉기에도 좁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방은 앞에 퇴를 두어 더 좁다. 키가 큰 사람은 눕기조차 쉽지 않은 크기이다. 게다가 온돌을 들이기 위해 바닥을 높이고 보니 안에서는 서있는 것이 부담스럽다. 전면에 창은 그야말로 창일뿐 드나드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다.
수선로 누마루
수선루 후면
이렇게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은 건물이 들어앉은 곳의 조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좁은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지만 일단 내가 큰 편이고 당시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보다는 작았으니 그런대로 지낼 만은 하였을 것이다.
건물을 계획한 분은 지형에 대해 매우 깊게 살펴본 것 같다. 아주 간단한 건물이지만 배치가 지형과 매우 잘 맞는다. 가장 낮은 부분에 출입문을 내고 출입문 좌우의 자연암반사이에 누마루를 걸었다. 좌측에 있는 방의 바닥도 암반의 높이에 맞췄다. 또한 좌우에 담을 쌓아 외부와 구획을 지었다. 이렇게 하고보니 공간의 변화가 다양하여 작지만 아기자기한 건물이 되었다.
수선루는 매우 화려한 정자이다. 이익공에 단청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벽이 있는 곳은 후면만 제외하고는 모두 벽화로 치장했다. 그러나 그림 솜씨나 그린 기법이 최근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벽화가 있어 다시 벽화를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수준이 신선이 노닌다는 ‘수선루’라는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수준이다.
동굴 안쪽 바위에 붉은 색으로 글을 새겨 놓았다. 우측에는 이 누각을 지은 사형제의 이름인 ‘眞儒, 明儒, 哲儒, 瑞儒’를, 누마루로 올라오는 바로 앞에는 ‘宋氏 睡仙樓’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이 동굴 안에는 석간수가 나오고 있다. 지금도 졸졸 흐르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는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다. 예전에는 이 석간수로 차를 끓여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후면의 석간수
누정건축은 밖에서 건물을 바라다보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 누정건축은 풍광을 즐기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정건축을 이해하려면 안에서 바라다보는 풍광에 중점을 두고 봐야 한다.
내가 수선루를 찾은 때는 6월로서 녹음이 우거져 있어 앞의 풍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수선루가 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과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있는 산이 어우러져 있는 풍광이 사뭇 수려하다. 처음 수선루를 지었을 때는 나무들이 지금처럼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풍광이 지금보다 장쾌했을 것이다.
수선루는 자연이 준 선물에 사람의 지혜를 살짝 덧붙여 지금과 같은 아름다움을 만들었다. 이곳에 동굴이 없었다면 수선루는 없었다. 그러나 수선루를 다 돌아본 후의 느낌은 이곳이 기도처로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고려시대, 아니 조선 중기까지는 이곳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처로 쓰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이전만 해도 스님들의 수도처였을 것이고, 그 후에는 많은 아낙네가 이곳에서 촛불을 켜놓고 치성을 드렸을 것이다. 그러던 곳이 어느 날 갑자기 송씨 가문의 놀이터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도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으로 ‘수선루睡仙樓’라고 했다.
송씨 가문 양반들이 신선인 냥 노니는 동안 아낙들은 어디에서 치성을 드렸을까.
수선루 정면
수선루 내부 벽화
전북 제일의 정자라고 불리우는 수선루는 섬진강 천변의 산기슭 암굴에 세워져 있다. 이 정자는 숙종12년(1686년)에 연안송씨 사형제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등이 건립한 것으로 고종21년(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고 1888년 연재 송병선 등이 재중수했다고 전한다.
'진안군지'에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으며 수선루 사변(四邊)에는 '연안송씨수선루통문(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사형제가 갈건포의 하며, 팔순이 되도록 조석으로 다니며 풍류함이 진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해 협서성의 상산에 은거한 동원공, 하황공, 용리선생, 기리수 등의 기상과 같다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자연암굴을 이용해 이층으로 세워진 수선루는 이층 중앙에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있고 1층의 문을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특히 동굴속에 지어진 것으로 희귀한 정자로도 불리면서 전북제일의 정자라는 명칭을 받고 있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산57)
# 너와를 사용한 영모정(永慕亭)
영모정
영모정은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6년(1869)에 세워진 것이다.
전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너와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정자 아래부분 네 기둥에는 거북머리 모양의 원형주춧돌을 사용하고 있고 원형주춧돌을 이용하고 있다.
정면에 있는 4개의 기둥(평주)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세워져 다른 것 보다 1m정도 더 내려와있다.
누정의 남쪽내부 중앙에는 '영모정(永慕亭)'과는 다르게 '영벽루(永碧樓)'라고 쓰여진 현판과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이 지은 상량문이 걸려 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676 )
# 수몰의 역사 간직한 태고정
태고정
태고정은 용담면 소재지 서북쪽 주천으로 향하는 도로의 남쪽 언덕, 주자천변의 절벽위에 잇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 1530)에 의하면 당초 태고정이 있은 자리엔 이미 15세기말경에 현령 조정이 지은 이락정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현종7년(1666)에 당시의 현령 홍석이 크게 고쳐 짓고 이름도 태고정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홍석은 현종 5년에 용담 향교를 개축하고 삼천서원을 창건했다.
1911년 태고정은 일본의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국가재산으로 강제 몰수 공매 처분 되었는데 그때 송림리의 임소환이 250원에 구입해 용담군의 공유물로 정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태고정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춘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기와지붕의 누각으로 송준길(1606~1672)이 쓴 태고정(太古亭)의 현판과 송시열)이 쓴 '용담현태고정기(龍潭縣太古亭記)'의 현판이 있고, '태고정중수찬조인방명기(太古亭重修贊助人芳名記)' '용담팔경(龍潭八景)'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전북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13-14)
[출처] 김병학 충북일보 기자 [충북 아름다움 자태와 기교] / 충북일보
/김병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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