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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如來無碍行
佛子야 如來應正等覺이 住無礙行하야 無有住處나 而能普爲一切衆生하사 示現所行하야 令其見已에 出過一切諸障礙道하나니 佛子야 譬如金翅鳥王이 飛行虛空에 廻翔不去하야 以淸淨眼으로 觀察海內諸龍宮殿하고 奮勇猛力하야 以左右翅로 鼓揚海水하야 悉令兩闢하고 知龍男女의 命將盡者하야 而搏取之인달하야 如來應正等覺金翅鳥王도 亦復如是하사 住無礙行하야 以淨佛眼으로 觀察法界諸宮殿中一切衆生하사 若曾種善根하야 已成熟者면 如來가 奮勇猛十力하사 以止觀兩翅로 鼓揚生死大愛水海하사 使其兩闢하고 而撮取之하야 置佛法中하야 令斷一切妄想戲論하고 安住如來無分別無礙行이니라
佛子야 譬如日月이 獨無等侶하고 周行虛空하야 利益衆生이나 不作是念호대 我從何來하야 而至何所인달하야 諸佛如來도 亦復如是하사 性本寂滅하야 無有分別이나 示現遊行一切法界하사 爲欲饒益諸衆生故로 作諸佛事하야 無有休息호대 不生如是戲論分別하야 我從彼來하야 而向彼去라하나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以如是等無量方便과 無量性相으로 知見如來應正等覺所行之行이니라
“불자여, 여래 응공 정등각이 걸림 없는 행에 머물러서는 머물 곳이 없지마는 널리 일체 중생을 위하여 행할 일을 보여서 그들로 보고 나서는 온갖 장애되는 길을 벗어나게 하느니라.
불자여, 마치 금시조왕(金翅鳥王)이 허공에 떠서 돌아다니면서 청정한 눈으로 바다 속 용왕들의 궁전을 살펴보고 용맹한 힘으로 좌우의 날개를 뽐내며 바닷물을 쳐서 두 쪽으로 헤치고 암용과 수용의 목숨이 다한 것을 골라서 잡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여래 응공 정등각의 금시조왕도 또한 그와 같아서 걸림 없는 행에 머물러 있으면서 청정한 부처님의 눈으로 법계의 모든 궁전 안에 있는 일체 중생을 살펴보고 만약 미리 착한 뿌리를 심어 성숙하였거든 여래가 용맹한 열 가지 힘을 떨치어 지(止)와 관(觀)의 두 날개로 나고 죽는 큰 애욕의 바닷물을 쳐서 두 쪽으로 헤치고 들어다가 불법 가운데 두어 일체 허망한 생각과 부질없는 말을 끊어 버리게 하고 여래의 분별없고 걸림 없는 행에 편안히 머물게 하느니라.
불자여, 비유하면 마치 해와 달이 짝이 없어 홀로 허공을 돌면서 중생을 이익하게 하면서도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모든 부처님 여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성품이 본래 고요하고 분별이 없이 모든 법계를 다니면서 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불사를 쉬지 않고 지으면서도 그렇게 희롱거리로 분별하여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하여 간다.’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방편과 한량없는 성품과 형상으로써 여래 응공 정등각의 행하시는 행을 알고 보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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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무애행(如來無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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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여래응정등각(如來應正等覺)이 : 여래 응공 정등각이
주무애행(住無礙行)하야 : 걸림이 없는 행에 머물러서
무유주처(無有住處)나 : 머물 곳이 없지만
이능보위일체중생(而能普爲一切衆生)하사 : 그러나 능히 널리 위한다. 두루 일체 중생을 위해서
시현소행(示現所行)하야 : 행할 바의 일을 나타내어서
영기견이(令其見已)에 : 그들로 하여금
출과일체제장애도(出過一切諸障礙道)하나니: 나타내는 행을 딱 보게 하고는 어디로 나아가게 하느냐?
일체제장애도에서 출과하게 한다. 확실히 벗어나게 해준다.
보살문명품에 원효스님이 잘 인용하시는 현수보살의 게송이 나온다.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
일체 걸림이 없는 무애인은 바로 부처님을 상징한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삼세제불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다, 그런 게송이 이 대목에 해당되겠다.
보살문명품에 현수보살의 게송 일도장이라고 나오는 것,업과심심(業果甚深)하고, 교화(敎化)가 심심(甚深)하고, 연기(緣起)가 심심(甚深)하다 하는 대목.
얼마나 좋았으면 원효스님이 삼국유사에 딱 깔아 놓았다.
일체무애인(一切無礙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
모든 부처님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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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여
비여금시조왕(譬如金翅鳥王)이 : 마치 금시조왕이
비행허공(飛行虛空)에 : 허공을 날면서
회상불거(廻翔不去)하야 : 가지 않으면서 빙빙 돌면서, 솔개가 높이 떠서 뱅뱅 도는 것은 무엇인가? 먹이를 노리는 것이잖은가.
이 대목은 세주묘엄품 가루라왕을 할 때 이 대목이 나온다. 철위산 꼭대기에서 가루라왕이 일륜속질가루라왕이라고 가루라왕 중에 넘버원이 있잖은가.
태양이 확 뜨는 것처럼 속질 빠르게 쏜살같이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는 가루라왕이다.
파도에 고기를 한 마리 잡아서 바다가 갈라졌다가 물이 덮치기도 전에 철위산 꼭대기로 날아온다는 새 있잖은가.
그 이야기가 가루라왕하고 똑같은데, 입법계품 미륵보살장에는 그 대목이 이렇게 나온다.
‘장대교망(張大敎網) 녹인천지어(漉人天之魚)라’
큰 그물을 펼쳐서 인천의 고기를 다 건진다 하는 내용이다.
여기도 금시조가 바다의 용왕 궁전을 살펴보고 건질만하고 죽을 만할 때 근기가 익은 중생들을 건져내는 내용이다.
용은 또 금시조한테 꼼짝을 못하는 가보다, 재수없이. 용자가 훌륭한 건데.
금시조가 용을 잡아 먹고 살잖는가.
여기서는 반대로 금시조가 용을 구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청정안(以淸淨眼)으로 : 청정한 눈으로 집착 없는 눈으로
관찰해내제용궁전(觀察海內諸龍宮殿)하고 : 관찰한다. 모든 바다 궁전을 잘 관찰해보고는
분용맹력(奮勇猛力)하야 : 분용맹력으로 쏜살같이 그렇게 일륜속질이라고 나온다. 태양이 확 비추면 어둠이 싹 가셔버리지 않는가. 일륜속질가루라왕 하는 것처럼.
용맹한 힘으로, 용맹한 힘이라고 하는 것은 쪼잔하게 요리 묶이고 저리 묶인 번뇌 수갑 차고 칼 차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좌우 양 날개로, 양날개라고 하는 것은 행원이 있다는 것이다. 행원은 보살의 행과 보살의 원력과 안에 품고 있는 원력과 바깥으로 행하는 행, 보시행, 바라밀행이 여조양익(如鳥兩翼)이라. 양 날개와 같다. 행원은 양익이라 이렇게 이야기한다.
원효스님은 자리이타(自利利他)는 여조양익(如鳥兩翼)이라 하기도 하지만 화엄경에서는 행원을 양 날개라고 이야기한다.
이좌우시(以左右翅)로 : 행과 원력으로
고양해수(鼓揚海水)하야 : 바닷물을 쳐서
실령양벽(悉令兩闢)하고 : 실령양벽이라. 두 쪽을 헤치고, 바닷물을 쳐서 착 헤치고는
지용남녀(知龍男女)의 : 남녀 용의 암컷 수컷이
명장진자(命將盡者)하야 : 명장진자하여 남녀노소 안 가리고 암놈이 됐든 수놈이 됐든 딱 꼴까닥 죽을 만한 것을 사로잡아서
이박취지(而搏取之)인달하야 : 골라서 잡아가지고 가느니라.
잡아죽이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생사의 바다에서 건져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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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응정등각금시조왕(如來應正等覺金翅鳥王)도 : 여래응정등각 금시조왕과 같은 부처님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이와 같아서
주무애행(住無礙行)하야 : 걸림이 없는 무애행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정불안(以淨佛眼)으로 : 청정한 부처님의 눈으로
관찰법계제궁전중일체중생(觀察法界諸宮殿中一切衆生)하사 : 법계의 모든 궁전, 사람사람 중생들을 다 살펴보고는, 근기가 딱 맞고
약증종선근(若曾種善根)하야 : 만일 미리 착한 뿌리를 심어
이성숙자(已成熟者)면 : 성숙하였더니
여래(如來)가 : 여래가
분용맹십력(奮勇猛十力)하사 : 용맹한 열 가지 힘을 빌려서
이지관양시(以止觀兩翅)로 : 여기는 지관이라고 해놓았다. 지관의 양 날개로 사마타와 비파사나의 두 날개로 나고 죽는
고양생사대애수해(鼓揚生死大愛水海)하사 : 애착의 바닷물을 갈라쳐서
사기양벽(使其兩闢)하고 : 두 쪽으로 헤치고는
이촬취지(而撮取之)하야 : 찰취지라 그걸 딱 잡아 끄집어내어서, 중생들을 생사의 물결에서 끄집어 내어서
치불법중(置佛法中)하야 : 불법 가운데 두어서
영단일체망상희론(令斷一切妄想戲論)하고 : 영원히 끊게 한다. 그들로 하여금 끊게 한다. 무엇을 끊게 하는가? 일체의 망상 희론을 끊게 한다. 부질없는 말과 허망한 생각을 싹 끊어버리게 한다. 그래서 어디에?
안주여래무분별무애행(安住如來無分別無礙行)이니라 : 여래의 분별심이 없는 허망한 생각이 0.1%도 없는 무애행에 안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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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비여일월(譬如日月)이 : 비유컨대 마치 해와 달이
독무등려(獨無等侶)하고 : 짝이 없어서 태양이나 해와 달이
주행허공(周行虛空)하야 : 홀로 허공을 돌면서 주행 허공하여
이익중생(利益衆生)이나 : 중생을 이익되게 하되, 남이 찾아오든지 안 찾아오든지 정상이 되면 외롭지 않은가? 그런데 외로움에 떨어져 버리면 중생심이고 외로움을 극복해 버리면 부처심이다.
부작시념(不作是念)호대 : 부작시념호대
아종하래(我從何來)하야 :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아종하래며
이지하소(而至何所)인달하야 :이지하소고,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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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여래(諸佛如來)도 : 제불여래께서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사 : 이와 같아서
성본적멸(性本寂滅)하야 : 성품이 본래 고요해서, 성품이 본래 적멸해서
무유분별(無有分別)이나 : 분별심이 없다. 부처님은 어떤 번뇌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러나
시현유행일체법계(示現遊行一切法界)하사 : 모든 법계에 다니면서 일체법계에 유행하면서
위욕요익제중생고(爲欲饒益諸衆生故)로 : 중생들을 넉넉하게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중생 때문에 부처님이 다니시는 것이다. 부처님 당신이 허공에 갈 일이 없다.
작제불사(作諸佛事)하야 : 불사를
무유휴식(無有休息)호대 : 쉬지 않고 지으면서 작재불사 무유휴식이라, 쉬지 않고
불생여시희론분별(不生如是戲論分別)하야 : 내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희론 허망한 이론이나 분별심을 내지 아니하고, 무슨 내용이냐?
아종피래(我從彼來)하야 : 내가 어디서 왔다가
이향피거(而向彼去)라하나니 : 어디로 가느냐, 최희준의 하숙생인가 그런 노래가 있잖은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원래 나옹스님의 누이가 지은 게송이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運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내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해 간다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이런 것이 화엄사상을 전형적으로 잘 보여준다.
오고 감이 이미 정리된 것이 부처님의 여래행이다.
중이 어디 가서 ‘살고 싶다’ 이렇게 갔다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바로 떠나버릴 수도 있고, 그냥 슬쩍 갔다가 앉아서 30년을 살아버릴 수도 있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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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이여시등무량방편(應以如是等無量方便)과 : 응당히 이와 같은 등의 무량방편과
무량성상(無量性相)으로 : 무량한 성상으로, 이와 같은 무량한 방편과, 한량없는 안쪽의 모양과 성질과, 바깥의 모양 성품과 형상으로써
지견여래응정등각소행지행(知見如來應正等覺所行之行)이니라 : 알고 봐야 된다. 여래응정등각의 소행지에 행할 바의 행, 부처님의 행을 그렇게 알고 봐야 된다.
(4) 二行의 重頌
가. 眞如行
爾時에 普賢菩薩이 欲重明此義하사 而說頌言하사대
譬如眞如不生滅이라 無有方所無能見인달하야
大饒益者行如是하야 出過三世不可量이로다
法界非界非非界며 非是有量非無量이니
大功德者行亦然하야 非量無量無身故로다
이때에 보현보살이 그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을 설하였습니다.
비유하면 진여는 생하거나 멸하지 않으며
처소도 없으며 볼 수도 없듯이
크게 이익하게 하는 이의 행이 이와 같아서
삼세를 벗어나서 헤아리지 못하도다.
법계는 계(界)도 아니고 계(界) 아님도 아니고
유량(有量)도 아니면서 무량(無量)도 아니니
큰 공덕 있는 이의 행도 또한 그러해
유량과 무량이 아님은 몸이 없는 까닭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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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二行)의 중송(重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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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여행(眞如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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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부처님의 행을 중송으로 다시 한 번 거듭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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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이때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보현보살이
욕중명차의(欲重明此義)하사 :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 게송을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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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진여불생멸(譬如眞如不生滅)이라 :비유컨대 마치 진여는 불생불멸이다. ‘진여는 불생불멸이다’ 라고 하는 것을 심체라고 한다. 심체(心體) 마음의 본체, 심상은 어떠냐?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바다에 보배가 가득하다, 또 중생이 가득하다. 이것이 심상(心相)에 해당한다.
무유방소무능견(無有方所無能見)인달하야 : 있는 것도 없으며 보는 사람도 없다. 무유방소무능견이다.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것을 의상스님께서는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대요익자행여시(大饒益者行如是)하야 : 대요익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다. 여래의 행이 이와 같다.
나 혼자만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그것도 한두 사람의 이익도 아니고 전체가 이익되도록 하기 위한 대요익자는 행이 이와 같다.
그런 사람은 몇 번지에 사는 것이 아니다. 전체 번지에 같이 산다.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허공입니다.’
‘몇 번지입니까?’
‘허공 번지입니다.’
헛번지다.
출과삼세불가량(出過三世不可量)이로다 :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 그 시간들을 불가량이로다. 삼세를 넘어가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으로서 헤아릴 수 없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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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비계비비계(法界非界非非界)며 : 법계는 계도 아니고 비계도 아니다.
비시유량비무량(非是有量非無量)이니 : 유량도 아니고 무량도 아니니
대공덕자행역연(大功德者行亦然)하야 : 대공덕자, 큰 공덕자, 부처님 여래의 행은 어떻게 나오느냐?
비량무량무신고(非量無量無身故)로다 : 비량무량무신고로다. 제일 쉬운 말은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선도 악도 없다. 선악을 따지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선악은 심념이고 심성에서는 선악이 없다. 선성도 악성도 없다.
때로는 악하게 쓰지만 중생의 업에 따라서 악하게 쓸 때도 있고 업의 근기가 무르익으면 선하게 쓸 때도 있다.
이런 것은 자꾸 우리 공부쪽으로 당겨야 되는 대목이다.
나. 無碍行
如鳥飛行億千歲나 前後虛空等無別인달하야
衆劫演說如來行호대 已說未說不可量이로다
金翅在空觀大海하고 闢水搏取龍男女하나니
十力能拔善根人하사 令出有海除衆惑이로다
譬如日月遊虛空에 照臨一切不分別인달하야
世尊周行於法界하사 敎化衆生無動念이로다
예컨대 나는 새가 억천 년을 날아다녀도
앞과 뒤의 허공은 차별이 없듯이
많은 겁 동안 여래의 행 연설하여도
말한 것과 아니한 것 헤아릴 수 없도다.
금시조가 하늘에서 큰 바다를 보고
물 헤치고 수용 암용 잡아가듯이
열 가지 힘으로 선근 중생 가려내어서
생사의 바다[有海] 벗어나 의혹 없게 하도다.
비유컨대 해와 달이 허공에서 노닐매
모든 것을 비춰도 분별 않듯이
세존이 법계에 두루 행하여
중생을 교화해도 생각함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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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행(無碍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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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조비행억천세(如鳥飛行億千歲)나 :저 허공을 나는 금시조가 억 천년을 날아다녀도
전후허공등무별(前後虛空等無別)인달하야 :허공은 등무별이다.
우리가 49재를 지낼 때 무고무금(無古無今)이라고 한다. 무고무금이 여기에 해당한다.
해인사 일주문에 가면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요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다,라고 하였다.
내지는 법보단에 가면 원각도량(圓覺道場)이 하처(何處)냐 현금생사(現今生死)가 즉시(卽是)다.
불생불멸이 어디 있느냐? 여기 생멸법이 그대로 불생불멸이다. 출세간법이 어디 있느냐? 세간법이 출세간법이다, 하는 대목들도 여기에 다 해당한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그렇고 우리는 그게 사실 잘 안 된다.
중겁연설여래행(衆劫演說如來行)호대 : 중겁 아주 많은 세월을 여래 부처님의 행을 찬탄하고 연설하고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글자로 할 수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할 수도 없고, 거기에 미칠 수도 없는 자리다.
이설미설불가량(已說未說不可量)이로다 :이설미설불가량이다. 말한 것도 말하지 못한 것도 앞으로 해야될 말도 억수로 많고 이미 해놓은 말도 너무 많다.
하루가 이렇게 지나는데, 하루해가 지나가면 소동파의 게송처럼 8만 4천 게송이 그 하루에 다 벌어진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이요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가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가
그 많은 게송이 80권 화엄경이 뭔가, 하루만 지나가도 8만 권 화엄경이 지나간다.
눈으로 본 것만 해도 8만 권이고 귀로 들은 것만 해도 수백만 권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뭐라고 하는가?
여래출현품에도 그대로 나왔다.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 나에게 경전이 한 권 있는데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은 아니다.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子)라. 펼치면 한 글자도 없지만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무량무변하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도 나오는 글들이지만 여기에 다 해당하는 글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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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재공관대해(金翅在空觀大海)하고 : 금시조가 허공에서 큰 바다를 보고는
벽수박취용남녀(闢水搏取龍男女)하나니 :물을 헤치고 암용 수용을 잡아가듯이
십력능발선근인(十力能拔善根人)하사 : 십력은 부처님이다. 부처님께서 능히 뽑아낸다.
십력이라고 했다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는가? 대공덕이라고 했다가 대요익이라고 했다가 전부 다 부처님의 마음작용을 그렇게 법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인격적으로 해석하면 석가모니라고 하든지 비로자나라고 하든지 아미타불이라고 하든지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인격적으로 이야기할 때도 있고, 법리적으로 이야기할 때도 있다.
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십력이다, 대공덕이다, 대요익이다 라고, 이치로 이야기할 수 있고, 사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지위나 계급이나,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십력의 힘으로써 중생을 가려내어서
영출유해제중혹(令出有海除衆惑)이로다 : 영출, 벗어나게 한다. 영출유해 삼계25유 생사의 바다를 벗어나게 한다. 제중혹이로다, 모든 삿된 번뇌의 미혹 의혹으로부터 번뇌 미혹함, 중혹으로부터 다 제거해 버린다, 없애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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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일월유허공(譬如日月遊虛空)에 : 비유하면 마치 태양이 허공을 빙빙 도는데, 해와 달이 저 허공에서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비추면서, 높고 낮고 멀고 가까운 것을 동시에 다 비추면서
조림일체불분별(照臨一切不分別)인달하야 :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이
세존주행어법계(世尊周行於法界)하사 : 부처님께서도 세상을 돌면서
교화중생무동념(敎化衆生無動念)이로다 : 중생을 교화해도 흔들리는 생각이 없다.
대원경상(大圓鏡上)에 절친소(絶親疎)라, 친한 사람 비추고 안 친한 사람 안 비추는 것이 아니다. 다 비춘다.
다 비추는데 국화도 집에서 피는 것을 보면 햇볕을 많이 받는 쪽에는 국화가 좀 하얗게 피고 햇볕을 못 받는 쪽에는 노리끼리 하게 핀다. 또 똑같은 종자인데 세면바닥에 요즘 피는 국화는 갈색으로 핀다. 조건이 악하면 악할수록 꽃 색깔이 탁해진다.
사람도 절에 와서 사는데 이렇게 보니까 자기 마음 쓰는 꼬라지가 쪼그라들면 계속 쪼그라들어서 사람이 탁하다.
저는 백옥 같다고 주장을 하는데 백옥 같지는 않다. 백옥 같지는 않지만 이래도 살아야지.
훤한 사람이 있고 쪼그리 쪼그리한 사람이 있고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국화도 한 종자인데 어떻게 그런가?
화엄경을 많이 본 사람은 좀 훤해질 것이고 안 본 사람은 쪼그리해 있을 것이고 그런 것이다.
부처님이 법계에, 법계에는 중생이 사니까 부처님이 그 법계를 이렇게 돌아다니시는 것도, 돌아다닐 일이 없는데 부동명위불인데 주행하는 것도 다 그런 뜻이다. 교화중생무동념이로다, 중생을 교화해도 흔들리는 생각이 없다. 이런 것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한다. 화목할 화(和)자에 말 이을 이(而)자 화이부동.
7. 如來出現의 正覺
(1) 正覺의 體相
佛子야 諸菩薩摩訶薩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의 成正覺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如來가 成正覺하사 於一切義에 無所觀察하며 於法平等하야 無所疑惑하며 無二無相하며 無行無止하며 無量無際하며 遠離二邊하야 住於中道하며 出過一切文字言說하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바른 깨달음을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여래가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서 일체 이치에 관찰함이 없고, 법에 평등하여 의혹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둘이 없고 모양이 없으며, 행함도 없고 그침도 없으며, 한량이 없고, 한계가 없음을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두 가지 치우친 것[二邊]을 멀리 떠나서 중도(中道)에 머물며, 모든 글자와 말을 벗어난 줄을 응당 알아야 하느니라.”
*
여래출현(如來出現)의 정각(正覺)
*
부처님의 정각은 어떠한 것이냐? 부처님의 경계, 부처님의 행,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올바른 마음이다.
*
정각(正覺)의 체상(體相)
*
번뇌 없는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가를 본다. 정각의 본체 체상의 모양이라.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訶薩)이 : 모든 보살마하살이
응운하지여래응정등각(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의 :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여래응정등각의
성정각(成正覺)고 : 성정각, 시성정각,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응지여래(應知如來)가 : 응당히 알아야한다. 여래가
성정각(成正覺)하사 : 성정각하사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어일체의(於一切義)에 : 일체 모든 뜻에
무소관찰(無所觀察)하며 : 관찰하는 바가 없고, 이것이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일체 뜻에 관찰하는 바, 관찰하는 건 뭘 가지고 하냐면 생각을 가지고 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환희지 초선 색계 사선정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에 선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일단 제일 가까이는 냄새나는 것하고 맛보는 것 두 가지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한다.
네 가지는 남아 있지만, 그중에 비근 설근에 내가 매몰되는 것, 맛이라든지 말초신경이 그런 데 대해서 휘말리지 않으면, 일단 초선(初禪)에 들어갔다고 한다.
초선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몸이 있다.
몸이 춥고 덥고 한다.
이런 것은 목욕탕 같은 데 찬물에 가서 혼자 실험해 보면 느껴진다. 처음에는 차갑다가도 손을 담가놓고 계속 찬물에 있으면 한 10분쯤 지나면서 몰입해서 딱 공부하면 몸이 뜨끈뜨끈해진다. 자체적으로 열이 올라온다. 그 찬물에 얼마든지 하루종일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 몸의 감각인 춥고 덥고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
목욕탕에 가서 이 실험을 하려면, 차가운 데 들어가서 즐기려고 하고 뜨거운 데 들어가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데 들어가서 잊어버리고, 뜨거운 데 들어가서 잊어버리고, 자기를 몰고 들어가 버려야 된다.
몸에 대해서 그런 것이 사라지고 나면 남아 있던 네 가지 중에 의식만 남는다.
몸하고 눈하고 보고 들리는 것에 대해서 좀 무심해 버리면 그다음에는 의식 하나만 남아서 삶 속에 있는데, 의식 하나가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서 끌고 간다. 의라고 하는 이것까지가 다 끊어져야 된다. 분별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쪽으로 자기를 끌고 가는 것이다. 무소관찰의 관찰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이야기다.
오위백법이나 이런 데 보면 유식간에 자세하게 나온다.
이것은 식이다, 라고 해서 분별사식을 잡아 들어가는 그 상태다. 여기 나온 ‘관찰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보고 듣고 하는 바깥의 현상, 분별사식에 끄달리지 않는다, 이런 말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온갖 이치에 관찰함이 없다. 그런 데에 대해 쪼잔하게 파고들고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법평등(於法平等)하야 : 모든 법에 평등하여
무소의혹(無所疑惑)하며 : 의혹이 없으며
*
무이무상(無二無相)하며 : 둘이 없고, 모양도 없으며
무행무지(無行無止)하며 : 행도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없다. 본래 없는데 가기는 뭘 가고 멈추기는 뭘 멈추는가.
없는 것을 또 어떻게 없앨 수는 없지 않는가.
무량무제(無量無際)하며 : 한량도 없고 한계도 없고
*
원리이변(遠離二邊)하야 : 원리이변하야, 이쪽 저쪽, 이쪽 저쪽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생사열반(生死涅槃) 본평등(本平等)이라.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라 하고 장수자선선사는 본평등이라고 했다.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는 것은 본래 없다는 것이다.
허공이 좌측에 있는 허공이나 우측에 있는 허공이나 똑같잖은가.
그래서 우리가 49재 지낼 때는
백초임중일미신(百草林中一味新)
조주상권기천인(趙州常勸幾天人)
팽장석정강심수(烹將石鼎江心水)라고 했다. 강심수, 강의 중도 궁좌실제중도상에 갔을 때는 아래위 좌우가 없지 않는가. 강심수. 팽장석정강심수
원사망령헐고륜(願使亡靈歇苦輪)
그러니까 영가여, 중도정견에 들어가야지, 네 생각에 사로잡혀서 여기로 떨어지고 저기로 떨어지지 말아라, 하는 내용이다.
49재 지낼 때 게송을 하나하나씩 보면 촌철살인이다.
그분들의 공부 살림살이가 거기에 다 나온다.
여기도 써놨다. 그래서 원리이변하야
주어중도(住於中道)하며 : 중도에 머무르며, 화엄경에는 이렇게 나왔다. 보살수행자가 가면서 생사에도 대지 않고 열반의 언덕으로 가지도 않고 중간에 머물지도 않는 것을 중도라고 한다. 중간에 머물러야 중도가 아니고 때로는 좌측에 가도 중도고, 우측에 가도 중도다.
주어중도 하야 그래서 이것이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이다. 중도에 가면 뭔가?
구래부동명위불이다. 중도가 바로 부처님이다. 여래출현이다.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아 이게 부동이고, 명위불이구나’ 앞에서 부동 불생 불기는 다 봤지 않은가.
이것이 중도이고, 궁극이고 다 그런 뜻이다.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무연선교 인연 없는 중생도 다 여의주 한 보따리씩 챙겨줘라.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눈으로도 다라니가 한량없고 귀로도 다라니가 한량없고 이다라니무진보배 안이비설신의로 장엄법계실보전(壯嚴法界實寶殿) 자기 법당을 잘 챙겨서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除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라.
출과일체문자언설(出過一切文字言說)하니라 : 일체 문자 언설을 벗어나야 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기신론 같은 데서 이심연상(離心緣相), 분별사식을 마음으로 반연하는 것, 생각을 끊어라,라고 한다.
달마스님은 뭐라고 했는가?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그 언어도단을 기신론에서는 이언설상(離言說相) 또 다른 말로 하면 이명자상(離名字相) 이심연상(離心緣相) 이언설상(離言說相) 이렇게 이야기한다.
달마스님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심행처멸(心行處滅) 심여장벽(心如墻壁)이라야 가이입도(可以入道)라.
방거사의 게송까지 붙인다면 단원공제소유(但願空諸所有)언정 절물실제소무(切勿實諸所無)라. 다만 원컨대 모든 있는 것도 없다고 해야될지언정, 없는 것에서 실제로 있다고 허망하게 집착하지 말아라.
없는 걸 집착하는 것을 우리는 망념이라고 한다.
다음 한 구절만 하고 오늘은 마쳐야 될 것 같다.
(2) 三世一切法의 了知
知一切衆生의 心念所行과 根性欲樂과 煩惱染習이니 擧要言之컨댄 於一念中에 悉知三世一切諸法이니라
佛子야 譬如大海가 普能印現四天下中一切衆生의 色身形像일새 是故로 共說以爲大海인달하야 諸佛菩提도 亦復如是하야 普現一切衆生의 心念根性樂欲호대 而無所現일새 是故로 說名諸佛菩提니라
“일체 중생의 마음에 행하는 바와 근성과 욕망과 번뇌와 습기를 알아야 하나니,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한 생각에 세 세상 모든 법을 알아야 하느니라.
불자여, 비유컨대 큰 바다에서는 사천하에 있는 일체 중생의 몸과 형상을 두루 나타내므로 다 같이 큰 바다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의 보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내면서도 나타내는 바가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의 보리[깨달음]라고 이름하느니라.”
*
삼세일체법(三世一切法)의 요지(了知)
*
한 생각에 삼세의 모든 법을 다 안다.
*
지일체중생(知一切衆生)의 : 지(知) 알지니라, 알아야 된다. 일체중생의
심념소행(心念所行)과 :심념 소행과
근성욕락(根性欲樂)과 : 근기와 성품과 욕망.
우리가 치문(緇門)을 배울 때 개중생지근욕성(盖衆生之根欲性)이 수(殊)라 하는 것도 화엄경에서 다 나왔다. 욕락과 근성과
번뇌염습(煩惱染習)이니 : 번뇌와 염습이니, 염(染)이라고 하는 것은 정(淨)자에 비해 정은 진여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염은 망념, 망심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심은 청정할 정자로 쓰고 허망한 생각은 염이라고 한다.
습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를 여기서 굳이 쪼잔쪼잔 하게 나누면 탐진치같이 바깥으로 행동개시하는 구체적인 것이다.
염이라고 하는 것 염습이라고 하는 것은 찌들어서 훈습되어서 안쪽에 미세번뇌까지, 속에까지 물들어서 찌든 때가 안 빠지는 것이다. 8식의 습기, 습기종자라고 한다.
번뇌는 분별이라 하고 습기는 선천적인 것이라 한다.
번뇌는 예를 들어서 분별번뇌는 후천적이라고 한다면 염습은 다생겁래에 찌들려서 중생놀음을 해서 곤조라고 한다. 흔히 ‘곤조 안 고쳐진다’고 한다. 곤조가, 그 뿌리 근성이 딱 배겨 있는 것이다.
*
거요언지(擧要言之)컨댄 : 중요한 것을 말하자면
어일념중(於一念中)에 : 일념중에
실지삼세일체제법(悉知三世一切諸法)이니라 : 삼세 일체 제법을 다 알아야 하느니라.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비여대해(譬如大海)가 :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가
보능인현사천하중일체중생(普能印現四天下中一切衆生)의 : 보능인현, 해인삼매가 나온다.
큰 바다에서는 사천하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몸과 일체 중생들의
색신형상(色身形像)일새 : 색신 형상이 다 나타난다.
시고(是故)로 : 이러한 까닭으로
공설이위대해(共說以爲大海)인달하야 : 다 같이 말한다. 무엇을? 이위대해라. 거기 다 나타난다. 큰바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이 다 나타나기 때문에 대해라고 한다.
*
제불보리(諸佛菩提)도 : 제불보리도, 모든 부처님의 큰 바다에 모든 세상 것이 다 비치듯이, 인터넷에서 모든 세상 것이 다 비치듯이, 모든 부처님의 보리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또한 그와 같아서
보현일체중생(普現一切衆生)의 : 일체중생의
심념근성낙욕(心念根性樂欲)호대 :심념과 근성과 욕망을 두루 나타내되
이무소현(而無所現)일새 : 그러나 나타낸 바가 없을새, 이것은 많이 나온다. 중생의 마음을 다 나타내도 나타난 바가 없다.
시고(是故)로 : 이러한 까닭으로
설명제불보리(說名諸佛菩提)니라 :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제불보리라고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나타낸다,라고 한다.
또 화엄경의 십회향품에 보면 이러한 게송이 나온다.
보살교혜(菩薩巧慧)는 이행보시(而行布施)라, 보살의 선교 아주 훌륭한 선교 교묘한 지혜 아주 빼어난 지혜, 보살의 아주 빼어난 지혜로써 보시행을 행한다 이렇게 나온다.
그러한 보시행은 행하는 바가 없다.
금강경의 첫구절에 뭐라고 해놓았는가?
‘부처님, 어떻게 보시를 해야 될까요?’
법계의 성품이 본래 없는 줄 알고 바라밀행을 닦는다.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하고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主聲香味觸法布施)하라. 지혜롭게 보시해도 보시한 바가 없게 하라.’
널리 일체 중생의 심념과 근성과 욕낙이 다 나타나지만 그러나 이무소현이다. 하나도 나타난 바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것을 이름하기를 제불보리니라.
오늘 여기까지 해서 마치겠다.
근념하셨다.
(죽비소리)
하강례
타력신앙 자력신앙
큰스님께서 유튜브에서 읽어주시는 화엄경이 제7권 보현삼매품으로 들어가는 날은 11월 20일이었는데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을 이야기해주시면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부처님을 의지하든지 보살들을 의지하든지 경전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주문을 외우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타력신앙이 되면서 또한 자력신앙도 됩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맞백독 하는 학동’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염화실의 회원들은 큰스님께 화엄경 법문을 백 번 이상 들었다. 그래도 처음 듣는 것 같은 ‘둔재를 포기하지 않는 스승의 이야기’가 겨울 햇살처럼 따스했다.
이날 법문의 일부분을 녹취한다.
맞백독 학동 -無比스님-
불교를 믿는 것, 불교 공부를 하는 것, 이런 것들도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한다 하면 처음에는 이렇게 읽는 것을 듣고, 또 책에 의지를 하고 그게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지요.
그러다가 자기 소견이 생기고 자기 안목이 열리고 문리가 좀 나요. 문리라 그래요 그것을.
불교에서는 문리(文理) 특히 강원에서는 문리라는 말을 잘 씁니다.
‘어떻게 하면 문리가 빨리 나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마음대로 읽고 또 읽으면서 해석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등등 그런 문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아 저 사람은 문리가 났다, 저 사람 문리가 좋다’ ‘아이 나는 도대체 문리가 안 나.’ 이런 경우도 있고요.
서당에서 선비가 학동들을 가르치는데 대개 아이들이 동네에서 오면 오육 세부터 칠팔 세까지 와서 공부를 하는데 보통 그 수준들은 가르치면 따라서 하고 또 조금 늦는 사람도 있고 또 빠른 사람도 있고 조금 조금씩 차이가 나고 다르죠.
그런데 가르쳐 줘도 따라하지 못하는 학동을 더러 만나요.
하늘천 하면 하늘천, 따지 하면 따지, 검을현 하면 검을현, 누를황 하면 누를황, 이렇게 한 번에 넉 자를, 천자문이 넉 자가 한 줄이잖아요. 그러면 그걸 한자한자 읽을 때는 따라하다가 ‘너 혼자 한 번 그 넉 자 읽어 봐라’ 하면 그건 못해요.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이 넉 자를 못 읽는 거야. 한 자 한 자 읽어 줘야 돼.
그걸 백 번을 같이 하는 거야.
백 번을 같이 해야 겨우 하는 것을 ‘맞백독’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런 둔한 학동을 만나면 그 선생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기뻐합니다.
‘아 맞백독 하는 학동이 생겼다’고.
그런 사람이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크게 터지거든 문리가.
문리가 보통 따라서 할 줄 아는 사람이 예를 들어서 한 세 번 읽어 줘서 할 줄 아는 사람, 한 번 읽어줘서 할 줄 아는 사람, 열 번 읽어줘서 할 줄 아는 사람, 여러 가지 근기가 있는데, 백 번을 같이 읽어 줘야 겨우 따라서 하는 사람을 ‘맞백독’ 그래요.
마주 앉아서 백 번을 읽어 줘야 읽을 수 있다 해서 그걸 맞백독 한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저한테나 듣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둔재를 만나면 선생은 아주 좋아라고 합니다.
아주 좋아라고 ‘아 이거 맞백독 하는 학동이 생겼다’고, ‘아마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야’라고, 큰 인물이 될 거라고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다 문리가 크게 터지는 건 아니지만 대개 또 그런 사람들이 끈질기거든요. 끈질기고 아주 추진력이 좋고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문리가 크게 터집니다.
크게 터지면 머리가 보통 좋던 사람들이 못 따라가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뭔가 예를 들어서 경전 공부를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우리가 관세음보살 이름을 몰라서 그렇게 열심히 읽는 건 아니죠. 그러나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몰라서 읽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읽는 데, 거기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쉬지 않고
겨울이 온 것처럼 다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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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大圓鏡上 絶親疎...고맙습니다 _()()()__
아름다워라 환희로워라 감사하여라
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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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