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오늘이 일정 중에 제일 바쁜 날이 될 거라고 일찍 출발을 하자고 해서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버스에 올랐다. 처음 도착한 곳은 근처에 있는 삿포로 구도청사였다, 일명 아까랭가(붉은 벽돌)라는 홋카이도 개척시대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1888년 약 250만 개의 벽돌을 사용하여 미국 메사추세스 의사당을 본 떠서 지은 네오바로크 양식이란다. 하얗게 눈덮힌 정원에 고풍스런 붉은 벽돌집이 운치가 있었다. 특히 팔각지붕은 한껏 멋부린 서양 신사의 중절모처럼 눈에 띄었다. 내부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입장 불가라고 해서 건물을 배경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남긴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삿포로의 대표적인 상품인 아사히 맥주 공장 견학을 갔다. 이곳도 생산 라인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10분간 비디오 시청을 하도록 한 후 시음장으로 안내하였다. 생맥주를 제공하였는데, 술을 못마시는 사람들을 위해 음료수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이동 중에 마실 수 있게 음료수 캔을 더 챙기라고 귀띔을 한다. 일본은 물가가 비싸 음료수 한 캔도 우리 돈으로 몇천원씩 하는 통에 돈 계산하다 보면 물 한 모금 마시기도 겁이 난다. 시음장의 넓은 홀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눈내리는 뜨락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의 맛이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황홀하였다. 모두들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맥주 공장을 나와 오타루로 이동하였다.
오타루는 오츠크해에 연해있는 항구 도시로 개척시대에는 본토에서 물자를 실어 나르고 외국과의 무역도 활발하여 번성했던 도시였는데, 새로운 항구가 개척됨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오타루 운하에는 88개의 가스등과 물류 창고들이 늘어서 있어 그 당시 이국적인 풍경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버려진 창고를 사들여 유리 공예 전시장, 오르골 전시장 등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하면서 오타루는 새로운 문화 거리로 탈바꿈하여 그 멋스러움으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오르골 전시장에 들어서니 3000 여개의 오르골이 절묘한 조화로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도 증기 시계탑 모형 오르골을 하나 샀다. 증기 시계탑은 정시가 되면 증기 기관차처럼 소리를 지르며 증기를 뿜어 내는 그 거리의 명물이다. 취미로 탑모형을 모으고 있기 때문에 좀 고가이긴 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는 오타루 운하 근처의 창고 식당에서 해산물 나베 정식으로 하였다. 일본에 오기 전에 인터넷에 나와 있는 사진만 보고 여러가지 나베를 맛볼 수 있겠구나 싶어 기대가 컸는데, 막상 먹어보니 '그림의 우동' 일 뿐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인 둘째도 금방 수저를 놓는 걸 보면 별 맛인가 보다. 그래도 예의상 '고치소 사마데시다'(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식당 한켠에는 매장이 있었는데,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마유를 발견했다. 말기름이 북해도 특산물인 줄 처음 알았다. 설명서를 읽어보니 보습 효과가 뛰어나 건조한 피부인 남편에게 좋을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남편 얼굴이 거칠어졌다고 화장품 좀 발라주라고 시어머니한테 한 소리 듣고 나니 신경이 쓰였는데
좋은 보습제를 발견하여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가이드가 내일 아이누촌에 가면 진짜 좋은 마유를 구입할 수 있다고 더 이상 구입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쩌면 여행사와 연계되어 리베이트를 받는 상점일지도 모르지만 수고하는 가이드를 위해 그 곳에 가서 쇼핑을 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돌아 나왔다.
단체 관광에서는 시간 엄수가 첫째이다. 키타이찌 거리에서 시간이 좀 남길래 우리끼리 스시야에 들어가 생선 초밥을 시켰는데,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집어 삼키고는 주차장까지 냅다 달려왔다. 이번에 함께 간 분들은 비교적 시간을 잘 지켜 기다리게 하는 민폐를 끼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가이드 설명으로는 북해도는 본토의 일본인들도 평생에 꼭 한번 와보고 싶어 하는 곳으로 그 만큼 여행비가 비싸 경제적인 여유가 없이는 와 보기 힘든 곳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에 함께 온 사람들은 먹고 살만하다는 얘기다.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서로 만나면 인사나 주고 받을 정도이지 좀처럼 자기 신분을 노출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남에게 싫은 소리 들을 짓은 안하려고 극도로 조심하니까 차라리 편하다고 해야 할지. 암튼 단체라고는 해도 개인적인 여행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도야로 이동하는 동안은 피곤과 식곤증으로 모두들 골아 떨어졌다. 일본 역사에 대해 교수님처럼 강의를 하던 가이드도 멋쩍은지 입을 닫아 버리고 오수를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역사 얘기를 좋아해 가이드의 얘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잠 앞에서는 도리가 없어 후키다시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잤던 것 같다. 후키다시 공원은 제2의 후지산이라 불리는 요테이잔(양제산)의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데 하루에 8만톤의 약숫물이 솟아나는 곳으로 유명하며 일본의 명수로 지정된 곳이다. 설경이 이를 데 없이 아름답긴 했지만 자다 깨니 더 춥고, 눈길이 너무 미끄러워 약수터까지 가는 데 애를 먹었다. 가이드가 물을 떠가게 물병을 준비하라고 하더니 정말 물맛이 시원하고 깨끗해 물병을 가져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서 눈 속에 피어있는 작은 야생화를 보았다. 꽃잎이 클로버 모양이었는데 하도 신기해서 사진에 담아 왔다.
호텔로 들어가기 전에 사이로 전망대에 갔다. 도야 호수와 물 속에 떠 있는 네 개의 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야 호수는 북해도 최대의 칼데라 호수로 예전에는 그곳에 산이 있었는데 화산 폭발 때 함몰되어 호수가 생겼다고 한다. 어두어져가는 호수 건너 편에 오늘 밤 우리가 묵을 만세각 호텔의 불빛이 반짝이는 게 꼭 그림같았다. 호텔 방을 배정받고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가니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춘절 연휴를 이용하여 중국인 관광객 수만명이 몰려 왔다더니 가는 곳마다 중국인들을 만나게 된다. 일본 TV에서도 연일 중국 관광객 뉴스 뿐이다. 이런 불경기에 중국인들이 와서 엄청난 돈을 쓰며 매장마다 싹쓸이 쇼핑을 해대니까 신이 날만도 하겠다. 부페 코너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으니 맛있는 것 먹겠다고 차례를 기다리다가는 하세월이라 되는 대로 빨리 집어올 수 있는 몇 가지로 배를 채우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큰 애가 감기가 왔는지 식사도 제대로 안하고 웬만해서는 약을 먹지 않는 애가 내 방까지 와서 약을 찾으니 걱정이 되었다. 푹 자면 괜찮아질 거라며 일찍 누워버렸다. 팜플렛에는이 호텔에 도야 호수가 보이는 대욕장이 있다고 하던데, 너무 피곤해 꼼짝 하기도 싫은데다 중국인들이 득실거리는 대중탕에서 벌거벗은 몸을 부딪힐 생각을 하니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재미로 유까다만 갈아 입고 둘째와 사진 찍기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어디를 가도 가만 있지를 못하는 남편은 어느 틈에 밖에 나가 일루미네이션 터널에도 가보고, 110v전환용 플러그를 구하려고 옆 호텔 데스크까지 찾아가서 빌려왔다고 자랑을 쳤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가끔씩 남편의 엉뚱함이 나를 놀라게 한다.
첫댓글 정정; 데스크▶프론트
그림 같은 도야호수와 눈속의 야생화 사진을 넣어주시면 더 감동 받을 것 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