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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여행] 이충무공 어머니 살던 곳...........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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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여행] 이충무공 어머니 살던 곳...........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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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무공(이순신) 풍전등화(風前燈火)와도 같은 상황에서 조국을 구한 조선 선조 때의 명장(1545~1598)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이며 이름은 순신(舜臣)이다. 장군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1576년 봄 무과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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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해전에서 거북선을 만들
어 왜군을 격파하며 승리로 이끈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이름을 남긴 조선의 명장이다. 1592년 4월 임진왜
란이 일어나자 5월에 옥포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대첩에서 적선을 크게 격퇴하여 왜군의 전의
를 상실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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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공원으로 연결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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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 왜군의 간계와 통제사 원균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으나 통제사 원균이 패하자 곧 삼도수군
통제사로 복귀했고, 12척의 배로 333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대첩을 이끌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
마지막 전투였던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적이 쏜 유탄에 왼쪽 가슴을 맞고 전사했다. 저술로는 진중에서
기록한[난중일기(亂中日記)]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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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이켜 볼 때 조선왕조 5백여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조
영무,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등 아홉 명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충무공 하
면 오직 이순신 장군만을 떠올린다. 대체 그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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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시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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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 적장 와키 사카 한 유명한 유언이 있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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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왜군 장수 와키 사카 야스하루가 후손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절대로 조선을 넘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토록 이순신은 전
란 내내 그처럼 놀라운 전략과 무용으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감추고 퇴
각하는 왜군을 섬멸함으로써 남해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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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난중일기]를 통해 성웅이 아닌 고독한 인간 아들 이순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그를
낳아 민족의 영웅으로 길러주신 그의 어머니가 전란을 피해 잠시 몸을 피신했던 그 장소를 유랑자가 찾았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의 어머니인 변씨 부인을 모신 '곰내', 혹은 '고움천'이라고 불린 곳이 이 곳이다.
현재의 명칭인 웅천(熊川)은 이 곰내/고움천의 뜻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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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세계 해전사에 유래가 없는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 의 신화가 시작된 곳 여수, 이로서 여수는 ‘구국(救
國)의 성지(聖地)’가 되고 이순신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곳,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무인으로
서 위난의 나라를 구한 충신이자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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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 전종주 선생님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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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쟁터에서 쓴 '난중일기'에는 집에 계신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을 정도다. 임진 7년 동안
난중일기에 100여 회에 걸쳐 어머니 안부를 묻고 걱정하는 모습이 나온다고 하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유랑자가 찾은곳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효(孝)를 실천한 현장인 바로 여수문화
유산 제1호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사시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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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 보트 교육장에서 신월로를 따라 가다보면 이순신공원 끝자락 도로가에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우측으로 붙어있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널따란 주차장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먼저 이중무공 사
모 비를 만난다, 사모 비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의 일기가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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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忠武公思母碑(이충무공 사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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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1594) 1월 11일 경인(사모비에 적인 장군의 일기내용)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바로 고음 천에 도착하였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갔다. 어머님께 가서 배알하려 하니 어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날 저녁에 손악수의 아내가 죽었다는 부음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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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신묘 맑음. 아침 식사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
'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구구절절하다. 이 글귀를 읽다보니 괜스레 가슴이 찡해 온다. 나의 어머니를 생각
해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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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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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뜰에 들어서니 단아한 마당은 너무 크지 않고 호기스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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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
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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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
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
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
해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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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겹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자지간의 인형이 안방에 보이고, 건너방에는 충무공의 부인 상주방씨가 단아하게 앉아서 충무공
을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의 분위기를 왼지 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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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비를 지나 협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5칸에, 측면 세칸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임지
왜란 당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의 집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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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있는 집의 부엌과 장
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
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
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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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께서 집에오면 들러 묵었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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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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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
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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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집을 자세히 살
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 기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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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고택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충무공이 이듬해 왜란이 발생하자 모친을 걱정해 오던 차에, 휘하
의 군관 정대수 장군이 편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임을 알고는 장군의 모친인 초계 변씨(草溪卞氏), 부인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가솔들을 데리고 와 기거하며 5년(1593~1597)동안 피란생활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
렸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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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건물은 송현마을이 택지개발로 이주하면서 옛터 그 자리에 2015년 신축한 건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 관리실, 사주문, 협문, 토석담장, 생활용품 등의 전시되
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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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충무공 어머니께서 쓰셨던 절구통이다. 40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색깔만 변색 되었을 뿐 원형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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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어머니께서 쓰셨던 무쇠 밥솥인데. 지금은 이렇게 형체만 남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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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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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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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당시 장군은 전장에서 얼마간 어머니의 안부를 듣지 못할 때에는 무척 애를 태웠고, 본영(여수)에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어머니를 찾아뵙고 손수 진지를 차려드리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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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오죽했으랴마는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
다."고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탄식하지 않으셨다니, 공은 목숨을 두렵지 아니하고 전심으로 싸
워 전승을 하실 수 있으셨을 거라. 역시 명장 밑에 약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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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멈췄지만 평상시 효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다. 효의 산실인 이곳에서 자녀들과 함께
충무공의 효 정신을 새기고 체험한다면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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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군의 어머니 변 씨는 충무공(53세)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와병 중에도 불구하
고 조정에 탄원을 올리기 위해 노령에 배를 타고 올라 가다가 태안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1597(정유년)년 4월
11일 배에서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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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불을 끄고 떡을 썰어 명필 한석봉을 기른 어머니와 ‘맹모삼천지교’를 남긴 맹자의 어머니, 대학자 율곡을
키워낸 신사임당까지, 영웅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존재했다. 이들 어머니는 훌륭한 자식 못지않게 이 시대
에도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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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장독대 뒤편에는 ‘이충무공모부인초계변씨유적비‘가 있다. 비의 앞면에 "李忠武公母夫人草溪卞氏遺蹟碑(이충무공모부인
초계변씨유적비)"라고 쓰여 있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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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곳 송현마을은 어머니 변 씨의 마지막 거처지 이자 모정과 효성의 산실로서 울림을 주는 충무공 유적지
로 여수가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장군의 어머니께서 마지막 생을 살았던 이곳은 웅천신도시 택지 개발이 시
작 되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충무공 어머니가 사시던 곳이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불과 면년전까지만 해도 충정공 정대수 장군의 후손들이 14대까지 대대로 살았던 곳이기도 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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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삼도수군통제영인 국보 제304호 진남관이 충(忠)을 실천한 곳이라면 이곳은 효(孝)를 실천한 역
사적인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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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35㎝이고, 너비는 40㎝인 이 비는 1973년 여천군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효 정신을 받들기 위하여 모친과 부인 등
가솔이 살았던 이곳에 유적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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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가 오늘은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에서 이순신 장군과 어머님의 사랑을 느끼고 왔다. 구국영웅인 충
무공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에 효의 정신을 본받는 건 어떨지, 유랑자는 돌아오는 길 내내 젊은 시절 효를 다하
지 못했던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회한(悔恨)으로 가슴 먹먹함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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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LKz0/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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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 웅천동 1849 (주차장)
(도로명)전남 여수시 신월로 195 (주차장)
대표번호 :061-659-3874
소개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모친 변씨 부인이 고음천(古音川) 송현마을에서 5년간(1592-1597)
임진왜란을 피해 있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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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입니다만 내가 간들 그저 그렇구나 하며 대충 훝어보며 팽나무며 동백나무에 눈길을 줄게 뻔한데
효성스런 역사가 담긴 그 의미들을 헤아려 다시금 충무공의 큰 뜻을 기리게 하여준 자세한 글에
새삼 고마움을 느낍니다 감사 합니다.
ㅎㅎ 그러게 말입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관심 분야에서만
빛을 발휘하는 법이지요. 이 유랑자 처럼
그렇게 세세히 보는 분들도 많지만 대다수는 ....
암튼 이 유랑자의 여행 방법이 좀 피곤한 스타일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