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따라 떠난 강화도 여행
― 약초 이야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하는 시간 여행
덕천 염재균/수필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10월로 접어든 두 번째 화요일이다. 새벽부터 가을비가 내리며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있다. 호기심을 가슴에 안고 오전 7시경 약초 이야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강화도로 힐링 여행을 떠났다. 강화도는 고려가 몽골에 맞서 약 38년 동안 항쟁했던 곳이며, 조선 말 서양 세력의 침략을 직접 받았고,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곳으로 중요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수확의 계절이다. 여름의 푸르름을 내려놓고 산과 들을 울긋불긋 물들이면서, 우리에게도 잠시 걸음을 늦추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강화도로 들어서니 들녘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고, 찬 이슬이 내린다고 하는 한로(寒露)가 지나서인지 바람은 서늘한 기운이 묻어난다. 강화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순무'다. 강화의 밭에서 자란 '순무'는 보랏빛이 감도는 독특한 모습과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맛으로 오랜 세월 강화 사람들의 밥상을 지켜왔다. '순무' 하나에도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오늘 우리들의 강화도 여행은 단순히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보는 여행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천년의 역사도 만나고, 1960~70년대의 아련한 추억도 만나게 되고, 분단의 현실을 눈으로 보면서 아픔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갖는다. 말 그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첫 발걸음은 천년 고찰인 전등사로 향했다. 전등사는 정족산 자락에 자리 잡은 강화도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사찰이다. 강화도 자체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왕실과 조정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이었던 만큼, 전등사에 들어서니 오래된 나무 한 그루, 돌계단 하나에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전등사를 걷다 보면 대웅보전 처마 밑의 4개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흔히 '나부상'이라고 부르는 조각상이다. 여기에는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전등사 대웅보전을 짓던 목수가 공사를 하면서 한 여인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사가 끝날 무렵 그 여인이 목수를 배신하고 떠나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목수는 그 여인을 원망하면서도, 다시는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 여인의 모습을 조각하여 건물 처마를 받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전등사에 전해 내려오는 민간의 전설이다. 그러나 전설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배신한 사람을 벌주려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잘못을 잊지 말라는 교훈이었을까.
가만히 처마 밑을 바라보고 있으면 옛사람들이 돌과 나무에 남겨 놓은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전등사의 고목 사이로 가을 햇살이 비치고, 바람에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강화읍에 있는 풍물시장 2층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서 밴댕이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비린내도 없고, 맛이 있는 생선을 비하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밴댕이 속이 작기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멈춘 듯한 교동의 대룡시장으로 가기 위해 교동도로 향했다. 대룡시장에 들어서니 어느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낡은 간판과 좁은 골목, 오래된 가게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1960~70년대 어느 날로 돌아온 듯하다. 196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필자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본다. 학교 앞 근처의 문방구에서 학용품을 팔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고향의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의 골목에는 단순한 '옛날 분위기'를 넘어 실향민들의 삶과 기억이 배어 있다고 한다.
골목을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들의 어린 시절도 하나둘 떠오른다. 옛날 다방, 오래된 이발소, 낡은 간판….
"어, 저거 옛날에 우리 동네에도 있었는데!"
약초 이야기 동호회원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아서인지 웃으며 자신들의 옛 추억을 꺼내놓는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았고, 생활도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기억에는 따뜻함이 있다.
친구들과 뛰놀던 골목, 어머니가 기다리시던 집, 시장에서 사 먹던 작은 간식 하나에도 행복이 있었다. 대룡시장 골목을 걷다 보니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어린 시절로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식이다. 강화도에 오면 '순무'의 맛을 보아야 한다.
보랏빛이 감도는 순무 맛을 보면서 회원들은 자연스럽게 김치 이야기를 꺼낸다. 필자는 집에 가져가서 먹으려고 순무 김치 한 통을 샀다. 먹을 생각에 군침이 돈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별로 없어서 김치 참 많이 먹었지."
한 사람의 말에 또 한 사람의 추억이 이어진다. 음식은 참 신기하다. 한입의 맛이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한다. 순무의 알싸한 맛 속에서 우리는 강화도의 자연을 느끼고, 동시에 어린 시절의 밥상과 어머니의 손맛까지 떠올린다.
그래서 여행의 참맛은 유명한 음식의 맛만이 아니라, 그 음식을 함께 나누며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맛인지도 모른다.
북녘땅을 바라보며 강화도의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강화 평화전망대에 이르렀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는 넓은 물길과 그 너머의 북녘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일대와 연백평야 등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망원경 너머로 바라보는 북녘의 산과 들. 그곳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멀리 보이는 강물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진다. 강물은 아무 말 없이 남과 북 사이를 흐르고 있는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가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고 있다.
회원들과 함께 전망대에 서서 잠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어본다.
'언젠가는 저 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오늘 우리의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평화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는 순간이다.
여행을 통하여 책 속에서만 보았던 역사를 직접 그 땅에 서서 바라본다면, 역사의 진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여행은 결국 역사와 소통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등사에서는 천년의 시간을 만났고, 대룡시장에서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만났다. 그리고 평화 전망대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분단의 현실과 통일의 희망을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강화도는 단순한 곳이 아니라 생각된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역사와 사람이 만나며, 추억과 미래가 만나는 곳이다.
오늘 약초 힐링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한 강화도 여행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여행은 멀리 떠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까운 곳으로 가서 오래된 나를 만나고, 잊고 지냈던 사람과 추억을 만나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여행의 맛이라 생각한다.
가을빛으로 물든 산과 들 사이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강화도의 들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해본다.
"오늘 참 잘 왔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서 좋은 추억 하나를 만들었구나."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오늘의 이 여행도 또 하나의 그리운 추억이 되어 필자를 비롯한 동호회 회원들의 마음속에서 가을빛으로 물들 것이다. (2026.10. 13.)
첫댓글
강화도 순무
별미지요
강화도에 자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