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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봄의 수당과 추사
역사학과 20142155 권예진
필자는 작년 11월 학과에서 실시한 일일답사에서 같은 코스를 다녀왔다. 간 지 오래되지는 않아 유적지와 유물들이 떠올라 처음 답사를 가는 학우들만큼 ‘새로움’에 대한 설렘은 덜했지만 전통 고택이 계절마다 주는 느낌이 다르기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봄날의 고택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수당 고택에 도착했을 때, 필자의 기대가 채워졌다. 11월 쌀쌀한 초겨울에 방문했을 때는 수풀이 없고 추워서 경관이 조금 삭막하게 느껴졌는데 5월의 고택은 봄기운을 가득 품은 꽃, 나무, 풀들이 어우러져 생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당 고택에 도착한 후 기념관장님의 덕담을 듣고 수당 기념관에 들어가서 수당가(修堂家)의 호국정신을 살펴봤다. 수당가와 가문의 주요 애국 위인들에 대한 간략한 영상을 보고 본격적으로 기념관에서 설명을 들었다. 수당가는 이전에 향리 중에 가장 높은 호장을 할 정도의 시골 양반이었다. 목은이색 때 과거 급제를 했으나 유명 가문이 아니라 제대로 벼슬에 뜻을 펼치지는 못했다. 과거에 합격했으나 10년이 지나도 현직에 발령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색은 중국에 가서 제와에 급제하여 원에서 고려로 내려온 덕에 정식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목은선생은 연경에 10년 동안 있었는데 그가 친 제과는 중국 사람과 같이 쳐서 외국인들만 모아 실시했던 빈공과보다 더 합격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런 시험에 합격하여 비로소 향반에서 서울 양반이 되어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수당가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영의정에 올라 집안의 중흥을 이끄는 등 양반 가문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는데, 19세기 수당 이남규(李南珪) 선생을 시작으로 4대에 걸쳐 독립·호국정신을 드높였다.
수당 이남규 선생은 1855년에 태어나 이후 문과 급제를 하여 승정원동부승지, 공조·형조참의, 안동부관찰사까지 지낸 조선 양반이었다. 그가 진실된 양반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애국정신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었는데,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항거 활동을 시작하여 일제침략에 맞서 홍주의병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그의 항거 활동 때문에 매일 일본 경찰이 와서 고택을 지켰다. 그런데 수당선생은 가마꾼과 아들 이충구(李忠求)와 함께 길을 나서던 도중 일제에 의해 아산 평촌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항거정신은 그의 항거 활동과 함께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이라는 고귀한 정신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수당선생의 호국 정신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손자 이승복(李昇馥)은 연해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22년에 귀국하여 조선·동아일보 및 신간회에서 활동했다. 실제로 그가 신간회에서 활동한 문서가 남아 있어 그의 독립·호국정신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4대 이장원(李章遠)은 기념관장의 형님이셨는데 해병사관후보생으로 1950년대에 입대하여 51년 6.25 전쟁 때 원산에서 사망 순국하셨다.
수당 기념관에는 수당가의 위인의 업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 전해오는 선대유물 및 고문서가 잘 보존되어 있어 필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과거 급제 후 받은 교지, 이산해의 시고, 월급을 얼마만큼 주는 지 알려주는 녹패 등 여러 고문서가 남아있었는데 오래된 서체에서 나오는 서예의 미학을 감상하는 것도 좋았으나 평소 박물관에서 보기 어려웠던 양반가의 생활품들에 더 관심이 갔다.
마패 주머니는 이전에 수당기념관을 방문했을 때도 봤지만 그 시점을 기준으로 박물관에서 본 적이 전무후무하여 다시 방문해서 봤을 때 더욱 집중해서 봤다. 박물관에서 마패만 전시해서 본 경우는 많았으나 그것을 어떻게 들고 다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수당가문의 마패 주머니를 보고 비로소 그 쓰임새를 알게 되었다. 마패를 주머니에 넣고 허리에 끈을 묶는 식으로 썼는데, 주머니만 남아 있는 이유는 마패는 쓰고 반납하는 것이라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상아홀은 오늘날의 화이트보드와 비슷했는데, 상아를 얇게 자른 단면에 붓으로 글씨를 써서 메모하고 물로 지우는 식으로 쓴 조선시대 메모장이었다. 조상들이 직접 실생활에 어떻게 물건을 썼는지 알 수 있었던 귀중한 유물들이었다.
기념관에서 유물과 고서까지 본 후에 고택에 향했다. 수당고택은 특이하게 여느 한옥과는 달리 대문이 없었는데, 사랑채 마당에 들어가기 전 돌에 적힌 ‘반환대’가 대문 역할을 했다. 대문 없이 돌에 글귀를 새겨 입구를 알리는 특이한 형식에 놀랐고, 자연을 구조물로 삼은 조상들의 자연친화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봄날의 아름다운 고택을 보고 감상하며 좋은 모습을 남겨 두기 위해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그 때 대청마루로 다들 올라오라는 말씀을 듣고 서둘러 마루로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대청에 둘러 앉아 고택 앞뒤의 풍경을 바라보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탁 트인 전경과 산 아래에 지어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밤에 서늘하고 마루에는 백해 등을 깔아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는 등 한옥의 건축 과학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청의 안쪽이 약간 위로 솟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은 여름에 창을 쳐놓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거나 어른이 앉아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공간이었다. 대청에서 구분된 공간 하나만으로도 조선시대 한옥에서의 생활을 알 수 있어 연이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당시의 남녀윤리가 건축에도 반영되어 있어 유심히 설명을 들었다. 한옥에서 사랑채는 남자, 안채는 여자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실제로 5살까지는 안채에서 남자아이가 크다가 이후에는 사랑채에 가서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수당 고택 안채 입구 세 칸은 머슴이 살던 곳인데 본래 안채가 여성의 공간이라 보이지 않기 위해 안쪽 공간과 꺾여 있는, 내외단이 있어 남녀의 공간이 구분되고 내외하던 그 시절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수당고택이 다른 고택에 비해 또 특이했던 점은 사랑채가 옆에 위치하고 안채가 사랑채보다 높게 지어져 안채가 더욱 부각되어 보였던 것이다. 이는 고택을 지으신 분이 여성이라 다른 고택보다 여성중심화 된 것 같다고 추측된다. 안채의 여성들에 대한 배려는 안채의 입구에서도 나타났다.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지고 들어갈 때 보다 손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치마를 걷지 않고 들어갈 수 있도록 입구 모양이 원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채는 지금도 후손들이 가정집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 모습에서 지난 추계답사 때 방문했던 해남윤씨 고택이 연상되었다. 그 곳에서도 안채를 현재 가정집으로 리모델링하여 쓰고 있었는데 역시 안채는 몇 백년이 지나도 살림을 하고 살 수 있는 알짜배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당고택에서 보고 감명 깊었던 1위는 사랑채, 안채도 아닌 사당이었다. 명문 양반가의 고택이라면 신주를 모신 사당은 당연 있어야 하는데, 수당 고택에서는 겉으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념관장님께서 안채 구석의 문을 여시더니 이곳이 신주를 모셔 놓은 공간이라고 하시며 소개 해주셨다. 이런 구조는 처음 봐서 모두들 달려들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 겨울에 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장소였는데, 다시 와서 보게 되니 온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신주는 특이하게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휴대가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재 등 긴급 상황 시 신주를 쉽게 들고 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수당고택은 독특한 구조로 한산이씨 가문의 전통·역사·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유산이었다. 수당 고택에서 얻은 여운을 안고 든든한 점심을 먹은 뒤 추사 유적지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추사 고택을 보며 수당 고택과 비교해보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추사 고택은 수당 고택과는 다르게 일반 고택과 거의 흡사한 구조였다. 대문이 있고 안에 들어서면 사랑채, 안채, 사당 순으로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집들이 사랑채를 제외하고는 동향을 하고 있었는데, 사랑채 앞마당 화단에 석년(石年)이라고 새긴 길쭉한 돌이 눈에 띄었다. 옆 팻말의 설명을 보니 그 돌은 해시계로 그림자 길이로 시간을 측정하게끔 한 장치였다. 사랑채는 ㄱ자 형태로,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고, 꺾이는 부분에 대청을 두고 동쪽으로 큰방, 서쪽으로 건넌방을 둔 수당고택과는 많이 다른 구조였다. 수당고택보다는 추사고택의 사랑채가 조금 작지만 더 권위적인 것 같았다. 안채는 보통 안채처럼 ㅁ자 구조였다. 본래 안채 들어서는 곳에 내외벽이라는 벽이 문간에 있어 안채가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는, 수당 고택의 내외단같은 구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다. 안채 역시 수당고택보다 조금 작은 느낌이 있었으나 대청은 넓어 보다 트인 느낌이 있었다. 추사 고택의 사당은 보통의 경우처럼 독립 건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추사 고택은 아쉽게도 추사의 직계손이 끊어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사이에 헐려 변형이 심하게 되었기에 수당 고택이 가지고 있는 옛스러움이 많이 묻어나오지 않아 아쉬운 면이 있었다.
아침에 학교에 집합해서 당일치기로 충남까지 답사를 다녀온 것은 거의 6개월 만이었다. 그 시간동안 그 장소들은 변함없었지만 계절이 바뀌면서 필자에게 주는 인상은 달랐다. 따뜻한 봄기운에 어우러져 충청도 고택 2곳을 내실 있게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처음 갔을 때보다 더욱 자세히 설명에 경청하고 관심을 두어서인지 얻어가는 것이 많았고, 이전에 비해 새로 알게된 점도 있어 같은 곳을 여러 번 방문해도 새롭게 느끼는 점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참고문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 돌베개,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