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0월 8일 오전 9시, 서울 청량리경찰서 강력반 홍인수(가명·당시 34세) 순경은 전날 밤 당직자로부터 한 통의 제보를 인계받았다. 청량리서 역전파출소에 제보된 신고는 `한 청년이 세탁소에 피묻은 옷을 맡기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강력반의 막내였던 홍인수는 제보를 받자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보다 30분 전인 오전 8시 30분께. 20대 중반의 깡마른 청년이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광명세탁소(주인 하모씨·당시 26세)의 문을 열었다. 청년은 가게를 지키고 있던 주인 하씨의 어머니 진모(당시 50세)씨에게 입고 있던 블루진 상하의를 세탁해 달라고 했다.
진씨는 “입은 옷을 세탁하면 뭘 입고 다니냐”고 물었다. 청년은 “날씨가 추워 속에 옷을 한벌 더 입었다”며 옷을 벗었다. 청년은 “친구와 싸우다 코피를 흘려 피가 묻었다”고 둘러댔다.
세탁소 주인 하씨는 직감적으로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코피를 흘렸는데 하의에 피가 묻었고 별로 춥지도 않은데 안에 바지를 두겹으로 껴입었다는 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수상한 세탁물을 신고하라는 경찰의 당부도 떠올랐다. 하씨는 바로 옆 청량리경찰서 역전파출소로 뛰었다.
홍인수는 세탁소 안에 들어가 잠복했다. 청년은 오후 2시께 옷을 찾으러 오겠다고 말했으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홍인수는 “당시 성동서 관내에서 전당포 강도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세탁소에 수상한 세탁물을 신고해달라고 했으나 문제의 청바지는 무릎 부분에 피가 한방울 정도 묻어있는 상태였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안이었다”고 회고했다.
청년은 오후 4시를 훌쩍 넘겨서야 세탁소를 찾았다. 홍인수는 “왜 피를 흘렸는가”라며 청년을 다그쳤다. 청년은 “사촌누나의 동생과 싸웠다”고 둘러댔다. 홍인수는 그를 앞세우고 미아리 판자촌의 사촌누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사촌누나는 “동생과 싸우지 않았다”고 상반된 진술을 했다.
청년은 말을 바꿨다. 이번에는 미아리 뒷골목에서 동네 불량배들에게 맞았다고 했다. 홍인수는 청년을 데리고 미아리 3거리일대를 뒤졌으나 목격자도 싸운 흔적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스름이 찾아왔다.
홍인수의 회고. “청년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데 그가 느닷없이 `어제 저녁부터 세끼를 굶었다.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그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에 배갈 한병을 비웠다. 배를 채우고 담배를 맛있게 핀 그가 갑자기 `형님, 사실은 한놈을 깠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깠다''는 말은 `죽였다''는 말의 은어가 아닌가. 살인범이라고는 생각도 않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그렇더라도 그가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공포로 몰아갔던 연쇄살인범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홍인수는 청년을 경찰서로 연행했다. 청년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청량리서에 연행된 청년은 `때리면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털어놓은 첫번째 범행은 검거 바로 전날 서울 우이동에서 저지른 마지막 범죄였다.
경찰서 강력반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이동 야산의 살인현장으로 수사팀이 급파됐고, 청년의 얼굴이 경기도 일대 연쇄살인사건의 몽타주와 비슷하다는 점이 포착됐다. 그는 바로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당시 26세)였다.
수사는 서울시경 강력계로 넘어가고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베테랑 강력반 형사들로 수사팀이 짜졌다.
다시 홍인수의 회고. “김대두는 키가 160㎝가 채못되고 삐쩍 마른 작은 체구였다. 그런 김대두를 연쇄살인범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김대두''인 줄 알았다면 같이 밥먹고 몇시간을 함께 다닐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사실 오싹하다. 그를 조사할 당시 `왜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나''라고 물어보니 `나는 몸이 약해 내가 먼저 죽이기 전에는 당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대답했었다.”
홍인수와 김대두는 한차례 더 만난다. 김대두의 신병이 서울시경으로 넘어간 뒤 김대두는 남대문서 유치장에 보호된다. 홍인수는 “남대문서에 찾아갔을 때 유치장에서 제일 큰 방에 김대두가 누워 있었는데 함께 수용된 수감자들이 그를 안마해주고 상전으로 모시고있었다”고 말했다.
홍인수는 김대두 체포로 일계급 특진했다. 김대두가 검거된 10월 8일 밤 박경원 내무장관이 직접 청량리서를 방문했다. 다음날 국회에서 경기지역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추궁이 있을 예정인 상황에서의 터진 김대두 검거의 낭보인 만큼 경찰은 축제분위기에 빠졌다.
경찰에 모든 것을 털어놓은 김대두는 사회에 대해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에 나온 김대두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교도소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배운 기술도 없을 뿐 아니라 장사할 돈도 없었다. 친척과 친구들도 전과자라고 냉대를 했다. 그럴수록 남보다 끗발나게 살고 싶었는데 집에서 도와줄 형편이 못돼 일을 저질렀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젖먹이는 우는 소리가 귀찮았다. 처음 전남 광산서 살인하고 나니 그후로는 사람 죽이는 일이 두렵지 않았으며 내 깡이 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대두에 대한 현장검증은 그의 첫번째 범행지역인 전남 광산을 시작으로 10월 10일부터 시작됐다. 그는 현장검증에서도 `빨리 끝내자''며 신경질을 내거나 히죽히죽 웃고 검까지 씹어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김대두의 고향은 전남 영암이다. 그가 저지른 초기 범행 두건이 전남 광산과 무안에서 일어났고 전남에서만 4명이 살해됐다.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두의 살인행각으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호남푸대접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김대두의 범행은 호남인들의 자존심을 구겨지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지금도 김대두는 살인마의 전형으로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오주승기자jsoh@kwangju.co.kr
**김대두의 범죄일지**
김대두의 살인릴레이는 75년 8월 12일 새벽 전남 광산군 임곡면 고룡리 한 외딴집에서 시작됐다. 김대두는 이날 밤 12시께 안모(62)씨 집에 잠입한 뒤 새벽 3시께 안씨 집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잠에서 깬 안씨가 도망가자 이를 살해하고 안씨의 부인 박모(58)씨에게 중상을 입힌다.
김대두가 55일 후인 10월 8일 서울에서 검거될 때까지 전남과 서울·경기를 오가며 저지른 9차례(17명 살해, 3명 중상, 3명 강간)에 걸친 살인질주의 시작이었다.
첫 범행 뒤 목포로 간 김대두는 순천행 기차를 탄다. 여기서 우연히 수원교도소 한 감방에 있었던 교도소 동기 김회운(당시 29세)를 만났다. 둘은 무안군 몽탄역에서 내린 뒤 철길을 따라 가며 범행장소를 물색했다.
9월 7일 새벽 2시께 몽탄면 당호리 2구 박모(55)씨의 집에 침입, 돈을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박씨와 부인 서모(56)씨, 손자(6)를 살해한다. 여기서 강취한 돈은 단돈 250원. 둘은 “이왕 죄를 지을 바에는 돈이 많은 서울에서 하자”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서울역에 도착한 뒤 둘은 일단 헤어진다. 이후 범행은 김대두 단독으로 이뤄진다.
제3범행, 9월 11일 서울시 면목4동 용마산 중턱에서 최모(60)씨 살해-제4범행, 9월 24일 경기도 수원시 송탄읍 양모(40)씨 집에 침입, 양씨의 어머니 최모(70) 할머니, 다섯살과 여덟살난 손자 둘, 손녀(11) 등 4명 살해 고추 15근 탈취-제5범행, 9월 27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읍 변모(50)씨 집 습격, 변씨와 부인 손모(40), 아들(3) 살해, 장녀(15) 등 2명 중상, 2만1천원 탈취-제6범행, 9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남면 양모씨의 부인 윤모(28), 생후 3개월 여자어린이 살해, 1천500원 탈취-제7범행, 10월 2일 경기도 수원시 우만동 칫골산 근처 독립가옥 침입, 노모(38)씨와 부인 김모(37)씨 살해-제8범행, 10월 3일 경기도 성남시 낙생동 남서울 컨트리클럽 근처 야산에서 캐디 이모(21)양 강간, 1천450원 탈취-제9범행, 10월 7일 밤 서울 우이동 수원교도소 감방 동기 이모씨 살해.
김대두가 전남과 서울·경기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약 두달동안 전국은 살인 공포에 휩싸였다. 김대두는 주로 외딴집이나 노약자, 어린이들을 범행의 목표로 했다. 17명의 목숨을 앗아 뺏았은 돈은 모두 2만6천800원에 불과했다.
김대두는 82년 4월 경남 의령경찰서 궁유지서 우범곤 순경이 인근 5개마을 주민 56명을 하루사이에 살해한 소위 `우순경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기록적인 살인 수치를 남겼다.
김대두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하던 1975년 10월 말. 변호사 이상혁(당시 39세)은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의 주인공은 서울 법대 1년 후배이자 사시 동기인 심훈종 부장판사. 심 부장은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연쇄살인범 김대두 재판을 맡았는 데 일체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 국선변호인이 돼 재판진행을 도와달라”고 부탁해왔다. 심 부장은 김대두 담당 재판부인 서울지법 형사 8부의 주심이었다.
1967년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이상혁은 72년부터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심 부장은 이 변호사와의 인연과 그가 교화위원이란 점을 감안해 어려운(?) 부탁을 해온 것이다.
이 변호사는 김대두에 대한 국선변호를 승낙한다. 이상혁은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난 김대두에 대해 “깡마르고 새까맣고 못생긴 얼굴이었다”고 회고했다. 김대두의 말에서는 아직 독기가 흘렀다.
이상혁의 회고. “첫 접견 때 그는 `당신 검찰의 앞잡이지. 적당히 재판해서 나를 사형시켜 버리려는 것 아닌가''라며 나를 몰아세웠다. 부의 불평등, 사회적 차별에 대한 분노를 욕설을 섞어 거칠게 표현했다. `있는 놈들은 배불리 먹고 우리같은 사람들은 무관심이다''고 쏟았다. 이런 자를 변호해야 하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꾸준히 접견을 신청했다.”
이상혁은 모두 다섯번 김대두를 접견했다. 국선변호인이 사형이 분명한 피고를 여러번 만난 경우는 거의 없다. 이상혁은 세상사의 우스개소리를 하면서 그를 달랬다.
“`틀림없이 사형구형되겠지만 무기로 감형되도록 모든 노력을 하겠다''고도 했다. 김대두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그가 `이 변호사 같은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우리사회는 바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상혁은 이런 말도 했다. “네 이름 대두는 큰 대(大)에 말 두(斗)인데 결국 `큰 사람''이란 뜻 아닌가. 사형을 받아 죽을 몸이고, 인격체로서의 시간은 짧게 남아있지만 유용하게 크게 살아라. 그 길만이 인간다운 모습 되찾는 것이고 피해자에게 회개하는 길이다.”이상혁은 자신이 재판을 맡는 한편, 종교교화는 김수진 목사에게, 개인교화는 김혜원이란 여성에게 맡겼다.
재판은 진행됐다. 혐의가 뚜렷했기 때문에 쟁점도 별로 없었다. 75년 11월 17일 오혁진 검사는 김대두와 공범 김모에게 강도살인 등을 적용, 사형을 구형했다. 1심 선고도 마찬가지였다.이 변호사는 마지막 변론을 통해 “`남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불빛은 많은데 내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피고인의 한탄은 바로 집단에의 귀속의식이 충족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사형제도 폐지론의 조류에 따라 실증적인 하나의 연구로서 피고인을 무기로 감형시켜 달라”고 말했다.
김대두는 항소했다. 이 변호사는 “김대두는 평소 `무기감형은 원치도 않고 죽은 목숨으로 여기고 담담하게 가겠다''고 말해왔다. 그가 항소한 것은 공범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항소심인 서울고법 제3형사부(재판장 김병연 부장판사)도 김대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공범 김모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범행에 가담했다”며 무기로 감형했다.
76년 3월 18일. 김대두의 항소심 판결이 내려진 날이다. 김대두는 상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 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접견실. 가죽수정(양팔에 채운 가죽수갑)을 찬 김대두와 40대 초반의 여성의 첫만남이 이뤄졌다.
이 여성은 김대두의 교화위원인 김혜원(당시 40세). 김혜원은 전남 구례출신으로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나온 재원이다. 당시에는 수도여고 교사를 그만둔 뒤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김혜원은 김대두의 마지막 나날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사람이다.
김혜원은 “가냘프고도 작은 체구였다. 수줍은 듯 미소를 짓자 그의 가느다란 눈이 눈꺼풀 속으로 숨어버렸다”고 첫 만남을 말했다.
김혜원과 김대두와의 인연은 75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만남 3개월 전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김혜원이 먼저 신앙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김대두도 이에 답해 편지를 보냈다.
김혜원의 회고. “우리 둘은 우선 기도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렵고 흉악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순진하고 순박해 보였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단 `벌레만도 못한 나를 무엇하러 찾아오느냐''는 말만 기억난다.”
이후 김혜원은 한달에 두번씩 김대두를 찾았다. 김혜원의 기억에 김대두의 가족 중 면회를 온 경우는 어머니 뿐. 김대두는 면회온 어머니에게 “다시는 면회오지 마라. 고향의 사모님이 잘 돌봐주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해를 마감하는 76년 12월 28일 김혜원은 서울구치소로 부터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혜원은 결국 그날 구치소로 가지 못했다. “그때 마지막 길을 보지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김혜원의 술회다.
김대두는 바로 이날 사형당했다. 김은 자신의 종교교화위원인 김수진 목사를 통해 유언을 남겼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회의 전과자들을. 좀 더 따뜻히 대해주셔서 갱생의 길을 넓게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은 더욱 간절하고 누구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알라주시기 바랍니다. 교도소에서 초범자와 전과자는 분리 수용하여,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요.”
/오주승기자 jsoh@kwangju.co.kr
**김대두가 보낸 편지**
김대두는 김혜원씨를 비롯, 김씨의 남편 박일재 변호사, 아들·딸 등에게 모두 18통의 편지를 보냈다. 김대두는 이 편지에서 김씨에 대한 감사와 함께 김씨의 가족, 특히 자녀들의 건강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의 편지는 그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인 75년 12월 시작돼 사형당한 76년 12월까지 꼭 1년동안 보내진 것이다. 편지 원문(일부 맞춤법은 교정)을 그대로 옮긴다.
`…사치와 허영심에 사로잡혀 허황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범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생충처럼 다른 사람을 갉아먹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지몽매하였던 나의 발자취 얼마나 욕스럽고 못난 인간이었던가. …부질없는 이 죄인으로 인하여 무참히도 피해를 입은 영혼들에게 이 세상에 못다한 명복을 저승에 가서라도 빌어주겠습니다'' (75년 12월 17일)
`다사다난했던 을묘년도 악몽속에서 사라지고 밝고 희망찬 병신년의 아침을 맞이하여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의지할 곳없는 이 못난 죄인이 사모님에게 첫 세배를 올립니다.… ○○, △△꼬마께서 보내주신 카드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이런 카드를 받아보니 가슴이 뭉클했읍니다'' (76년 1월 1일)
`추악하고도 흉악한 살인마라고 부릅니다. 역시 돌이킬수 없는 죄를 저질르고 말았습니다.…얼마남지 않는 생애지만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할수 잇는 정신이 무엇인가…그것은 오로지 교도관의 지시에 순종하고 나의 악마같은 손에 희생된 영혼들에게 명복을 빌어주고 각성하는 길이옵니다'' (75년 1월 17일)
`4월 18일(부활절) 세례를 받았습니다.…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군요. 그 눈물은 괴로움과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요, 그 눈물은 죄사함과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76년 5월 9일, 김혜원의 남편 박일재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이! 어머니 말씀들으니 감기에 걸렸다는 데 다낳은지.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공부열심히 하고 착한 꼬마 아저씨에게 감기를 걸리게 하셨는지, 하나님도 무정하셔!…△△이 그럼 공부 열심히 해요.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5월은 어린이날, 어린이 세상...''(76년 5월 30일, 김혜원의 아들 △△에게 보낸 편지)
`어느덧 모진 장마도 지나가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이때…죄수 대두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주님의 은혜가운데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면서 모든 지은 죄를 주님 앞에 속죄하면서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앞에 기도를 드리고 있읍니다''(76년 7월 22일)
`다사다난했던 76년의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의 한해를 보냅니다.…존경하는 사모님 그동안 이 죄인을 위해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쁜 가정일을 뒤로 미루고 이렇게 찾아와 주신 데도 주님의 은혜로움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형제의 병이 완쾌되기를 기도드리겠어요. 안녕히 계십시요'' (12월 18일자 마지막 편지)
**사건 이후**
김대두는 화장돼 경기도 벽제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김대두의 두번째 범행을 저지른 공범 김모(김대두의 수원교도소 동기)는 20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현재 결혼해 수도권에서 살고있다.
김대두의 국선변호인 이상혁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교화활동을 계속하고있다. 82년부터 최근까지 20여년동안 서울구치소 교화협의회장을 지냈다. 수감자 2천여명을 계도한 공로로 87년 국민훈장 동백장도 받았다. 89년에는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회장을 지내고있다. 그는 김대두를 비롯, 50여명의 사형수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2003년 10월 변호사회의 `이달의 법조인''에 선정됐다.
그는 기자에게 `선행은 몰래하라. 자의든 타의든 이를 들키면 곱을하라''는 말을 인용하며 자신을 숨기려했다.
김혜원의 남편인 박일재 변호사는 95년 고향인 영암에서 초대 민선군수로 당선된다. 김혜원은 이때 은밀하게 김대두의 모친을 만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김혜원은 지금도 서울구치소의 종교지도위원과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실행위원이다.
김혜원은 “최근 김대두사건을 영화화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그 사건을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가 설령 회개하고 갔더라도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의 아픔을 되살리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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