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믿음 이외에는 어떤 구원의 장치가 전혀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사람으로 이끌어 가시고,
지옥보낼자는 어떻게 해서든 지옥보내고야 마시는 주권자임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펌글(칼빈 삶 행적의 어두운 면을 볼 때,
성령을 따르는 자로 보기엔 미심쩍으며 구원받지 못한 죄인으로 단정한 글)
에 대한 사실 여부와 평가를 설명듣고 싶습니다.
소위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저 우리들과 비슷한 연약함과 독선에 빠진 자아도취자로 보아야 할런지요?
[펌글 내용 전문]
어거스틴-칼빈을 일컬어 기독교 진리의 전달자라고 하는데,,
이대 교목이셨던 조찬선 목사님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죄악사에서
"칼빈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라고 하셨다.
칼빈은 제네바 치리 시절, 16000여명의 제네바시민들을 종교적철권으로 통치하였다.
카톨릭이 거의 천년이 되어 자행한 화형을 불과 100년도 못되어
개신교의 이름으로 자행한 장본인이니
곧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반대하던 세르베투스를 화형시킨 것이었다.
그전부터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자기 눈앞에 나타나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였으며
세르베투스가 자신의 예배에 참석하자
그를 곧바로 체포케하여 화형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는 기독교 강요 초판에 실었던 내용,
종교와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슬그머니 삭제하였다.
그는 예배에 참석치 않은 자를 금식케하고 벌을 주고
자신은 주일 예배 후 청년들과 오락을 즐겼으나
카드놀이한 교인을 채찍으로 때리고
자신은 담배를 즐겨 피우면서 정신건강에 좋다고 했고
자신을 위선자라고 한 사람을 혀에 꼬챙이를 꽂아 기둥에 묶어 죽이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자들을 추방 혹은 사형시키며
개신교 역사에 유래없는 신적권력을 향유하며 피의 보복을 즐겼다.
그런 자가 어찌 성령을 따르는 자이리요.
오늘날 칼빈의 후예들도 이와 비슷하여 온갖 간음과, 도박, 싸움, 분쟁,
비리 등을 일삼고 있으니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5:31)"는
성령의 말씀은 오늘날 한국교회 칼빈의 후예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고 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삼위일체를 가리켜 삼분신(三分神), 삼두견(三頭犬) 운운하여 칼빈을 제네바로부터 제거코자 했으나 도리어 화를 자초하고 말았던 인물입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가 한 본질 안에 거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셋으로 나뉘어져 신의 유일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셋은 단순히 환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격위(格位)란 신의 본질 안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외부적 어떤 관념이라는 것" 곧 신이 우리를 위하여 혹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나타나는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타초에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에 신 안에 아무런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 신에게서 나온 신으로 나타난 후로는 성령도 그에게서 '다른 신'으로 유출하였고, 이렇게 유출된 성령은 신성의 그림자(유령)이다 고 보았습니다.
경륜(배분)의 방법에 따르면 마치 인간이나 나무들 혹은 돌들 중에 있는 본질상 동일한 영이 신의 일부분인 것처럼, 성자나 성령도 신의 일부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세르베투스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삼위의 위격은 신의 영광이 밖으로 나타나는 가견적 모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칼빈은 제네바 시민 정부를 자신의 신정정치론에 따르도록 요구한 입장에서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곧 제네바 시민 정부에 대한 정치적 이데오르기를 전면에 내세운 반발세력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요즈음 말하면 김일성 주체의식에 물들어 반공세력을 도리어 몰아내려는 인물이 세르베투스인 것입니다. 칼빈이 시민정부에 대해서 세르베투스를 위험인물로 보고 사형집행 하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이미 완벽한 신정정치를 꿈꾸는 제네바 시민정부가 칼빈에게 넘겨준 권한의 일부라고 칼빈이 생각하듯 합니다.
그러니
칼빈이나 제네바 시민정부의 문제점은 완벽한 신정정치가 이 세상에서 실시 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정치성향에 문제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나 말로 안될 때는 신성한 권세(?)를 행사할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하는 강자(强者)를 지향하는 의식 말입니다.
칼빈의 이러한 잘못된 의식은, 그의 예정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칼빈의 신론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삼위일체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즉 일반적인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님 의식이 그의 신학의 전편에 깔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인간의 세상에 '적응'(Accommodation)하시는 형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쪽에서 먼저 자신을 낮추시어 자신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그는 루터와는 달리, 십자가를 비켜가서도 알 수 있는 예수님과 신론을 주창하고 있는 겁니다. 그 신론을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를 다듬어서 그 삼위일체 중심으로 구원론을 뽑아내느데 그 삼위일체 신론의 내재적 관계에서 소위 그의 '예정론'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예정론은 성경적인 예정론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최고 신', 즉 '신의 주권의식'의 논리적인 확장에서 비롯된 의식입니다.
이것은 확정된 지식은 곧 신이 내린 합법적 권세를 동반된다는 의식도 아울러 갖게 합니다. 즉"옳은 일 하겠다는데 감히 누가 나에게 덤벼..."하는 식이죠.
이러한 정치의식은 20초 히틀러에게 충성한 법철학자이며 카톨릭 옹호자인 칼 슈미트 의식으로 만개하고 있습니다. 즉 신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는 이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권한을 행세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교황처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그 인간이 가진 신성한 권력적 은사 행사를 무시해서는 아니된다는 주장을 칼빈이 길을 터놓은 겁니다.
교회 내에서 실시하는 '당회적 차원의 치리(治理)'라는 것도 이런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사람 하나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칼빈의 후예로 자처하면서 마치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처럼 복음 대신 완전한 이상적인 교회을 가견적으로 만들고자 해서 사람들을 영적으로 사형시키는 오늘날 한국 교회를 사람들이 여전히 참된 교회인 양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참된 신자는 여전히 십자가의 운명을 밖으로 보여주기에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여전히 약자(弱者)인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롯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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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근호 목사님의 글에 대한 이효종님의 반론 1 )
칼빈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언급에 대해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답변인 것 같아서 제가 몇 말씀드립니다. 저는 자주 십자가마을에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이근호 목사님께서 자신의 신학사상과 조금 다를 성 싶으면, 악마라는 섬뜩한 단어를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보고 조심성 있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김홍배님께서 질문하신 칼빈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님의 주저 없는 비판에 대하여, 사실을 바로 잡아야 되었기에 몇 자 올립니다.
과연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까? 그리고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상황적 근거가 작용했을까?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 과연 누가 그 시대의 정확한 사정을 근거로 해서 명쾌하게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이는 그리 쉽게 대답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 생각되어집니다.
저 자신도 한 때는 칼빈을 존경하면서도, 그가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키는 일에 주도적인 일을 감당했다는 이유만을 근거로 그를 배척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에 소개된 칼빈에 관한 글들이 너무 편협한데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본인이 네달란드 자유대학 도서관에서 접한 칼빈의 글들을 보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칼빈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것은 퍽이나 다행스러운 것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읽은 책들은 오래되어서 기억은 안나지만, 폐의 혈액 순환기능을 발견한 과학자이자 ‘삼위일체의 오류(1531년)’의 저자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1553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화형에 처해졌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인 것은 칼빈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칼빈은 그의 방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흠집처럼 따라다는 것이 세르베투스의 화형사건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교회사를 기록한 책들은 당시에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칼빈이 참지 못해서 죽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단 몇 권의 책을 일고 명확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들을 검토해 보면, 그러한 사실들이 허구라는 것으로 즉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글들 속에는 당시 세르베투스의 화형 집행은 칼빈 개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5명으로 구성된 제네바 소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었는데, 이 소위원회의 결정은 칼빈이 아닌, 당시 다른 개혁파 목사들의 자문을 통하여 이미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결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칼빈은 재판정에서 세르베투스의 행위에 대하여 증인 역할을 하였으나, 재판이 진행되어지는 과정에서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막기 위해서 노심초사하였고, 재판이 끝난 뒤에도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살리기 위해서, 세르베투스의 소신을 바꾸기 위한 노력들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소위원회가 화형을 결정하자 칼빈은 이미 자신의 한계를 떠난 결정에 대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세르베투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 참수형을 요구했지만, 재판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제네바 소위원회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는 일부 교회사의 기록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그것은 훗날 제나바에서의 칼빈의 종교개혁이 반대파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보여 졌고, 그들에 의해서 칼빈은 더욱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처럼 묘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미 수백년 지나간 역사를 한국에 알려진 몇 권의 책들만 가지고 과거의 일들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개혁파 교회들은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개혁파 교회임을 표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칼빈의 심오한 신학사상의 뒷받침 없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혁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 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으로만 이야기 하자고 말합니다. 근데 칼빈만큼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것은 의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도 대장간을 통하여 많은 글들을 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만큼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책을 써낸 사람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행7:58). 혹자는 바울이 스데반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설령 직접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죽어가는 스데반을 사울이라고하는 바울의 발 앞에 둔 것은 바울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스데반을 죽인 바울에 대하여 비판을 합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히 특심하여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던 자신의 죄를, 나중에서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다고 단정할지라도 그의 모든 업적을 우리는 한 가지 사건으로 뒤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진실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한 그였기에 그는 죽기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때 엄청난 죄를 지은 고재봉이나 김대두 같은 인물들도 후에는 회개하고 죽었다는 사실 속에서 한 때 실수한 죄를 가지고 그들의 모든 삶까지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인간의 속 좁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모든 인류가 다 똑 같습니다. 단 인간들이 판단하는 경우에 따라서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예정론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떠나서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정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진행되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가 사단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깨어짐으로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 곧 죄가 침범하지 못하는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시기 위해서, 때를 따라 당신의 종들에게 약속하신 일들을 역사를 따라 성취해가는 여정들이, 곧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이를 언약적 구속사에 담긴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실현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류의 구원은 처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도 성경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 다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약간의 차이는 서로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내용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기복주의를 부추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오순절계통의 신학들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마을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신자의 ‘성화적 삶’ 과연 가능한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근호 목사님의 주관적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예수를 영접했다고 해서 점진적인 성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은 한번 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착하게, 선하게, 도덕적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죄성을 가진 인간은 순식간에 사단의 꾀임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거룩한 목사일지라도 자기 심령 속에 감추인 죄의 속성은 여전하다고 할 것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다 옳은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누리는 성도의 삶은, 그들 심령 속에 성령께서 좌정하시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을 쫓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살아야 된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이 모두 명령어로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들은 너희로써는 어쩔 수 없는 존재니까 그 명령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좋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괜찮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허공에만 메아리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율법을 다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구원 얻은 성도들로서의 당연한 삶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은 신자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거처를 삼고, 우리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는 이 세상은 여전히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역사가 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도가 죄에 대하여 패배할 때 마다, 죄를 깨닫게 하시고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도록 붙들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들은 성도가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명령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질 못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주님께서 직접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 간단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명령한 것들은, 너희들은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한번 해본 소리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터인데.... 왜? 주님은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고,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면서 따라오라고 하셨을까?
“내가 너를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았다.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알았지”이렇게 말씀하지지 않고 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하는 삶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 십자가마을을 대표하는 모든 분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한 삶의 내용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삶이다”라고 너무 단편적인 말씀만 하시지 마시고,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삶의 내용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분명 여러분의 의지와 행함이 포함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기도를 할 때에도,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기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를 할 터인데 그 삶 자체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함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마을에서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을 거부한다고 해도 여전히 여러분은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을 때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져왔으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파괴되어져 왔고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값없이 주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오늘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해하는 사단의 권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어서 주님은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시고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시며, 때로는 질책도 하시고, 때리기도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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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효종님의 글에 대한 이근호 목사의 반론 2 )
칼빈의 대한 의견은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역사란, 기껏 '후차적 진술'이라는 표현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사형을 중차대한 오판이라 여겨 극렬히 반대했다면 그는 그 후 자진해서 그 제네바 시민정부 측과 손을 끊었어서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칼빈이 역사를 보는 '후차적 입장'이었습니다.
본인이 시민정부 측에 같이 묻혀 들어가는 것을 칼빈 본인이 용납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스데반 죽음에 대해서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으로 서슴없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개별적인 개인으로 고립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사람의 성향을 알아보겠다고 덤비는데서 흔히 나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소위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에게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기원전 368년경 플라톤은 시칠리아의 독재자 디어니시오스 2세의 야심에 말려들어 시라쿠스로 정치에 참여하려 갑니다. 중간에 친구 디온의 농간에 말려들어서 말입니다. 이런 유혹으로 인해 나중에 플라톤은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유명인사 흔들기는 일종의 재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적과 동지를 무슨 기준에 의해서 구분지었느냐로 가판가름됩니다.
제가 지적하는 것은 칼빈에게는 정치적 결정이 복음적 결정보다 앞서 있다는 점입니다. 즉 정치를 통한 이상 신정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의사가 칼빈에게 있었는데 이는 칼빈의 모든 신학 사상의 근간이 됨을 부인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칼빈의 성화론은 이런 점에서 복음적으로 비난받아야 합니다.
성화론의 성립 자체가 정치색을 띱니다.
즉 "내가 타인의 신앙을 관찰하고 판단내릴 기준을 나는 수립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곧 성화론을 낳게 하는데 이것은 사고방식이 성경의 뜻과는 무관하고 오로지 '교회정치'와 관련되어져서 나오는 발상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칼빈의 주장대로 "교회 내에서 목사 말에 순종해서 구원받는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나오는 것이 예수님의 의(義)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 나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해서 거룩의 질(質)에 우열을 논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마치 자처해서 '주님 노릇'하겠다고 나서는 행위와 같습니다.
도덕이나 윤리는 시시각각으로, 그리고 형편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본인이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행한 짓이든 아니면, 본인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나오는 감격의 표현이든간에 결코 겉행동으로서 판정을 내리는 기준은 인간의 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인식은 그 자체로도 역시 순환논리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인간이 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판정을 내리는 것이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놓고서도 성령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인간으로 인해 성령을 받은 자가 정죄된 정치적 처형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부 일률적으로 정리하면 '십자가 복음에 의해 정죄받고 지배받는 묵시적 기간(에이온)'으로 접어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적 관점'입니다.
새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성화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기초한 '거룩론' 밖에 없습니다.
이 거룩론은 교회 정치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義)인 복음에서 나옵니다.
즉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거룩론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행위에 기초를 공격하는 예수님의 행위에서 나온 거룩론이죠.
이러한 거룩론을 이 어두운 묵시적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증인의 바른 사명입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성화론은, 신앙이 없어 기껏 보이는 교회의 존재와 그 안의 행정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측정하고 손에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구실과 핑계 노릇을 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상품으로 삼아 종교 사업 하기 딱 좋은 논조를 칼빈이 후대들에게 전수해 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 신앙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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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근호 목사님의 글에 대한 이효종님의 반론 2 )
외람되게 다시 한 번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혹시 저의 글을 통해서 감정이 상하셨을 수도 있는데 부드러운 글로써 답변을 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근데 이근호 목사님께서 칼빈에 대한 의견에 동감하신다고 서두에서 말씀하셨는데, 어떠한 의견에 동감하신다는 것인지 확실하질 않습니다. 단지 시대적 상황만 동감하시는지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만약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사형을 중차대한 오판이라 여겨 극렬히 반대했다면 그는 그 후 자진해서 그 제네바 시민정부 측과 손을 끊었어야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쉽게 판단해야할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실제적 상황이 어떠한 지를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우리들의 단편적인 사고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시대적 상황이 만든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한국의 정치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일들을 보게 되는데, 과거에 어떤 사람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에 순응한 것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으로 명확하지 않은 사건들을 자기들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다시 회복되어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왜냐하면 제도권이 너무 물량주의, 기복주의, 정치권력의 도구화로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도권을 보면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울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 가고자하는 노력들이 전혀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기복주의를 배격한다고 외치면서도 기복주의 설교를 해대는 어처구니없는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노라면, 때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권 속에는 여전히 한국교회를 염려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소수는 어떻게 하면, 바른 교회를 이루어 나갈까 하는 명제를 가지고 노심초사 하며 바른 진리를 선포하고자 힘쓰는 부류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소수는 제도권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하면서도 제도권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들이 진리 임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을 박차고 나오지 못하는 피치 못할 사정말입니다. 이러한 피치 못할 사정들을 삼자가 나서서 함부로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소수는 제도권 속에 있으면서, 제도권의 변화를 기대하며 그 속에서 작은 불씨를 태우며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들을 제도권 속에서 나오지 않느냐고 함부로 비판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십자가 마을’을 방문하여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동조하는 많은 목회자들 중에는 심한 갈등을 느끼는 분들이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매료되어, 여기 저기 기웃 거리면서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이 참된 진리라고 외치면서,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저들은, 저들이 몸담고 있는 제도권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냥 제도권 교단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퍽이나 아이러니컬한 일이 되는 것이라 보아집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입장이시라면, 저들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십자가 마을’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글 보다는 이근호 목사님의 글들을 엄청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회건수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데, 모두는 아닐지라도 상당수는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동조하고 있는 분들이라 여겨집니다. 정작 저들은 자기들이 소속된 교단을 탈퇴하여 ‘십자가 깃발’에 모여든 ‘개혁노회’에 가입하지 않고, 이 ‘십자가 마을’에 올라와 있는 자료들만 취사선택하여 뽑아 가는 저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들은 내가 알바 아닙니다. 저들은 저들대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면 그만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근호 목사님께서 칼빈의 잘못된 이중성을 꾸짖을 자격이 있으시다면,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동조하면서도, 즉각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교단들을 탈퇴하여 ‘개혁노회’의 깃발아래 모이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엄중한 꾸짖음과 경고가 있어야 할 줄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마을’의 홈페이지를 폐쇄하는 결정까지도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는 적극 동조하면서도 자신들이 비판하는 제도권 속에 머물러 있다면, 저들은 말로는 동조하면서도 행위로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성화론의 성립자체가 정치색’을 띠고 있고, 이는 교회정치와 맞물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내에서 목사의 말에 순종해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 이치와 똑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저로서는 도저히 납들이 가질 않습니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칼빈주의)에 몸담고 있는 교회들 속에 목사의 말에 순종해야 구원 받는다고 설파하는 목사들이 과연 있다는 말씀입니까? 제정신이 아닌 목사가 아니고서야, 역사적 개혁파 교회 내에는 이런 목사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역사적 개혁파교회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오직 말씀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개혁파 교회의 본연의 의무이며 책무입니다. 근데 목사 개인의 말에 순종해야 구원 얻는 다는 소리는 이근호 목사님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러한 목사님이 계시다면, 저는 동조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교회의 정치적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도들에게 성화를 촉구하는 교회가 있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칼빈의 신학사상을 존중하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는 그런 교회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칼빈의 성화론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던지 아니면 무지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칼빈이 주장하는 성화는 정치적인 입장을 강화하고자 생긴 것이 전혀 아닙니다. 칼빈이 주장하는 성화론은 일부 신학자들이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점점 더 성화되어져서 성화의 도가 장차 극대화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 개인의 입장으로는 이 사상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마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성화를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칼빈이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정치적인 성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 본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캐톨릭 입장에서 보는 주장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원의 조건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개혁파교회에는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그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성화는 이미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저들이 주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성령께서는 저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셔서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보게 하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이 구원을 얻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책망하시기도 하시고 채찍을 가하기도 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스스로 자각 하도록 하는 역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 판에 새긴 새 언약의 증거(렘:31:31~33)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도의 성화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업적을 쌓는 것도 아니며,혹은 보상을 바라보고 수고하는 노력의 결과물도 아닙니다. 다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에 합당한 삶을 만들어 나가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마을’에서의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공짜로 구원을 받았는데, 거기에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를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행위 없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섭리에 따라 구원 얻은 성도의 삶은, 반드시 성령의 역사를 따라 세상과 구별된 성화적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겠다는 증거이며, 그것은 성도의 구원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주장처럼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훗날 회심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이후 그는 아무런 수고와 노력 없이 살았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구원 얻은 걸로만 만족하고 그냥 멍청하게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방인의 사도로서 가난함과 부요함에 굴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성화적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이렇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이유가 구원을 받기 위한 몸부림 이라고 생각되어지십니까? 물론 아니지요 이미 구원 얻은 백성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자하는 성화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근호 목사님은 도덕이나 윤리는 시시각각 변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기준에 의하여 성화적 삶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물론 타당성 있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도덕이나 윤리의 기준은 시대 상황과 문화의 차이에서 어떠한 것은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만고불변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10계명 같은 경우입니다 (4계명만 제외하고). 그러한 계명은 어떠한 시대, 어떠한 문화 속에서도 불변하는 만고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은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성화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기초한 거룩론만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성화론과 거룩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성화론적 의미가 더욱 더 풍부하게 드러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성경에서는 ‘거룩’이라는 말의 의미가 세상과는 구별되었다는 말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에, 더 더욱 구원 얻은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어진 성화적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 까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마지막으로 이근호 목사님은 칼빈이 예수님을 상품으로 삼아 종교 사업을 하도록 후대에게 전수해 준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는 가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칼빈이 종교 사업을 벌려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출판사를 등에 업고 복음을 팔고나 있지나 않은지 의심이 갈 뿐입니다. 설교 자료들을 cd에 담아 주문을 받는 것이 또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죄악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소한의 운영자금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노라고 자부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신앙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했는데, 진정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말씀에 이끌리어 성화적 삶을 살아가고자, 수고하는 사람은 절대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 혹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장하여 구원을 확증하고자 않습니다. 다만 구원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말씀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심만이 있을 뿐입니다. 비록 자주 실패하고 넘어질지언정 속히 일으켜 주시는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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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효종님의 글에 대한 이근호 목사의 반론 3 )
이효종님께서는 제가 언급한 것 중에 제일 핵심되는 대목을 누락 시켰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나 자신과 혹은 타인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기준을 가져야되겠다"는 의식의 문제점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에게 직접 마이크 대고 인터뷰를 해보세요.
"당신은 우리들이 볼 때는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대단한 성화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가 무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입니다.(고전 15:10)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고백만으로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혜택을 입느냐 아니면 제외되느냐 하는 것은 인간들의 애타는 몸부림과 요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시혜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목회가 곧장 거들나기 십상이라는 뻔한 미래가 보입니다.
은혜만 생각하다가 안오는 손님을 언제까지 기다릴 것입니까?
따라서 사람들 자체를 재평가하고 분류할 수 있도록 모든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식으로 신학을 재조립하게 되는게 그것이 바로 도덕과 윤리 생활에 의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분류 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윤리라는 것은 교양과 관련되어 있고 교양이란 그 집단 내에서의 숙련성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즉 분위기 파악을 잘하면 성화요, 분위기 파악을 못하면 성화가 덜된 작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1. 복음만 알아듣지만 전혀 교회 관행과 관습에 대해 익숙해져 있지 못하는 쪼자 시기
2. 슬슬 목사가 요구하는 것이 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요구에 의해서 나온 소리라는 것을 알아 먹는 시기
3. 그래서 일단 목사가 시키는대로 따라는 가 주지만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고, 자신을 왕따시키면 얼른 다른 교회로 튈 준비가 되어 있는 시기
4. 교회 분위기에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어주어야 이 바닥에서 사람 구실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시기
5.. 교회에서 뒤 처지기 싫어 목사가 시키는대로 선동적으로 움직여서 그 교회에서는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다져보겠다고 나서는 시기
5. 슬 슬 교회를 자기 앞 마당 산책하듯이 놀러다니면서도 그동안 투자해 놓은 헌금과 자기가 박아놓은 자기줄 사람으로 인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목사에게도 부담없이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시기
이것이 자본주의적 사회 내에서의 교회내 성화론 활용도입니다.
칼빈의 시대는 자본주의가 활성화 되지를 않는 시대이며 그 시대에는 신이나 교회나 그리고 성직자를 거부하는 것은 오늘날 이 한국 땅에서 노골적으로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치고 다니는 경우에 같은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돈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성화론=축복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돈이 많은 자는 곧 신의 축복을 남보다 더 받은 자이고
신의 축복을 더 받은 자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남보다 많이 성화된 착한 신앙인임'이라는 확증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평소에 성화되었다고 목사한데 칭찬을 많이 받았던 자라도 회사 부도 난다든지 이혼하면 교회 안나오는 법입니다.
만약 교회 얼굴 비치다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으로 성화된 자라고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성화가 안되었기에 된통으로 저주받아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나보다"라는 비난 받는 것이 뻔합니다.
귀하께서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교회란, 돈이라는 자본 위에 설립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관'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앙적으로 사는 자라면 집에서 혼자 성경보고 천당가면 그만입니다.
그럼에도 자꾸 목사들이 교인들을 집에서 교회라는 건물 안으로 집어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목사들이 목회라든지, 교회라든지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을 그리워하는 것은 칼빈이 어려운 시기에 이상적인 (하나님보시기에 바람직한) 교회를 시도했다는 점이 자신의 목회 비젼과 야심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신이 지배해는 사회이지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비록 돈이 없어도 신앙적인 폼만 유지한다면 훌률한 양반소리듣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번듯한 직장이나 직업이 없으면 사회의 불순물로 취급당하는 시대에 가족으로부터도 무능력자로 냉대받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신학교를 나온 자들이 '목사'라는 직업의식과 '교회'라는 직장 갖지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즉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명예유지가 더 다급하고 시급한 당면과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정립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아, 과연 나는 주의 종일까?'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교회라는 것이 자본을 바탕으로 한 조직체로서 이 사회 내에서는 인정받는 한 요소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사회적 구조틀 속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기존 유력 교단에 속하면서 아무리 십자가 복음에 기웃거려봤자, 사회가 인정해주는 자신의 '주의 종'으로서의 정체성을 쉽게 포기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 쉽게 포기했다면 신학교 다닐 때 그 교수라는 '이단들'에 대해서 수업시간에 그들의 이단성을 공격하고 제적당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있어서 목사들의 자기 정체성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려면 자금이 모아져야 하는 겁니다.
교단이든, 작은 교회든, 어느 정도 대규모 교회가 되었던 막론하고 말이지요.
공짜로 일당주고 점심 제공해 보세요. 왜 가난한 이웃들이 교회로 안몰려 오겠습니까! 따라서 목회업에는 자금 동원이 필수적입니다.
십자가 복음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교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사업에 단골 모집하려고 얼굴 익히기 위해 교회 나오는 겁니다.
구원이란 '교회 등록'하고 성례식 참석하는 것으로 행정 절차상 마감된 일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되었다고 목사들은 이미 공개적이고 사무적으로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포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인들을 계속 '성화론'으로 뒤에서 후려치는 이유는 단지 교회를 재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목적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이판사판의 목회 전문가들의 눈물겨운 사투입니다.
칼빈 시대와 다르지만 칼빈의 성화론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효하게 써먹을 꺼리가 됩니다. .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본인들의 가능성을 제촉하면 그것이 곧장 그 사람의 질적인 등급을 매길 수 있는 빌미를 신학적으로 뒷바침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한 참된 '거룩관'은 바로 이 모든 것이 다 '사기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받은 자들의 사명으로서 전할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성이라는 말입니다.
그 근거는 오직 십자가에만 있습니다.
참으로 복음을 아는 목사라면 죽기 위해 목회하지 살기 위해 목회하지 않습니다.
죽기 위해 목회 한다는 말은, 억지로 목회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목회로부터 자유로운 목회자를 말합니다.
교회로부터 자유로운 목회자를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목회자를 말합니다.
이 자체가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룩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관찰해서 그런 관찰된 쪼가리를 줏어 모아 신학을 건설하겠다는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불가능성'을 모토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모토로 하여
'교회 유지가 가능한 신학'을 수립하려는 야심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하는 다음의 점을 다시금 정립해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그 안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구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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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근호 목사님의 글의 대한 이효종님의 반론 3 )
또다시 글을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이 마지막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마을의 치명적인 결함은 성화론의 오해인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의견을 나누면서 풀어버리면 그만인데, 그 골이 너무 깊어 도저히 오고 갈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마음 아프기도 합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제일 핵심되는 대목을 누락시켰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나 자신과 혹은 타인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기준을 가져야 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한,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께 직접 마이크를 대고 인터뷰를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과 스데반 집사님께 마이크를 대고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그 어려운 고난과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삶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원동력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답변 하시기를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제시한 바울의 답변이나, 먼저 이근호 목사님의 질문에 응하신 바울이 답변이나 결론적 의미는 같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주장하는 결론 부분에 자기가 원하는 답변인 것처럼 둘러 붙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삶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심령 속에 자리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이근호 목사님께서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바울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 즉 춥고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핍박당했던 모든 삶들은 주님이 주시는 능력, 곧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실천적 삶’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서 구원을 깨달은 성도에게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난 실천적 삶인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성도의 성화적 삶을 부정하는 것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오류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새 언약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 언약은 성도들의 마음 판에 새겨둔 것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제가 말씀드리는 성화론이라는 것이, 윤리생활에 의한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구별하는 것이 성화론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저를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본 처사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저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면 저들은 분명 가짜 목사일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윤리나 도덕을 내세우며 구원을 외치고, 복 받기 위해서는 목사의 말에 순종하고, 교회의 일에 열심을 내라고 강요하는 목사들을 가장 싫어하고 경멸합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아니 다른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얼마든지 선행과 사랑(인간의 기준에 의한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나, 그들도 복음을 떠나서는 아무런 구원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가짜 목사, 가짜 성도가 아니라, 진짜 성도들에 관한 이야기 를 나누어 보고자 하는 것인데, 앞서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가짜 성도들의 유형을 대여섯 가지 정도를 열거하면서 그것이 성화론의 활용도라고 하셨는데, 참으로 제 가슴이 답답합니다. 겨우 가짜들의 모습만을 열거하시면서 성화론을 비판하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성화론은 축복론과 동일하게 표현하셨는데, 이러한 표현은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화론’으로 뒤에서 후려쳐서 교회 재정을 유지하지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지요, 그런 목사가 있다면 그들은 당연히 지옥감입니다. 진짜 교회는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가짜 교회들을 내세워서 토론을 하시면 진정한 의미는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재하신 성령께서는 구원을 누리는 성도들의 삶 속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시고,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너는 그저 ‘죄인이다’ ‘죄인이다’라고만 하시면서, 너는 별수 없는 놈이다 그러니 십자가만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십자가 마을의 주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과연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진정 기쁨으로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영혼들에게 한줄기 기쁨의 복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질 못하고 단지 십자가 깃발아래 모인 패잔병들처럼, 그저 우는 모습으로 좌절하고 만 있다고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될까 싶어 하나의 비유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흔히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기도를 가리켜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밥을 먹고 호흡을 한다고 해도,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 없으면, 그는 식물인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병원에 누워있는 식물인간은 밥도 먹고 호흡도 하지만 살아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삶 자체가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깨달은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어있고 그러한 기도를 하는 성도들은 그러한 기도에 합당한 삶의 내용이 자발적으로 나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 얻은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성화적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즉 정말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사랑에만 강권되어 있기에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 의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귀하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성에 대해서 방어하고 나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훌륭한 사람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몰아넣느냐 하는 것잖아요.
그런데 그런 고백이 과연 구워의 능력이 되는 복음의 핵심입니까?
정신을 도대체 어디다 팔고 다닙니까?
택한 자를 건지는데 있어 하나님은 복음의 능력으로만 사용하지, "성도, 너도 잘났다"라는 사항을 첨가시킨 그런 복음을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복음을 증거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교회'라고 우기는 그 고집은 또 뭡니까?
사도 바울이 세상도 제대로 모르고 상황판단이 안되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십자가의 앞에서 인간의 기본 태도는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아닙니다. 성화론이 아닙니다.
그 딴 것은 이 세상의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얼마든지 조립해 내고 있습니다.
모든 이단들이 다 그런 것을 가지고 인간들을 유인하고 있습니다.
상화론이 돈과 무관하지 않다고요?
인간의 윤리성과 도덕성이 인간의 생존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까?
인간은 살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의롭다는 판정을 받고 싶어하고 그것으로 자기를 휘어감아 축복된 인물로 거듭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자기 방어책인데 이래도 인간의 윤리, 도덕과 성화론과 구원의지가 돈과 상관없단 말입니까?
장바구니에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가득 담아봐야 그것은 모두
주님 십자가 팔아먹어가면서 목사짓해서 밥벌이하겠다는 용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칼빈이든 누구든 그렇지 않는 인간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다 '아담 안'에 속한 그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스데반 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깨서 그런 인간을 사용하셔서, 귀하가 거론한 성경 귀절처럼 오로지 성령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자신을 주님의 죽으심에 넘겨지게 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이
귀하께서 그토록 신봉하는 교리 '자기 잘남의 성화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도록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 산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즉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님에 의해서 직접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귀하께서는 이런 고백이 나오지 않는 겁니까?
정답은 오직 하나,
성령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이비이기 때문입니다.
기껏 나오는 것은
자기의 성화했다는 의로움으로 사회적으로 자신의 주의 종으로 자처해서 결국 목사짓해서 정당하게 생계를 보장받겠다는 강한 생존의 몸부림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자신의 처지를 성화론으로 커버하려고 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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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근호 목사님의 글에 대한 이효종님의 반박 글 4 )
김홍배님! 이규호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시온지요? 주일은 잘 보내셨는지요?
님의 질문에 빠른 답변을 해드리지 못해서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제가 님께 양해를 구한대로 지난 주말은 몹시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님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기에 앞서 이근호 목사님께서 1281번의 글의 통하여 제가 올린 글들에 대하여 반박하신 내용들에 대하여 먼저 답변을 드리고 님의 질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규호님께서 1280번 글에서 자신의 경험상 저의 주장은 맞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부터 제가 올리는 글들을 읽어 보시면 어는 정도는 납득하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말씀하는지를 먼저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글을 쓰기에 앞서 조회건수를 보니, 다른 사람이 올린 글들에 대해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이근호 목사님께서 쓰신 답변 글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조회건수를 늘리는 일부독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 글들을 독자들이 제대로 읽으셨다면, 앞서서 주장한 내용들이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이근호 목사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 때문에라도 앞서, 다른 사람이 올린 글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야 될 터인데, 이근호 목사님의 이름만 나오면, 내용은 거두절미하고 자세히 읽어 보지도 않고 조회건수만 올리는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쓴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1281번의 글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지적에 대해서 제가 답변할 필요성이 전혀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시 글을 올리는 것은 이글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바른 진리를 소개하고 싶어서 임을 말씀드립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제가 예수님의 공로 보다는 인간의 가치성에 대해서 방어하고 나선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정신을 도대체 어디다 팔고 다니냐구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앞서 소개한 글들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읽으셨다면, 이러한 말씀은 나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의 글이라 하여 대충 읽어버리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시니 거기에서 무슨 유익된 말씀이 나오겠습니까? 앞서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처럼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자신의 주장을 펴기에 앞서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하여 ‘정말로 그러한가’에 대하여 베뢰아 교회원들의 심정으로 성경을 다시 한 번 상고하시는 지혜가 필요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더 좋은 하나님의 섭리를 맛보시라 봅니다.
앞서 소개한 저의 글들 속에는 주님의 공로 사상이 지배적입니다.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나올 수 없는 존재이기에 주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구원을 누리는 자들로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은 바, 이 은혜를 깨달은 성도의 삶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 건져주신 아버지의 뜻을 쫓아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강조했지만,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제가 무턱대고 주님의 공로를 부인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니 참으로 한심할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기본 태도는 ‘자기 부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말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그 말씀에 대하여 반박하는 내용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삶의 내용이 진정 무엇인가를 말씀하고자 한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삶의 내용이 없으면, 사실 입술로는 십자가를 말하나 행위로는 십자가의 능력을 거부하는 사악한 존재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부인’을 주장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삶의 내용이 없다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는 입술로는 주님의 은혜를 말하나 행위로는 주님의 의를 무시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김홍배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말씀하기로 하겠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도 아니고 성화론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절대주권을 거부하시면, 이근호 목사님의 삶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영역입니다. 그 안에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고 있는 질서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뿐입니다(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근호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무서운 범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귀하께서 그토록 신봉하는 교리 '자기 잘남의 성화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도록 사용하시는 겁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성화라는 것이 자기 잘남의 성화론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은 이근호 목사님께서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성도에게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와야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의 생명이 나오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말로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제가 이근호 목사님께 질문을 하면,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증거 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또다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증거 하는 삶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삶의 내용이 없는 것은 허공에 입술만 조아리는 별 볼일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것은 성도는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모습을 보여 주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도 동일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닮은 인격’은 말씀의 순종함의 역사로부터 나오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도의 성화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은 저를 가리켜 성령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나 쉽게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이는 성도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삶을 가리켜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은 부단히 구원 얻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말씀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에 성령이 없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에 대하여 싸울 능력도 없고, 그저 나무십자가 깃발 아래 모인 패잔병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딤후3:15~17)”
마지막으로 이근호 목사님은 제가 성화론을 빙자하여 생계를 보장 받겠다고 하는 사람처럼 묘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저를 한참 잘못 보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몇 가구 살지 않는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농사짓는 농사꾼임을 아셔야 합니다. 지난해에는 농사가 신통치 않아서 빚만 더욱 늘어났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면서 강사비 같은 것을 챙길 지도 모르는 그러한 유혹을 받을 소지는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김홍배님! 오래 기다리셨죠? 그리고 이규호님도요.
지금부터 님께서 질문하신 이근호 목사님과 제가 생각하고 있는 성화론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김홍배님께서 앞서 올리신 이근호 목사님에 대한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근호 목사님은 참으로 인기 있는 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니 조금은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김홍배님께서는 요즘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현상들이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에는 저로서도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가 인기 있는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 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강의를 들은 적은 없지만 추측컨대, 한국교회의 잘못된 유전적인 전통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과정 속에서 청중들과 함께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이완 작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사람들의 속성에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이나 부정적인 내용에 대해서, 자신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대신 비판해 주는 일에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요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암흑기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중세 암흑기 말입니다. 개혁파 교회가 주장하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제일주의는 사라진지 오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복음을 사수하고자 하는 남은 자들(Remnant)이 있다는 사실 속에서 어느 정도 위안을 받고 있다하겠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선배목사님들께서 아직 신학의 정립이 미숙한 시대에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어지러움을 탄생시켰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 대부분의 선배목사님들은 세대주의 사상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외람되게도 ‘예수 믿고 천당’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교회를 세워나갔고,
그 중간에 오순절 성령파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기복주의를 내세우며 부흥하게 되자 개혁파 교회들도 덩달아 그들의 모습을 답습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즘 역사적 개혁파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들도, 다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불순 세력들에 의해 자기 소견대로 성경을 마구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것이 인본주의로 흘러버려서 사사시대의 암흑기를 연상케하는 모습들로 나타났으리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즘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사수하고자하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는 찾아보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역사적 개혁파 사상들을 가진 젊은 신학도들도 기득권 세력에 대하여 소신 있는 발언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 보기에 급급한 실정입니다. 이미 커다란 제도권을 형성하고 있는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리거나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리가 위협을 받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일 것입니다. 사실상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자신들의 돈줄을 쥐고 있는 곳이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수신학교(총신, 고신, 합신)에서는 어느 정도 역사적 개혁파 성향을 띈 교수들로부터 부분적인 가르침을 받기는 하지만, 목회 현장에 나가면 역사적 개혁파 교회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목회자들이 드물다는 것도 하나의 큰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식 있는 신학교 교수들도 눈치 보기에 급급해서 정치적인 위협을 느끼고 어물쩡하게 바른 가르침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유형들 가운데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성공지상주의에서 나온 기복주의, 누가 뭐래도 교회 양적 부흥만 일으키면 된다고 하는 부흥성장 마켓팅주의, 말씀의 편향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하질 못하고 인간적인 도움의 방편으로만 선포되어지는 것이 한국교회의 병폐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말씀의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기복적인 산물로 나타난 ‘야베스의 기도’ ‘일천번제’ ‘십일조’ ‘성전제일주의’ ‘이적주의’ ‘기도만능주의’등등 엄청 많은 신학적 오류들과 함께 재벌목사들의 무분별한 권위주의와 교회의 재산증식의 문제가 오늘날 심각한 한국교회의 영적 위기를 몰고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 많은 교회들은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겼던 세상적인 것들을 예수의 이름을 동원하여 얻어 보고자 하는 노력들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므로 말미암아, 그동안 맹목적으로 기존의 제도권의 권력을 추종하던 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들이 인기 상승의 비결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는 남을 비판하는 것만큼, 속 시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현실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들이 부분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옳다고는 해도 그가 주장하는 모든 신학사상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한 번쯤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근호 목사님과 토론을 해오면서 느끼는 것은 이근호 목사님은 역사적 개혁주의에 입각한 개혁교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라 함은 중세교회의 잘못된 오류들을 지적하며, 바른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 걸었던 종교개혁자들의 순순한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칼빈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사상이 우뚝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서술한 모든 글들을 제가 추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칼빈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당시의 모든 신학자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심도 있게 해석한 분들이 없었다는 사실 속에서 그 분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는 교회들을 가리켜 역사적 개혁파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파 교회들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1643~1649),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1563), 벨직 신앙고백서(1561)등의 내용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님은 칼빈이 주장하는 절대주권 사상과, 하나님의 예정론, 그리고 성도의 성화적인 삶에 대해서 부정할 뿐만이 아니라 칼빈을 상업주의를 생산한 장본인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예수그리스도의 단독 사역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저는 찬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 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진 구원 역사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곳 십자가 마을에서 사용하는 ‘개혁노회’라는 명칭도 시대조류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자 그렇게 붙인 것이지 역사적 개혁파 교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김홍배님께서 질문하신 이근호 목사님과 제가 가지고 있는 성화론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제가 언급하는 내용들을 통해서 이규호님께서도 오해하시는 부분들이 해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까지의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말씀들을 보면, 철저하게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아 이근호 목사님에게는 성화론 자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성화론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다고 말씀할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이근호 목사님은 단순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나타내자, 오직 십자가만 증거 해야만 한다고 하는 논리에 대하여, 말씀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김홍배님의 질문에 답하면서 저는 저 개인의 주장보다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사실이 그러한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서 입증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물론 그것이 저 개인의 성화론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는 말씀들 속에는 저도 따를 수밖에 없는 진리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공로로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저는 분명하게 밝힙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들의 심령 속에서는 오직 죄 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명백히 밝히면서 말씀을 올립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크게 착각하시는 것은 성도가 구원을 깨닫기 이전의 삶과 구원을 확인한 이후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구원을 깨닫기 이전의 삶이나 구원을 확인한 이후의 삶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구원을 확인한 성도들의 삶도 여전히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처럼 취급을 하기 때문에 성화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화론 자체를 부정하는 이근호 목사님의 설득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생각할 때에 인간의 간악한 죄성을 파고 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심리 말입니다. 뭔가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해도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 죄성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쩔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경험을 이규호님께서 질문하신 고백 속에도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나오는 명령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 ‘나보다는 남을 낫게 여겨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저주를 하는 자에게 축복하라’라는 말씀들은 아무리 구원 받았다고 하는, 우리 인간으로서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명령들은, 우리가 지키라고 주신 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살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역시 죄인입니다. 오직 그것을 실현하시는 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명령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에 대하여 포기한지 오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나 같은 죄인들을 너그럽게 어여삐 보아 주셔서 구원해 주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근호 목사님 뿐만 아니라 십자가마을을 넘나드는 추종자들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성화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짓지도 않는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이 물음에 대하여 개혁파 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구원 얻은 자들의 완전한 성화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을 무저갱으로 가두어 두기 전까지는 구원받은 성도들일지라도 죄의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직접 명령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말씀들은 인간들이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다만 구호에만 그치는 것일까? 정말 주님은 그러한 의도로 이러한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지혜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근호 목사님과의 토론 속에서 저는 성도의 점진적 성화나 완전 성화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까지는 불가능함을 피력하였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화’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뉘앙스입니다. 다는 아닐지라도 많은 분들이 ‘성화’라고 하면 예수님처럼 똑 같은 모습으로 완전한 변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갖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만약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처음보다는 점점 연륜이 깊어 갈수로 승화되어 결국에는 완전 성화에 이를 수도 있다는 착각들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웨슬리언들(감리교)이나 세대주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 가운데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명령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순종해야 하는가?
이러한 주님의 명령들은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목표 지향점’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이러한 ‘목표 지향점’은 성도 개인이 자기의 의지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성도 각인의 사명에 관련된 믿음의 분량대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의 길을 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수준까지도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사들 통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적 삶을 통해서 우리는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가는 삶 말입니다. 때문에 성화적인 삶을 모두가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성화적인 삶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임을 스스로 자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부인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가 성화를 이루어 감에 있어 죄에 대하여 실족하고 넘어 질수는 있으되, 그 넘어진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등산가가, 산을 올라가다 넘어질 수는 있는데 그 넘어지는 위치가 처음 위치보다는 한 단계 높은 위치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의 견해와는 조금 다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성화적인 삶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빈이 성화론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다음의 내용을 한 번 쯤 생각해 봐야합니다.
“어느 날 주인은 노예 시장에 나가서 노예 한 명을 사왔는데, 이 노예는 바뀐 주인에 대하여, 종전에 자기가 섬기던 주인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완벽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항상 수고를 하지만, 그 마음에는 항상 무거운 부담감으로 말미암아 자유가 없었다. (그것은 주종관계에서 나오는 어쩔 수없는 마음의 짐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종이 자신을 부르는 주인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나에게 또 무슨 일을 시킬려고 부르는 구나 왜 저 주인은 죽지도 않고 나만 보면 일만 시킬려고 할까 정말 종 노릇하기 힘들구나’라고 푸념하면서 주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주인은 그 종에게 말하기를 ‘오늘부터 너는 노예가 아니다, 내가 너를 나의 양아들로 삼고, 나의 모든 재산을 너에게 맡길 뿐만아니라 장차 나의 상속자로서 나의 재산을 잘 관리해다오’
이 말을 들은 그 종은 너무 감사해서, 그 후부터는 그의 삶이 당당한 주인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에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러한 칼빈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죄의 종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씀을 순종해 나가는 삶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종으로서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켰다고 해도 그것은 사망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당당한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일은, 어느 정도 실수가 있고 일을 잘못 처리를 했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겁니다. 만약 종이 일을 잘못 했으면 쫓겨 나갈 수도 있고, 주인의 여하에 따라서는 다른 곳에 팔려 나갈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자녀의 구원은 확실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김홍배님께서 슬하에 아들이 한분 있다고 한다면, 아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자기의 말에 100% 순종하길 원하지만 아들은 그렇질 못한다고 해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점점 더 성숙하면서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아보면, 아버지의 심정을 그 때에 이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앙에 있어서도 이러한 성숙단계는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화론에 있어서 이근호 목사님과 저의 견해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은 얻었다고는 입술로는 말하지만 아직까지도 죄의 종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여서, 사단이 죄를 가지고 공격하면 여전히 자신은 죽일 놈입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이 살려주면 좋고 살려 주지 않아도 저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삶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장하는 성화적인 삶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주님께서 자신의 핏 값(속죄)으로 나를 사신 사실을,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여 천국을 상속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감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행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과정에 있어서 실수가 있고 범죄행위가 있을지라도, 성령은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며 다시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회개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가 끊어질 까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아버지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 자녀로서의 마땅한 회개인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에 확신을 가진 회개와 그렇지 못한 회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성화적인 삶인 것입니다.
계시의 방편으로 주신 구약 성경을 보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던 사람입니다(창세기 12장과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질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자기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싸워 이겨야만 얻어지는 거룩한 싸움이던 것입니다. 물론 그 싸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위한 싸움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는 이미 구원이 확보된 영적싸움이 있는데, 이는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승리가 보장된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 싸움이 성도의 성화적인 삶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1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바울이 배를 타고 압송되어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배에 함께 탄 모든 승객들은 물에 빠져 죽는 줄 알고 우왕좌왕합니다.
그 때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행27:22~25)”
이 말씀 속에서도 바울이 탄 배에 속해 있는 모든 승객들의 안전에 대해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예언적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마침내 이루어져서 모두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행27:44).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예정하신 일들에 대하여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인간의 싸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만 믿고 배에 탄 승객들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예언의 약속만 믿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가만히 눌러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가 파선하지 않도록 하기위한 자기들의 노력들이 동시에 진행되어 지면서, 그들은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밀을 바다에 버리기도 하고 닻을 끊어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진행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까지는 영적인 전투가 남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영적인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며,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싸움이 곧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슬라엘에게 붙이신 싸움은 모두가 승리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붙이셨다고 해서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나갔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오직 십자가만을 붙드는 삶을 자기부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자기포기이며, 이 세상에 기대를 걸지 않는 삶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부인은 말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한 영적싸움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도의 성화적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은 구원을 깨닫기 전과 구원을 깨달은 후의 삶의 내용을 구분하지 않는 데에서 나오는 오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무런 의식을 느끼지 않고 하늘을 보면 미세한 먼지는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늘진 곳에 빛이 들어오면 그 빛에 반사되어 미세한 먼지까지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비추이면, 말씀을 통한 우리의 죄악이 들어나며,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죄악과 더불어 싸워나가는 성화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싸움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낙담하며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일으키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온전한 삶을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우리는 죄악과 싸워야할 영적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김홍배님! 그리고 이규호님 오늘도 영적싸움에 승리하여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성화적인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김홍배님!
쉽게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제가 너무나 장황하게 설명한 것들이 오히려 이해를 돕는데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본인의 생각을 100% 납득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성령의 유기적인 역사’ 관해서 논해야 되는데 시간의 제약 때문에 말씀드리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원하시면 제게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관련된 파일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참고삼아 개혁주의 자들의 성화에 대한 의견들을 간략하게 적어놓았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안토니 후크마(Antony A. Hoekema) 교수는 ‘성화’를 정의하기를 ‘성화’는 ‘인간의 책임 있는 참여가 수반되는 성령의 은혜로운 활동’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성화’는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가운데서 우리로 ‘선한일’을 할 수 있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선한 일을 공로로 자랑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그 일을 온전히, 즉 흠이나 결점이 없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성화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엡2:10)”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서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3~11)”
칼빈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에서 ‘믿음은 성화의 두드러진 수단이다’라고 했습니다.(Gereformeerde Dogmatiek)
베드로 사도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벌카우어(G. C. Berkouwer)는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그의 저서 바울신학에서 ‘새로운 순종’을 논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명령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믿음으로 단번에, 그리고 계속적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야할 직설법 위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으로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몸과 지체들을 의의 봉사를 위해 드려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은 성도가 원수(죄)와 싸워야하는 전일생의 과업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이델 베르그 요리 문답서 64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접 붙여진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감사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안토니후크마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말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요한은 믿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대충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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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효종님의 글에 대한 이근호 목사의 반박 글 5 )
기본적으로
신학적으로 제가 하는 말을 못알아 듣는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1. 성도에게 주어진 성령의 세례가 십자가 사건가 터진 그 이후의 취지에서 봐야 한다는 논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2. 인간의 가능성(인간 행함의 동기성)이 십자가 사건 연계해서 어떤 식으로 유효한가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3. '신의 주권론'과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적 예정론'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언약적 예정론이 인간들의 신적 이미지에서 나오는 신적 주권론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4. 사회 전반적인 인간들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신학을 하고, 무엇을 노리면서 학문 탐구에 나서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그렇게 길게 하신 그 '성화론'은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그 시류에 따라 유니폼을 입고서 계속해서 등장되고 사항입니다.
즉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5. 귀하께서는 제가 책을 많이 섰다는 소식만 접했지, 그 중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읽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책이라는 통일성 있는 사상집을 내지 않았다면 단편적인 글들을 통해서 짐작한 바를 가지고 토론하면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책을 안읽고서 반박하려는 사람들을 다소 도와드리기 위해
이미 질문/답변 란이라든지, 아니면,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저에게 반박했던 많은 글들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입니다.
즉
나중에 저의 글에 반박하고 싶은 분들은 자신들의 반박이 이미 수 백차례 먼저 이루어진 다양한 글들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뭐라고 반박했는지를 미리 파악하고 질문하라는 겁니다.
여기 십자가 마음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온갖 종류의 반박들을 벌써 읽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생략하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 소리냐. 그 논조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그런 최소한의 수고 조차도 아니하고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런 발언으로 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은 뜻의 글을 남긴 것입니다.
소위 신학을 공부하고 사람들이 의식 속에는 "과연 내가 주의 종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위하여 기존의 신학에 천착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지요. 그런 의식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기껏 죄에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이 정도로 인간들은 본능상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김홍배 선생님께서 지적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이근호'씨의 성화론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즉 그의 전체 신학이 어떠하기에 그런 '거룩'에 대한 개념을 수립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을 말하려면 제 책을 직접 읽으시고
왜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의 대가들이 비성경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저의 견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질문을 해야 하는 겁니다.
칼빈이니, 로이드 존스니, 리델보스니, 바빙크니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화론은,
인간의 타고난 품성의 발로로서, 하나님을 규탄하기 위한 악마의 조종력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 말 듣고 이러이러해야 좋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악마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왜냐하면 귀하의 이론은 모든 종교가 일률적으로주장하는 공통된 인간의 지혜입니다.
기존 한국 정통 교단 뿐만 아니라 여호와 증인, 지방교회, 안디오크 파, 박옥수 파, 안식교 모두가 이것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종교를 갖지 않는 일반인들도 이런 의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점을 알려면 철학도 병행해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칸트가 어떤 성화론을 주장하는지, 헤겔이 어떤 성화론을 주장하는지를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귀하는 너무 성급합니다.
안타깝게 말하면
너무 속아왔습니다.
교회 장사꾼들에게!
그리고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참된 신학'이라고 외치는 신학교 이단들에게 말입니다.
끝으로 귀하의 형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화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경로당에 노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노인네가 어두운 실내에 앉아서 다음과 같이 절규합니다.
"인간에게는 따뜻한 햇빛이 필요한단 말이야! 이 어두운 실내에서 더이상 살 수 없단 말이야! 사람의 참된 삶은 따뜻한 햇빛과 더불어 이루어진단 말이야. 왜 이 이론을 모르고 있단 말이야!"라고 발악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따스한 바깥에 햇빛 쪼는 노인네들이 한 마디 건넵니다.
"그 실내에 틀어박혀 있는 양반, 좀 조용히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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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근호 목사님의 글에 대한 이효종님의 반론 5 ): 이 글은 이미 십자가 마을에서 삭제된 글인데 다행이 누군가 삭제되기 전에 '양무리마을 카페'에 퍼서 올려진 이효종님의 글을 옮긴 것임
저는 봄을 준비하느라
한 겨울에 땅을 뒤 엎는 일로 조금은 바쁩니다.
그래서 항상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글을 쓰는 버릇이 있어서
오늘도 새벽녘에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나 봅니다.
몸도 피곤해서 더 이상 답변 글을 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이근호 목사님께서 올리신 글들을 보면서
왠지 이근호 목사님이 불쌍하기도 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의 미래가 참으로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어
저의 마지막 글이라 생각하며 몇 자 올릴까 합니다.
앞서의 많은 분들이 십자가 마을의
‘삭제’라는 권력 앞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감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아마 십자가 마을에서는 별 볼일 없는
저의 글에 대해서는 ‘삭제’는 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무능한 십자가의 무덤 앞에 패잔병처럼 모여 있는 무리들 속에
세상 철학으로 단단히 무장한
이근호목사님의 개인 신학이 너무도 무서워서
혹시나 지옥갈까봐 벌벌 떠는 추종자들이
자신들이 올린 글들을 자신들이 직접 삭제하면 될 것을
“제가 올린 글들을 제발 ‘삭제’해 주세요”라고 부르짖는 아우성!
참으로 가관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제가 성격이 너무 급해서 이근호 목사님께서 쓰신 책들을 한권도 읽어 보지도 않고 십자가 마을에 글을 올리는 것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패배의 상징인 나무십자가 마을에 처음부터 글을 올린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스트레스를 풀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곤할 따름입니다. 다만 사단의 머리통을 치시고 승리의 십자가를 들고 무덤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이 훼손되는 것이 안타까워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여기에 글을 올린 사유는 김홍배님의 질문데 대하여 칼빈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대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제가 글을 올린 글들 속에 성화론에 관한 것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님께서 문제를 제기함으로 말미암아, 토론이 전개 되어져 왔고, 오늘도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지, 이근호 목사님처럼 할 일이 없어, 스트레스나 풀기 위해서 이글을 쓰고 있지 않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칸트와 헤겔의 성화론에 대해서 공부나 하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자신의 지식을 과대 평가하는, 그래서 남에 대해서는 평가 절하하는 그야 말로 자기자랑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 추종하는 칸트와 헤겔은 예수님을 역사적 신존 인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비신앙적 입장에서 철학적 논증을 펼쳐나가는 그들의 글들에 관하여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비신앙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은 역시 비신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치고, 과연 칸트와 헤겔이 주장한 성화론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이성과 관념 속에서 나온 성화론이 아닙니까. 그들이 주장한 인간의 경험론적 성화론이 이근호 목사님과 일치한 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칸트와 헤겔은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악으로부터 선으로 절대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없다”고한 사실, 그리고 헤겔은 우리의 현실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판단하면서 사람들이 아무리 이상을 실현 해보려고 해도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부합되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견해가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어찌보면 성경적인 것 같지만, 그렇치 않은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한계를 가진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어떠한 말도, 성경에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절대정신 절대이성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택자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인의 눈으로 성화적인 삶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 생각합니다.
이성과 관념 그리고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절대적 무능을 이야기 하는 것과 신앙인의 관점에서 인간의 전적부패를 이야기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실입니다. 칸트나 헤겔은 신학을 하고 교수까지도 지냈지만,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아름답게 채색하고자 성경을 잠깐 잠깐 이용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책속에 신앙이라는 단어를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고 인간의 경험적 이성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도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바라보는 말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비신앙인의 시각 바라보면, 그것을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으로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보면 구원 얻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한일에 대하여 항상 무익한 종으로서의 자기 성찰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의로 행한 것이 아니라 성령임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칸트나 헤겔은 자신들의 인생 경험을 통한 ‘인간의 무능력’을 주장하는 하지만, 칼빈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전적부패’를 주장합니다. 이의 결과는 엄청납니다.
비 신앙인들도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인간의 한계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 앞에 어쩔 수 없는 인간은 그저 주어진 운명에 따라 순응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말들은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가장 호소력이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씻을 수 없는 인간의 죄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은 인간의 죄성을 최대한 극대화 하여,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이 그들이 믿고 있는 신들이 살려주면 다행이고 살려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식의 신앙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의 십자가만 알았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어처구니없는 누를 범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헤겔은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에 대해 관념론적 형이상학적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나 신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으로 판단하였으나, 그에게 있어서의 절대자는 오직 이성이고 그 본질은 자유라고 말함으로서 그의 신관은 범신론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근호목사님의 개인 신학도 범신론의 사생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믿긴 믿어도 자신 속에 있는 경험과 관념을 더 중요시하는 헤겔의 절대 정신의 사상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칸트 역시 계시종교를 이성종교로 둔갑시킨 장본인이 아니겠습까, 비신앙의 사상 속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칸트나 헤겔 역시 이근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두가 배설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근호 목사님은 그런 분들의 사상을 좇아 추종하시는지 참으로 답답할 지경입니다.
성화에 대한 의미는 성도가 어느 날 성스럽게 변화 되어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착각하시는 모양이신데, 그것이 아니라 그야 말로 말씀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자발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삶인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4)”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는데, 사실 본문은 ‘...이루라’(work)가 아니고 ‘...이루어 가라’(work out)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는 복합 동사를 사용하여 목표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이 말은 분명히 성도가 달성해야할 성도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목표요 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성도가 주도적으로 움직여 할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의지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에 하나님께서도 함께 참여하십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움직이고 행동하는 주체는 분명히 자신인데, 사실은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지혜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정말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고 계시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만약 오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근호 목사님의 개인 신학에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구약과 신약에 이르기 까지 수십명의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이근호 목사님께서 배설물 처럼 여기던 그들이(물론 이근호 목사님께서도 들어 갈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을까?
이근호 목사님의 설명대로라고 하면, 인간은 죄 밖에 나올 수 없는 데, 어떻게 그들은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도를 주장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성경을 가리켜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심령 속에 거하시며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불신자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성도의 성화적인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의 당연한 책임이며 의무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비로소 안식을 누리며,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께 서 기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새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난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4~5)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1~33)”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가짜 신자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한다고 하나 너무 단편적으로 하며, 입술로만 조아리며, 그 마음에 진심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 하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어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신학적인 모든 업적과 개혁교회가 지향하는 신조들(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 베르그 요리문답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화적인 내용들을 무시함으로서 이번 토론을 통하여 십자가 마을은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아님이 들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 노회’라는 것은 역사적 개혁파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에 ‘개혁노회’라는 이름을 다른 명칭을 바꾸실 의향은 없으신지 묻고 싶습니다. 가령 ‘혁명노회’말입니다.
첫댓글홀리죠이님! 죄송합니다. 이 글이 새벽별님의 요청에 따라 공지 사항에 올라가 있어서, 전에 있던 글들을 제가 삭제 했더니, 공지사항에 있던 글도 동시에 사라지더라구요/ 그래서 마침 제가 복사본을 가지고 있어서 재차 올립니다./ 다시 한번 공지 란에 올려주세요 /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휴....어쩌나....howhappy68님의 귀한 고백도 있었었는데....이효종님의 글도 귀하지만, howhappy68님의 그런 고백으로 십자가마을의 신학에 현혹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도전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는데....또 기회가 있으면 그런 고백을 하시는 분이 또 나오겠지요. 왕의친필님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
홀리죠이님! 저 역시 howhappy68님 처럼 한 동안 십자가 마을의 이근호 목사의 신학에 심취해서 많은 갈등을 느꼈었는데, 이근호 목사와 이효종님의 토론을 지켜 보면서, 정말 십자가의 사랑이 무언지 구원 얻은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되었다구요. 때문에 양무리 마을과 이효종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말입니다. 토론 글들 속에 나타난 이효종님의 신앙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참된 것이 었습니다. 저는 정말 제가슴 속에 꽉 막혔던 무거운 담이 허물어지는 시원함을 체험 했으니까요, 반대로 이근호 목사의 신학은 기계적인 예정론으로 하나님께서 택했던, 말던 인간은 별수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구해주면 좋고, 안 구해줘도 별수 없는 존재론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헌신짝 처럼, 아니 무용지물 처럼 취급하고 있단 말입니다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죠. 그러나 이효종님의 글은 성화론의 교과서와도 같은 진심을 우리에게 보여준것 같습니다. 근데 이근호 목사는 왜 이효종님의 질문에 대해서 회피
하시고 마지막 이효종님의 글을 십자가 마을에서 삭제를 했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는 이효종님과 토론하면서 거기에 올린 글들을 삭제하지 않고 놔둔다고 하면서, 이효종님의 글은 왜 삭제 시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양무리 마을 화이팅! 그리고 홀리죠이님 화이팅! 끝까지 힘내십시요.
저 같은 사람들이 잘 걸려들죠. 즐거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에겐 저런 가르침이 통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섬기면서 기쁨을 맛 보는 자들에게는 나는 죄인이다고 고백만 하고 주님만이 의인이라는 고백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이근호님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새벽별님, 그리고 열매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역시 제가 이효종님의 글을 잘 보았군요. 그 글 속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느껴졌었습니다. 님들의 정진에 그리고 이곳 양무리마을의 사역에 우리 주님께서 기름부어주셔서 더욱 "성화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두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익한 종들이 감사감사뿐입니다.
홀리죠이님! 이효종님을 뵈었으면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효종님은 목사신지? 아님 교수신지요? 목사님이시라면, 교회는 어디에 있는 교회인지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친구가 새벽별님 처럼 한때는 이근호 신학에 쩔어 있었는데/ 요즘 이글들을 일고 많은 갈등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직접 대화를
홀리 죠이님! 기뻐해 주십시요. 그동안 이근호 신학에 빠져있던 제 친구가 드디어 이효종님과의 상담을 통해서 다시 돌아왔답니다/ 친구가 고백하기를 이효종님과 상담하면서 말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말씀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참된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홀리죠이 화이팅!
홀리죠이님! 근데 이 토론이 처음 시작될때 처음 질문한 김홍배님의 글이 십자가 마을에서 삭제가 되어서 찾을 수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홀리죠이님이 퍼다 옮긴 글이 양무리 카페에 있더라구요/ 그래서 김홍배님의 질문 요지를 제가 복사해서 이 토론 서두에 올려서 수정을 하였더니 공지사항에 올려있던 글이 지워져
왕의친필님, 저도 너무너무 기쁩니다. 제가 사람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합디다. 효정님을 연결시켜드린 것 너무 잘되었군요. 효종님도 너무 수고하셨구요. 제가 이 글을 그대로 "공지사항"으로 올려놓겠습니다. 김홍배님의 글 제가 애당초 퍼놓기를 잘했군요. ㅎㅎㅎ....수고하셨어요~
참으로 그렇습니다. 참, 아침이슬님, 이효종님은, 농부처럼 사십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이곳 마을에 계신답니다. 저희 마을에는 은거하시는 분들이 참 많답니다. 언제 다시 중원으로 나오실지.....때가 되면 그리고 필요하시다고 여기신다면......주님의 감동을 받아서, 활동하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첫댓글 홀리죠이님! 죄송합니다. 이 글이 새벽별님의 요청에 따라 공지 사항에 올라가 있어서, 전에 있던 글들을 제가 삭제 했더니, 공지사항에 있던 글도 동시에 사라지더라구요/ 그래서 마침 제가 복사본을 가지고 있어서 재차 올립니다./ 다시 한번 공지 란에 올려주세요 /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휴....어쩌나....howhappy68님의 귀한 고백도 있었었는데....이효종님의 글도 귀하지만, howhappy68님의 그런 고백으로 십자가마을의 신학에 현혹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도전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는데....또 기회가 있으면 그런 고백을 하시는 분이 또 나오겠지요. 왕의친필님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
홀리죠이님! 저 역시 howhappy68님 처럼 한 동안 십자가 마을의 이근호 목사의 신학에 심취해서 많은 갈등을 느꼈었는데, 이근호 목사와 이효종님의 토론을 지켜 보면서, 정말 십자가의 사랑이 무언지 구원 얻은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되었다구요. 때문에 양무리 마을과 이효종님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말입니다. 토론 글들 속에 나타난 이효종님의 신앙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참된 것이 었습니다. 저는 정말 제가슴 속에 꽉 막혔던 무거운 담이 허물어지는 시원함을 체험 했으니까요, 반대로 이근호 목사의 신학은 기계적인 예정론으로 하나님께서 택했던, 말던 인간은 별수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로
구해주면 좋고, 안 구해줘도 별수 없는 존재론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헌신짝 처럼, 아니 무용지물 처럼 취급하고 있단 말입니다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죠. 그러나 이효종님의 글은 성화론의 교과서와도 같은 진심을 우리에게 보여준것 같습니다. 근데 이근호 목사는 왜 이효종님의 질문에 대해서 회피
하시고 마지막 이효종님의 글을 십자가 마을에서 삭제를 했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는 이효종님과 토론하면서 거기에 올린 글들을 삭제하지 않고 놔둔다고 하면서, 이효종님의 글은 왜 삭제 시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양무리 마을 화이팅! 그리고 홀리죠이님 화이팅! 끝까지 힘내십시요.
이근호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무위자연을 추구하기에 성화의 삶을 살기를 게을리 하고, 구원의 확신을 보존하기에 게으른 자들이 딱 먹혀들기 좋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십자가를 지는 기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나는 십자가 질 수 없다고 핑계하기 딱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잘 걸려들죠. 즐거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에겐 저런 가르침이 통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섬기면서 기쁨을 맛 보는 자들에게는 나는 죄인이다고 고백만 하고 주님만이 의인이라는 고백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이근호님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즐거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기쁨을 아는 자들은 이근호님이 아무리 그렇게 강조를 해도 더욱 즐거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게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기쁨과 감격을 보존하기에 게으르고, 은혜를 유지하기에 게으른 자들이 십자가를 동원하여 무위자연을 추구하죠.
이렇게 십자가를 동원하여 무위자연을 추구하는 이근호님의 신학을 향해서 솔로몬이 유명한 말을 남겼죠.....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서 바람을 잠는 것과 같이 헛되도다!
새벽별님, 그리고 열매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역시 제가 이효종님의 글을 잘 보았군요. 그 글 속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느껴졌었습니다. 님들의 정진에 그리고 이곳 양무리마을의 사역에 우리 주님께서 기름부어주셔서 더욱 "성화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두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익한 종들이 감사감사뿐입니다.
홀리죠이님! 이효종님을 뵈었으면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효종님은 목사신지? 아님 교수신지요? 목사님이시라면, 교회는 어디에 있는 교회인지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친구가 새벽별님 처럼 한때는 이근호 신학에 쩔어 있었는데/ 요즘 이글들을 일고 많은 갈등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직접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연락이 가능할까요? 아무쪼록 이러한 글들이 많이 읽혀져서 이근호 신학에 물든 사람들이 하루 속히 빠져 나오길 기대합니다. / 홀리죠이님 그럼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아하 그런 일이 있군요. 그래요. 연락을 취해보지요. 최근에도 메일을 주고 받았었는데.............요즘 바쁘신 지....그런 수고는 저의 보람이랍니다.
다, 홀리죠이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공간에 좋은 글들을 올릴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수고해주시는 모든 분들과 더불어 사귐을 허락하시는 우리 주님께만 영광이 되기를~ 감사합니다.
홀리 죠이님! 기뻐해 주십시요. 그동안 이근호 신학에 빠져있던 제 친구가 드디어 이효종님과의 상담을 통해서 다시 돌아왔답니다/ 친구가 고백하기를 이효종님과 상담하면서 말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말씀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참된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홀리죠이 화이팅!
홀리죠이님! 근데 이 토론이 처음 시작될때 처음 질문한 김홍배님의 글이 십자가 마을에서 삭제가 되어서 찾을 수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홀리죠이님이 퍼다 옮긴 글이 양무리 카페에 있더라구요/ 그래서 김홍배님의 질문 요지를 제가 복사해서 이 토론 서두에 올려서 수정을 하였더니 공지사항에 올려있던 글이 지워져
버렸네요/ 그래서 참 아쉽네요/ㅎㅎㅎㅎㅎㅎ
왕의친필님, 저도 너무너무 기쁩니다. 제가 사람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합디다. 효정님을 연결시켜드린 것 너무 잘되었군요. 효종님도 너무 수고하셨구요. 제가 이 글을 그대로 "공지사항"으로 올려놓겠습니다. 김홍배님의 글 제가 애당초 퍼놓기를 잘했군요. ㅎㅎㅎ....수고하셨어요~
이근호 목사도 자주 이곳 양무리마을을 둘러볼텐데, 이러한 댓글들을 보면 어떠한 느낌이 드실찌 궁금하군요 ㅎㅎㅎㅎㅎㅎ, 화인 맞은 양심처럼 무덤덤할찌?....말입니다.
동문 서답을 하는데 일가견이 있군요!~~~전에도 그랳지요 그게 어디 갈껴!~~~~~~~~~~
어구 징한 이근호모사~ 수선화님이 이근호씨구먼? 이 글 봄시롱 댓글을 달아서 제대로 비판을 했뿌리지 비겁하구만유~ 징하기로 비겁해유~ 자기비판하는 글 다 삭제하구 이곳까지 둘러본다유?
홀리죠이님, 이곳에 처음으로 글을 올리는 사람입니다. 좋은 글을 보면서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효정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이메일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교제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마을의 "샤로니에'님을 클릭하시면 아마도 제일 빠르게 접속이 되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좋은 교제를 나누시길^^
샤로니에 님이 어데 있는지 알아야? 클릭을 하지용
홀리죠이님. 클릭을 해도 이메일 주소가 없다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그래요. 그런 줄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면 제가 부탁을 드려서 전화번호를 알려주어도 괜챦은 지 허락부터 먼저 받고는 님에게 연락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효종님에게 연락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연락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무척 바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한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이 분명하면 그런 분은 성심으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개혁주의의 가장 큰 뼈대는 말씀안에 사는 삶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성도의 성화적이니 삶이겠죠. 이효종님의 견해는 당연한 것입니다.
오사랑님, 옳습니다. 이런 견해를 삭제하고 배척하고 있는 십자가마을신학을 저희들은 경계하고 비평하는 것입니다. 기도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이효종님! '이 양무리마을에 있습니까?
금번 십자가마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글을 읽게 된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십자가 마을의 많은 분들이 이글을 읽고 손무성 목사님처럼 이근호 개인신학을 숭배하진 않고 진리에로의 길얼 갔으면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참, 아침이슬님, 이효종님은, 농부처럼 사십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이곳 마을에 계신답니다. 저희 마을에는 은거하시는 분들이 참 많답니다. 언제 다시 중원으로 나오실지.....때가 되면 그리고 필요하시다고 여기신다면......주님의 감동을 받아서, 활동하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