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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와 대하소설 『임꺽정』
문학박사 / 김인희
Ⅰ 서론
1. 작가 홍명희에 대하여
1) 개요
작가 홍명희의 호는 벽초(碧初)이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졌다. 춘원, 육당, 벽초 셋은 죽마고우였다. 춘원과 육당은 친일로 변절하였지만 벽초는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林巨正)』은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었다. 1985년 출판되어 큰바람을 일으켰고 문학사적 위치도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2) 출생과 집안
벽초 홍명희는 1888년 충청북도 괴산에서 출생하였다. 작가의 가계를 살펴보면 풍산 홍씨 집안으로 선조의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와 남편 영안위 홍주원의 차남 홍만형이 10대손이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친정인 홍봉한, 홍인환 형제는 홍주원의 장남 홍만용의 증손이고 선조들 중에는 정조 때 세도재상 홍국영이 있으며 다산 정약용의 처도 작가의 집안 혈족이다.
홍명희의 증조부 홍우길은 장원급제 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언 참의를 지냈으나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며 한일 병합 조약 후 조선 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반면 작가의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있는 동안 한일합방에 치욕을 느껴 자결한다. 홍명희는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동생들이 태어났다.
홍명희는 참판 민영만의 딸 여흥 민씨와 1900년에 결혼하였다. 장인 민영만은 고종의 외조부 민치구의 형 민치대의 손자이며, 민선호의 아들이다. 명성황후 민씨나 순명효황후 민씨 집안과도 가까웠다.
홍명희는 일본으로 유학하기 전까지 1901년부터 1906년 동안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했다. 당시 부친을 법학을 하길 바랐으나 작가는 문학을 더 좋아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성중학에서 공부했다.
3) 학창 시절과 독립운동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은 군산군수로 있을 때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이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당시 홍명희는 일본에서 공부던 중 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충격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홍명희는 부친상 중인 1911년 4월에 일본 문예지에 단편소설 [유서]를 게재한 일이 있었다.
홍명희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항일운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했다.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보고 이광수를 만났다. 홍명희는 이광수와 가깝게 지내며 이광수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 전해진다.
홍명희는 여러 차례 항일 독립운동으로 치르면서 작가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한편 아들 홍기문과 함께 신간회 결성 등 업적을 남겼다.
1927년에 창간된 《현대평론》에 1928년부터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소설 『임꺽정』은 13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며 1930년대에는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에 홍명희의 모든 글을 발표했다.
소설 『임꺽정(林巨正)』은 <조선일보>에 1928년부터 13년 동안 연재되었다. 1930년대 쓴 글 대부분은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에 발표했다. 홍명희는 일제 치하에서 수감된 문인 중 옥중 집필이 유일하게 허용된 작가였다. 홍명희의 수감으로 연재가 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거셌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 관리들도 『임꺽정(林巨正)』에 빠져서 옥중에서 집필된 원고를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먼저 읽고 <조선일보>에 넘겼다. 1928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임꺽정(林巨正)』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적인 사정으로 4차례 연재가 중단되었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에는 자매지 <조광>에 작품을 발표했다.
4) 광복 이후
광복 이후 홍명희는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1948년 남북협상 차 김구, 김규식 등과 방북하였으나 홍명희는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북한에서의 작가의 생애는 생략한다.
5) 사후 문학비 건립
1968년 천수를 누린 홍명희는 81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사망했다. 현재 홍명희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1998년 홍명희 작가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홍명희의 월북 사실이 문제가 되어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 단체들의 반발로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를 삽입하여 새로 2000년에 비를 건립했다.
Ⅱ 본론
1. 소설 『임꺽정(林巨正)』 내용 요약
소설 『임꺽정(林巨正)』은 조선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대하역사소설이다.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은 식민지시대에 발표된 한국 소설들 중 가장 규모가 큰 대하소설이다. 소설은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각 1권씩 「의형제편」 3권, 「화적편」 4권을 포함하여 전 10권으로 이루어졌다.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은 임꺽정을 중심으로 한 일당이 결성되기 전인 연산군 때부터 명종 초기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를 폭넓게 묘사한다. 백정 출신인 임꺽정의 집안과 성장과정을 전개한다. 『임꺽정(林巨正)』은 경기도 양주골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놈’이었는데 부모를 걱정시킨다고 ‘걱정’, ‘걱정’하다가 ‘꺽정’으로 불린다.
임꺽정이 결혼한 누이를 따라 서울로 와서 갖바치와 같이 살면서 글을 배우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 열 살이다. 갖바치 양주팔은 천한 직업과 달리 학식이 높았으며 묘향산에 가서 도인에게 천문 지리와 음양 술수를 배우고 와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학문에 두루 통달하여 당시 이름을 떨치던 조광조 등과 왕래한다. 꺽정이는 글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검술을 익힌다. 박유복과 이봉학과 또래였으며 자주 어울렸고 의형제가 된다.
갖바치 양주팔은 기묘사화를 당하고 나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예견하고 임꺽정을 동행하여 전국을 유랑한다. 양주팔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의 모습을 접한다. 백두산에 갔을 때 세상을 등지고 남편을 여의고 홀로 남매를 키우는 여인을 만난다. 그 남매는 누이 운총과 남동생 황천왕동이다. 꺽정은 이때 만난 누이 운총과 결혼하여 양주로 돌아와서 아들 백손을 낳는다.
임꺽정이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봉산 황주 도적이 된다. 종실 서자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이봉학, 유복자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라 억울하게 모함으로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박유복, 머슴살이하다가 주인집 아들이 보쌈해 온 젊은 과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지만 부인이 아이를 낳고 죽자 배고파 우는 아이를 달래다 내동이 쳐 죽인 곽오주,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자라고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걸음이 빠른 잘생긴 황천왕동, 돌팔매질을 잘하나 여색을 밝히는 배돌석, 소금 장수를 하며 떠돌다가 혼인하나 장모와 사이가 안 좋아서 쫓겨난 길막봉 여섯 명의 산적 두령과 함께 의형제 결의를 맺는다.
임꺽정과 일당들은 청석골에 본거지를 삼고 도적질을 하면서 생활하고 평산에서 관군과 접전해서 승리한다. 임꺽정이 한양에 나들이 왔다가 기생 소흥, 박 씨, 원 씨, 김 씨 첩을 맞이하여 방탕하게 지내다 두령들의 성화에 다시 청석골로 돌아온다. 관군에게 붙잡힌 부하와 부인을 전옥을 파괴하고 구출한 후 조직의 위험을 느끼고 소굴을 여러 군데로 분산시킨다. 관군과 접전을 벌인 평산 싸움에서 관군이 패하고 꺽정이 일당이 승리한다.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근거지를 자모산성으로 피난하면서 작품은 미완의 상태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임꺽정이 잡혀 처형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연재 초기에 작가 홍명희 말에 의하면 『임꺽정』 연재를 시작할 당시부터 작품 전체를 몇 개의 편으로 나누되, 각 편의 독립성을 지니는 형태가 되도록 구상했다고 했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임꺽정』의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 은 별개의 장편소설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독립성이 강하다. 「의형제편」 3권은 8장, 「화적편」 4권은 6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장’ 역시 한 편의 중편소설이라 해도 좋을 만큼 독립성이 뚜렷하다는 것도 『임꺽정』의 특징이며 홍명희의 강한 필력이라 할 수 있다.
2. 시대적 배경
소설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은 16세기 조선이다. 이때 왕권은 부패한 관료들의 세도와 횡포에 눌려 크게 약화되었다. 수년 동안 계속된 흉년과 지방 관리들의 수탈은 이중 삼중으로 가중되었다.
소설의 갈등은 부패한 권력층과 핍박받는 민중들의 대립에서 비롯된다. 권력층을 이루는 지방 관리들이나 권신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횡포를 부리는 것에 익숙해져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곡간은 채우는 모습과 더 이상 빼앗길 것조차 없이 가난하고 힘든 더러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활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 갈등의 극을 이룬다. 부패한 권력층의 횡포로 삶의 터전을 잃고 많은 민중들이 유리걸식(遊離乞食)하면서 도적이나 화적패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개 역사적인 소설은 장군이나 사대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권력층을 옹호하고 굳건하게 미화시킨 반면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통해 권력층에게 억압받던 민중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들을 통하여 상류층을 비판하고 철퇴를 휘두르게 하여 상류층을 단죄했다는 데 큰 의의를 지닌다.
《명조실록》 편찬에 참여한 한 사관은 임꺽정의 반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고화(敎化)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며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이 잘박해도 끼닛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의 반란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3년간 지속되었다. 역사 속 민란에서 한 인물이 이끈 난이 오래 지속된 매우 드문 사례였다. 더욱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을 축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데 있다. 명종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외척에게 넘어갔던 왕권을 회복할 기회를 잡았다. 반면 사림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바탕을 만들었다.
임꺽정의 반란이 일어난 배경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농민들이 왜 토지를 잃고 빈농이 되었으며 빈민, 유랑민, 도적으로 변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정치를 맡고 있던 관료와 외척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왕권이 약화되고 중앙 정치가 흔들린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시국에 따라 흔들리는 정계, 문란해진 국가 기강, 지방을 통제하지 못한 중앙, 부패를 일삼는 지방 관리들이 날뛰는 통에 농민들을 토지를 잃었다.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내려앉고, 무전 농민이 되고 도적이 되어 유랑민으로 떠돌았다.
16세기 공납은 농민들에게 설상가상이었다. 왕실과 관료들의 사치는 날로 더해가고 그들의 욕구를 충당할 공물의 양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전가되는 폐단이 자리 잡았다. 농민들이 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상인들과 지방 관리들을 통해 대납하게 하여 그 대가로 착취를 일삼는 결과를 초래하여 관리와 중간 상인들이 이익을 챙겼다.
임꺽정의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일당의 활동으로 지배층은 불안과 위기의식으로 떨었으며 어려움을 겪던 민중들에게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임꺽정의 난은 양날의 칼이다. 지배층은 흉악무도한 도적이라 하고 민중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대변한 영웅이라 했다.
3. 작품에 나타난 한국어문화문법
작가 홍명희에 대하여 ‘살아있는 최고의 우리말 사전’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홍명희는 『임꺽정』을 쓰면서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고 밝혔다.
필자의 문학박사 논문 주제는 『박경리 <土地>에 나타난 한국어문화문법』이다. 한류열풍을 타고 한국어의 위상이 날로 높아졌고 세계가 한국어를 주시하고 있어서 한국어문화문법 연구가 절실했다.
문화문법이란 문화를 문법에 적용하는 것, 혹은 관습이나 집단의 기질을 문법에 적용하는 것이다. 즉 한국어문화문법을 알면 한국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잘 쓸 수 있게 된다. 필자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林巨正)』 10권을 품에 안고 지낸 이유는 『임꺽정(林巨正)』에 나타난 한국어문화문법을 찾고 작가의 필력에 전율했기 때문이었다.
가히 ‘살아있는 최고의 우리말 사전’이라는 명성이 당연했다. 소설 『임꺽정(林巨正)』에 우리말의 보물창고와 다름없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려운 용어나 낱말의 뜻풀이를 본문에 실었기 때문에 독서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역으로 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어려웠다는 것이 곧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말도 많이 변했다는 걸 입증했다. 책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임꺽정(林巨正)』에 나오는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일부 예를 들어본다. 단어, 의태어, 중첩어 등 속담이나 민속, 복식 등 많은 자료가 있으나 지면을 고려하여 일부만 발췌한 예는 다음과 같다.
단어
가탈걸음 : 말이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며 걷는 걸음.
납월 : 음력 섣달을 달리 이르는 말.
다랍다 : 언행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조금 인색하다.
마들가리 : 나무의 가지가 없는 줄기.
바라지 : 방에 햇빛을 들게 하려고 벽의 위쪽에 낸 작은 창.
숫밥 : 손대지 않은 깨끗한 밥.
의태어, 중첩어
곰배곰배 : 곰배임배. 계속하여. 자꾸자꾸.
겸두겸두 :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아울러 함을 이르는 말
너푼너푼 : 가볍게 자꾸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양
어뜩비뜩 : 행동이 온당하지 못한 모양
홍명희는 주인공 임꺽정을 비롯하여 다양한 신분의 민중을 등장시켜 당시의 민중 생활을 폭넓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 임꺽정을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고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인물로 그려낸 것이 독보적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묘사가 세부적이고 정밀하며 당시의 풍속과 문화를 선명하게 재현하고 있다. 작품에 민담이나 전설 등을 삽입하여 흥미를 더하고 혼례식, 세시풍속, 무속 등 당시의 풍속들에 대한 묘사가 다양했다. 일제강점기 시대 불구하고 한문을 배제한 지명, 토속적인 언어와 속담들이 풍부해서 필자에게는 ‘한국어문화문법’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일찍이 홍명희는 일본 유학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등 러시아소설을 탐독했으며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들의 소설도 섭렵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신간회운동을 추진하면서 그 정신을 『임꺽정(林巨正)』에 담았다고 했다. 작품에서 각각의 등장인물을 형상화하고 서술적 설명이 아닌 장면 중심의 객관적 묘사, 치밀한 세부적인 표현 등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로서 서구 리얼리즘소설의 성과를 가져온 것이 바로 홍명희의 능력이었다. 하여 『임꺽정(林巨正)』은 동양고전 문학의 전통과 서양 근대문학의 성과를 통합한 작품이라는 것 또한 높이 평가해야 한다.
홍명희의 문장은 아름답고 힘차다고 했다. 도적 임꺽정을 세상과의 친화력을 가진 인물로 사물에 대한 직감적인 이해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고 칠장사에서 사나운 말을 길들여서 사귀고 소통하는 모습에서 벽초의 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홍명희의 필력은 세련된 유머와 해학이 가득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곽오주와 박유복이 싸움을 하던 중에 곽오주가 똥을 누는 장면은 배꼽을 쥐게 한다. 이교리가 귀양 중에 굶주리고 길에 쓰러져 물소리 나는 쪽으로 기어가면서 물컹하고 손에 잡힌 것을 밥이라고 들여다보니 똥이었다. 보리밥이 채 다 삭지 않은 똥을 시냇가로 와서 물에 씻어 보리쌀알을 입에 넣어 목에 넘기는 대목에서는 슬픈 정조로 사로잡았다.
“자네는 지금 여편네 맛이 단 줄로 알 테지만 그것이 본맛이 아닐세. 여편네는 오미(五味) 구존한 것일세. 내 말할게 들어보려나. 혼인 갓 해서 여편네는 달기가 꿀이지. 그렇지만 차차 살림 재미가 나기 시작하면 여편네가 장아찌 무쪽같이 짭짤해지네. 그대신 단맛은 가시지. 이 짭짤한 맛이 조금만 쇠면 여편네는 시금털털 개살구루 변하느니. 맛이 시어질 고비부터 가끔 매운맛이 나는데 고추 당초 맵다 하나 여편네 매운맛을 당하겠나. 그러나 그 매운맛이 없어지게 되면 쓰기만 하니”
* 구존 : 빠짐없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
소설에는 우리나라 민속문화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가가 어린 시절에 시골의 부잣집에서 생활한 것을 대변하듯 자배기, 버들고리, 모코리, 동고리, 키, 대독, 중두리, 항아리, 뒤지, 용중 항아리, 반닫이 등의 일상용품이 많이 들어있다. 식사 장면에서 쌀밥과 조밥의 대비로 등장인물을 떠보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임꺽정(林巨正)』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역사소설로 역사적 상상력이 풍부하다. 홍문관 교리 이장곤이 거제도로 귀양 간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년) 무렵에서 「봉단편」이 시작하고 「앙반편」의 마지막은 을묘왜변(1555년)이 있었다.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 이들 세 편에는 갑자사화, 중종반정,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정치적 암투 및 을묘왜변을 주축으로 역사적인 기록이 들어있다. 전국에서 힘든 민중들이 화적패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 작가는 임꺽정을 등장시킨다.
『임꺽정(林巨正)』에서 홍명희는 주인공으로 하여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여러 곳을 거치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국토를 소설 속에 배치한다. 『임꺽정(林巨正)』 각 10권에 국토에 대한 기록을 따라가다 홍명희의 우리나라 국토에 대한 세세한 기록에 감동하여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청석골은 서편 탑고개까지 나가기에 시오리가 넘는 긴 산골이다. 성거산이 내려와서 천마산이 되고 천마산이 내려와서 송악이 되니 송악은 송도의 진산(鎭山)이요, 송악 한 줄기가 서편으로 달려와서 청석골이 생기었다. 천마산 줄기에서 솟아난 만경대와 부아봉과 나월봉은 삼거리 동북편에 겹겹이 둘러 있고 매봉만은 남으로 떨어져 삼거리 정동편에 와서 있고 탑고개 북쪽에는 두석산이 있고 남쪽에는 봉명산이 있고 서남쪽에는 빙고산이 있다. 처녑 같은 산속에 골짜기를 따라 큰 길이 놓여 있으니 이 길이 비록 송도부중에서 이삼십 리밖에 아니 되는 서관대로이나, 도적이 대낮에도 잘 나는 곳이라 왕래하는 행인들이 간을 졸이고 다니었다. (4권 「의형제편」)”
『임꺽정(林巨正)』에는 복식 풍속을 포함한 다양한 풍속이 들어있다. 조선 후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지녔으나 조선 후기 풍속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임에는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을 알려주는 장면과 풍부한 어휘로 가득하다.
“발에 짚신감발을 단단히 하였으니 근처 사람이 아니고 먼 길을 온 사람이다.” (「의형제」편)
“유복이가 애기 노량 명주저고리 해 입으라고 무색 명주를 보내”려다가 “무슨 무색이든지 무색을 들여야 건색은 보기 싫소.” (「의형제」편)
* 무색 : 물들인 색이란 의미
* 건색 : 물들이지 않는 색이란 의미
Ⅲ. 결론
『임꺽정(林巨正)』을 읽으면서 홍명희의 필력에 압도당했다. 장편의 글을 막힘없이 물 흐르듯 펼쳐냈다. 홍명희를 일컬어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고 했다. 이 문장이 『임꺽정(林巨正)』을 읽게 했다. 본문에 따로 표기한 어휘 풀이가 없었다면 책을 읽는 시간이 더 지체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낯설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글로 표현하면서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주인공 임꺽정과 일곱 두령이 의형제를 맺고 일당을 이끌어 가면서 도회청에서 심의하고 결정을 내릴 때 결속력이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임꺽정이 한양에서 지내는 동안 여인들을 취하고 각각 처소를 마련한 다음 잠자고, 점심 식사하고, 손님이 왔을 때는 맞아들인 처소를 자유롭게 왕래할 때 이맛살을 찌푸렸다. 청석골 대장으로서 위엄있는 권위라든가 공명정대한 처신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임꺽정에게 있어서 제갈량 역할을 하는 서림이 관에 붙잡혔을 때 자신이 살고자 청석골 조직을 배신하고 임꺽정 일당을 밀고하는 장면에서 실망했다. 화적패라고 하지만 의형제 결의하고 한솥밥 먹은 의리는 초개와 같았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원망은 원망을 낳는다. 억압받고 짓밟히고 빼앗긴 사람들은 일순의 망설임 없이 무참하게 짓이기고 빼앗았다. 청석골 화적들과 임꺽정은 의적이 아니었다. 빼앗은 것을 그들을 위해 취했으며 그들만을 위해 썼다. 두령 곽오주가 쇠도리깨로 어린이들만 골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에서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들이 당한 억울한 무게만큼 잔인함의 무게도 비례했다.
AI가 인간의 고유영역에 침범하여 활개치고 있다. 챗GPT가 시제(詩題)를 주면 시(詩)를 쓴다. 시인이 쓴 시에 대한 시평(詩評)을 쓴다. MZ세대들이 쏟아낸 신조어는 기성세대에게 이방인의 언어처럼 낯설 때가 많다. 『임꺽정』에 나타난 아름다운 우리말 또한 MZ세대들의 신조어 못지않게 생경했다. 시대를 역주행하자고 주창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언어도 역사성을 갖는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생각한다. 한국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한다. 한국어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한국어의 우수성이 날개를 달고 비상할 수 있게 갈고닦아야 한다. 한국어는 가장 한국어다울 때 아름답다.
『임꺽정』에 나타난 한국어문화문법에 대한 연구를 제언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세계인이 한국어를 주목하고 배우고 있다. 그들이 한국어를 통하여 문화와 역사도 배울 수 있도록 한국어의 장을 펼쳐야 한다. 한국어문화문법을 알면 한국어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다. 한국어를 폭넓고 다양하게 쓸 수 있다.
벽초 홍명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제강점기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한 부친의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라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받들어 독립운동한 업적에 밑줄을 긋는다. 소설 『임꺽정』이 지닌 문학적 가치와 소설에 담긴 아름답고 힘찬 한국어는 자랑스럽다.
일찍이 홍명희가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고 밝힌 뜻을 기리며 필자는 위대한 과업을 받든다.
※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읽고 글을 정리하면서 문학적인 접근에 한계를 두고 정리하였음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 비평, 1999)
홍명희, 임꺽정 (사계절, 2008)
조선의 임꺽정 다시 날다 (사계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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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 작가의 역사대하소설 [임꺽정] 전집 10권을 읽고
정리한 원고를 덕향문학 16호 원고로 투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