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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독일의 어느 인터넷 중고매매 사이트에서 발견한 빨간 지갑을 구입하러 어느 판매자 집으로 향했다. 원래는 판매자와 오전 약속을 잡았으나 "혹시 오후에 올 수 있어요? 주말이라 늦잠 자려고요. 미녀는 잠꾸러기니까 ^^"라는 메시지를 받고 나는 오후에 길을 나섰다.
길을 걸으면서 판매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우리가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으로 봐서는 왠지 젊은 독일 여성일 것 같았다. 게다가 농담 섞인 표현에 능숙하고 이모티콘도 자주 사용하는 걸 보니 젊은 독일 여성일 것이란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판매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보통은 판매자가 집 주소를 알려주면서 초인종에 적힌 이름을 말해주기 마련인데(독일에는 다세대주택이 많고 주택 대문에 있는 각 세대별 초인종에는 거주인의 성(姓)이 적혀있다) 판매자는 그저 "맨 아래 초인종을 누르세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과연 판매자는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빨간 지갑은 내 마음에 들지, 잔뜩 기대감에 부푼 채 걷고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 목적지는 내 예상을 빗나갔다. 일반 주택이 아니라 장애인 거주시설이었던 것이다.
'아, 여기 직원이었구나'란 생각으로 벨을 눌렀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더니 예상대로 어느 여성 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직원은 매우 의아한 표정으로 "누구시죠? 무슨 일로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또 한 번 내 예상이 빗나갔다.
"어..."
나는 잠시 더듬거리며 말했다.
"빨간 지갑을 찾으러 왔는데요"
그런데 직원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판매자 이름을 모르지만, 잠시만요..."
익명의 판매자와 나눈 메시지라고 증거로 보여주려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는 순간, 휠체어를 탄 중증지체장애여성과 활동보조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휠체어 테이블 위에는 내가 사려던 빨간 지갑이 놓여 있었다.
"제가 지갑 판매자예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뇌성마비가 있는 듯했다. 여성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제품이에요"라며 내가 지갑을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시간을 줬다.
"와, 제가 원하던 지갑이에요. 사이즈, 색상, 촉감 모두 완벽해요!"
나는 지갑 값으로 8 유로를 여성의 휠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여성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를 바라보며 내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나 자신이 살짝 부끄러웠다.
필자가 구입한 빨간 지갑. ⓒ민세리
지금까지 수년간 중고품 직거래를 해 오면서 나는 왜 판매자가 장애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까? 직거래 장소가 장애인시설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을까? 판매자가 '젊은 독일 여성'이라고 상상하면서 나는 왜 전형적인 비장애인 모습만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까? 그리고 실제로 그 '젊은 독일 여성'을 마주했을 때 나는 왜 살짝 놀랬을까? 순간 나의 편협한 사고방식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장애인의 자기결정적 삶이구나' 하고 나는 깨달았다. 우리나라였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장애여성은 방 안에 머물거나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부모나 활동보조인, 시설종사자 등이 여성을 대신해 나에게 지갑을 건네주면서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을까? 과연 장애여성이 자기 주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넷 직거래를 할 수 있는 환경과 인식이 조성되어 있었을까?
판매자 여성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기까지 약 5분이 걸렸다. 5분 동안 나는 온전히 여성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 옆에 서 있던 활동보조인은 그야말로 보조인일 뿐이었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시설 직원은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5분 동안 판매 주도권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었다. 여성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와 뚜렷한 눈빛에서 그녀가 판매 주도권뿐만 아니라 삶의 주도권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은 그야말로 자기결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자기결정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것이다. © pixabay
우리나라보다 장애인복지가 앞서 발달한 독일은 이미 수년 전부터 장애인의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초점을 맞춘 장애인복지를 모범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자기결정은 말 그대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나아가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인의 자기결정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장애인의 자기결정 능력이 강화되어야 하고, 필요에 따라 보호자나 지원인력이 장애인의 요구 및 의사결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존중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는 능력도 강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장애인의 자기결정이 여전히 법률 속 '자기결정권'으로만 머물러 있는 듯하다. 여전히 장애인복지 이론서에만 머물러 있는 듯하다. 장애인의 자기결정이 아직까지는 현장과 일상에서 적극 실현되지 않는 현실이다.
장애 유무를 떠나 인생의 진짜 의미는 스스로 선택하고 설계하고 결정하는 삶을 사는 데 있다. 그렇지 못한다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지위가 높고 아무리 유명해도 그 삶은 진정 의미 있는 삶이 아니다. 장애인이 아무리 많은 지원과 혜택을 받더라도 정작 스스로 선택하고 설계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삶은 진정 의미 있는 삶이 아닐 것이다.
물론 빨간 지갑 판매자 사례가 독일 내 모든 장애인의 삶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독일에도 여전히 장애인 자기결정권은 100% 실현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사례는 장애인 자기결정이 일상에서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단편적이지만 생생하게 보여준다. 장애인의 자기결정적 삶은 이래야 한다. 현장에서 일상에서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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