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30년을 되돌아본다 ❶
노산의 유언 “현대시조를 살려야 한다.”
김전 (시인. 문학 평론가)
1. 서언
‘현대시조’가 지령 125호를 맞이했고 30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그간 구절양장(九折羊腸)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
현대시조의 흐름을 조명해 보고 현대시조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1983년 7월1일 현대시조 변경 1호가 고고한 울음을 터드리며 세상에 태어났다. 그 전에 6호까지 나온 일이 있었는데, 새롭게 현대시조가 만들어진 연유는 알 수가 없다.
한 회에 1호부터 4호까지 살펴보고 현대시조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변경 1호에서 살펴보면 지도위원에 김상옥, 김어수, 양상경, 편집 대표에 이우종. 채희상
편집위원에 류성규, 류태환, 정하경, 기획위원에 김준, 김해성 , 임영창, 전규태, 황순구, 김상훈, 박재두, 송선영, 이병기, 이우출, 임헌도, 정소파, 정일신 최성연, 최승범, 상임편집에 김월한, 선정주, 지성찬으로 되어있다.
Ⅱ. 현대시조의 중심 내용
변경 1호에서 <여름호 1983년 7월 1일>
1호에서는 노산 이은상 추모 대 특집 ‘노산 그의 생애와 생각’ 으로 노산의 인간, 노산의 문학, 노산의 정신, 노산과 나, 추모 시, 노산의 행적이 실려 있다.
1호 권두언에는 편집 대표로 되어 있는 이우종 시인의 글이 실려 있다. 권두언에도 노산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찍부터 시조 형식이 혼란스럽고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반한
시조 전문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노산 선생이 강조해 왔다. 그래서 행정적으로는 처리가 되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을 때 노산선생이 돌아가셨다.
이우종 선생이 병문안 갔을 때 마지막으로 손을 꼬옥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리 어려워도 ’현대시조‘만은 꼭 살려 주어야해.’ 하시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시는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노대가(老大家)가 하는 이 엄숙한 유언에 목이 꽉 메어 ‘네! 걱정 마십시오.’
라는 한마디를 해 놓고 가까스로 돌아 앉아 울었다. 그때 이우종 선생은 현대시조를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다짐 하였다고 한다.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 창립총회가 1983년 1월30일 비로봉에서 열렸다가 명주식당으로 옮겨 개최되었다.
이날 임시 의장에 선정주 시인이 지명되어 사회를 맡았고 이어 임원 선출이 있었다. 회장은 김어수 부회장은 이우종(상임), 임영창, 임헌도, 황희영 고문에는 서정주, 김동리, 양상경, 조종현 김오남, 조애영 서울 이사에 선정주(상임) 김동준, 김월한, 김준, 김해성, 류태환, 전규태, 지성찬(실무), 황순구, 지방이사 박일송 (강원도) 이도현(충남) 이병기(전북) 송선영(전남) 류상덕(경북) 박재두(경남) 정대훈(부산) 감사 홍준오 신순애,
추천시단에는 초회 추천에 김정희의 ‘여인일기’, ‘외출’ 정공량의 ‘어느 산사에서’ 추천 완료에 채나원의 ‘自省三題’가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채나원은 현대시조에 관심이 많고 본지 편집 일을 하며 시조 부흥 운동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초회추천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천료가 되었다.
혁신 2호에서<가을 호 1983.11.10.>
노산 선생의 유지에 따라 힘차게 태동하였다. 2호에서는 창작시조 현대를 증언하는 20인 선으로 선을 보이고 있다. 정훈, 정소파, 최승범, 송선영, 이우종, 류성규, 김상물, 김종, 민경헌, 박영교, 박정숙, 김몽선, 공재동, 조동화, 이정환, 김영수, 정대훈, 권형하, 김경자, 양원식 등 쟁쟁한 시인들의 작품이 본지를 화려하게 만들고 있다.
대전에서 개최된 현대시조 전국 백일장 세미나 경과와 입상자 작품을 실었다. 또 전국 동인순례 가람문학회 시조 시인들의 작품을 실었다.
추천 부분에서 천료 작품으로 박옥위 ‘소리’, 초회 추천으로 법인 ‘不眠’ 권혁모 ‘하회에서’ 박종균 ‘東海에서’ 김영배 ‘木蓮’이 선정되었다
3호< 겨울호 1983. 12. 24.>
飛天像을 현대지조 象徵像으로 결정하다.
논단에서 이우종의 ‘가람시조론 형식론’을 중심으로 김상선의 ‘육당 최남선론’을 중심으로 장식하였으며 현대시조 지상 백일장 수상자와 수상작이 실려 있다. 현대시조를 부흥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국 백일장을 개최하는 등 현대시조는 많은 활약을 했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주부부, 노인부 등 다양한 계층에서 선발하여 시조를 알리는 데 큰 공현을 하였다.
전국시조 동인 순례에서 부산 시조문학회(볍시 同人) 회원들의 작품을 게재 하였다.
추천 시단에서는 추천완료에 김정희 ‘길쌈四季歌’ 이국민의 ‘硯滴’ 초회추천에 조혜숙의 ‘山頂의 祈願’ 강경주의 ‘바람개비’ 선정되었다
4호 <봄 1984.3.10.>
현대시조의 숙원사업이던 ‘제1회 현대시조 문학상’ 시상식을 서두에 실었다. 수상자로는 임현도 공주사대 대학원장, 황순구 대전대 교수가 수상하게 되었다.
1984년 2월 4일 한국 문화예술 진흥원 강당에서 신은경 아나운서의 사회로 화려하게 개최 되었다. 이우종 부회장의 경과보고 임영창 부회장의 심사보고 임헌도 시인과 황순구 시인의 약력소개에 이어 임헌도, 황순구 시인의 수상소감을 게재하였다.
84년 현대시조 문학상 기념 논문에서 임헌도 시인의 ‘춘원시조론’. 황순구 시인의 ‘안민영 론’을 실었다
84년 봄 현대시조 시단에 50인선을 마련하여 좋은 작품들이 발표 되었다.
추천 詩壇에는 추천완료 작품으로는 강경주 ‘거리에서’ 김광경 ‘청산도’ ‘山房歌’ 김영배 ‘초시’ 장이두 ‘가을 抒情’ 초회 작품에는 유광걸 ‘응시자’ 박록담 ‘이대로 돌이 되어’ 손재중 ‘白瓷花甁’ 조근호 ‘달빛 抒情’ 이윤주 ‘고드름’ ‘아쟁 산조’ 가 선정되었다.
5호 <여름 1984.8.1.>
현대시조 5호에는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시조 3수가 발표 되었고 전병택, 전성신, 나병기 옹이 현대시조 운동에 동참을 자원하여 노익장을 과시한 모습이 실렸다. 84현대시조 시단에 37인선이 게재되었다.
논단에는 임헌도 ‘고시조에 나타난 충효사상’ 김상선 ‘춘원 이광수론’이 게재되었고 자작시 해설에 김상형의 ‘나비’ 최진성의 ‘연푸른 설화이고’등이 나타나 있다.
현대시조 소 시집으로 임영창 시인의 작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전국 동인순례에 부산 ‘물례 동인 편’이 소개 되었다.
추천시단에는 추천 완료에 나병기 ‘파시의 밤’, ‘가을 나그네’ 전병택의 ‘도자 삼제’ ‘예술가의 손.4’ 전성신의 ‘황악산 직지사’. ‘만남’ 손재중의 ‘사모곡’ 문한종의 ‘휴전선 너머의 고향 꿈’ 박종균의 ‘이른 봄 아침’ ‘3월은’이 천료 되었다.
초회 추천으로 이광우의 ‘이른 봄 아침’ 장영기의 ‘달달 무슨 달’ 김철수의 ‘설움’ 안의선의 ‘동해 환상’ 이창희의 ‘봄의 서곡’ 김람정의 ‘바늘 서정’. ‘부부’가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으로는 김어수 (현시조협 회장) 김준(서울여대 교수) 류태환(현시조협 편집위원) 이우종(현대시조 편집인)으로 되어 있었다.
Ⅲ.결언
1983년은 현대시조의 태동기였다. 현대시조가 태동된 것은 노산 이은상 선생의 유지에 의하여 탄생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 현대시조시인 협회”가 발족 되어 기관지 역할을 하게되었다.
‘한국 시조시인 협회’가 있는 데 새롭게 발족하는 ‘한국 현대시조시인 협회’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따라서 현대시조를 사시(斜視)의 눈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당당히 현대시조를 통하여 등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조 출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왕성한 ‘현대시조’의 여러 활동은 한국 시조 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전국 규모의 백일장은 초등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실시되었고 세미나 및 현대시조 문학상 제정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당시 KBS 방송국에서도 방영되었음을 볼 때 상당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시조사의 국민시조 부흥운동은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