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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미로 찾기
--홍정미의 시세계
안현심(시인·문학평론가)
1.
시인은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이 남다르며, 내면세계가 활성화된 사람이다. 내면세계, 잠재의식의 세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시인의 행위 양상을 은밀히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만의 특별한 내면세계가 시로 형상화되었을 때 독자들은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듯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그처럼 특별한 내면세계가 시적 감성과 조화를 이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좋은 시의 탄생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홍정미는 내면세계의 언어를 탁월하게 구현하며 영혼 여행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따라가다가 보면, 내면의 길은 구부러지고 뒤틀리다가 불쑥 솟아오르고, 또 지하 깊숙이 곤두박질치기도 하는데, 이쯤에서 독자는 어지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꼬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 미로의 끝에서 빛나는 고뇌 혹은 아름다운 서정과 마주하게 된다.
내면세계의 손짓을 어쩌지 못해 시인이 된 사람, 그의 시를 정독하는 동안 시와 한 몸이 될 수밖에 없는 영혼을 마주하고 말았다. 시를 쓰지 않고는 온전히 살기 어려운 천생(天生)의 시인, 시인의 에움길을 동행하며 빛나는 아픔에 젖을 수밖에 없다.
2.
홍정미의 첫 시집 표제에등장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년)’는 아르헨티나의 천재적 작가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이었으나 말년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채였다. ‘미로의 작가’라고도 불리는 그는 미로에 갇혀 방황하는 인간을 내세워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자리를 헤맬 수밖에 없는 지적 한계를 보여주었다.
내 가방 속에는
보르헤스 미로로 가득하다
둥글둥글 낯선 미로, 우물우물 복잡한 미로, 흥미로운 소문에 갇혀버린 미로, 시간의 무한한 갈라짐으로 속수무책인 미로, 앞뒤가 맞지 않는 초고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가방 속,
보르헤스의 미로는 백 년 내내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문장처럼 고요하다
― 「가방 속 보르헤스」 전문
홍정미는 보르헤스의 미로가 가방 속에 가득하다고 형상화하고 있다. “둥글둥글 낯선 미로, 우물우물 복잡한 미로, 흥미로운 소문에 갇혀버린 미로, 시간의 무한한 갈라짐으로 속수무책인 미로”가 “뒤죽박죽 엉켜”있는데, 그들은 “백 년 내내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문장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시 창작을 위해 보르헤스의 ‘미로’를 빌려왔을 뿐, 보르헤스의 미로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미로의 본질은 사뭇 다르다. 보르헤스의 미로가 우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시인의 미로는 시로 탄생하지 못한 채 가방에 갇혀 있는 미숙아들이다. 이때 ‘가방’은 ‘시인의 내면세계’로 치환해 읽어도 무방하다. 시의 형상을 입고 내면세계 즉 가방을 빠져나오려고 하지만, 온전한 시가 되지 못한 시 부스러기들인 셈이다. 그래서 시인의 미로는 “백 년 내내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문장”일 수밖에 없다.
시를 궁구하는 시인의 가방에는 책과 시상을 메모한 수첩 등이 들어 있을 게 분명하다. 그와 같은 사실을 “앞뒤가 맞지 않는 초고가 뒤죽박죽 엉켜” 있다고 형상화한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표현과 뒤죽박죽 엉켜 있다는 표현은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써 출구가 어딘지 모르는 ‘미로’와 동일한 맥락을 지닌다. 시가 되지 못한 미숙아들이 들어 있는 가방을 ‘가방 속 보르헤스’라고 은유한 시인의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바흐는 나를 묻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지쳤는지 다만 겹친 음들 사이에 내 삶 하나를 조용히 놓아주었다 창밖으로 석양이 누릿누릿 무거운 색으로 지고 있었다
…(중략)…
바흐를 다시 만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지만
마침내 도착했다
나 자신에게로
― 「바흐를 만나다」 일부
홍정미 시인은 독서도 많이 하고, 그림이나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그와 같은 체험들은 시 세계를 기름지고 풍성하게 가꿔줄 터, 시 「바흐를 만나다」에서도 음악적 상상력이 밀도 있게 구현되고 있는 걸 인지할 수 있다.
겨울 강가를 걷고 있을 때, 한 카페에서 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문을 닫아도 닿을 만큼 낮고 단정한 음악을 들으며, 시인은 삶이 몰아세우기 전 자신이 얼마나 바흐를 좋아했는지를 기억해 낸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바흐와 재회했을 때, “바흐는 나를 묻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지쳤는지, 다만 겹친 음들 사이에 내 삶 하나를 조용히 놓아”주었을 뿐이다. 호들갑 떨거나 닦달하지 않은 채 조용히 내면의 길로 안내한 것이다.
음악적 상상력이 내어주는 길은 깊고, 다정하고, 감미롭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바흐의 음악을 듣고 빨려 들듯 들어가 내면세계를 더듬는 화자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바흐를 다시 만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지만” 화자는 마침내 나 자신에게로 도착했다고말한다. 음악과 더불어 내면세계를 여행하다가 자신에게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만난 ‘자신’은 눈이 더욱 맑아졌을 것이 분명하다.
시를 쓰는 행위는 자신을 찾기 위한 영혼 여행자의 고독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자신을 찾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거듭거듭 찾아 나서야 한다. 다시 찾은 ‘나’는 더욱 높고, 깊고, 넓어진 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알을 깨고 나왔지만, 더욱 큰 세계가 감싸고 있어 거듭거듭 깨야 하듯이 말이다.
담으로 이어진 주택을 지나
행성 프록시마b까지 가는 길
댕그랑댕그랑
종소리 은밀하게 손 내밀면
무수한 은유가 춤을 춘다
목련 하얀 치맛자락이 나를 툭 건드리면
순간, 환하게 불이 켜지고
나는 탱고 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태양과 이어져 있는 길
바람난 생명으로
가득하다
― 「목련 길을 걷다」 전문
목련꽃이 활짝 핀 봄날, 시인은 “담으로 이어진 주택을 지나/ 행성 프록시마b”로 이어지는 길을 걷는다. ‘프록시마b’는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는 행성으로서 가설에 묻힌 채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시인은 왜 지구의 골목을 지나 행성으로 가는 길을 열고 있을까? 물음의 끝에서 독자들은 우주 공간을 넘나드는 상상력을 목도하게 된다.
미지의 행성을 동경하는 시인에게 “댕그랑댕그랑/ 종소리 은밀하게 손 내밀면/ 무수한 은유가 춤을” 추며 다가온다. 종소리는 목련 봉오리로부터 울려왔을 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시인 앞에는 은유로 현현되는 우주가 펼쳐질 것이 분명하다. 온갖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노래하며, 생명력 넘치는 우주, 그것은 바로 ‘봄’이라는 현상이다.
이처럼 경이로운 세계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소 외설적으로 언급되는데, “태양과 이어져 있는 길// 바람 난 생명으로/ 가득하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생명의 탄생과 생장에 꼭 필요한 태양, 그쪽으로 이어진 길이 바람난 생명으로 가득하다고 언급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람난 생명”에 주목해야 한다. 바람난다는 표현에는 성 충동적 은유가 함의되는바, 동물이든 식물이든 바람이 나야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의 ‘바람’은 아주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생명 에너지라고 언급할 수 있겠다.
시 「경칩」도 「목련 길을 걷다」와 마찬가지로 함축과 은유를 도입해 ‘봄’의 현상을 생동감 있게 구현하고 있다. “봄은/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몸을 뒤척이며/ 시작”되는데, “가만히 두면 땅에도 숨이 생겨 아래와 위로 나뉘고, 발끝 아래 어둡던 흙이 조금씩 밝아”지면서 발바닥을 따끔거리게 한다. 이때 바람 한 가닥 한 가닥이 분명하게 보이고, “하늘도, 바람도, 나무도 잔뜩 물이” 오른다. 한껏 부푼 몸이 마음을 한꺼번에 쏟아내 골목 모퉁이까지 환해지면, “나는 올라가고, 도망가고, 뒤꿈치에 용수철 달린 신발을 신고 하얀 절벽 아래로” 내달리다가, 알 수 없는 손에 의해 “돌려세워지고, 첨벙 빠지”기도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이 끝없는 길 사이”로 바람은 끈질기게 따라온다.
이 작품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르게도 하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구절이 겹쳐오기도 한다. 프루스트가 묘사하는 ‘바람’은 좋아하는 소녀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하는데, “이 바람은 그 애의 옆을 지나온 것이다. 그 애의 소식을 내게 소곤거리지만 나는 그 뜻을 알 수 없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그것에 입 맞추었다고 표현한 부분이 그렇다.
홍정미는 직관력이 뛰어나고 영적인 세계, 잠재의식의 세계가 활성화된 시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와 같은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겠는가? 마법사의 마법처럼 봄의 현상과 이미지를 이보다 더 역동적 ‧ 환상적으로 구현할 수는 없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원석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인의 잠재력이 놀라울 뿐이다.
3.
홍정미 시에서 가족사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대부분의 시인이 첫 시집에서부모에 관한 시를 많이 발표하는 것과 대비되는 측면이다. 짐작하건대, 홍정미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개인사적이기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세계, 좀 더 확장된 우주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아니면 가족에 대한 형상화에서도 특별한 상상력과 표현 기교를 도입해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장치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장에서는 가족사를 다룬 시 「봄은 소란으로 가득했지만」과 「아버지의 복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강둑과 벚나무들이 비틀거렸어
강물도 떨었고 바위들은 창백하게 누워 있어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골목에선 산더미같이 높은 바람이 불었어
스르르 번지던 향기가 문장이 되어 병실로 들어왔어 삶이란 다 읽지 못한 채 자꾸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일인지도 몰라 그녀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다음 장을 넘겼어
봄은 소란으로 가득해
병실엔 길고도 줄기찬 고통이 줄지어 서서
그녀를 보고 있는데
― 「봄은 소란으로 가득했지만」 일부
허리가 부러져 입원한 어머니는 기저귀를 찬 채로 침대 위에서 주절주절 옛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나는 집에 두고 온 자스민을 생각한다. 너무 이르게 밖에 내놓아서 밤을 잘 견딜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 자스민 향기가 어머니의 말 사이를 지나 희미하고도 은은하게 따라와 앉는다. 어머니를 간호하면서도 자스민을 더 걱정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이기성과 근원적인 고독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표현 기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자의 심금을 더 울리는데, 이러한 기법은 이 작품을 내내 관통하고 있다.
명절에도 오지 않던 자식들이 침대 곁에 서 있자, 어머니는 좋아서 밥 한술 넘기지 못한다. “그녀가 젖을 물리던 밤, 등을 굽히던 부엌, 잠들지 못한 밤들이 각자의 얼굴을 하고 서” 있을 때, “허리보다 깊은 곳”에 “서로가 서로를 낳으며 생긴 되돌릴 수 없는 통증”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쉬지 않고 먼 계절을 불러내 “이 작은 방에서 다시 집을 짓”느라 바쁘다.
“서로가 서로를 낳으며 생긴 되돌릴 수 없는 통증”은 가난한 시절을 지나오며 어쩔 수 없이 생성된 가족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연민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채 “침대 옆에서” 각자의 “얼굴로 바라보는 자식들 사이” 어머니는 저쪽에 있고, 그녀의 인생은 이쪽에 있다는 형상화는, 타협할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어머니의 고독과 쓸쓸함이 고조되는 부분이다.
시인은 감정을 배제한 채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형상화는 역설적이게도 더 큰 슬픔을 몰고 온다. 그 슬픔은 “강둑과 벚나무들이 비틀거렸어/ 강물도 떨었고 바위들은 창백하게 누워 있어/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골목에선 산더미같이 높은 바람이 불었어”라는 은유가 대신 말해주고 있다.
“삶이란 다 읽지 못한 채 자꾸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이번 생에서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병실엔 길고도 줄기찬 고통이 줄지어 서서/ 그녀를 보고 있는데” 봄은 제 본분을 다하느라 소란스럽기만 하다.
방안에서는 한 생명이 꺼져가는데 밖은 탄생의 환호성으로 소란스럽다는 형상화, 독자는 이 부분에서 책장을 넘기지 못한 채 먼 산을 바라보아야 한다. 소리 내어 우는 것보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느껴 우는 울음이 얼마나 깊은 슬픔을 몰고 오는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머니라는 희생의 상징을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봄이 오면 일어나서
걸어 나갈 수 있을 거야
밭에 감자도 심고 고추도 심어야지
감자가 여물어 가는데
그는 없다
석양과 도시의 변두리를 좋아하더니
그곳에서 노을 하나 소유했을까
너무 아름다워 서러운 노을 하나 소유했을까
그곳은 알 수 없는 블랙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
이 세상 저물녘, 그는 어둡고 악몽 같은 복도였고
현기증 일으키는 깊숙한 층계였으므로
해줄 수 있는 일은
감자를 캐서 그의 복도와 층계를 채우는 것
어두운 복도에 등불을 단다
그는 나로부터 자유로이 날아 봄이고 여름이다
― 「아버지의 복도」 전문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아버지를 묘사하다가 “이 세상 저물녘, 그는 어둡고 악몽 같은 복도였고/ 현기증 일으키는 깊숙한 층계였으므로/ 해줄 수 있는 일은/ 감자를 캐서 그의 복도와 층계를 채우는 것”이라고 형상화한 부분에서 시인의 의도가 드러난다.
아버지를 “어둡고 악몽 같은 복도였고/ 현기증 일으키는 깊숙한 층계”였다고 형상화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때는 “이 세상 저물녘”이었으므로 말년에 지병으로 고생한 것을 표현한 것인지, 가정적이지 않은 아버지를 형상화하고자 한 것인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해도, 그는 감자를 좋아했으므로, 그의 복도와 층계를 감자로 채워주는 일은 최선이 될 것이며, 화자에게도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어두운 복도에 등불을” 다는데, 등불을 거는 행위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어둡기만 하던 아버지에게서 밝은 측면을 발견하겠다는 의지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기억에서 어두운 측면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으로 긍정적이며 신성한 제의가 아닐 수 없다. 그랬을 때, 아버지는 딸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이 날 수 있고, 화자 또한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하 시집을 뒤적이다 책갈피 속에서 승차권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나는 1997년 5월 따뜻했던 기억 속으로 떨어졌다
… (중략) …
승차권은
내 몸속에서 출렁이는 바다였다
오늘이라는 해안에 닿기 위해
서른 해 동안이나 거칠게 파도쳤다
―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전문
홍정미 시를 읽을 때 늦었다 싶게 공부한 이력을 빼고는 그를 온전히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자력으로 공부하며 어려움을 극복한 체험이 시 세계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 「청량리에서 춘천까지」는 그 시절의 체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 날 유하 시집을 뒤적이는데 승차권 한 장이 툭 떨어지며 1997년 5월의 기억 속으로 스며든다.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는 그녀가 웃었다. 이파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꾹꾹 눌러 그은 밑줄 사이로 웃음이 잠시 머물다 날아갔다. 보름달 같은 눈매를 지닌 언어가 웃었다. 온 세상이 그리움의 문장으로 가득했다. 현재를 채운 원시의 목소리, 꼬리를 세차게 휘두르다 머리를 높이 쳐든 문장들이 웃었다. 나무 위에 흩어져 있던 구름도 웃었다.”
춘천에서 성북동까지 등하교하며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설레던 상황을 ‘웃었다’라는 시어의 반복으로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시집 속의 승차권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눈부신 순간을 훔쳐” “글 속에 가두려 했으나 기차는 늘 공지천 안개 속으로 나를 밀어” 넣으며 꿈을 바스러뜨렸기 때문이다.
시인은 “성북동에서 춘천까지 긴 철길 위에” 두고 온 웃음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는 동안 “깃털 하나의 무게로 얼마나 멀리 날아왔을까? 이름 붙이지 못한 사랑, 도착하지 않은 생각들이 작은 날갯짓에 반짝 빛”났을 때, 그는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내 안의 깊은 곳”에 스며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승차권 한 장은 시인을 탄생시키는 데 동기부여를 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인 셈이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고투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최승자의 시집
내 무덤 푸르고를 읽는데
얼룩진 상처가 푸르다, 아직도 푸르다
정미언니에게
1994년 3월 29일
잉크처럼 번진 花, 花, 花
후배가 젊은 혈관을 접어 내게 주었다
나는 그때 구불거리는 이 글씨처럼
헉헉거리며 골목을 헤맸다
삼십 년 전, 삼십 개의 골목
여전히 내 무덤은 푸르고
내 젊은 분노는 비늘처럼 번쩍이는데
조용한 어느 오후,
후배의 손이 나를 덮었다가 펼치던
花, 길고 질긴 시간이
푸르게 눕는다
― 「내 무덤 위에, 花」 전문
시 「내 무덤 위에, 花」 역시 학창 시절의 고뇌가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이다. 시를 쓰고 싶은 절실함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시는 순순히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학교생활 또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얼마나 방황했는지는 시의 형상화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최승자 시는 끔찍할 정도로 어둡고, 과거에 대한 노출이 적나라하다는 게 특징이다. 비극적 사랑에 의한 슬픔 혹은 인생의 덧없음으로 인한 공허감, 자기연민 등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자학하고 냉소하지만, 그러한 어둠이 또한 매력적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내 무덤, 푸르고는 최승자의 네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을 끝으로 시를 그만 쓰겠다고 선언하지만, 십여 년이 지난 후 다시 시집을 내놓는다.
홍정미 시인은 1994년 3월 29일 후배에게서 내 무덤, 푸르고를 선물 받는데, “정미언니에게”라는 사인이 꽃처럼 번져 “잉크처럼 번진 花, 花, 花”라는 시구를 떠올리기에 이른다. 그 시절에 “얼룩진 상처가” “아직도 푸르”기만 한데, 후배의 글씨는 꽃처럼 피어 역설적 아름다움을 생성해 낸다. ‘꽃’을 한자어 ‘花’로 표현한 것은, 시각적 효과를 얻기 위한 기법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시인은 당시 “구불거리는” 후배의 사인처럼 “헉헉거리며 골목을 헤맸다/ 삼십 년 전, 삼십 개의 골목”은 길고도 질긴 무덤이 되어 오늘까지도 화자를 괴롭힌다는 형상화가 몹시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은 시의 길을 가는 동안 화자를 일으켜 세우는 든든한 동행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최승자 시집의 표제 ‘내 무덤, 푸르고’를 인용함으로써 내 아픔 또한 푸르게 살아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이 인지하고 있는 최승자의 아픔은 자연스레 시인의 아픔이 된 것이다.
4.
홍정미 시는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묘사하기도 하고, 좋은 시를 생산하기 위한 몸부림을 형상화하는가 하면, 좋은 시는 어떤 것인지 제시하는 형식을 띠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시를 쓰는 순간순간마다 좋은 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증거라고 하겠다. 시 「글자로 그린 풍경」은 시가 탄생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그 은유가 참으로 돋보이는 작품이다.
흩어진 단어들을
양동이에 긁어 담는 일,
처음에는 수월해
단어들이 저절로 굴러들어 올 때까지는
양동이가 묵직해지면
손수레에 실어 책상으로 나르지
문을 열고 떡갈나무 속으로 던져 넣는 거야
부채꼴로 흩어지며 고르게 스며들어야 하거든
바늘 끝에 매달린 숨결처럼
계기판의 압력이 떨어지면 다시 불 속으로 던져
물론 그 안은 뜨겁지
아궁이 안에서
돌처럼 단단해진 문장,
글을 쓰고 골목으로 나서면
한낮의 태양마저 시원하게 느껴지지
― 「글자로 그린 풍경」 전문
제1연은 시가 될 만한 어휘를 주워 담아 구상(構想)하는 과정을 형상화하면서 그때까지는 수월하다고 말한다. 제2연의 “양동이가 묵직해지면/ 손수레에 실어 책상으로 나르지”라는 형상화는, 시어를 충분히 모으고 구상이 끝나면 책상으로 가서 쓰기 시작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때 시는 종이에 써야 하는데 종이는 나무로부터 얻기 때문에 “문을 열고 떡갈나무 속으로 던져 넣는 거야”라는 형상화가 나올 수 있다. “부채꼴로 흩어지며 고르게 스며들어야 하거든”이라는 형상화는, 시어가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돼야 문장이 촘촘하고 유려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바늘 끝에 매달린 숨결처럼/ 계기판의 압력이 떨어지면 다시 불 속으로 던져/ 물론 그 안은 뜨겁지”라는 표현은 긴장감이 결여된 시가 탄생하면 불 속에서 도자기를 단련하듯 다시 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합평할 때는 비판받을 각오로 임해야 하는데, 그러한 상황이 “물론 그 안은 뜨겁지”라고 형상화된 것이다. 그처럼 치열한 퇴고나 합평을 거치고 나면, “아궁이 안에서/ 돌처럼 단단해진 문장”이 탄생할 뿐 아니라, “한낮의 태양마저 시원하게 느껴”질 만큼 기쁨도 클 것이다.
샹사완 사막으로 가는 길,
나는 음산산맥을 따라 달리고 있다
그 산맥은 거대한 책장,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었다
붉은 사암은 불타는 문단,
푸른 편마암은 오래된 구절,
회색 석회암은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이었다
바위는 스스로를 비추고
그 그림자가 또 다른 바위를 낳으며
복제가 끝없이 이어질 때 내 시선은 미로에 갇혔다
광부들은 거울에 새겨진 글자를 삽과 드릴로 해석했다
금의 문장, 구리의 행간, 리튬의 미래 시제들이
바위 속에서 깨어났지만 산은 자신이 읽히는 줄 몰랐다
그 문장은 오직 바람과 시간에만 열려 있었다
게르는 페이지 귀퉁이로 산의 여백에 놓여있고
옥수수 군단, 해바라기 군단은 각주로 길가에 흩어졌다
나는 그 길 위에서 한 문장을 따라가다가
다른 페이지로 미끄러지며
또 다른 문장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덮을 수 없는 책,
서로를 비추며 번식하는 거울이었다
― 「엽서 - 서몽골 음산산맥에서」 전문
시인은 여행할 때마다 그 감동을 「엽서」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는데, 그 시들이 이번 시집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다. 「엽서 - 서몽골 음산산맥에서」도 그중 한 편으로, 주제는 음산산맥을 책장 혹은 문장에 비유하면서 산맥의 모양과 형질을 분석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서몽골의 음산산맥을 달리며 “붉은 사암은 불타는 문단/ 푸른 편마암은 오래된 구절/ 회색 석회암은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이”라고 형상화하고 있다. 붉은 사암 부근을 지날 때는 열정적인 소설의 한 문단이 떠오르고, 푸른 편마암 부근에서는 오래된 구절을 상상하는데, 푸른 편마암을 오래된 구절로 은유한 것은 그 지질학적 생성 시기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회색 석회암을 아무도 읽지 못한 문장이라고 형상화한 것은, 경제적 가치가 없어서 캐내지 않았거나 작업하기 어려워서 캐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음산산맥의 바위는 스스로를 비추고, 그 그림자는 “또 다른 바위를 낳으며/ 복제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 변화무쌍함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광부들은 삽과 드릴로 “금의 문장, 구리의 행간, 리튬의 미래 시제”를 바위에서 캐내는데, 금맥을 ‘문장’이라 하고, 구리를 ‘행간’, 리튬을 ‘미래 시제’라고 표현하며 ‘글’에 빗댄 은유는 독자를 낯선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강 위로 재즈가 흐르고 사람들은 음표로 출렁거렸다 에타 제임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쓸쓸했다 자라섬의 풀잎, 조명 아래 흔들리는 잔디, 색소폰 음률이 문장으로 흘렀다
강은 현처럼 떨리고 바람은 드럼을 쓸었다 낮에는 트럼펫이 햇살을 들어 올리고 저녁엔 피아노가 노을을 휘감았다 나는 모든 음을 필사하였다 연인들의 웃음까지도 필사하였다
―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일부
홍정미 시인의 글쓰기는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현장에서도 계속된다. “나는 모든 음을 필사하였다. 연인들의 웃음까지도 필사하였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필사’는 깊이 내면화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좋아하는 시를 필사한다고 할 때, 그 시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강렬한 욕구까지가 함의된다는 뜻이다. 화자가 모든 음을 필사하고, 연인들의 웃음까지도 필사했다는 것은, 페스티벌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는 부드럽고 달콤한 이미지로서 에로틱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독자들의 정서 또한 말랑말랑해져서 화자가 이끄는 대로 시 세계를 여행할 수밖에 없다.
5.
홍정미 시를 읽는 동안 행성으로의 긴긴 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오래된 문장과 미래 시제까지 해독하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오니 푹푹 찌는 무더위, 팔월 한복판이다.
“고리끼를 좋아해 무작정 향한 모스크바, 삶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자작나무 숲에 내려놓았다. 하얀 껍질이 젖으며 무늬가 선명해졌다. 나도 저 나무껍질처럼 벗겨진 무늬가 있었다.”(「자작나무 숲에서」).
벗겨진 자작나무를 연민하다가 도망가지 못한 바람처럼, 나는 왜 비틀거릴까? 내가 시인인 듯 시인이 나인 듯, 올라가고 도망가고, 용수철 달린 신발을 신고 절벽을달리다가 마법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둥글둥글 낯선 미로, 우물우물 복잡한 미로, 흥미로운 소문에 갇혀버린 미로”에서 영혼을 도둑맞은 게 분명하다.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 시는 곧 저니까요.”
다듬지 않은 원석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인, 그 행보를 지켜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