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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스카 신비에 참여하기 위하여
사순 제1주일: 다해: 빠스카 신비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 안에 파스카 축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은 없다. 빠스카 축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일을 거룩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승리와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는 파스카 축일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하여 40일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의 충만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간으로 사순절을 살고 있다. 오늘의 성서 대목들은 이 파스카라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차 있는 우리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다.
제1독서: 신명 26,4-10: 선택받은 백성의 신앙고백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8-9절)에서 수확한 첫 결실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감격에 찬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첫 결실을 바치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고백하고 있다.
“저의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 이었습니다. 그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이집트로 내려가 이방인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수가 많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이 저희를 학대하고 괴롭히며 저희에게 심한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저희의 소리를 들으시고, 저희의 고통과 불행, 그리고 저희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강한 손과 뻗은 팔, 큰 두려움과 징표와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5-9절).
이 대목을 사순절과 연결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은 12부족의 시조인 이스라엘이고, ‘떠돌아다니는’이란 말은 유목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예레 50,6; 에제 34,4.16; 시편 118,176; 루가 14,4-6) 구원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유랑생활 끝에, 즉 고통의 시기가 끝난 다음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둘째로는 억압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아우성을 치자 주님께서는 ‘징표와 기적’(8절)으로 그들을 해방시키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해 오랫동안 시험과 단련을 받았듯이 우리도 약속의 땅인 파스카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거기에 도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순절을 지내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스카의 신비는 약속의 땅보다 더 의미가 깊다.
복음: 루가 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유혹의 내용이 아니라 이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이 단련되고 또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케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체험 중심으로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유혹은 예수님의 수난까지 계속된다. 즉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유혹이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1-2절)고 하고 있고,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13절). 그 ‘다음 기회’란 ‘수난의 때’이다. 그 악마는 유다의 배반과(루가 22,3)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루가 22,53)라고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둘째, 이 유혹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한(루가 3,22) 세례 후에 나타난다. 사탄은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영광에 결부시켜 세속주의적인 ‘메시아’로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혹을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3.9절).
이러한 유혹은 계속 예수님께 그분의 공생활 중에도 나타났던 것이었다. 군중들(14,15; 19,11)과 고향 사람들(4,23) 그리고 사도들(10,20)로부터도 나타났다. 십자가 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23,35). 사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다.
이 유혹은 바로 예수께 하느님의 뜻에 맞는 메시아로서보다도 인간들이 바라고 원하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는 무서운 유혹이다. 즉 현세적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동요시키는 유혹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보여주신 것을 통해 원하시는 것과는 달리, 즉 하느님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눈치에 자신을 맞추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성공하는 영원한 유혹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의 표현인 ‘말씀’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4.8.12절).
즉 예수님은 ‘말씀’의 식별력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신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명이다. 즉 하느님만이 우리가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제2독서: 로마 10,8-13: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고백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이란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의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것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말하고 있다. 그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음의 멍에까지도 없애셨다.
이제는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 구원을 갈망하며 하느님께 호소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때에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여정도 그리고 그 도착지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사순절은 파스카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은총이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감으로써 말씀을 실현시켜 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예수님께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라고 더 애쓰는(갈라 1,10)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체를 통해 받으셨던 유혹을 우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리하고 인간적인 원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유혹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좀 더 나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사순 제1주일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 조욱현 신부님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