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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5편 3절-4절: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3절: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성도에게는 두 종류의 싸움이 있는데, 시온의 백성이 된 자는,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자는 먼저 자기 속에서 대내전의 싸움이 있다. 이 대내전에서는 새사람이 옛사람을 이겨야 한다. ‘새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이에 반해 한 쪽 마음에는 세상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도 있으니, 이것을 ‘옛사람’이라고 한다. 현재적 자기가 진리를 붙잡으면 새사람이 이기는 거고, 현재적 자기가 세상을 붙잡으면 새사람이 지고 옛사람이 이기는 거다. 옛사람이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먼저는 대내전에서 이겨야 하고, 그 다음에 대외전에서 이겨야 한다. 몸 밖에 있는 세상적인 정신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자기를 세상소원 목적적으로 살도록 하면 안 된다. 이 대외전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진리이치, 생명이치, 하나님의 도덕이치로 무장을 하면 된다. 이 무장을 하지 않고 싸우려고 하면 백전백패다. 말씀으로 무장을 하지 않으면 대내전이나 대외전에서 이길 수 없다. 안과 밖의 싸움을 이길 수 없다. 특히 우리 궁극교회의 신앙은 영능의 실력에 중점을 둔 신앙이니, 내가 하는 교훈도 이걸 염두에 두고 한다. 성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도 이것에 목적이 들어가 있다.
자기의 신앙을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이 사람은 힘이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의 종교인일 뿐이고, 거짓 종들이나 사기꾼 목사들에게 마냥 속아 넘어가게 된다. 이러면 신앙인격 면에 열매가 없이 자기는 완전히 쪼그라지고, 자기로 통해서 신앙운동이 진리운동이 주님 오실 때까지 대대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 면이 다 끊어진다. 성경에서 이 면을 두고 ‘악한 자의 자손 끊어지리로다’ 라고 하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자식을 많이 낳아서 후손 대대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복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이게 부모 마음대로 되느냐? 안 된다. 사람이 나고 죽고 하는 것이나, 세상의 복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달려있는 것이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태어났을 때 먼저 진리의 말씀의 씨앗을 마음바탕에 심어놓고, 자라면서 이게 자꾸 자라게 해서 하나님께 붙들려 살게 하는 게 참 복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하는 것만 아니라 일반 도덕성이나 공중도덕도 다 포함이 되어있다.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사람들과 사귈 줄을 몰라서 사람 가운데 섞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리더십도 없는 거고, 이런 사람은 다 싫어하고 도망을 가 버린다. 그래서 사람은 모든 사건 환경 면에서 오는 오각의 오감성, 사람을 만나면서 오는 오각의 오감성을 다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느낄 줄을 모르면 그만큼 폭이 좁고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돼버린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도록 하면 안 된다.
진리신앙을 떠나서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없이 되는 모든 것은 자기 만족일 뿐이고, 자기 기분일 뿐이지 사람이 다듬어지지를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통해서 되어지는 것은 영적인 기능 지능 면이 잘 다듬어진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고 했다.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이 사람은 벌써 죄가 자기 안에서 성립되어 있는 거다.
믿는 사람이 진리를 놓치면 선악과를 먹게 되고, 진리를 붙잡으면 생명과를 먹게 된다. 선악과를 먹는 것은 곧 죄를 짓는 거다. 이 죄를 이기려면 늘 진리 생명과를 먹어라. 진리 생명과를 안 먹으면 죄를 이길 도리가 없다. 그리고 죄를 행동에서만 찾으면 안 된다. 다윗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그만 죄악에 넘어갔다는 거다. 죄에 넘어간 것은 곧 옛사람이 강했다는 증거이고, 진리를 붙잡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자기를 못 다스린 증거가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자기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우리의 죄 사함은 회개를 통해 되는 것인데, 회개를 한다는 것은 ‘내가 이런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으로만 알면 안 된다. 잘못 됐으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바로 고치는 게 회개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바로 나가는 것을 모르면 같은 죄를 또 짓게 된다. 틀렸느냐? 그러면 바로 나가야 한다. 이래야 회개가 된다.
이미 지은 죄에 대해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한다고 해서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회개를 하면 주님께서 그 죄를 기억지 않는 것이지 없이 해 주는 게 아니다. 이미 지나간 것은 기억지 않는다는 것은 바른 것을 잡고 앞으로 계속 뛰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다. 바로 뛰지 않으면 계속 죄를 짓게 된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면, 바로 잡으면 하나님의 아가페가 죄를 사해주도록 되어있다. 아가페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있다.
죄를 사해주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있는 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있는, 이룰구원이 있는, 당신의 성품을 입어가는 구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거다. 안 사해주신다면 우리가 무슨 수로 천국에 들어가겠느냐?
또 한 가지 이유는 신령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회개를 해도, 바로 잡아도 용서를 받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아가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가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를 지옥 불에 집어넣지 않는 거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성도가 죄를 고백하고 고치면 죄를 사해주시는 애정이 넘치는 분이다. 죄인을 용서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만 보아도 이것을 능히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죄 사함에는, 예를 들면 학생이 현재 공부를 잘 하고 있는데 지금 공부를 잘 하고 있는 학생을 생각지 않고 이 학생이 과거에 공부를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이 학생을 두들겨 패는 선생이나 부모가 있느냐?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현재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뤄가는 성도의 과거의 죄를 생각하면서 두들겨 패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의 죄를 용서받으려면 하나님께서 매를 들기 전에 현재 나의 잘못된 생각이나, 마음이나, 소원이나, 목적을 하나님 말씀대로 똑바로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을 잘 이뤄 가면 된다. 이러면 현재적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또한 얻어맞지도 않는다. 다시금 하나님의 노를 쌓지 않게 하는 것도 죄 사함의 하나다. 우리가 죄를 누적시킨다면 죄 사함이 되겠느냐?
4절: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느냐? 주께서 택하신 사람이다. 인간 자기가 주를 택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인간 자기를 택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주께서 인간 자기를 택하실 때 세상에서 돈 많고 잘나고 똑똑해서 택했느냐, 이런 것은 상관치 않고 택한 것이냐? 후자다. 왜 그랬을까?
우리 인간은 사람을 택할 때 외모 외형 세상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택해주신 것은 오로지 당신의 아가페 사랑으로 우리로 하여금 신령계에서 영원 궁극적인 영화를 누리게 해 주시려고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냐? 만일 자기를 인간으로 만들지 않고 나무나 돌이나 구더기로 만들었다면 이런 존재를 하나님께서 택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이 면을 염두에 두고 자기를 예수 믿게 한 것이니, 이 자체가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 모두는 택한 백성이다. 우리에게 궁극적 구원, 즉 천국을 통치하고 누릴 구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그 세계를 누리게 해 주기 위해서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이점에서 우리를 택한 거다.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택했다 그 말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존재적으로 택한 것만 아니라 가까이 오게 했다. 왜 가까이 오게 하시느냐? 친하게 지내고 싶고, 사랑해 주고 싶고, 극치의 행복을 느끼게 해 주고 싶고, 하나님 당신과 같은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택한 것만 아니라 가까이 오게 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냐?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가 집사를 세우는 것은 헌금을 뜯어먹으려는 거냐?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해 주고 싶어서이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해 주고 싶어서 세우는 거다. 그러나 메시지 자체가 세상에서 부자 되라고 하는 목사가 집사를 세운다면 이건 의미가 완전히 다른 거다.
교회에서 구역장을 맡기는 것은 교회에 그만큼 다니고 진리를 그만큼 들었다면 구역식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라는 거다. 예수를 믿어갈수록 신앙적으로 자라가야지 맨날 오늘 믿은 사람처럼 되어있으면 이거 되겠느냐? 하나님의 집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시고.’ 그러니까 택하시고, 그 다음에 가까이 오게 했고, 그 다음에 주의 뜰에 거하게 했다. 주님과 점점 가까워진다. 이걸 그냥 보면 안 된다. 이 단계적인 말씀에는 신앙정신 사상이 들어있다. 당신의 소원성이 들어있다. 교회의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인도할 때 계시적으로 이 뜻과 같아야 한다. 같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 뜰’이란 주의 가족권 안이요, 생명권 안이요, 애정권 안이요, 뜰은 또 성전 안에서 수종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왜 수종을 들게 하느냐? 주님의 성품을 입혀주고 당신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기 위해서 뜰에서 수종을 들게 하는 거다. 주님의 교훈권 안에 있게 되면 주님께 말을 하기 좋고 부탁하기 좋지만 주님의 이 교훈권 안에 안 들어오면 말하기도 힘들고 얼굴 보기도 힘들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처럼 대하면 좋겠느냐? 성도를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심은 당신의 나라를 상속시켜 주기 위해서다. 주님의 이런 모든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다. 진정 이 복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타지고 썩어질 물질적인 소유를 참 복으로 착각을 하고 살게 된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우리가 주의 집이나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단순히 그 자체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고향집을 생각할 때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생각하지 않고 그 안에서 부모형제들이 사랑으로 오손도손 살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고향집이 그리워진다. 마찬가지로 본 절은 아름답게 꾸며진 집, 또는 아름답게 높이 지은 성전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는 성도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이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그 인격에 있고, 성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은 인격에 있다. 신적인 지혜지식성으로, 신적인 도덕성으로, 신적인 능력성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입은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교회 밖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사람이 없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이 아름다움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껍데기의 아름다움은 금방 시들어지고, 더더군다나 껍데기는 아름다운데 속에 악령의 감화성이 들어있는 사람은 그 껍데기의 아름다움이 가면처럼 보여져서 더 보기 싫어진다.
세상사람들은 겉을 보지만 믿는 우리는 사람 속의 아름다움을 봐야 한다. 속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이게 성령의 눈이다. 이런 사람은 속사람의 아름다움이 겉으로도 전달이 되기 때문에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름답지 않을지라도 아름답게 보이는 거다.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주의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곳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늘 임재하는 곳은 주의 집이요 주의 성전이다. 그래서 영이 중생이 된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주님의 전이다. 우리의 몸은 거룩한 몸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수종들고 쓰여지는 의의 병기다. 이렇게 살아갈 때 성화구원이 잘 이뤄지는 것이니, 이 이상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사람이나 집이나 성전이나 표면적 아름다움은 전부가 퇴색이 되고 허물어지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은 아름다움은 영원히 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니 아름답게 될 자기의 집이나 전을 귀신이 집이나 귀신의 놀이터로 만들지 말아라.
건물을 성전 시 하면서 건물에 돈을 쳐 바르는 것은 못 쓴다. 성전을 아무리 아름답게 지었을지라도 그 안에 사람이 없다면 이 건물을 어디에 쓰겠느냐? 아무리 잘 지은 집이라도 그 안에 사람이 안 살면 그 집은 금방 썩고 무너져 버린다. 반면에 아무리 허술한 집이라도 그 안에 사람이 살면 그 집은 때깔이 난다. 이게 우리들에게 뭘 가르치는 거냐? 자기 속에 생명이 들어있다면 육신은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어서 허물어져 갈지라도 이 사람은 아름답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몸뚱이는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거라서 못 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