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주 어린이집 출근(등교)을 시키다보니 출발시간이 다소 늦어 10시반쯤에야 집을 나섰고....
길음역에서 4호선 전철로 노원까지가서 7호선으로 바꿔타 두정거장째가 수락산역이었다.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산행입구표지안내가 눈에 들어온다.
본래는 삼각산을 갈까 했으나 시간이 아무래도 늦을것 같기도 했고,
얼마전 까닭없이 죽어간 여인의 원혼도 위로하고 시인 천상병도 만나보자는
욕심이 발동하여 수락산으로 방향을 선회했던것.
안내표지판을 만나 곧장 산행이 시작되는데 아무래도 예전에 와본 기억과는 전연 딴판이다.
표지석입구에서 오르다 보니 자락길 보수공사가 한창이었고...
천 상병시인의 자취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지나가는 등산객에 물어보아도 다들 모른다고 하니, 아무래도 방향이 다른 쪽에 있나보다.
염불사라는 사찰 입구 아래서 왼편 길로 꺾어들어가야한다.
사찰을 잠시 살펴보고 길을 떠나는데,사찰 이름이 염불사라니 매우 특이한 이름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락산과 불암산 등산안내표지판을 살펴보았고...
길가에 드러누운 거대한 바위
수락교를 지나면 장락교가 나오고 또 다른 여러 다리들을 지나 올라가게된다.
다리들이 많은 걸로 보아선 그만큼 수량이 풍부할땐 물이 많아 그냥 건널수 없기 때문이리라.
여기서부터 깔딱고개까지 힘든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2km 이상을 걸어서 가야하는 고역의 노정을 겪어야만 깔딱 고개에 이르게 되고....
오랜 가뭄때문에 물이 말라 물 떨어지는게 요 모양으로 시원치 않다.
붙었다 떨어져 또 다시 붙어있는 연리목이 인상깊었다.
바위 형상이 이채롭기도 하고...
아, 드디어 물이 보였다.
물을 적게 가지고 출발했기에 조마조마했는데,...
가느다랗게 한줄기 떨어지는 물이었지만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깔딱고개 정상에서 만난 들고양이
도대체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깔딱고개 이르면 네갈레길이 나타난다.
올라오던 방향 좌측으로가면 김시습을 기리는 매월정이란 정자가 있단다.
300m정도라니 그쪽부터 가보기로 했다.
오르는 길이 심상치 않았다.
드디어 매월정이란 정자에 이르렀고...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전기 학자이며 생육신의 한사람이다.
김시습이 수월당과의 인연은 지방을 떠돌다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수락산 동봉에 폭천정사를 짓고 10여년을 지냈
매월당 김시습은 신동이었단다.
생후 8개월에 글을 깨치고 살때 벌서 글을 지었다고 한다.
신동 소문을 듣고 세종대왕이 5살짜리 김 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하자 바로 글을 지어서 감탄한 세종대왕이 상으로 비단 50필을 하사했고, 가져갈수 있느냐고 하자, 비단 50필의 끝과 끝을 묶어서 끌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김 시습이 남긴 여러편의 시들이 눈에 들어오고...
매월당 김시습은 문인이자,학자이며, 스님이기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단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천재방랑시인으로 꼽기도 하고,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선비출신이면서도 승려가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라고도 하는가하면,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남긴 작가이기도하단다.
오세신동,백세스승 ㅡ매월당
'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걸까! 누런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네!' 맷돌로 보리 가는 모습을 세살 아기가 표현했다는데 감탄을 금할 길 없다. 소문 일사천리라~ 당대 재상 허조가 세살 아기를 불러 늙을老자로 글을 지어보라 시험한다. '老木開花心不老' 재상어르신은 비록 늙었다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노목에 꽃이 피듯 마음은 늙지 않으셨사옵니다~ 어르신 심중을 배려하는 어린 마음이 놀라울 뿐이다. 세종대왕이 시습을 불러 놓고 '어린아기 배움이 학이 푸른 하늘을 날아 춤을 추는듯 하다고 칭찬하자, '성주지덕황룡번벽공지중' 어진 임금님의 은총은 황룡이 푸른하늘에서 번득이는듯 하옵니다.'로 답한다. 매월당이 '오세신동'이란 별호를 받는 순간이다. 忠과仁義를 기본으로 학문하던 김시습에게 세조의 왕위찬탈은 견딜수 없는 노릇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결코 고개를 숙일 수 없는 고뇌다. 지식과 세상이 각각 별개로 흩어지니 책을 불사르고 미친 듯 방황한다.
어느 날 서강을 지나다 정자에 걸려 있는 한명회시를 발견한다. 흔들리는 나라 기강을 붙잡고 정치를 안정시키느라 일생 고단했던 신하가 노후에 자연을 벗하다 묻힌다는 멋진 내용이다. 매월당 눈에 어림없는 소리~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김시습은 이 시에 한 글자씩 고처서 뜻을 바꾼다. 靑春(亡,危)社稷 白首(汚)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인륜을 져버린 왕위찬탈에 주동자요 수 많은 충신을 제거하고 일생 호위호식하던 姦자가 그 무슨 당치 않는 소리냐? 늙어서까지 끝끝내 강호를 더럽히는者라~ 천둥같은 울분호통이 들리는듯 하다.
1485년 쉰 한살되던해 '동봉오가'를 남긴다. ' 나 어린 시절 학문에 뜻을 세웠다. 언짢은 선비 노릇 바라지 않았다. 하루아침 나랏 일이 뒤집히니 갈팡질팡이라~ 아득한 저 하늘을 나 몰라라 하네. 마디 많은 꼬부랑 지팡이 짚고, 북으로 남으로 수심 가득한 창자를 어디에 묻으랴! 날 저물고 지쳐도 갈 길을 멀다. 어찌해야 날개 펼치고 구만리 창공을 날아 올라 보느냐! 오세 신동 일필휘지 용사비등 하였으나 염원을 못 이루고 불우한 신세 되었구나! 내 어머님 일찍이 공맹가르쳐 나랏일 크게 하라 하셨으나 학문도 쓸모없이 산수갑산 떠돌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저 산골 까마귀도 반포를 부르는데! . 구름 개인 하늘은 씻을듯 맑은데 우수수 부는 바람 마른 풀 할퀴누나. 외로움 마음으로 쉼에 잠긴채 창공을 바라보니 장구한 하늘아래 싸라기 같은 내 신세. 고독을 못내 괴로워 하면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한 세월~ 아~ 애간장 끓는 이 노래 넋없이 어디로 돌아 갈거나!'
외롭다.. 슬프다.. 한많은 세상에 애상곡이라고 하면 될까! 간절함 더하여 진혹곡을 울려드려야 할까! 동녘 산봉우리에 홀로서서 지나는 구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그 분에 모습을 그려본다. 어린날부터 천재로 이름하던 자신인데,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한생을 돌아보니 비 정상이다. 미물도 마지막 울음소리는 구슬프다는데 호걸의 비분강개야 오죽할까! 어두운 세월도 흐르기 마련, 일월은 변함없이 빛을 발한다, 강직한 지성은 '백세의 스승'이라~ 자자손손 영원한 존경이다.
북쪽으로 멋진 바위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눈에 들어온다.
수락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매월당 정자를 바라보니 좌우에 삼각산,도봉산이...
뒤따라오는 젊은이에게 사진 한컷 부탁해보고...
ㅡ수락산(637.7m)의 전설ㅡ
수락산 이름이 생긴 유래 중에는 아들을 찼는 父情이 산의 이름으로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사냥꾼이 아들 수락이를 데리고 지금의 수락산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왔단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큰 소낙비가 쏟아져 사냥꾼 부자는 비를 피하여 큰 바위 밑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면서 잠이 들었고... 그 때 호랑이가 나타나 잠자고 있는 수락을 물어가 버렸다네요.
한 참 뒤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 사냥꾼은 아들 수락이를 찼았지만 찼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초조해진 아버지는 아들 수락을 찼아 헤메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뒤로 비만 오면 산에서 '수락아! 수락아!' 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들이 산 이름을 수락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앞에 보이는 곳이 수락산 정상이다.
거리상으론 400~500m불과한 전방인데
갑자기 망설임이 앞선다.
정상에 갔다오려면 1시간이상 소요될텐데
아무래도 시간에 지장이 있겠다는 걱정때문이었다.
까닭은 5시 이전에 집에 돌아가야 손주퇴근에
지장이 없기때문이다.
정상을 목전에 두고 하는수 없이 발길을 돌리기로했다.
목표를 정상에 오르기로 했던건데 되돌아간는게 무척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정상의 수려한 풍광을 제대로 다 볼수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
정상 오른쪽에 있는 또 다른 산봉우리다.
여기까지 오는 코스는 정말 장난아닌 유격훈련코스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은 한번쯤 생각해보고 올라야하는 코스...
여기에 무성한 소나무들은 완전히 바위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다.
생명의 신기와 경외심이 새삼 느껴지지 않을수 없다.
이 젊은 사람들도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고...
깔딱고개 내려와서 반대방향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장암역이 나온단다.
오를때 길과는 대조적으로 힘들지 않게 갈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길이 매우 쉽게 갈수 있구나 했는데 이런 험곡도 나타나고....
나무가 돌을 먹고 큰건지 바위 모퉁이가 나무에 박혀있다.
험곡의 연속이다.
높다란 나무 계단길도 나타나고....
계단길 타고 내려오니 물속에 발 담그고 있는 여성들도 보였고...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석림사란 사찰을 만났다.
이곳 사찰은 여승들만 있는 곳이란다.
사찰 경내를 돌아보니 상당히 큰 가람이었고....
석림사에서 잠시 더 내려오니 <노강서원>이 나타난다.
이곳 노강서원은 서계 박 세당선생의 아들인 박태보를 기리기위해 세원진 서원이란다.
박태보(朴泰輔)는 숙종 15년 민비폐출때 죽음으로 충간했던 인물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1697년에 조윤벽(趙潤璧)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노강(鷺江)’이라 사액되었단다.
그 뒤 6·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게 되었고....
이곳 노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기도 했단다.
노강서원을 돌아보고 조금 더 내려오다보니 커다란 고택한채가 눈에 들어왔다.
쾌재를 부르며 찾아갔더니 일반인에겐 공개를 하지않고 있단다.
취재좀 하고 싶다 했더니 그래도 쾌히 승락을 해주셨고....
고택 안채에 들어서니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들어온다.
400년 이상된 은행나무인데 꼭대기엔 까치가 둥지를 틀고 있었고....
이름하여 서계 박 세당의 고택이다.
박 세당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한때 관료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며 세상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지만,
타협과 쟁론을 일삼는 관료직을 내던지고 세상의 영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 바로 이곳 수락산 자락....
이곳은 아버지의 유업과 먼저간 아내의 유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고, 먼저간 두 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풍광이 빼어난 이곳에 머물며 낮에는 채전을 일구고
,밤에는 삼간초옥에서 학문에 열중하며 학인으로서의 냉철함을 가다듬었단다.
이후 수많은 관직에 임명받기도 했고,유배령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이곳에 다시 낙향하여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서계 박 세당 ㅡ그는 시대를 초월한 지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현재 박세당 고택과 노강서원등은 박세당선생의 후손인 박용우선생이 서계문화재단이사장을 맡아 이곳을 관리 보전하고 있단다.
오늘 산행은 비록 수락산 정상에 오르지 못했고 천상병시인의 자취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뜻 밖의 수확인 석림사와 노강서원,
서계고택까지 답사할수 있어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귀가하니 오후 5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으니,정상에 오르지 않은게 무척 다행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