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회관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수반 위의 꽃’이라는 내 시가 전시되었다. 수반 위에 꽂힌 꽃의 절규, 몸이 반을 잘린 아픔을 겁도 없이 썼던 것이 장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어 선생님은 시인이셨다. 선생님은 윤동주 이육사 등 암울의 시대에 양심을 지키며 일제에 항거한 시인의 시를 높이 사셨다. 심사를 맡으신 선생님이 내 시가 고독과 아픔을 잘 표현했다고 장원을 준 것 같다.
수반 위의 꽃은 꽃이 아니라 절규다. 일제에 대항하여 살아간 학병들은 수반 위의 꽃처럼 살다간 생(生)이란 생각을 해본다. 양기(陽氣)를 올리고 푸른 잎을 왕성하게 피워 쭉쭉 뻗어가는 그들의 가지를 사정없이 잘라 말라 죽게 했던 일본인의 잔악한 행위,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버린 눈물겹도록 처절한 윤동주 시인은 불가항력의 상황에도 절망을 극복하고 끝까지 버텨 강인한 민족정신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끝내 서서히 시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 송이 슬픈 인화(人化)였다.
노인 병동에서 봉사할 때, 옆에 누워있는 중년의 나이를 바라보는 듯한 남자는 사지를, 쓰지 못하고 말도 못 했다. 의사(意思)를 표현하는 수단이라야 굳어있는 손가락으로 겨우 글 두어 자 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불의에 맞서는 단체에서 선동자로 온몸을 불사르듯 열기와 광기를 날렸다. 그 후 곧바로 쓰러져 9년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도, 주위의 시선도 줄어든, 거의 방치된 상태였다. 내 손가락에 낀 묵주반지를 보며 자신의 세례명은 ‘베드로’라고 내 손바닥에 써 주며 나에게 세례명을 물었다. 그의 손바닥에 ‘마리아’라는 내 세례명을 적어 주었다. 세례명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려는데 들어 올려지지 않는 팔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신은 멀쩡했다.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억울하고 한 맺혀 말 한마디라도 끄집어내서 속 시원하게 토하고 싶은데 단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으니, 그래서 가끔 가슴을 치듯 큰 소리를 내어 엉엉 우는 것이다. 속으로만 치는 저 가슴에 얼마나 큰 멍이 들었을까. 9년이란 긴 시간 속에 얼마나 깊은 한(恨)의 탑이 쌓였을까. 창을 통해 눈으로 계절의 변화와 날씨를 알 뿐, 이미 세상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도 주사와 약으로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는 슬픈 인화였다.
산길을 내려오다 연보라 토끼풀을 보았다. 토끼풀꽃이라면 대부분 흰색인데 연보라색은 처음 보았다. 그 토끼풀은 외래종이라 했다. 저 태평양 건너 먼 나라에서 밀가루 포대 귀퉁이에 숨어서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저 높은 하늘을 날아 예까지 온 걸까. 남의 나라에 왔다고 모가지를 제대로 곧추세우지도 못하고 땅에 엎디어 기어 다니는 꽃. 차지한 땅이 미안해서 산 밑 모퉁이에 저들끼리 모여 올망졸망 뭉쳐서 뿌리를 내린 가련한 토끼풀꽃, 언덕 아래 잔디밭에서 하얀 토끼풀들이 이웃을 바라보며 반갑다 인사하듯 넘실거린다.
내 자리를 이웃에게 조금 내어주며 땅속에 내린 하얀 뿌리로 얼기설기 걸고 오순도순 정답게 살아가는 저 토끼풀의 세상. 사람들은 저 토끼풀만도 못한 세상을 살아가는 걸까.
마음의 벽에 여고 시절의 시를 걸어두고 있다. 차가 셀 수 없이 달리던 도로, 가로등이 현란한 거리, 사람들로 붐비며 시끄러웠던 낯선 땅이 쉬 정이 들지 않아 밤이면 곧잘 울었다. 열이 나고 아플 땐 온 밤을 뒤척이며 엄마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집에 가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산을 넘었다.
부모로부터 분갈이가 되어 낯선 땅에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꽃, 잘린 목이 침봉에 꽂혔어도 목을 축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무언의 발버둥. 그때 나는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그렇게 아프게 바라보았다.
시화전에 참석한 타 학교 남학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조르르 몰려들었다. 겉으로는 내 시를 설명해 달라고 하면서 하얀 교복칼라와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자꾸 딴말을 걸었다. 그들은 나의 시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은근한 속셈을 가지고 나를 귀찮게 했다. 만약 내 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인 학생이 있다면 나는 그와 좋은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여고 시절, 부모와 떨어져 바라본 아픔의 시간 들이 하나둘 흩어진다.
첫댓글 황 선생님의 예쁜 마음씨가 잘 나타나 있는 글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여름을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