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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鼓 岔水 地帶>, 관전호(寬甸湖)와 포석하(蒲石河)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여진(女眞)과 연합정부로 시작하였다.”라는 사실이 오늘날 한(韓),중(中),일(日)의 사학
(史學)의 금기(禁忌)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日帝)가 신해(辛亥)혁명에 쫒겨난 청(淸)의 마지막 황제를 끌어들여서 만주(滿洲)에 ‘괴뢰(傀儡)-국(國)’을
만들고, 원래(原來) 조선(朝鮮)과 공유(共有)하던 만주(滿洲)지역에 대해서 ‘전통적인 여진인(女眞人)’들이 조선
(朝鮮)의 영토를 무단(無斷)하게 점거하는 것을 꺼리자, 오늘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허위(虛僞) 조선
강역(疆域)’을 만들어 내는 대신에, 만주(滿洲)에 대한 영토권이 여진(女眞)에게 있음을 역사왜곡으로 만들어 내서,
만주국(滿洲國)의 여진(女眞)-수뇌(首腦)들을 안심시킨후에, 철도부설권, 광산채궐권, 일본군의 진주권을 얻어
내서, 동(東)-아시아(Asia)를 피(血)로 물들게 하는 ‘대동아-전쟁’을 일으킬 기지(基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병도 박사의 스승이면서 속칭 식민(植民)사학(私學)의 ‘뼈대’를 만든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조선사편수회’
와 만철(滿鐵)(=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약칭)에 모두 관여(關與)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동(東)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가장 빠른 코스(corse)는 만철(滿鐵)에서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해 모스크바,
베를린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 만주"는 유럽으로 열린 창(窓)이었고 만철(滿鐵)은 그 입구(入口)였기 때문에, “만주(滿洲)는 유럽
- 다시 말해 세계(世界)를 향해 뻗어가는 토대(土臺)”였었기에, 조선(朝鮮)이 여진이 공유하였던 만주(滿洲) 지역을
철저히 괴뢰화(傀儡化)된 여진(女眞)의 것으로 역사왜곡을 한 것은 결국 우리 역사가 ‘세계와 호흡’하는 일체의
역사를 부정하는 주춧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제(日帝)의 영향이 해방(解放) 이후에 만주(滿洲)지역을 중국(中國)이 차지 한 후에도 이상하게 답습이
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즙안(楫安) 피라미드(pyramid)가-적석총(赤石冢)을 뜻함- 있는 지역이 만족(滿族)자치현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즙안 피라미드가 있는 박작호(泊汋湖) 근방 - 다시 말하면 오늘날 환인(桓仁)지역은 원래부터 즙안(楫安)의 피라
미드(pyramid)가 고구리(高句麗) 유적이었고, 고구리(高句麗)때부터 조선조(朝鮮朝)때까지 전통적으로 한족(韓族)
들과 여진인(女眞人)들이 이 성지(聖地)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日帝)때 한족(韓族)들은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移住)한 정도가 크지만, 여진인(女眞
人)은 이미 ‘독립’을 의지를 잃고, 단지 “원래의 고향에서 산다.”는 의식에 많이 거주하고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아래 ‘솟대님의 요녕성 수계(水系)지도’를 보게 되면, ‘환인(桓仁)만족(滿族) 자치현’이라고 적혀있게 된 것
입니다.
이처럼 원래 조선인(朝鮮人)과 여진인(女眞人)이 모두 <공동(共同)의 성지(聖地)>로 여기고 많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일제(日帝)때 조선 사람들이 독립투쟁을 위해서 떠난 반면에 여진인(女眞人)들이 계속 거주(居住)했던 관계로 ‘만족
(滿族) 자치현’으로 자리 잡게 된 포석하(蒲石河)근처의 도시가 바로 <관전(寬甸)>입니다.
이 관전(寬甸)은 ‘관대(寬大)한 경기(京畿)지역’이란 의미로 조선과 여진이 모두 임내(任內) - 즉 고대로 부터 내려
오던 ‘내재율(內在律)에 맡긴 지역’인 <청구(靑邱)-조선(朝鮮)>의 경기(京畿)지역이었고, 이 지역은 관전(寬甸)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 그대로 “여진인(女眞人)은 조선인(朝鮮人)에 대해서 관대(寬大)하였고, 조선인(朝鮮人)은 여진인
(女眞人)에게 관대한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 만족(滿族)자치현인 <환인(桓仁)>과 <관전(寬甸)>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이 관전(寬甸)은 <청구(靑邱)-조선(朝鮮)>에서 선박을 타고서 불(乀)자로 놓여진 정령(井嶺)산맥의 서록(西麓)으로
흐르는 위원하(威遠河)로 다가가기 위한 요충(要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전회(前回)에 오늘날 길림성에 마치 장구(長鼓)( >--< )처럼 생겨서 ‘물(水)이 나뉘어지는’ 이른바 차수(岔水)
지대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인 것이지요.
이런( >--< )모양의 ‘장구-차수-지대’에서 동북류(東北流)(↗)하면서 올라가는 것이 바로 정령회하(井嶺回河)이고,
동남류(東南流)(↘)하는 것이 바로 포석하(蒲石河)이기에 “장구(長鼓)처럼 생긴 차수(岔水) 지대(地帶)”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포석하(蒲石河)의 포(浦)는 ‘부들’이라는 습지(濕地)와 개울가에서 자라는 ‘풀’을 의미합니다.
이 ‘부들’은 ‘돗자리’를 만드는 재료(材料)입니다.
(*) ‘부들’에 대한 다움(daum)백과사전의 설명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0b0664a
하천(河川)의 이름에 이처럼 ‘부들’을 의미하는 포(蒲)와 돌 석(石)자가 나란히 들어간 이유부터 검토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조선조(朝鮮朝)때까지 우리 민족 만의 노우-하우(know-how)로 전(傳)해진 운하(運河)는 갑문과 제방을
활용해서 물(水)이 서(耳亇)를 타고서 산(山)을 넘게는 하지만, 늘 물(水)이 흐르게 하지 않는 묘한 방법으로 운용을
합니다.
즉 갑문(閘門)은 그 구조(構造)가 모두 ‘이동 가능한 형태’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운하(運河)자체도 물이 흐르게
할 필요가 있을 때만 흐르게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원래(原來) 상태로 회귀(回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
습니다.
따라서 물(水)이 흘렀다가 안흘렀다를 왕복(往復)으로 하다보니, 운하(運河)로써 놓인 강이 물이 빠진 후에도 습지
(濕地) 형태가 되어서 ‘부들’이 많이 자라는 현상을 가져온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 “포석하(蒲石河)의 흐름이 구체적으로 어찌 흐르는지?”를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에서
부터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볼 때에
[1] 먼저 검토할 것은 이런 ( >--< )의 <장구(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의 동북(東北)에서 서남류(西南流)(↙)하는
우모생하(牛毛生河)가 경도(經度)표시: 6(4)에서 나오는데,
그 ‘윗 지도’를 보면, 이 우모생하(牛毛生河)는 우측에서 영어의 와이(Y)자처럼 ①천교구(天喬泃)와 ②불야구(佛爺泃)
를 모아서 남류(南流)하다가 ③정욕(井峪)에서 이런(--<)모양으로 서류(西流)하면서 나오는 정욕수(井峪水)까지
합친 물(水)이기 때문에, 결코 세류(細流)가 아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천(河川)이름이 “소(牛)의 털(=모(毛))가 생기는 하천(河川)”이라고 붙은 까닭은 이 하천이 “소(牛)의 털(=모(毛))
처럼 세류(細流)로 흐른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 우모생하(牛毛生河)라는 하천(河川)주변에서 마치
산(山)처럼 생긴 갑문(閘門) 속에 들어가서 갑문이 움직이는 동력(動力)을 불어넣는 ‘칡소’j와 ‘흑소’들이 워낙 많이
방목(放牧)하였던 결과로 “‘소(牛)의 털’이 생기게 된.” 하천의 의미인 것입니다.
‘칡소’는 흔히 ‘얼룩소’라고 하는 소를 뜻합니다. ‘칡소’와 ‘흑소’는 덩치가 황소보다 훨씬 커서 ‘일소’로써 단연 힘이
더 셉니다. (황소가 평균적으로 500Kg나감에 비해서, ‘칡소’, ‘흙소’는 700Kg나갑니다.)
(*) ‘칡소’및 ‘흑소’에 대한 소개 글
http://blog.daum.net/dream6838/9218
그런데, 이 우모생하(牛毛生河)는 <장구(=장고(長鼓)-차수(岔水)-지대(地帶)>를 지나기 까지는 서남류(西南流)(↙)
하는데, <장구-차수-지대>를 지난부터는 동남류(東南流)(↘)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런 (<)모양으로 꺽어져서
흐르게 됩니다.
즉 이런( >--< )모양의 ‘장구-차수-지대’에서 우측의 이런(<)모양의 하천(河川)인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포석하(蒲石河)의 원류(源流)가 동남류(東南流)(↘)하는 곳에서 ‘또 하나의 포석하(蒲石河) 원류(源流)
’인 간양구(看楊溝)가 서남류(西南流)(↙)해서 영어의 와이(Y)처럼 만나기 직전에 마일삼(馬日三)이라는 분지(盆地)가
있습니다.
즉 포석하(蒲石河)원류가 동남류(↘)하고, 또 간양구(看楊溝)가 티(T)자 모양의 본류(本流)가 다시 별(丿)자 흘러들어
오는 지류(支流)와 합류해서 서남류(↙)하는 사이에 역삼각형(▼)으로된 <서(西)-반납청(半拉靑-山: 700m-600m)>이라
는 산(山)이 있지만, 이 <서(西)-반납청(半拉靑-山: 700m-600m) 북록(北麓)에 마일삼(馬日三)이 있기 때문에,
결국 <서(西)-반납청산(半拉靑-山: 700m-600m)> 양쪽으로 포석하(蒲石河)원류와 간양구(看楊溝)가 이런(↘▼↙)식
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 두 하천(河川)을 막으면, 결국 하천은 이런 (↘__↙)식으로 흘러들어와서 ‘역사다리 꼴’의
호수(湖水)(◥■■◤)가 일단 생기는 지역입니다.
여기서 ‘일단’이란 말을 쓴 까닭은 이곳에 있는 호수(湖水)가 여기서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역사다리
꼴’의 호수(湖水)를 수평(___)으로 할 때에 긴 빗금(/)이 더해진 모양 즉 이런(_/) 모양의 호수(湖水)가 되는 곳입니다.
이런(_/)모양으로 생긴 호수(湖水)의 이름을 짓자면, 이곳을 총괄하는 조선조(朝鮮朝)때 <청구(靑丘)-임내(任內)>의
지명(地名)이름이 관전(寬甸)이기 때문에 ‘관전호(寬甸湖)’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甸)>은 경기(京畿) 즉 ‘왕성(王城)주변의 직할(直轄)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관전(寬甸)의 뜻은 ‘너그러운 경기
(京畿)지역’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관전호(寬甸湖) 주변의 지리(地理)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니다.
포석하(蒲石河)의 원류가 동남류(↘)하는 좌측에는 반납청산(半拉靑山: 671m)이 있습니다. 이는 관전호(寬甸湖)의
좌단(左端) 서남(西南)(↙)입니다.
반납(半拉)이란 말은 “반(半)은 (호수(湖水)물을) 데려온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포석하(蒲石河) 원류(↘)가 흘러
나가는 곳 우측에 역삼각형(▼)의 산 이름 역시 “나머지 반(半)을 데려온다.”는 뜻에서 반납청산(半拉靑山)으로 불리
웠던 것이지요. 이는 포석하(蒲石河) 원류가 내려오는 곳(↘)을 중심으로 반납청산(半拉靑山)을 동서(東西)로 분리
- 즉 ‘서(西)-반납청산’과 ‘동(東)-반납청산’으로 분리해주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양구(看楊溝)의 지류(支流)가 서남류(↙)하는 바로 남쪽에는 평행(平行)하면서 서남행(西南行)(↙)하는
산세(山勢)-면(面)(700m-500m-700m)을 지닌 서(西)쪽에 꼭지점을 둔 부채꼴<◀)>모양의 거대한 산 노평태령(老平
駄嶺: 868m)이 있습니다.
이 부채꼴<◀)>의 윗쪽 빗변(/)은 이런 (_/)모양으로 생긴 관전호(寬甸湖)의 ‘빗긴 받침’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노평태령(老平駄嶺: 868m)의 ‘부채꼴<◀)>모양’에서 빗금(/)역할을 하는 산(山)을 이 산록(山麓)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 대천두(大川頭)를 따서 대천두산(大川頭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천두(大川頭)란 마을 이름이 있게 된 까닭은 이 마을 동북(東北)쪽 - 즉 대천두산(大川頭山)이 끝나는 곳에서 이런
(↘↓↙) 모양으로 3가닥의 하천인 ‘삼도구(三道溝)’가 모여서 남류(南流)하는 계곡의 왼편에 자리잡고, 삼도구(三道
溝)를 갑문으로 막을 경우, 이 강물이 빗변(/)모양으로 흘러서 대천(大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대천(大川)은 결국 이런(_/)모양의 관전호(寬甸湖)를 형성하게 되는 ‘연결된 하천(河川)’의 칭호인데, 이런
대천(大川)이 흐르는 머리(=두(頭))부분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대천두(大川頭)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부채꼴<◀)>모양’의 노평태령(老平駄嶺: 868m)에서 ‘윗 빗변’을 형성하는 산맥은 대천두산(大川頭山)이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왼쪽의 대천두산(大川頭山)과 ‘삼도구(三道溝)’를 건너 오른편에 875m의 정상(頂上)을 지니면서 부채꼴의 외벽
(外壁)을 마치 물음표(?)처럼 길게 하는 산(山)의 이름이 나권전자산(羅圈甸子山)입니다.
따라서 이 대천두산(大川頭山)우단(右端)과 물음표(?)처럼 생긴 나권전자산(羅圈甸子山) ’사이‘에 갑문을 쳐주면,
당연히 이 삼도구(三道溝)는 대천두산(大川頭山)에 평행되게 서남류(↙)하게 될 것입니다.
관전호(寬甸湖)의 전체모양이 이런(_/)모양인데, 역삼각형(▼)으로 생긴 <동(東)-반납청산(半拉靑山)>의 ‘윗 면(面)의
길이’는 이런(_/)모양에서 이런(_)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즉 포석하(蒲石河)원류(↘)와 간양구(看楊溝)(↙)가 빠져나가는 ‘사이’의 길이에 해당하는 이런(_) 부분인 <동(東)-
반납청산(半拉靑山)>의 ‘윗 면(面)의 길이’는 7Km 정도 됩니다.
또 대천두산(大川頭山)이 빗금(/)면의 길이는 간양구(看楊溝)(↙)와 삼도구(三道溝)(↓)는 14Km정도 됩니다.
따라서 이런(_/)모양의 총 수평 길이는 (7Km+14Km=21Km)가 되어서 관전호(寬甸湖)의 길이는 매우 큰 것입니다.
관전호(寬甸湖)는 해발 510m까지 수위(水位)가 올라와야하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서
갑문을 닫아서 물(水)이 차올랐을 때에, 호수(湖水)의 남북(南北) 폭(幅)을 생각해보면, 평균 3.5Km 정도 됩니다.
전체적으로 이런(_/)모양으로 생긴 관전호(寬甸湖)의 북(北)쪽 ‘뚜껑(=개(蓋))’ 역할을 하는 산의 이름이 대태산
(大台山: 848m)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848m는 간양구(看楊溝) 바로 우상(右上)에, 대태산(大台山)은 848m의 우상(右上)에 있음)
(*) 마일삼(馬日三)은 경도(經度)표시: 6(4)~6(5), 위도(緯度)표시: 2~1 (*)
(*) 위 [1], [2]를 추측할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그런데, 이런 관전호(寬甸湖)는 그 수위(水位)가 해발 510m가 되기 때문에, 포석하(蒲石河) 하류(下流)에서 선박을
타고 올 때에, 이곳 갑문(閘門)을 총괄하는 관전(寬甸)이 있는 곳을 해발 100m로 볼 때에 “무려 410m 를 올라갈 수
있는 수리시설을 어찌 설치하였겠는가?”를 이곳 지리(地理)와 관련해서 규명(糾明)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관전호(寬甸湖)의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나아가면서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서
[1] <동(東)-반납청산(半拉靑山:700m-600m)>의 서(西)쪽에서 동남류(↘)하는 포석하(蒲石河) 원류(源流)는 <서(西)
-반납청산(半拉靑山: 671m)>와 넘어가는 고개가 해발(海拔)500m이기 때문에, 갑문(閘門)을 설치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단지 수표(水標) 즉 수위(水位)를 재는 게이지(gauge)만 설치해 놓으면 되는 곳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500m되는 고개를 넘어서 남류(南流)하는 양자구(亮子溝)가 있는데, 이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진 반납청산
(半拉靑山)을 수원(水源)으로 하는 원래의 ‘개울’이름이었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지도가 만들어졌을 때가 1950년대인데, “이 양자구(亮子溝)가 남류(南流)하는 것이 포석하(蒲石河)
이다.”라고 기재(記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동서(東西)의 두 반납청산(半拉靑山)의 ‘사이’가 해발 고도(高度)가 해발 500m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런(_/)
모양으로 생긴 관전호(寬甸湖)에서 삼도구(三道溝현)가 나가는 곳에 갑문을 쳐서 인위적으로 호수(湖水)를 만들어
수위(水位)를 500m 이상으로 만들지 안ㅡ는 한, 해발 500m 되는 고개를 넘어서 물(水)이 흐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지(現地)사람들이 “옛날에 관전호(寬甸湖)의 수위(水位)가 510m까지 올라가서 저 고개를 넘어서 흘러내렸고,
그것이 포석하(蒲石河) 원류(源流)이다.”라는 전래(傳來)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미 전회(前回)에서 밝혔듯이 하협하(下夾河)에 갑문을 쳐서 그 물이 정령(井嶺)산맥의 구아암산(臼丫岩山)과 감아
암산(凵丫岩山)-서(耳亇)를 넘기 위해서는 태자하에서 하협하(下夾河)로 들어가기 위해서 1차 갑문을 열었을 때의
폭류(瀑流) 때문에, 태자하(太子河) 맞은 편에 있는 청하(淸河)가 영수보(英守堡)의 경첩-갑문을 열고, 마치 ‘흔들이
(=진자(振子)’처럼 선박과 함께 하협하(下夾河)를 역류(逆流)해서 넘는 방법이 가장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의 수위(水位)높이가 510m이기 때문에, “관전호(寬甸湖)의 수위(水位)가 510m로 두 반납청산(半拉靑山) 사이로
흘렀다.”는 것은 정령(井嶺)산맥을 넘어서 관전호(寬甸湖)까지는 선박을 타고 특별히 하강(下降)하는 단계가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2] 이런 (_/)모양의 관전호(寬甸湖)에서 ‘짧은 수평(水平) 밑변’ 역할을 하는 역삼각형(▼)의 <동(東)-반납청산(半拉
靑山:700m-600m)>의 우측에서 간양구(看楊溝)가 서남류(↙)하는 계곡은 고도(高度)가 해발 200m지역이기 때문에,
반드시 갑문(閘門)을 쳐주어야하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갑문(閘門)을 쳐주되, ‘급격 배수(排水)’의 필요성이 있을 때에만, 갑문을 열었던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홍수(洪水)가 져서 관전호(寬甸湖)가 넘칠 때나, 혹은 포석하(蒲石河)를 타고 외적(外賊)이 군선(軍船)으로
공격해 올 때, 경첩-갑문을 활용해서 폭류(瀑流)를 내보내는 이외에는 갑문(閘門)을 닫아놓고 있는 곳으로 볼 수 있습
니다.
역삼각형(▼)의 <동(東)-반납청산(半拉靑山:700m-600m)>우측에서 간양구(看楊溝)(↙)를 건넌 대천두산(大川頭山)
서단(西端)은 맞은 편 산과 이런(∋)모양으로 3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맨 북쪽 산-갈래 끝에 맞은 편 산인 <동(東)-반납청산(半拉靑山:700m-600m)>과 자반(雌盤)갑문을 설치하고,
중간에는 ‘경첩-갑문’을 설치하고, 맨 남(南)쪽 산-갈래에는 웅반(雄盤)-갑문을 설치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 계곡에 노두비(老豆碑)가 있기 때문에, 노두비(老豆碑)계곡이라고 이름 할 수가 있는데, ‘노두비’에 설치된 갑문은
“선박(船舶)이 오르내리는 문(門) 역할을 하는 갑문들이 아니라, 배수(排水) 용도로만 쓰였다.”는 인식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갑문(閘門)은 조감도(鳥瞰圖)로 보면 이런(--ㅌ ⊃--)식으로 깍지 끼듯한 미닫이 문(門)이고, 정면도(正面圖)로 보면
맨홀(manhole)이 갑문이 설치된 하상(河床)의 지하(地下)로 이런(↘___↗)식으로 나가고 갑문의 바퀴가 맨홀-뚜껑을
밟고 나가는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갑문을 열어서 ‘틈’이 보이지 않아도 지하(地下)로 수량을 조절할 수가 있습
니다.
그런데, 이 ‘노두비(老豆碑)계곡’의 갑문이 배수(排水) 역할만 담당하는 갑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포석하(蒲石河)쪽
으로 외적(外賊)이 군선(軍船)을 타고 공격해왔을 때에는 중간의 경첩-갑문을 갑자기 젖혀서 폭류(瀑流)가 내보내는
급격(急擊)-배수(排水)가, 해발 몇 미터(m)까지 가능한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두비(老豆碑)계곡’을 벗어나면, 역삼각형(▼)의 <동(東)-반납청산>의 남단(南端)이 되기 때문에, 관전호(寬甸湖)의
수표(水標)역할을 하는 동서(東西) 반납청산 사이의 고개(500m) 남쪽에서 동남류(↘)하는 양자구(亮子溝)와 만나서
영어의 와이(Y)자처럼 남류(南流)하게 됩니다.
즉 ‘노두비(老豆碑)계곡’에서 경첩-갑문을 갑자기 젖혀서 폭류(瀑流)를 내보내게 되면, 맨처음은 서남류(↙)하지만,
그다음에는 남류(南流)하게 되는 것이 이곳 지형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남류하는 수로(水路)를 편의상 폭류로(瀑流路)로 부른다면, <관전(寬甸)>이라는 청구조선(靑邱朝鮮)의 도청
(都廳)이 있는 곳은 이 폭류로(瀑流路)에서 오른 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 관전(寬甸)과 폭류로(瀑流路) ‘사이’에는 황의산(黃椅山: 513m)이 있는데, 이 황의산(黃椅山: 513m)은 자연히 관전
(寬甸)의 서(西)쪽, 또 대천두산(大川頭山) 서단(西端: 500m)의 남(南)쪽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천두산(大川頭山) 서단(西端: 500m)과 황의산(黃椅山: 513m)의 두 산(▲▲)사이에는 관전(寬甸)에서 노두비
(老豆碑)계곡 쪽으로 들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해발 고도가 300m가 됩니다.
이는 경첩 갑문을 터트릴 때에 해발 300m의 수위(水位)의 물을 터트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대천두산(大川頭山) 서단(西端: 500m)에서 3갈래의 산(山)의 팔(手=arm)이 뻗어서 그 서(西)쪽의 역삼각형(▼)의
<동(東)-반납청산>과 이어주는 부분이 은근히 해발 200m의 고개로 되어 있어서 아무리 경첩-갑문을 터트려도,
관전(寬甸)-도청(都廳)은 폭류(瀑流)가 절대 밀려들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관전호(寬甸湖)가 갑문을 통해서 선박이 넘나들을 수 있는 삼도구(三道溝)가 개괄적으로 어찌 흐르는가?”
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3] 이런(_/)모양으로 된 관전호(寬甸湖)의 물은 삼도구(三道溝)가 남류(南流)하는 곳을 통해서 둥근 괄호[)] 모양
돌아서 황의산(黃椅山: 513m) -이는 관전(寬甸) 도청(都廳)의 서(西)쪽에 있는 산(山)입니다.
- 남(南)쪽에 있는 대피구산(大避口山)으로 반원(半圓)(⊃)을 그리듯 흐르게 됩니다.
그런데, 대피구산(大避口山: 300m-595m) (TA-P'I-KU-SHAN)은 남북(南北)에 각기 산 봉우리를 지닌 산이기 때문에,
관전호(寬甸湖)에서 흘러나온 포석하(蒲石河)은 그 사이를 서류(西流)(←)해 뚫고 나가서 포석하연(蒲石河沿)까지
흘러나가게 됩니다.
포석하연(蒲石河沿)를 지나서 포석하(蒲石河)의 흐름은 갑자기 서남류(西南流)(↙)하면서 협면구(夾面溝)를 지나
왕팔발자(王八脖子)에서 남류(南流)(↓)하게 됩니다.
왕팔발자(王八脖子)에서 동남류(東南流)하는 신개하(新開河)는 문자그대로 “새로 개척한 하천(河川)”이란 뜻이어서
“일제(日帝)강점(强占)때” 수류(水流)를 돌려서 개척한 하천(河川)이기 때문에, 미군사지도(1950년대)로써 조선조
(朝鮮朝)때의 포석하(蒲石河)의 흐름을 추적할 때에는 이 강이 변조(變造)된 수류(水流)임을 분명하게 알아야되는
것입니다.
왕팔발자(王八脖子)의 발(脖)은 ‘배꼽 발(脖)’인데, 그 앞에 붙은 왕팔(王八)는 중국 발음으로써는 “왕빠”로써 ‘거북이’
를 뜻하는데, - 이는 “아무 놈하고 흘레 하는 녀석”이란 욕입니다.
문제는 지명(地名)이름에 “왜 이런 이상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포석하연(蒲石河沿)에서 왕팔발자(王八脖子)에 이르기 까지 ‘옆구리’쪽에서 들어오는 하천(河川)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번호를 붙이고, 옆구리로 들어오는 하천의 방향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협면구(夾面溝)(↙), ②사도구(四道溝)(→) ③소황구(小荒溝)(←) ④천교구(天橋溝)(↖)
약 12Km를 서남남(西南南)방향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에 무려 4개의 지류가 옆구리에서 있다는 것은 외적(外賊)이
군선(軍船)을 타고 <관전(寬甸)>쪽으로 접근할 때에 옆구리-하천(河川)에서 만년(萬年) 무적함대인 매영(梅營)의
군선(軍船)이 은익되어 있다가 공격할 수 있는 공격로가 많음을 뜻합니다.
(*)참고: 일인(日人)들이 수류(水流)를 돌려놓은 신개하(新開河)의 원래 명칭은 차피구(岔避溝)(Chia-p'i-kou)로 보
입니다.
이는 사도구(四道溝)(↘)남쪽에서 동류(東流)(→)하면서, 소황구(小荒溝)(←)가 들어오는 바로 북(北)쪽에서 포석하
(蒲石河)에 합류하게 됩니다.
따라서 매영(梅營)의 군선이 해적선(海賊船)에 대해서 측격(側擊)할 수 있는 하천은 총 5개였던 것입니다. (*)
따라서 이 왕팔발자(王八脖子)란 지명이 붙게 된 까닭은 “여기서 부터는 옆구리에 막 붙어서 흘레하는 듯한 하천
(河川)들이 있다.”는 의미에서 속칭(俗稱)으로 마을을 불렀던 이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경첩-갑문을 터트린다면, 폭류로(瀑流路)는 포석하(蒲石河)의 흐름이 서류(西流)(←)하다가 서남류
(西南流)로 방향을 튼 곳인 포석하연(蒲石河沿)에서부터 접점(接點)을 이루기 때문에, 왕팔발자(王八脖子)가 있는
곳까지 해발 300m의 폭류(瀑流)의 위력이 먹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팔발자(王八脖子) 주변의 포석하(蒲石河) 수면(水面) 높이를 해발 70~80m로 본다고 할 때에 이곳까지
경첩-갑문을 터트릴 때의 폭류(瀑流)높이가 300m가 200m로 줄어든다고 할지라도 무려 20m~30m되는 폭류(瀑流)가
덮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적선(敵船)이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설혹 적선(敵船)이 전복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무려 5개의 지류(支流)가 왕팔발자(王八脖子)와 포석하연(蒲石河沿)
사이의 포석하(蒲石河)의 옆구리 쪽에 붙어있기 때문에, 매영(梅營)의 군선이 잠복(潛伏)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전멸(全滅)되고 말 것임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왕팔발자(王八脖子)에서 포석하연(蒲石河沿)까지의 약 16Km 지역을 ‘폭류측격(瀑流側擊)’ - 즉 “폭류
(瀑流)가 밀려들고, 측면(側面)에서 군선(軍船)들이 공격할 수 있는 지역”으로 별칭(別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수류(水流)조절용 만으로 쓰이고, 또 경첩-갑문까지 다는 이런(∋)모양의 대천두산(大川頭山) 서단
(西端: 500m)에서 첫번째 갈래-산 - 즉 웅반(雄盤)갑문을 쳐주는 곳에 노두비(老豆碑)란 지명이 있습니다.
이 <노두비(老豆碑)>는 “오래된(=노(老)) 제기(祭器)에(=두(豆)) 적힌 비(碑)”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분명 이곳의
갑문(閘門)의 설치와 관련된 비문(碑文)이라는 예감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 기회(機會)가 있어서 이 주변을 여행(旅行)하시는 동학(東學)들께서는 “<노두비(老豆碑)>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탐문(探聞)해 주시길 바랍니다.
(*) <노두비(老豆碑)>의 위치가 있는 곳 : 경도(經度)표시 6(4)~6(5), 위도(緯度)표시: 2~1
(*) 위 [1], [2], [3], [4]를 볼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지금까지 개괄적으로 관전호(寬甸湖) 주변의 지리를 말씀드렸는데, 포석하(蒲石河)를 타고 올라와서 포석하연
(蒲石河沿)에 도달하면, 수로(水路)의 갈림길이 ①북행(北行)하는 폭류로(瀑流路)가 있지만, 이곳은 기본적으로
배수로(排水路)이기 때문에 운항(運航)이 불가능한 길이고, ② 오직 동행(東行)해서 <관전(寬甸)> 남(南)쪽에서
대피구산(大避口山)
(TA-P'I-KU-SHAN)이 각기 북(北:300m)과 남(南:595m)으로 되어 있는 ‘사이’로 동류(東流)(→)해서 서(西)쪽의 부채꼴
[◀)]모양을 한 노평타령(老平馱岺)과 동(東)쪽의 ‘거대한 물음표(?)’모양을 한 나권전자산(羅圈甸子山) 사이로
해서 둥근-괄호[)]모양 돌아서 이런(_/)모양의 관전호(寬甸湖)에서 삼도구(三道溝)가 흘러나오는 원래 포석하
(蒲石河)로 해서 관전호(寬甸湖)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전호(寬甸湖)에로 들어가는 진정한 입구는 대피구산(大避口山)이 되는 셈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대피구산(大避口山: 300m-595m)에서 피구(避口)의 뜻은 ‘벗어나게 하는 출입구(出入口)’임을 뜻하고,
‘벗어나는 대상’은 바로 해발 100m에서 해발 510m까지 수위(水位) 차이(差異)를 뜻한다고 봅니다.
문제는 관전호(寬甸湖)가 해발 510m의 높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대피구산(大避口山) ‘사이’가 해발 100m 정도로
본다면, “이 410m 정도의 수위(水位) 차이를 극복(克服)해 주기 위해서 어디에 갑문을 설치하였겠는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__/)모양의 관전호(寬甸湖)의 자반(雌盤)-갑문이 있는 곳에서 둥근-괄호 <)>로 모양으로 남류
(南流)하는 포석하(蒲石河)를 따라서 남(南)쪽으로 내려오면서 차례차례 주변 지형(地形)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갑문이 설치되었고, 이를 조선조(朝鮮朝)때 어찌 활용하였게는가 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1] 먼저 대천두산(大川頭山) 동단(東端)에서 남류(南流)(↓)하는 삼도구(三道溝)와 맞은 편 의 산(山)에 갑문을 쳐주
어야하는데, -그 위치는 ‘붉은 글씨’로 두도구(頭道溝)의 <구(溝)>자 적혀있는 곳입니다. - 이 삼도구(三道溝)가 남류
(南流)하는 곳 오른편의 경도(經度)표시선:<6(6)>의 오른쪽에 보면 875m의 정상(頂上)높이가 나옵니다.
이 산(山)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데, 이곳에서 동남남(東南南)쪽을 보면 마을 이름이 ‘나권전자(羅圈甸子)’라고
나옵니다.
이는 ‘하천(河川)들을 네트워킹(networking)시켜 우리(=권(圈))를 형성한 경기(京畿)지역’이란 의미를 지니는데,
이 이름을 따서 875m되는 산을 중심으로 크게 ‘물음표(?)’처럼 생긴 방대한 산의 이름을 나권전자산(羅圈甸子山)이
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 나권전자산(羅圈甸子山)은 서(西)쪽의 맞은 편 산이 이런 왼쪽에 꼭지점을 지닌 이런<◀)>모양의 부채모양의
산(山)인 노평타령(老平馱嶺)이 있는데, 이는 “노숙(老熟)하게 수평(水平)으로 ‘짐을 실어 나르는(=타(馱)) 산줄기
(=령(嶺)”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나권전자산(羅圈甸子山)의 이름에서 “네트워킹한 우리(=권(圈)”라는 것은 바로 수류(水流)조절만 하는 노두비
(老豆碑)쪽으로 흐르는 하천과 <관전(寬甸)>을 우리 치듯 감싸는 형국(形局)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입니다.
또 이런<◀)>모양의 부채모양의 산(山)이 노평타령(老平馱嶺)으로 칭해지는 까닭은 웅반(雄盤) 갑문을 쳐주었을 때
수평(水平)으로 물을 공급해서 수위(水位)를 높혀 주는 하천(河川)들이 많기 때문에, 자연히 이 하천(河川) 주변에
선소(船所)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난함선(欄檻船) 종류의 선박은 목선(木船)으로써 평형수(平衡水: ballaster water)를 채우고 다니는 관계로 수위
(水位)가 충분히 높지 않을 때에는 굴강(掘舡)이라는 “출구(出口)만 있고 돌담으로 둘러친 곳‘에 두어서 두었다가
수위(水位)가 높아질 때에 운항(運航)하는 배입니다.
특히 군선(軍船)일수록 ‘톱질하는 착(捉)’ - 즉 거착(鋸捉)으로써 적선(敵船)의 흘수(吃水)부부분이 있는 쪽으로 바싹
기울여야하므로, ‘돌물(石水)을 채운 두 본판(本板)간의 깊이’가 유난히 깊습니다.
이는 매영의 군선(軍船)이 흘수(吃水: water line)아래로 여덟 팔(八)자 처럼 생긴 ‘물밑 처마’가 있는 ‘공기(空氣)가
들어있는 선실(船室)이 있기 때문에, 기울이는 쪽의 지하실(地下室)에서 부력(浮力)이 생기고, 평형수를 채운 곳
에서 중력(重力)이 발생하여서 복원력을 ’짝힘‘으로 발생하게 하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난함선(欄檻船)은 전복(顚覆)이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난함선(欄檻船)은 <선저(船底)물 탱크(tank)>가 매우 깊은 군선(軍船)인지라, 이 ‘선저(船底)물 탱크(tank)’의
깊이에 해당하는 ‘수위(水位)’가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는 굴강(掘舡)이라는 시설이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 굴강(掘舡)을 볼 수 있는 곳.
http://hanulh.cafe24.com/entry/%EC%95%88%EA%B3%A8%ED%8F%AC-%EA%B5%B4%EA%B0%95
왜 관전호(寬甸湖)로 갑문을 타고 올라가는 포석하(蒲石河)의 곁가지-지류(支流)에 군선(軍船)을 숨겨두는 굴강
(掘舡)시설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것은 이 포석하(蒲石河)를 따라서 여러 갑문을 거쳐서 관전호(寬甸湖)를 통해서 올라오는 무역선(貿易船)의 항로
(航路)에 방해를 하지 않으면서도,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군선(軍船)을 두는 위치가 곁가지의 지류(支流)로 들어
가는 하천(河川)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른 굴강(掘舡)들이 포도송이 처럼 주렁 주렁 달린 강들이 노평타령(老平馱嶺) 속에서 뻗어나가기 때문에,
수위(水位)가 올라올 때까지 마소(馬牛)로써 군수물자(軍需物資)를 굴강(掘舡) 속의 난함선(欄檻船) 속에 나를 필요
가 있었던 것입니다.
노평타령(老平馱嶺) - 즉 <수평(水平)으로 물자(物資)를 마차(馬車)로 실어 나르는 것은 (=타(馱)) 비단 굴강(掘舡)
속의 난함선(欄檻船)에게만 관련되지 않습니다.
갑문(閘門)에도 물자를 공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갑문(閘門)을 측면으로 보면 가운데에 이런(▮) 모양의 목책(木柵)이 - 이는 조감도로 볼 때에 이런 (--ㅌ ⊃--)모양의
청동(靑銅)으로 된 철제를 밖에서 나무로 감싼 것을 뜻합니다. - 있고, 양 곁에 이런(◢ ◣)모양으로 된 속에 마소(馬牛)
들이 멍에목을 돌리는 힘으로 유압(油壓)을 발생시켜서 이 힘으로 구동(驅動)되는 산(山)모양의 부회환(釜回換)이
곁들인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즉 측면도로 보면 전체 모양이 대략 이런(◢▮◣)이 되어서 ‘움직이는 거대한 산’ 같은 구조인 것입니다.
(물론 가운데 이런(▮) 모양의 목책(木柵)이 솟아나(↑) 있습니다.)
갑문은 하상(河床) 높이로 150m~ 200m 나 되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꼭 산(山)(◢▮◣)과 같은 모습이고, 이 속에는
수천마리의 마소(馬牛)들이 들어가서 멍에목을 메고 갑문을 움직이는 동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사료(飼料)와
분뇨(糞尿)처리’를 해주는 마차(馬車)들이 끊임없이 왕래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나 검토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관전호(寬甸湖)가 이런(_/)모양으로 되어 있는 역삼각형(▼)의 <동(東)-반납청산(半拉靑山:700m-600m)>북록(北麓)의
마일삼(馬日三)의 지명의 의미입니다.
이는 “말(馬)이 하루에(=일(日)) 세번”이란 의미인데, 이는 마치 산(山)(◢▮◣)처럼 생긴 갑문 속에 들어가서 멍에목을
메고 갑문을 움직이는 동력(動力)을 만들어내는 “말(馬)을 하루에 3교대(交代)”하는 장소(場所)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이 <서(西))-반납청산(半拉靑山:671m>를 비롯한 여러 계곡(溪谷)에서 반(半)-방목(放牧)으로 사육(飼育)된 말(馬)
들은 이 마일삼(馬日三)지역에 와서 관전호(寬甸湖)에 이르는 계단형 갑문 속에 교대(交代)하기 위해서 일단 집결
하는 위치가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간양구(看楊溝)가 흘러나가는 노두비(老豆碑)계곡은 폭류(瀑流)를 내보내거나 혹은 홍수(洪水)때
수류조절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물 한방울’ 안 흐르기 때문에, 그 우측에 있는 마치 부채꼴 <◀)>로 생간 노평타령
(老平馱嶺)쪽으로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건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노평타령(老平馱嶺)의 정상(頂上)과 ‘마을’이 같은 이름으로 공존(共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노평타령(老平馱嶺)이란 마을은 마일삼(馬日三)의 동(東)쪽에 있는데, 사도구(四道溝)가 동북류(↗)하는 곳의
해발 500m 등고선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노평타령(老平馱嶺)의 정상(頂上)은 이 <노평타령(老平馱嶺)이란 마을>에서 남(南)쪽으로 “붉은 글씨로
대낭구(大娘溝)라고 쓴 곳” 바로 밑에 868m로써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노평타령(老平馱嶺)이란 마을’에서 ‘노평타령(老平馱嶺)의 정상(頂上)’있는 곳까지 말(馬)이 가려면 대낭구
(大娘溝)때문에 해발 600m 등고선을 타고 영어의 씨(C)자처럼 접근하는 것이 가장 편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은 ‘노평타령(老平馱嶺)이란 마을’이 해발 500m에 있었지만, 조선조(朝鮮朝)때에는 바로
남(南)쪽의 해발 600m의 고지에 있었고, 마을 이름도 조선(朝鮮)사람답게 “노평타참(老平馱站)”이라고 칭하였을 것
입니다.
이 600m 고지(高地)의 노평타참(老平馱站)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600m의 등고선을 따라서 가면, 이 <관전
(寬甸)>주변에 있는 갑문(閘門)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위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조(朝鮮朝)때 <마일삼(馬日三)>과 <노평타참(老平馱站)>는 말(馬)들이 집결하는 두 센터(center)였던
것입니다.
<마일삼(馬日三)>은 휴식하고져 하는 말들이 집결하는 장소(場所)이고, <노평타참(老平馱站)>은 갑문에 동력을
불어넣고 일하기 위해서 집결하는 장소(場所)였던 것이니다.
따라서 이 두 장소(場所)간에, 서로 교대(交代)하기 위해서 동서(東西)로 해발 600m를 통해서 달리는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서남류(↙)하는 노두비(老豆碑)-계곡(溪谷)을 지날 때에는 이런(∋)모양의 ‘3 갑문’을 쳐주는 곳에서
<경첩-갑문>과 ‘자반(雌盤)-갑문’을 쳐주는 사이로 해서 서로 왕래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흥미있는 것은 서남류(↙)하는 노두비(老豆碑)-계곡(溪谷)으로 <노평타참(老平馱站)>에서 내려가거나 혹은 노두비
(老豆碑)-계곡(溪谷)에서 <마일삼(馬日三)>으로 올라갈 때에 등고선(等高線)의 기울기로 보면, 우리가 예측하는
<경첩-갑문>과 ‘자반(雌盤)-갑문’ 사이가 가장 완만하다는 사실입니다.
(*) 노평타참(老平馱站), 노평타령(老平馱嶺)의 위치
: 경도(經度)표시 6(5)~6(6), 위도(緯度)표시: 1~2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2a/txu-oclc-6614368-nk51-12.jpg
이처럼 <마일삼(馬日三)>과 <노평타참(老平馱站)>이라는 갑문(閘門)에 동력을 불어넣는 말(馬)들이 3교대(交代)
하는 2개의 극(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地形)에 계단식 갑문을 설치해서 해발 110m 수위(水位)에서
해발 510m 수위(水位)로 올리는 것에 조선조(朝鮮朝)때 얼마나 활발하게 이 수로(水路)가 운영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 우리의 갑문 구조가 ‘조선조(朝鮮朝)때 만든 지도’와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비교해서 살펴본 결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이의 수위(水位)를 높히는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가?”하고
아연실색(啞然失色)하였는데, 여러 가지 기록을 참조한 결과 그동안 좌계가 갑문의 구조에 대해 추정한 것과는 훨씬
발달된 ‘전래되는 기술’과 구조(構造)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朝鮮)시대의 갑문 구조’는 현대(現代)의
갑문보다 더 발달되었음을 의미는 흔적들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양계만리도’의 좌하단(左下端) 서문(序文)해석이 끝난 후에 이 갑문의 구조와 기술에 대한 글을 따로 몇
회(回)분을 올릴 계획입니다. (*)
-각설(却說)
아무튼 마소(馬牛)들이 산(山)속에 들어가서 산(山)을 움직이는 것 같은 양상이 되기 때문에, 이 마소(馬牛)들의
사료(飼料)공급과 ‘분뇨(糞尿)처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마차(馬車)가 왕래하였기 때문에, 노평타령(老平馱嶺)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관전호(寬甸湖)의 자반(雌盤)-갑문을 쳐주는 위치는 바로 대천두산(大川頭山) 동단(東端)과 남류(南流)하는
삼도구(三道溝) 맞은 편을 연결하면 되는데, 이 때의 갑문(閘門)의 높이는 520m입니다.
즉 관전호(寬甸湖)와 삼도구(三道溝)가 하류하는 출구(出口) ‘사이’에 자반(雌盤)-갑문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삼도구(三道溝)가 그 밑에서 사도구(四道溝)가 동북류(↗)하면서 올라오는 곳 바로 ‘위’쪽 대천두산
(大川頭山) 동단(東端) 500m되는 곳에 <9차(次)-웅반(雄盤)-갑문>을 쳐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500m 등고선(等高線)의 높이로 볼 때에, 자반(雌盤)-갑문과 <9차(次)-웅반(雄盤)-갑문>이 설치되는 곳까지의
거리는 2Km 정도 됩니다.
(*) 삼도구(三道溝)가 남류(南流)하는 곳: 경도(經度)표시 6(5)~6(6), 위도(緯度)표시 3~2
(*) 위 [1]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자반(雌盤)-갑문과 <9차(次)-웅반(雄盤)-갑문>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2] 수위(水位)를 높혀주는 웅반(雄盤)-갑문을 쳐주는 곳은 이 <관전호(寬甸湖)>쪽에 9곳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8차(次)및 7차(次) 웅반(雄盤) 갑문>
8차(次)-웅반(雄盤) 갑문이 쳐질 곳은 오도구(五道溝)가 적혀 있는 곳입니다.
즉 사도구(四道溝)가 동북류(↗)한 밑에 오도구(五道溝)가 남류(↓)하고 있는데, 이곳을 노평타령(老平馱嶺:858m)가
그 밑에서 받쳐주기 때문에, 물(水)의 전체적으로 이런(∩) 모양으로 돌아가는 ‘오른쪽 어깨’에 8차(次)-웅반(雄盤)
갑문을 쳐주는 것입니다.
이 때의 갑문(閘門)의 높이는 해발 420m입니다. 따라서 수위(水位)를 이곳에서 410m까지 올려서 유지(維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치 사다리 타고 올라가듯 수위(水位)를 계속 높혀 갈 때에는 웅반(雄盤)갑문을 겹으로 쳐주게 되는데,
홀수 차(次)의 웅반(雄盤)갑문은 ‘갑문(閘門)을 통과’했을 때에 닫고서 수위(水位)가 올라가는 역할을 하고,
짝수 차(次)의 웅반(雄盤)갑문은 ‘갑문을 통과했을 때’ 수위(水位)가 유지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8차 갑판을 통과하면 수위(水位)가 410m가 이미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자반(雌盤)-갑문을 닫은 상태에서 9차 갑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때의 수위는 410m가 보장인 된 상태에서 8차갑문을 닫고, 510m로써 수위(水位)를 높힌 다음에
자반(雌盤) 갑문을 열고 관전호(寬甸湖)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8차(次)-웅반(雄盤) 갑문이 바로 근처에 7차(次) 갑문이 있을수록 효과적인데, 이곳의 등고선(等高線)의 높이
로 볼 때에, 8차(次)-웅반(雄盤) 갑문이 쳐진 곳에서 1Km 동남(東南)쪽이면 적절한 것입니다.
(*) 위 [2]의 < 8차(次)및 7차(次) 웅반(雄盤) 갑문>이 쳐지는 위치를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3] ① <6차(次)및 5차(次) 웅반(雄盤)갑문>을 쳐주는 위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 드러난 이곳의 수명(水名)은 북(北)에서 남(南)으로 내려오면서 관전호(寬甸湖)에서 내려
오는 포석하(蒲石河) 본류에 끼어드는 하천의 순번에 따라 번호를 붙이고, 그 어미(語尾)에 ‘~도구(道溝)’로 붙이는
관례(慣例)가 있었음을 수명(水名)의 이름에서 눈치챌 수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육도구(六道溝)가 기역(ㄱ)자처럼 서류(西流)해서(←) 포석하(蒲石河)에 합류하고,
다음에 칠도구(七道溝)(→)가 동류(東流)해서 포석하(蒲石河)에 합류하는 곳 바로 밑에 보면, ‘Shao-kuo-p'u-tzu’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는 한자(漢字)의 소구보자(召溝堡子)의 음가(音價)를 영어로 표기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소구보자(召溝堡子)의 뜻은 ‘봇도랑(=구(溝))’을 부르는(=소집(召集)하는) 보(堡)가 있는 곳‘이란 의미입니다.
이 소구보자(召溝堡子)(Shao-kuo-p'u-tzu)가 바로 해발 310m의 수위(水位)를 유지하게 하는 6차(次)갑문을 있었던
위치이고, 해발 310m로 수위(水位)를 올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5차 갑문은 이 소구보자(召溝堡子)라고 적혀있는 곳
으로 부터 남(南)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설치하면 되는 것입니다.
② 이곳에 1950년대까지 사용된 지명이 소구보자(召溝堡子) - 다시 말하면 “봇도랑(=구(溝))들을 소집(召集)하는
보(堡)”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역(ㄱ)자로 돌아서 서류(西流)(←)하면서 포석하(蒲石河)에 합류하는 육도구(六道溝)의 발원(發源)되는
것이 등고선의 높이로 볼 때에 300m라는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 이 육도구(六道溝)가 기역(ㄱ)자로 돌아서 서류(西流)(←)하게 된 까닭은 영어의 유(U)자를 위에서 눌러서 납잡
하게 퍼져서 마치 ‘냄비’처럼 된 산세(山勢)가 남(南)쪽에서 받침으로 있으되, 동(東)쪽이 보다 높으면서 이곳에서
산(山)의 팔(手: arm)을 북(北)쪽으로 조금 더 길게 내밀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산(山)이 있는 곳에 ‘K'ua-tzu-kou’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한자(漢字)의 과자구(鍋子泃)의 음가를 영어로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과(鍋)는 냄비를 뜻하기 때문에, 결국 ‘냄비의 개울’이란 의미를 띱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육도구(六道溝)의 발원이 되는 산을 <과자구-산(鍋子泃-山)>으로 이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육도구(六道溝)가 발원(發源)이 되는 유(U)자 모양의 남(南)쪽 ‘받침 산(山)’의 동(東)쪽에 훨씬 종심(縱深)이 남북
(南北)쪽으로 길고 깊은 모양의 유(U)자 모양의 산이 있어서 - 대략 6배(倍)가 됩니다. - 그 사이로 북류(北流)하는
하천(河川)이 그리스 문자 람다(Γ)모양으로 꺽어져서 동류(東流)(→)하고 있는데, 이 하천(河川)이 대탕석(大湯石)을
지나기 때문에 ‘대탕석구(大湯石溝)’라고 이름 할 수 있는데, 이 하천(河川)이 북류하면서 기역(ㄱ)자로 꺽여서 나가는
육도구(六道溝)와 서로 만나는 곳 즉 이런 (ㄱΓ)모양으로 되어서 서로 등(背)지게 되는 곳의 해발 높이도 역시 해발
300m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소구보자(召溝堡子)에서 해발 310를 유지하게 하는 6차 갑문을 해발 320m로 쳐주게 되면, 포석하(蒲石河)는
즉각 ‘대탕석구(大湯石溝)’를 타고서 동류(東流)하게 되게 되기 때문에, 이런(ㄱΓ)모양으로 된 서로 등(背)지면서
흐르는 곳을 <대탕석구(大湯石溝)-서(耳亇)>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대탕석구(大湯石溝)’가 동류(東流)해 나가는 출구(出口)에 갑문을 쳐서 막는다면, 이 ‘대탕석구’의 물을 전부
6차 갑문에 해발 310m의 수위(水位)를 유지하게 하는 것에 동원이 되기 때문에, 이 6차 갑문이 쳐진 곳의 보(堡)
이름이 소구보(召溝堡)로 1950년대까지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③ 그런데 이 ‘대탕석구(大湯石溝)’가 종심(縱深)깊은 유(U)자 모양으로 된 산세(山勢)의 사이로 해서 북류(北流)
하는데, 이 산(山)의 받침이 되는 곳에는 ‘Ta-yang-ch'a’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대양차(大陽岔)’의 음가(音價)를
적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양(陽)은 수지북(水之北)과 같기 때문에, 이 대양차(大陽岔)는 ‘대수지북차(大水之北岔)’로 바꾸어서 말할 수 있고,
이는 “큰 물(水)의 북(北)쪽에 있는 분수령(分水岺)”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이 ‘대양차(大陽岔)’는 지도에서 해발 600m를 정점(頂点)으로 해서 500m-400m의 높이로써 유(U)자모양의 산세(山勢)
를 형성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대양차(大陽岔: 600m) 남(南)쪽에 “도대체 어떤 하천(河川)이 있길 래 이를 대수(大水)로 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바로 동북류(東北流)(↗)하는 남고하(南古河)인 것입니다.
이 남고하(南古河)는 바로 대탕석구(大湯石溝)가 람다(Γ)모양으로 동류(東流)하다가 기역(ㄱ)자처럼 꺽어서 내려
오는 소탕석구(小湯石溝)와 만나서 탕석구(湯石溝)가 되어 동남류(東南流)(↘)해서 합류되는 본류(本流)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탕석구(湯石溝)가 동남류(↘)하는 동(東)쪽으로 약 4Km 되는 곳에서 길게 불(乀)자 모양으로 북고하(北古河)
와 나란히 달리는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회(前回)에서 이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가 북고하(北古河)와의 사이에 <왜양자구(倭樣子泃)-서(耳亇)>
(Wai-yang-tzu-kou)가 있어서 북고하(北古河)가 넘어오는 관계로 해발 310m의 수위(水位)를 동반(同伴)해서 유지
시키기 위해서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를 수용한 남고하(南古河)가 바로 동북류(東北流)하면서 북고하(北古河)
완 만나는 태평초(太平哨)바로 직전에 소차퇴구(小岔腿泃)가 북류(↑)하는 좌우(左右)에 ‘동반(同伴)6차(次)및 5차
(次) 갑문’을 320m 고도(高度)로 쳐주어야함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이야기는 (1)남고하(南古河) (2)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 (3) 대소(大小)탕석구(湯石溝)의 모든 물(水)
들이 역류(逆流)해서 <대탕석구(大湯石溝)-서(耳亇)>를 넘어서 소구보(召溝堡) 쪽으로 몰려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곳에 갑문시설이 갖추어진 조선조(朝鮮朝) 철종(哲宗)때까지에는 이런 대하(大河)가 소구보(召溝堡)쪽
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나권전자(羅圈甸子)라는 마을은 미군사지도(1950년대)에 별(✭)표로 표기된 포석하(蒲石河)
서안(西岸), 칠도구(七道溝) 북안(北岸)에 위치하게 되면 침몰(沈沒)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나권전자(羅圈甸子)는 “하천(河川)을 네트워킹(Networking)시켜서 우리(=권(圈))를 경기(京畿)지역에 틀게 한 곳”
이란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이곳 관전호(寬甸湖)로 포석하(蒲石河)를 통해서 선박들이 계단 갑문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에 대해서 안전(安全)을 총괄적으로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매영(梅營)의 사령부(司令部)가 있었던
지명(地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권전자진(羅圈甸子鎭)이라는 이름으로 원명(原名)을 확실히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나권전자진(羅圈甸子鎭)이 있는 원래의 위치는 <과자구-산(鍋子泃-山)>의 북록(北麓)에서 해발 310m된 곳에서
<대탕석구(大湯石溝)-서(耳亇)>를 통해서 포석하(蒲石河)와 남고하(南古河)가 서로 연결이 되는 요충(要衝)에 있었
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④ 그런데 이처럼 “<대탕석구(大湯石溝)-서(耳亇)>가 해발 310m 수위(水位)에서 ‘대탕석구(大湯石溝)← 탕석구
(湯石溝)←남고하(南古河) ←혼강(渾江)’로 연결되고, 이것이 포석하(蒲石河)가 해발 510m를 보장하는 관전호
(寬甸湖)에 오르기 전(前)에 서로 회통(回通)되게 하고 ”이곳에 주로 매영(梅營)의 기지(基地)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조(朝鮮朝)때 정령(井嶺)산맥으로 넘어가는 것을 오늘날 압록강을 기반으로 해서 혼강(渾江)의 지류인
남고하(南古河)와 포석하(蒲石河)를 연결하는 곳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천(河川)을 갑문으로 막는 경우, 가뭄이 들어서 수류(水流)가 부족할 때에는 남고하(南古河)전체를 소차
퇴구(小岔腿泃)가 북류(↑)하는 좌우(左右)에 ‘동반(同伴)6차(次)및 5차(次) 갑문’을 320m 고도(高度)로 쳐주는 것은
별로 현명한 처사가 못됩니다.
왜냐하면, 강물은 하류(下流)로 갈수록 제방 역할을 하는 산세(山勢)의 폭(幅)이 넓어지기 때문에, 채워야하는 물(水)
의 양이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종심(縱深)깊은 유(U)자모양의 대양차(大陽岔: 600m)을 벗어나 대탕석구(大湯石溝)가 람다(Γ)모양
으로 꺽어져서 동류(東流)하는 곳에 <갈수기(渴水期)-용(用)> 갑문을 6차(次)와 5차(次)로써 쳐주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유(U)자모양의 대양차(大陽岔: 600m)은 310m의 고도가 되기 까지는 가파른 협곡(峽谷)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금시 차올라서 낭비(浪費)없이 소구보(召溝堡)를 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이 협곡은 가장 매영(梅營)의
군선(軍船)들을 깊게 숨길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 위 [3]의 ①,②,③,④를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나권전자진(羅圈甸子鎭)이 있는 곳: 경도(經度)표시: 6(6)~6(7), 위도(緯度)표시 1~2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위 나권진자진(羅圈甸子鎭)은 의미하는 것은 박작호(泊汋湖)의 좌측(左側) 외곽이 되는 정령회하(井嶺回河)로 또
포석하(蒲石河)를 통해 정령(井嶺)산맥 서록(西麓)으로 흐르는 위원하(威遠河) ‘사이’인 (1)대소(大小)의 탕석구
(湯石溝) (2) 북적황자구(北吊幌子溝) (3)남고하(南古河)에서 이 두 수계(水系)를 모두 지키는 군선(軍船)들의 기지
(基地)의 센터(center)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 각설(却說)하고.
[4] 이제 4차(次)-3차(次) 웅반(雄盤)을 쳐줄 곳을 찾아야할 순서입니다.
① 4차(次) 웅반(雄盤)갑문은 수위(水位)를 해발 210m까지 높혀서 유지하게 하고, 또 3차 갑문은 수위(水位)를 해발
210m 까지 올리게 하는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에 이 두 웅반(雄盤)갑문을 해발로 보아서 10m를 더 보탠 220m가 되어
야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위(水位)를 210m로 올림에 있어서 수원(水源)이 되는 것이 바로 대낭구(大娘溝)임은 두말할 필요
가 없습니다.
문제는 미군사지도(1950년대)에 이 대낭구(大娘溝)가 완만한 기역(ㄱ)자로 꺽이는 곳에 삼도만(三道灣)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관전호(寬甸湖) 밑에
(1) 8차-7차의 갑문에 의해서 해발 410m로 올려 유지하는 것을 ‘첫번 째 길(道)의 만(灣)’이란 뜻에서 ‘일도만(一道灣)’
이라고 칭하고,
(2) 6차-5차 갑문에 의해서 해발 310m로 수위(水位)를 올려 유지하는 것을 ‘두번 째 길(道)의 만(灣)’이란 뜻에서
‘이도만(二道灣)’이라고 칭(稱)했던 연장선(延長線)상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도만(二道灣)’은 <두 길(道)로 나가는 만(灣)>이란 의미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미 이를 나권진자진(羅圈
甸子鎭)에서 <대탕석구(大湯石溝)-서(耳亇)>를 통해서 정령회하(井嶺回河)쪽으로 연결되는 수로(水路)가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입습니다.
아무튼, 삼도만(三道灣)에 쳐주는 4차-3차 웅반(雄盤) 갑문은 해발 210m까지 수위(水位)를 올려서 유지해야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② 그런데, 대낭구(大娘溝)가 완만한 기역(ㄱ)자로 꺽어서 남류(南流)해서 포석하(蒲石河)가 서남류(西南流)(↙)해서
만나는 교점(交點)의 남(南)쪽에 보면, 상차구자(上叉溝子)라는 마을 이름이 나옵니다. 이 마을은 북류(北流)(↑)하는
상차구(上叉溝)라는 하천(河川)을 끼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차구자(上叉溝子)라는 마을 남(南)쪽에 보면, 727m의 산이 있고, 또 500m되는 산세(山勢)를 대낭구
(大娘溝)가 남류(↓)하는 바로 동(東)쪽으로 팔을 내밀고 있기 때문에, 북류(北流)할 수 밖에 없음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727m되는 산의 이름을 상차구산(上叉溝山)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상차구(上叉溝)의 뜻입니다. 이는 “(물(水)을) 올리는 것을(=상(上)) 엇갈리게 하는(=차(叉)) 봇도랑”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남류(↓)하는 대낭구(大娘溝)와 엇갈리며(=차(叉)) 만나는 상차구(上叉溝)가 그 왼쪽에 4차(次) 갑문을 쳐주어서
“함께 물(水)을 올렸던(=상(上)) 수리시설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명칭”인 것입니다.
따라서 상차구산(上叉溝山: 727m)가 500m고도(高度)로 오른편에 ①대낭구(大娘溝)와 ②상차구(上叉溝) 두면서
불(乀)자 모양으로 팔을 내미는 곳과 포석하(蒲石河) 맞은 편에 4차 갑문을 쳐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 4차 갑문은 수위(水位)를 210m로 올려서 유지하게 하는 것이 그 역할임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3차와 4차 갑문이 합쳐져서 이곳 현지(現地)의 표현대로 하면, 삼도만(三道灣)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위(水位)를 해발 210m로 올리는 역할임무를 하는 3차 갑문의 쳐줄 위치만 확인하면 됩니다.
③ 그런데, 여기서 이 미군사지도(1950년대)에 가장 황당한 경우를 맛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포석하(蒲石河)가 관전호(寬甸湖)의 자반(雌盤)-갑문을 내려오면서 전체적으로 둥근-괄호 <)>처럼 돌
아서 흐르기 때문에, 일도만(一道灣), 이도만(二道灣)을 거친 후, 삼도만에서 서남(西南)(↙)쪽으로 흐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곳에서 수류(水流)가 갑자기 이런 ( >-↙)식으로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곳에 설치된 갑문과 제방시설을 조선조(朝鮮朝)철종 때에 죄다 철수(撤收)시킬 것을 감안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령(井嶺)산맥을 넘어서 하협하(下夾河)가 넘어오지 않아서 관전호(寬甸湖)가 고여서 수위(水位)가 높혀
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삼도구(三道溝)로 부터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둥근-괄호<)>로 돌아서 서남류(↙)해서 이윽
고 <관전(寬甸)> 남쪽으로 서류(西流)해야하는데, 이곳이 뚝 끊어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를 생각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포석하(蒲石河)가 끊어진 곳은 수류가 이런(>--)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아랫부분인 별(丿)자 모양의 좌하단
(左下端)에서 2Km정도를 가는 도중에 (Ch'i-pian-ling)이 가로막고 있고, 그 동(東)쪽에서 포석하(蒲石河)가 마치 지하
(地下)로 이어진 듯이 서류(西流)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즉 이런( ←(Ch'i-pian-ling)↙) 모양인 것이지요.
이 2Km정도가 되는 (Ch'i-pian-ling)이 자리잡은 구간을 등고선(等高線) 높이로 보면 (300m-500m-300m)가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지하(地下)-터널(tunnel)이 없었다면, 물이 고일 수 밖에 없고, 지도(地圖)에 호수(湖水)형태로 흔적을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데, 이런 흔적 또한 없게 그려진 것입니다.
(*) ‘4차-갑문’을 쳐줄 위치: 경도(經度)표시:6(6), 위도(緯度)표시:1의 교차점 바로 동남(↘)
(*) 이런( ←(Ch'i-pian-ling)↙)으로 포석하(蒲石河)가 끊어지는 곳.
: 경도(經度)표시 6(5)~6(6), 위도(緯度)표시선: 1의 밑
(*) 위 [3]의 ①.②,③을 볼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이런( ←(Ch'i-pian-ling)↙) 모양의 지리(地理)에서 (ling)이 ‘산봉오리 령(岺)’의 음가(音價)를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앞에 붙은 (Ch'i-pian)의 한자(漢字)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좌계는 이를 치평(置閛)으로 봅니다. 평(閛)은 [문(門)+평(平)]으로 구성되어 있는 글자인데, “문(門)닫는 소리”, “문
(門)을 여닫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의미는 이 치평령(置閛岺: 300m-500m-300m)속에 선박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대형 굴(堀=터널(tunnel))
을 파고서 이 터널 양단(兩端)에 갑문을 설치한 다음 중간에 ‘경첩-갑문’을 설치한 것을 “평(閛)으로 나타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선박이 굴(堀)을 통과해서 갈 때에 이 굴(堀)을 지닌 포구(浦口)를 조선조(朝鮮朝) 때에는 <굴포(堀浦)>라고 칭합니다.
굴포(堀浦)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천장(天障)이 없는’ -즉 뚜껑이 없어 하늘이 보이는 <무개(無蓋)-굴포(堀浦)>가
있는데, 이는 암반(巖盤)으로 된 산 위를 감(凵)자 같이 파고서 수위(水位)가 올라갈 때에 통과하는 유형입니다.
실제, 길목해(吉木海)가 북류(↑)하는 소하강(蘇下江) 우측에는 ‘경원도호부’가 있었는데, 이 소하강과 경원도호부
사이에는 돌아가기를 강요하면서 남북으로 난 곶(串)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곶(串)에 길목해(吉木海)의 수위
(水位)가 올라가면, 감(凵)자 모양의 <무개(無蓋)-굴포(堀浦)>로써 경쾌 군선(軍船)인 비거도선(鼻居刀船)이 먼저
나가서 소하강(蘇下江)이 나가는 굴곡(屈曲)진 만(灣)속에 적선(敵船)이 있는지 여부를 순찰(巡察)하고,
또 발견 즉시 퇴치(退治)를 위해서 설치되었음이 ‘세종실록 지리지(/함길도/길주목/경원도호부)’에 드러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유개(有蓋)-굴포(堀浦)>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이 <관전(寬甸)> 주변에는
<유개(有蓋)-굴포(堀浦)>가 실제 있었던 것입니다.
적선(敵船)이 <유개(有蓋)-굴포(堀浦)>를 통과해야만 관전호(寬甸湖)를 넘어서 만주(滿洲)쪽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
에, 굴(堀) 입구에 와야 하는데, 입구(入口)에 와보았자, 치평령(置閛岺: 300m-500m-300m)의 고지에서 활(弓)과 투석
기(投石機)의 공격을 받게 되기 때문에, 통과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설혹 굴(堀)속으로 들어가 보았자, 갑자기 어두워지는 관계로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경첩-갑문이 터트려
지면, 벗어날 수 있는 확율은 전무(全無)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에서
[1] ‘3차 갑문’이 쳐질 위치는 약 2Km 되는 치평령(置閛岺) 터널(tunnel)로 서남(西南)(↙)쪽 수류(水流)가 닫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터널(tunnel)한 가운데에 ‘경첩-갑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포석하(蒲石河)가 치평령(置閛岺) 터널(tunnel)을 통해서 흘렀다.”는 사실은 조선조(朝鮮朝)철종 때에 모든
갑문과 제방이 철회될 때에 “왜 이 터널(tunnel)만 남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부닫치게 됩니다.
이 치평령(置閛岺)의 지하(地下)터널(tunnel)이 암반(巖盤)이 되었을 경우는 갑문을 철회한 후에, 이를 폭파하였을
때에, 삼도만(三道灣)이 ‘물(水)이 빠지지 않는 호수(湖水)’로 되기 때문에 이를 꺼려해서 폭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강호(安康湖)의 경우로 보더라도, 제방과 갑문을 철회(撤回)할 때에는 주변에서 소도(蘇塗)를 그동안 유지해온
사람들에게 논밭으로 사용하게 하는 선물(膳物)로써 분배하는 것이 전통인데, ‘물(水)이 빠지지 않는 호수(湖水)’가
되면 이런 마지막 분배(分配)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폭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터널 속에 돌(石), 자갈 등을 넣어서 물(水)만 통과하는 식으로 마감 변조(變造)를 할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돌(石), 자갈을 들어내면, 터널(tunnel)의 모양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또 하나는 치평령(置閛岺) 지하(地下) 터널(tunnel)이 있는 곳이 암반(巖盤)이 아니고, 흙일 경우, 이를 감(凵)자
모양의 <무개(無蓋)-굴포(堀浦)>로 변형시키면서 갑문을 철회시킨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이런(◢◣) 모양으로 깊은 협곡(峽谷)이 있는 유형으로 변하게 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제(日帝)강점(强占)때에 일본 공군(空軍)의 격납고로 쓰기 위해서 다시 뚜껑을 덮었을 가능성을 우리는 가정
(假定)할 수가 있습니다.
(*) 부탁의 말씀 (*)
혹 요녕성(遼寧省) 관전(寬甸) 부근에 여행할 기회가 있는 동학(東學)들께서는 “이 치평령(置閛岺) 터널(tunnel)이
어떤 형식으로 개조(改造)과정을 밟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 싸이트(site)에 글을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
[2] 이제 마지막으로 1차(次)갑문으로 110m로 수위(水位)을 올리고, 2차(次)갑문으로 이 110m 수위(水位)를 유지
하게 하는 사도만(四道灣)을 형성하는 갑문의 위치를 추정하는 문제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래 미군사지도’를 보면, 치평령(置閛岺) 터널(tunnel)을 빠져나온 포석하(蒲石河)는 마치 그리스 문자
람다(Γ) 모양 꺽어져서 나갑니다. 즉 동류(東流)(←)하다가 남류(↓)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水)이 돌아나갈 때에는 수세(水勢)에 의해서 돌아나가는 안(內)쪽에는 옅게 되고, 모래가 쌓이고, 돌아나가는
쪽은 깊게 파이게 됩니다.
람다(Γ) 모양 꺽어져서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더 이상 파이기 힘든’ 단단한 암반(巖盤)이 람다(Γ)모양으로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현지(現地), 조선인들이 “과거에 이곳에 터널(tunnel)이 있었다.”는 것에 착안해서 이를 이 사도만(四道灣)이
해발 110m로 되어야하는데, 이는 <관전(寬甸)>이 있는 곳은 물론이고, 람다(Γ)모양으로 꺽어지도록 한 암반(巖盤)의
해발 높이가 적어도 해발 120m가 된다고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람다(Γ)모양으로 꺽어나가는 곳에 마치 한글 시옷(ㅅ)자처럼 서북류(西北流)하다가 서남류(西南流)(↙↖)
하는 하천(河川)이 있습니다.
이 하천이 시옷(ㅅ)자 처럼 흐르는 까닭은 그 시원(始源)이 장령(長嶺:709m)에서 연원하는데, 장령(長嶺:709m)의 산세
(山勢)자체가 시옷(ㅅ)자처럼 생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옷(ㅅ)자처럼 흐르는 하천을 우리는 장령구(長嶺溝)라고 이름할 수가 있습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시옷(ㅅ)자처럼 흐르는 장령구(長嶺溝)의 ‘터닝-포인트(turning-point)에 치평령(置閛岺)이 한글의
어(ㅓ)자 처럼 생긴 수평(水平)으로 내민 산맥이 <물(水)머리>를 눌러서 더 이상 진행치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람다(Γ)모양으로 꺽어나가는 포석하(蒲石河)와 시옷(ㅅ)자처럼 흐르는 장령구(長嶺溝)는 꼭 한자(漢字)의 “기울
측(仄)”자 처럼 <관전(寬甸)>의 동남(東南)에 포진(布陣)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기울 측(仄)”자 처럼된 두 물(水)이 합수되는 곳이 <관전(寬甸)>정남(正南)인데, 이곳에서 서류(西流)하는
입구(入口)에 있는 산이 바로 대피구산(大避口山: 300m-595m)입니다. 즉 측(仄)자처럼 포진한 두 물(水)이 합수된 물은
북(北)쪽에 300m, 남(南)쪽에 595m 고도를 지닌 사이로 해서 서류(西流)해 빠져나가는데, 이 남북으로 곤(丨)자처럼된
대피구산(大避口山)을 빠져나가는 곳에 갑문을 쳐줄수 있는 곳의 동서(東西)길이가 2Km됩니다.
따라서 대피구산(大避口山) 서구(西口)에 2차(次)갑문을 쳐주고, 동구(東口)에 1차(次)갑문을 쳐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1차, 2차 갑문이 있는 대피구산(大避口山)을 통과해서 선박이 동행(東行)해(→) 들어오면, 해발 110m의 수위
(水位)가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발 110m는 한자(漢字)의 “기울 측(仄)”자처럼 생기고, 수위(水位)가 110m로 올라가거나 혹은 가능한
최대로 물을 뺀다고 할지라도 지형(地形)의 특성상 물의 전체 모양이 “기울 측(仄)”으로 된 모양새는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람다(Γ)으로 되게 흐르도록 한 곳은 암반(巖盤)으로 되어 있고, 물이 돌아 흘러갈 때에는 바깥 쪽을 깊게 파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수위(水位)를 높히면, “기울 측(仄)”자 모양의 하천(河川)의 폭(幅)이 좀 더 두터워지는 결과만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만(四道灣)인 것입니다.
시옷(ㅅ)자처럼 흐르는 장령구(長嶺溝)와 암벽(岩壁)밑으로 람다(Γ)모양으로 된 사이는 ‘모래 사장(沙場)’인데,
이곳은 ‘국제적인 시장(市場)’이 형성되었던 곳입니다.
무역선(貿易船)들은 장령구(長嶺溝)가 서북류(西北流)(↖)하는 계곡 속에 정박(碇泊)하였음이 또한 자명(自明)한
것입니다.
또 <관전(寬甸)>에서 필요한 물품을 올릴 때에는 람다(Γ)모양의 암벽(岩壁) 위에서 ‘도르레(=녹로(轆轤))’로써 들어
올려서 공급되었음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무역선(貿易船)들은 <관전(寬甸)> 남(南)쪽의 측(仄)자처럼 하천이 흐르는 국제시장에서 교역
(交易)한 후에, 다시 배를 돌려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돌아가게 됩니다.
① 대피구산(大避口山)의 2차-갑문→ ② 대피구산(大避口山)의 1차 관문 →③포석하연(蒲石河沿)→ [폭류측격(瀑流
側擊)지역 : → ④ 협면구(夾面溝)→⑤왕팔팔자(王八脖子)→폭류측격(瀑流側擊)지역]→⑥토성자(土城子)→ ⑦만전자
(灣甸子)
이를 역(逆)으로 ‘오늘날의 압록강’에서 포석하(蒲石河)를 타고 올라오는 입장에서 보면,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
에 보다시피, 포석하(蒲石河)가 수량(水量)이 풍부해서 선박이 다닐수 있는 곳은 ‘굵은 푸른 글씨’로 써놓았는데,
오늘날 ‘굵은 푸른 글씨’가 없는 곳에 “과연 조선조(朝鮮朝)때에 외국(外國) 무역선(貿易船)이 다닐 정도로 물(水)이
풍부하였겠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답은 “그렇다.(=풍부하다.)”입니다.
이는 만전자(灣甸子)라는 지명이 있어서 알수가 있습니다. 만전자(灣甸子)에서 <전(甸)>이야, 바로 <관전(寬甸)>쪽
으로 가기 때문에 붙여진 글자인데, 그 앞에 만(灣)자가 붙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포석하(蒲石河)가 정확히 영어의 에스(S)자처럼 돌아가는 곳인데, 수량(水量)이 풍부하면, 저절로 에스(S)
자 모양의 만(灣)이 형성되는 곳입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보면, 오늘날의 압록강에서 포석하(蒲石河)로 들어오면, 유난히 강이 구불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데, 이처럼 하천(河川)이 구불거리면 강의 배수(排水)가 직선(直線)일 때보다 늦어져서 수량
(水量)이 풍부할 뿐만아니라, 역류(逆流)해서 선박이 올라오기 편해집니다.
그런데, 가장 구불거리는 정도가 힘한 것이 바로 만전자(灣甸子)의 ‘과격한 에스(S)’자가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문자그대로 만(灣)이 에스(S)자로 형태로 있는 곳입니다.
이 만전자(灣甸子)지역을 벗서나 북상(北上)하면, 토성자(土城子)가 나타나는데, “이곳에 토성(土城)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왕팔발자(王八脖子)쪽에서 전체적으로 서남류(西南流)하면서 <관전(寬甸)>쪽으로 접근하는 외적(外賊)에 대
해서 수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토성자(土城子) 바로 북(北)쪽에서 동류(東流)(→)하는 (Yang-mu-kou)라는 하천(河川)이 있읍니다.
일반적으로 강물이 서로 반대방향에서 흘러 들어올 때에는 (→ ←)에는 서로 부닥치기 때문에 수류(水流)의 속도
(速度)가 떨어집니다.
이 (Yang-mu-kou)는 양무구(陽務溝)나, 양무구(揚務溝)로 추정이 됩니다. 양무구(揚務溝)일 때는 “물(水)을 끌어
올리는 일을 하는 봇도랑”이란 뜻이어서 수량(水量)이 풍부해지는 역할을 함을 뜻합니다. 양무구(陽務溝)일 경우,
양(陽)이 수지북(水之北)이기 때문에,
“수지북무구(水之北務溝)”로 환원되고, 이는 “물이 북향(北向)하는 일을 하는 봇도랑”이란 의미가 됩니다.
한자(漢字)가 어찌 쓰였던 의미는 물을 풍부(豊富)하게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양무구>의 바로 북(北)쪽에서 서남류(西南流)하는 포석하(蒲石河)는 왕팔발자(王八脖子)에서 무척
과격하게 이런(冂凵)모양으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이 역시 수류(水流)가 천천히 하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조(朝鮮朝)때 <관전(寬甸)>의 사도만(四道灣) - 즉 측(仄)자 모양으로 된 입구에 까지는 수량(水量)
이 풍부해서 외국의 무역선(貿易船)들이 거침없이 올라올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만전자(灣甸子)의 위치: 경도(經度)표시 6(3)~6(4), 위도(緯度)표시: 9~8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12.jpg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조선조(朝鮮朝)때 포석하(蒲石河)를 타고서 관전호(寬甸湖) 밑에까지 대형선박이 올라오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또 관전호(寬甸湖)로 올라가는 것 역시 자반(雌盤)갑문까지 합쳐서 총 10차(次) 갑문이
있기 때문에, 넘기가 매우 수월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포석하(蒲石河)-위원하(威遠河)로써 넘어가는 수로(水路)는 외적(外賊)으로부터 의 공격에 대해서
철저한 방어조치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양계만리도(6)] 2개원(開元), <腕目湖>, <炅兵>,<정석(貞石)-부곡(部曲)>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 경계에 불(乀)자 모양으로 된 산맥을 조선조(朝鮮朝) 때에는 <정령(井嶺)산맥>이
라고 칭하였고, 이는 오늘날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1336m)이 바로 정령(井嶺)이고, 이를 중심으로 정령회하(井嶺
回河)가 우측의 박작호(泊汋湖)를 끼고 ‘일종의 인터체인지(interchage)가 달린 해자(垓字)’로써 두르고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양계만리도’에는
① 오늘날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가 각기 이런(↙ㄱΓ↘)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모두 절취(截取: cut off)
하는 “위엄(威嚴)을 ‘멀리 보내는(=원(遠)) 보(堡)’”라는 의미에서 위원보(威遠堡)가 설치되어 있고, <개원(開元)>바로
북(北)쪽에 이 위원보(威遠堡)에서 남(南)쪽으로 나오는 갑문(閘門)이 있었음을 위원보문(威遠堡門)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위원보(威遠堡)가 도대체 “정령(井嶺)산맥의 서(西)쪽으로 흐르는 여러 강(江)들 가운데, 어떤 강(江)
까지 절취(截取: cut off)해서 만들어져 있는가?”는 것도 알수 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② ‘양계만리도’를 보면, (1)철령위(鐵岺衛)에서 바로 북쪽의 산(山)넘어 서류(西流)하는 강이 하나있고,
(2) 그 북(北), 한글의 오(ㅗ)자처럼 합류하지만, 시초(始初)에는 꺽쇠(<)모양 합류해서 - 즉 이런(ㅗ--<)모양으로
강들을 합류시켜서 서류(西流)하다가 서남류(西南流)하는 강(江)이 그려져 있는데, 이 강이 오(ㅗ)자로 갈라전
우상(右上)(↗)에 개원(開元)이 있는데, 그 우측 어깨에 어떤 산(山)이 있음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2)의 강이 결과적으로 이런(↙--↓--<)모양으로 흐르는 강이 바로 이통하(伊通河)와 이어진 동요하(東遼河)인
것입니다.
즉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수계지도’에서 동요하(東遼河)가 이런(∩)모양으로 돌아나가고, 또 이통하(伊通河)가 람다
(Γ)모양으로 돌아나가기 때문에, 이 두 강(江)을 절취(截取: cut off)해서 위원보(威遠堡)를 만든 것에 응축(凝縮)시켜
- 보(堡)가 형성하는 호수(湖水)를 지도에 표기하지 않으면 결국 동요하(東遼河)가 이런(∩)모양으로 진행하는 방향인
서북향(西北向)(↖)임에 비해서 람다(Γ)모양으로 꺽어서 동북향(東北向)(↗)하는 것을 직각을 이루어서 결국 한글의
오(ㅗ)자처럼 두 강이 합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중요(*)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보(堡)에 의해 형성된 호수(湖水)가 원래 없는 것처럼 지도(地圖)에 그리는 것은
‘조선조(朝鮮朝) 사람들이 지도를 그릴 때 자주 쓰는 트릭(tric)’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런(--<)모양으로 합수되는 것은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수계치도를 보면,
동요하(東遼河)가 이런(∩)모양으로 돌아가는 오른쪽 기점(起點)에 <이룡산(二龍山)-수고(水庫)>가 있고, 이 ‘이룡산
(二龍山) 수고(水庫)’를 향해서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의 경계를 따라서 북류(北流)(↑)하는 동요하-원류가 있고,
<요원(遼遠)시(市)>남안(南岸)를 경과해서 서북류(西北流)(↖)해서 들어가는 원류가 있기 때문에 이 두 원류를
합치면 이런(↑↖)모양이 되는 셈인데, 이는 지도(地圖)에서 꺽쇠(<)모양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계만리도’의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에서 “(길목해(吉木海)및 나단해(羅端海)에서) 나가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대해서는 정북(正北)을 진짜 정북(正北)으로 그리지 않고, 연해주(沿海州)가 놓인 방향으로 틀어서 압록강
이나 두만강의 이름을 적용하여야한다.”고 이미 선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글의 오(ㅗ)자 처럼 만난 이통하(伊通河)(↑)와 동요하(東遼河)(←)는 이통하(伊通河)는 ‘별(丿)자처럼
놓인 연해주(沿海州)가 놓인 방향’으로 틀어야하기 때문에, 그 흐름을 동북향(東北向)(↗)으로 바꿔야하고, 동요하
(東遼河)는 그 흐름이 서류(西流)(←)로 그려진 것에서 서북향(西北向)(↖)으로 바뀌어야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양계만리도’ 안에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로 그려진 것은 그 흐름을 <동요하(東遼河)(↖)
와 이통하(伊通河)(↗)>로 바뀌어야하므로, 결국 오늘날의 흐름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 동요하의 흐름이 이런(↙--ㅗ--<) 모양으로 되어 이음을 추측할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그런데, ‘양계만리도’에서 <개원(開元)>이 있는 위치는 이통하(伊通河)가 뻗어나가는 곳의 분기점 오(ㅗ)자 모양의
우상(右上)에 그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원(開元)>이란 도시가 결국 위원보(威遠堡) 속에 있게 되는가?”하는 추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朝鮮人)들이 그리는 지도(地圖)’에 자주 사용되는 트릭(tric)을 전혀 모르는 독도(讀圖)방법인
것입니다.
지도(地圖)에는 일반적으로 “이 지도(地圖)안에 표기(表記)된 기호와 그림 등을 어찌 읽어야하는가?” 하는 범례
(凡例)를 지도 한 ‘귀퉁이’에 따로 칸을 만들어서 나타내는 것이 세계적으로 공통됩니다.
그러나 ‘조선인(朝鮮人)이 그린 지도’에서는 이 범례(凡例)에 관한 내용이 태연(泰然)스럽게 들어가서 지도(地圖)
안의 문자(文字)나 그림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위원보(威遠堡)가 있게 되면, 이 위원보(威遠堡) 안에 고인 물(水)이 밖으로 나오게 하는 갑문(閘門)이 있게 마련인데,
그 갑문을 ‘양계만리도’에서는 <위원보문(威遠堡門)>으로 나타내고, 그 남(南)쪽에 <개원(開元)>이 있음을 지도에
그려놓고 있는 것은 위원보(威遠堡)의 여러 갑문(閘門) 가운데 남문(南門)의 남(南)쪽에 <개원(開元)>이 있음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가 서로 오(ㅗ)자 모양으로 직각을 이루는 곳 우상(右上)에 <개원(開元)>
이 있다면, 이는 이런 ( ↙ㄱΓ↗)식으로 흐르는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를 절취(截取: cut off)하여 위원보
(威遠堡)를 만들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개원(開元)>이란 도시는 결국 위원보(威遠堡) 속에 있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도 내부(內部)’에그려져 있는 것은 일종의 범례(凡例)이 불과한 것입니다.
<개원(開元)>을 개원(開原)이라고도 표기하는데, <개원(開原)>의 의미는 “언덕(=원(原))을 연다.(=개(開))”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위원보(威遠堡)로 둘러쌓인 곳 내부는 모두가 호수(湖水)도써 물(水)로 꽉차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운데’에
언덕을 연 - 다시 말하면 개원(開原)한 땅으로 있었음을 ‘양계만리도’는 범례(凡例)로써 말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양계만리도’는 전체적으로 이런(↙--ㅗ--<) 모양으로 된 <동요하(東遼河)-이통하(伊通河)>바로 남(南)쪽에
이미 (1)로 구분지은 철령위(鐵嶺衛) 북(北)쪽의 산(山)을 넘어서 서류(西流)하는 강(江)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은 동요하(東遼河)가 ①요녕성과 길림성 경계에서 북류(北流)(↑)하고, <요원(遼遠)시(市)>에서 서북류
(西北流)(↖)이 만나는(↑↖)곳을 지나서 (동(東)쪽으로) 동요하(東遼河)의 두 원류(源流)의 출발점과 같은 위치에서
서류(西流)하는 발원(發源)을 지닌 강이 “외줄기”로써 하나 더 그려져 있습니다.
이 강(江)은 ‘양계만리도’가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과 또 지도(地圖)내부에서 알목하(斡木河) 해구에 정북(正北)
이라고 기재(記載)한 의미 - 즉 “압록강과 두만강에 해당하는 강(江)”은 연해주(沿海州)가 별(丿)자로 놓인 방향에
따라서 오른쪽(↘)으로 눕혀야한다.”는 지침을 적용시키고 보면, 그려져 있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지만, 이는
이런(←-乀) 모양으로 바뀌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에서 정령(井嶺)산맥 서록(西麓)쪽에서 이런(←-乀) 모양으로 흐르는
것은 청하(淸河)밖에 없습니다.
(*)참고: 물론 청하(淸河)의 지류(支流)가 수평(水平)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지류(支流)인지라 생략한 것을 감안한
것입니다.(*)
또 철령위(鐵嶺衛) 북(北)쪽의 산(山)이라는 것은 ‘솟대님의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 지도’를 보면,
오늘날 철령시(鐵岭市)쪽으로 흐르는 시하(柴河)와 청하(淸河) 사이에 어떤 산(山)이 ‘갈색’으로 표현되고 있고,
이 산(山)의 남록(南麓)에서 발원(發源)해서 짧게 서류(西流)하는 하천(河川)이 있습니다. 이를 미군사지도(1950년대)
를 통해서 찾아보면, 산(山)의 이름은 왜도산(歪桃山 : 666m)이고, 이 산(山)의 남록(南麓)을 통해서 서류(西流)하는
강은 사하(沙河)입니다.
(*)참고: 사하(沙河)라는 수명(水名)은 자주 발견이 됩니다.(*)
따라서 <철령위(鐵嶺衛) 북(北)쪽의 산(山)>이 왜도산(歪桃山 : 666m)이고, 이 산(山)의 남록(南麓)에서 사하(沙河)가
서류(西流)하면,
왜도산(歪桃山 : 666m) 북(北)쪽에서 이런(←-乀)모양으로 가는 강은 역시 청하(淸河)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아래 ①,②를 볼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수계 지도’
① 청하(淸河)본류가 이런(←-乀)모양으로 가는 청하(淸河)
② 철령시(鐵岭市)쪽으로 흐르는 시하(柴河)와 청하(淸河) 사이에 왜도산(歪桃山 : 666m)에서 ‘짧게 서류(西流)’하는
사하(沙河)를 볼수 있는 곳.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따라서 ‘양계만리도’에 그려진 수계(水系)와 오늘날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를 대비(對比)해보면, 결국 청하
(淸河) 북(北)쪽에 있는 구하(寇河)는 그 상류가 위원보(威遠堡)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음을 눈치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위원보(威遠堡)에 구하(寇河) 원류(源流)가 절취(截取: cut off)되었기에 구하(寇河)의 물줄기를 지도(地圖)에 그리지
않았다.”는 ‘양계만리도’의 실질적의미를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와 연결해서 고려해보면, 구하(寇河)와
서로 등지면서 흐르는 강(江)인 사하(沙河)도 - 이처럼 사하(沙河)란 강은 양계만리도 상(上)에 자주 등장합니다.
- 결국 위원보(威遠堡)가 절취(截取: cut off)하는 강에 속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래 ‘솟대님의 만주(滿洲) 수계(水系)지도’를 보면, 사하(沙河)의 동(東)쪽에서 남류(南流)하는 대사하
(大沙河)가 이통하(伊通河)가 북류(北流)하는 남단(南端)과 서로 등(背)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가 ‘한글의 오(ㅗ)자처럼’ 하나의 강으로 위원보(威遠堡)에 의해서 하나의
강으로 합해진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위원보(威遠堡)는 이통하(伊通河)와 남북(南北)으로 등(背)지면서 흐르는 이
대사하(大沙河)를 절취(截取: cut off)해서 수원(水源)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 구하(寇河)와 서로 등(背)지는 사하(沙河)가 위원보(威遠堡)에 절취(截取: cut off)되어 ‘위원보(威遠堡)’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는 ‘솟대님의 만주(滿洲) 수계(水系)지도’
(*)참고: 사하(沙河)의 수명(水名)이 적혀있음(*)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그런데, ‘양계만리도’에는 ‘위원보문(威遠堡門)’ 남(南)쪽에 <개원(開元)>을 그림으로써 개원(開元)이 위원보(威遠堡)
가 둘러쌓인 호수(湖水)의 ‘남(南)쪽 갑문(閘門)’ 밑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 <개원(開元)>의 우상(右上)(↗)
어깨에 어떤 산(山)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산(山)은 미군사지도(1950년대)에 의해서 찾아보면, 차도령(車道岺: 800m)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솟대님의 만주(滿洲)수계(水系)지도’를 보면, 사하(沙河)의 남(南)쪽에서 채룡만(寨龍灣)쪽으로 흘러들어
가는 매하(梅河)가 <매하구시(梅河口市)>를 지나서 동북류(東北流)하는데, 이런 매하(梅河)의 남(南)쪽을 받쳐주는
(山)들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출개타정자산(秫稭垜頂子山: 844m)과 차도령(車道岺: 800m)인 것입니다.
(*) 매하(梅河) 남(南)쪽의 출개타정자산(秫稭垜頂子山: 844m)과 차도령(車道岺: 800m)이 산맥으로 표현된 ‘솟대님의
만주(滿洲)수계(水系)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결국 이러한 이러한 이야기는 ‘양계만리도’에서 조선(朝鮮)사람만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린 지도(地圖)에서 위원보
(威遠堡)가 ① 동요하(東遼河) ②이통하(伊通河) ③구하(寇河) ④사하(沙河) ⑤매하(梅河) ⑥ 대사하(大沙河)의 원류
(源流)를 절취(截取: cut off)해서 매우 큰 호수(湖水)를 형성하되, 그 중앙부분은 ‘언덕이 그대로 열려있는’
- 즉 개원(開原)이 된 형태로 있음을 트릭(Tric)을 부려서 묘사함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아래 ‘양계만리도’를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동요하(東遼河)를 이런(↙--ㅗ--<) 모양으로 그림으로써 이통하(伊通河)가 위원보(威遠堡)속에 절취되었음을
그려놓았고,
[2] ‘<개원(開元)>=개원(開原)’이란 ‘지도(地圖)내부에 있는 범례(凡例)’를 통해서 위원보(威遠堡)로 둘러쌓인 호수
(湖水) 가운데는 ‘호수(湖水)가 아니라’ <열린 언덕(=개원(開原))>임을 밝혔고,
[3] 이런 동요하(東遼河) 바로 남(南)쪽에 철령위(鐵嶺衛) 북(北)쪽의 산(山)인 왜도산(歪桃山 : 666m) 넘어서 강이
정령(井嶺)산맥에서 길게 (←---) 서류(西流)하는 것을 그렸는데, 이는 지도의 <우하단(右下端)서문>에서 방향을
45도 정도로 트는 것을 고려하면 결국 이런 (←--乀)모양으로 흐르는 청하(淸河)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 청하(淸河)
북쪽의 강인 구하(寇河)와 등(背)지면서 흐르는 사하(沙河)가 모두 모두 위원보(威遠堡)에 절취(截取)됨은 물론,
이통하(伊通河)와 등지면서 남류하는 대사하(大沙河)까지 절취(截取)됨을 밝혔고,
[4] 개원(開元)의 우상 어깨에 오늘날 출개타정자산(秫稭垜頂子山: 844m)과 차도령(車道岺: 800m)을 그려 넣음으로써
매하(梅河)까지도 절취(截取)되어서 위원보(威遠堡)가 형성됨을 밝힌 것입니다.
(*) 위 [1],[2],[3], [4]를 살필 수 있는 ‘양계만리도’를 볼 수 있는 곳
(*)참고 : 향고도님이 제공한 30% 축약(縮約)한 지도가 편리한데, 이 ‘30% 축약(縮約)한 지도’를 클릭(clic)하면 ‘위원
보문(威遠堡門)과 개원(開元)’이 뜨고, 그 남쪽의 수계(水系)의 모습은 따로 ‘그 아래’로 따로 클릭(clic)해야 뜨기
때문에, 연관된 모습을 통합해 내기가 약간 힘이 듭니다. 연관된 지도(地圖)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원(開元)
과 철령위(鐵嶺衛)를 연결하는 ‘붉은 선(線)’인 육로(陸路)표시를 중심으로 해서 서로 달리 뜨는 두 지도를 연결해서
파악하는 것이 요령(要領)이 됩니다. (*)
http://blog.daum.net/sabul358/13171237
이런 사실에서 알 수가 있는 사실은 ‘양계만리도’를 비롯해서 조선인(朝鮮人)이 만드 지도(地圖)의 특성은 비록 트릭
(Tric)과 비밀(秘密)-코드(code)가 있긴 하지만, 이 지도(地圖)는 기본적으로 ‘현실(現實)지리(地理)’를 잘 아는 사람
들이 ‘국가기밀’을 서로 보호하는 가운데, 가장 핵심적된 내용을 서로 전달(傳達)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원보(威遠堡)가 “도대체 어떤 강(江)들을 절취(截取)해서 보(堡)로 형성하고 있는지?”하는 것이 답답
하면, ‘조선인(朝鮮人)이 만든 지도’를 보면 가장 정확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에는 이런 지도 속의 트릭(Tric)과 비밀(秘密)-코드(code)에 대해서 일단 아는 사람이어야만 해독(解讀)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트릭(Tric)과 비밀(秘密)-코드(code)>라는 것도 조선(朝鮮)의 문물(文物)에 대해서 존경심을 품고,
조선인(朝鮮人)답게 생각하면 약간 난해(難解)하기는 하지만, 독도(讀圖)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는 것입니다.
(*)가령, 좌계의 경우, 조선(朝鮮)사람이 만든 지도(地圖)를 독도(讀圖)하는 방법을 따로 전수(傳授)받은 적이 없지만,
“왜 이런 식으로 그렸지?” “조선(朝鮮)사람이 그렸으니 조선인(朝鮮人)답게 생각해보자!”라고 애를 쓰다가 결국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위원보(威遠堡)가 그려진 또 다른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이는 ‘18C 초 숙종
(肅宗)때의 조선지도’를 의미합니다. - 입니다.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에서는
[1] 동요하(東遼河)가 이런(∩)으로 돌아완 원류(源流)쪽에 2개의 산(山)이 이런(▲乀▲)식으로 되어 있는 사이에 마치
장성(長城)과 같이 폭(幅)이 좁은 석벽보(石壁堡)가 불(乀)자 모양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실 이
‘폭(幅)이 좁은 석벽보(石壁堡)’가 바로 위원보(威遠堡)인 것입니다.
이는 ‘조선(朝鮮)사람이 그린 지도’에 자주 나오는 트릭(Tric)으로써 가운데 호수(湖水)를 두고 그 주변에 산상(山上)에
설쳐한 제방(堤防)인 산상보(山上堡)가 있고, 이 산상보(山上堡) 위에 전차(戰車)가 다닐 수 있는 장성(長城)이 있을
경우, 이를 단순한 장성(長城)으로 그린 경우인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에는 위원보(威遠堡)가 장성(長城)으로 간단히 그려져 있는데, 문제는 ,
이런(▲乀▲)으로 된 2개의 산 중에 서(西)쪽에 있는 산(山) 밑에 <개원(開元)>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위원보(威遠堡)가 서(西)쪽으로 나가는 문(門) -쉽게 말씀드려서 구하(寇河)의 원류(源流)가 발생하는 쪽에 어떤
산(山)이 있고, 그 남(南)쪽에 <개원(開元)>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산(山)을 미군사지도로 찾아보면, 오룡산(烏龍山: 636m)으로 나옵니다.
이 오룡산(烏龍山:636m) 남록(南麓)에 있는 개원(開元)은 분명, 차도령(車道岺: 800m) 남록(南麓)에 있는 개원(開元)
과는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개원(開元)은 본래 2 곳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룡산(烏龍山:636m) 남록(南麓)에 있는 개원(開元)은 위원보(威遠堡)의 서(西)쪽에 있기 때문에, <서(西)-개원(開元)>
으로 이름할 수가 있고, 또 차도령(車道岺: 800m) 남록(南麓)에 있는 개원(開元)은 위원보(威遠堡)의 남(南)쪽에 있기
때문에, <남(南)-개원(開元)>으로 이름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2개의 개원(開元)이 있었고, 이 개원(開元)과 위원보(威遠堡)를 바탕으로 하는 수로(水路)에 대한 인식을 가지는
것은 ‘양계만리도’를 독도(讀圖)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
지도 좌상단(左上端)에 조선과 여진의 관계에 대한 긴 서문(序文)이 적혀 있는데, 그곳에는 생여진(生女眞)이 조선
(朝鮮)의 개원(開元)을 비롯한 몇 개의 전략적 요충지(要衝地)를 공격해서 점령(占領)하였고, 이런 ‘전략적 요충지’를
바탕으로 한 동안 만주(滿洲)에 군정(軍政)이 실시된 시기가 있었음을 담담하게 피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각화도(覺華島)에서 수로(水路)를 통해 천하(天下)로 부터 조공(朝貢)을 받는다.”라는 주기(注記)가 있기
때문에,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朝鮮) 역사와는 전혀 내용이 달라서 이 ‘양계만리도’가 공개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3] 아무튼,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에는 위원보(威遠堡)가 동서(東西)의 2개의 산 사이로 불(乀)자로 치달리고 있기
때문에, 위원보(威遠堡)가 채룡만(寨龍灣)쪽으로 흘러나가는 대사하(大沙河)까지도 절취(截取: cut off)해서 보(堡)가
설치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 위원보(威遠堡)의 동(東)쪽에 그려진 산(山)이 도대체 어떤 산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산(山)을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통해서 찾아보면, 광동자산(磺洞子山: 873m)로 나옵니다.
‘광동자산’의 광(礦)은 ‘숫돌’이고, 동(洞)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대사하(大沙河) 쪽으로 나가는 갑문
(閘門)을 열여서 위원보(威遠堡)에 고인 물(水)을 때로는 모두 다 방류(放流)하고, 다시 채워 넣는 일을 반복(反復)
하는 것이 마치 칼이나 낫을 숫돌에다 갈듯이 이 골짜기(=동(洞)‘를 갈아대는 듯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숫돌로 골짜기를 갈아대는 산(山)”이란 의미의 산명(山名)이 붙게 된 것입니다.
(*) 위 [1],[2],[3]을 느낄 수 있는 오룡산(烏龍山:636m)과 광동자산(磺洞子山: 873m) 사이에 위원보(威遠堡)갈 설치
되어서 채룡만(寨龍灣)쪽으로 물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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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위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는 채룡만(寨龍灣)의 북안(北岸)에 산(山)에 동루(東樓)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위원보(威遠堡)의 물이 채룡만(寨龍灣)쪽으로 흘렀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의 지도(地圖)를 ‘솟대 선생’께서는 이 싸이트(site)에 “18C 숙종초 '조선지도'의
삼분하: 조선전기 만주강역 재조정되야 하나? (完)”이라는 제목 아래 글을 쓰면서 소개(紹介)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 글 내용은 “조선의 영토가 만주(滿洲) 전반에 걸쳐있기 때문에,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써,
좌계에게 큰 각성(覺醒)을 준 글입니다. 일독(一讀)을 권합니다. (*)
그리고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에 대한 해설지도로써 ‘만주 수계(水系)지도’를 올리셨던 것입니다.
이 ‘솟대선생’의 해설지도를 보면,
[1] 남류(南流)하는 대사하(大沙河) 동(東)쪽에 반석시(磐石市)가 있고 그 서북(西北)(↖)쪽에 산(山)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광동자산(磺洞子山: 873m)인 것입니다.
[2] 또, 솟대선생은 오늘날 송화호(松花湖)인 채룡만(寨龍灣)을 바라보는 동루(東樓)를 기재함으로써 위원보
(威遠堡)에서 흘러나온 물이 채룡만(寨龍灣)으로 들어갔음을 명료(明瞭)하게 하고 있습니다.
(*) 위 [1],[2] 내용을 알 수 있는 ‘솟대님의 해설 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결국 위원보(威遠堡)가 ① 동요하(東遼河) ②이통하(伊通河) ③구하(寇河) ④사하(沙河) ⑤매하(梅河) ⑥ 대사하
(大沙河)라는 6개 강을 절취(截取)하여서 매우 큰 보(堡)를 불(乀)자 방향으로 달리는 정령(井嶺)산맥의 서북단
(西北端)(↖)에 있었고, 또 정령회하(井嶺回河)가 이런 정령(井嶺)산맥의 동남단(東南端)(↘)쪽에 있는 것으로써
이 정령(井嶺)산맥 주변의 조선조(朝鮮朝) 때까지의 지리(地理)를 압축해서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령(井嶺)산맥의 서북단(西北端)과 동남단(東南端)을 연결하는 수로(水路)가 어찌 설치되어 있는가?”를
규명해야만 “왜 압록강이 오늘날 대능하(大陵河) 주변의 의현(叉縣)에 있는 조선조(朝鮮朝) 의주(義州)에 까지 ‘바다’
가 아닌 육지(陸地)에 놓인 수로(水路)로써 연결되는지?”를 밝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계만리도’ 씨리즈(series)를 쓰게 된 이유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정령회하(井嶺回河)와 위원보(威遠堡)를 연결하는 수로(水路)가 ‘조선 사람이 그린 지도’에는 2가지 종류로
있었음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바로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1750년대 초)라는 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정령회하(井嶺回河)와 위원보(威遠堡)를 연결하는 수로가 ①위원하(威遠河)와 ②파저강(波猪江)으로 2
강(江)이 있었음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1] 즉, 이 지도에는 <서(西)-개원(開元)>에서 동남향(東南向)하는 위원보(威遠堡)가 불(乀)자로 놓여진 정령(井嶺)
산맥 서록(西麓)을 따라서 서남류(西南流)혹은 서류(西流)하는 강을 절취(截取)하는 것이 7개가 그려져 있고,
완전(完全)히 차단(遮斷)한 것이 1개로 되어 있어서 총 8개가 서류(西流), 혹은 서남류(西南流)하고 있는데,
이런 8개의 강을 남북(南北)으로 관통을 하는 성벽(城壁)이 곤(丨)자 처럼 쳐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장성(長城)같은 성벽(城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니다.
이 성벽(城壁)은 ‘조선 사람들이 그린 지도’에 애용(愛用)하는 방법 - 즉 자주 사용하는 방법인데, 장성(長城)같은
성벽(城壁)이 의미하는 것은 수로(水路) 외곽(外廓)에 산상보(山上堡)를 쳐주고 그 위에 전차(戰車)및 화차(火車)가
-이는 오늘날 ‘탱크(tank)’와 같이 포신(砲身)을 360도 회전시킬 수 있는 <화포(火砲)-차(車)>를 뜻합니다.
-다닐 수 있는 돌(石)로된 포장도로(鋪裝道路)가 있고, 그 연도변(沿道邊)에 두 줄로 장성(長城)을 쌓았을 경우,
①수로(水路) 혹은 호수(湖水) 외곽의 제방(堤防) ②제방 위의 돌(石)을 깐 포장도로(鋪裝道路)와 ③ 한 줄의 장성
(長城)을 생략(省略)하고, 오직 한 줄의 장성(長城)으로써 이 모든 시설(施設)을 대표해서 그릴 때 나타나는 <그림>
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조선여진분계도’에 그려진 곤(丨)자 모양으로 된 장성(長城)은 위원보(威遠堡)의 서문(西門)을 열고 흘러
나오는 위원하(威遠河)의 시발이 오늘날 구하(寇河)로 해서 흐르기 때문에, 위원보(威遠堡)에서 나와서 문자 그대로
“위엄(威嚴)을 멀리 보내는(=원(遠)) 하천”으로써 포석하(蒲石河)와 연결되어 흐르는 <위원하(威遠河)>를 그려놓은
것입니다.
[2] 이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1750년대 초)에서는 오늘날 혼강(渾江)인 파저강(波猪江)이 구랑개동(九郞
价洞)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ㅗ 조선조(朝鮮朝)때 <개(价)>란 용어는 운하학(運河學)의 전문
용어로써 이는 마치 밀물과 썰물이 들락거리는 ‘갯벌’과 같이 물이 서(耳亇)를 넘어서 무척 먼 거리를 갈 때에 이를
일반적인 서(耳亇)와 구분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의 구랑(九郞)은 ‘구렁이’의 이두(吏讀)표현으로써 정령(井嶺)을 구렁이 담 넘듯이 <개(价)>를 통해서 연결
됨을 의미합니다.
즉 구랑개동(九郞价洞)은 “갯벌 골짜기(=동(洞)가 정령(井嶺)산맥 쪽으로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서 (=구랑(九郞))) 결국
위원보(威遠堡)로 연결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1]은 불(乀)자 모양으로 된 정령(井嶺)산맥의 서록(西麓)에 위원하(威遠河)가 흘러서 결국 <동요하(東遼河)-위원보
(威遠堡)-위원하(威遠河)-정령회하(井嶺回河)-포석하(蒲石河)-오늘날의 압록강>으로 연결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2]는 이와는 달리 분수령(分水岺)이 되는 정령(井嶺)산맥 정상(頂上)을 꿰면서 위원보(威遠堡)-파저강(波猪江)-
정령회하(井嶺回河)-혼강(渾江)으로 강(江)이 흘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위 [1], [2]를 볼 수 있는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1750년대 초)
http://blog.daum.net/sabul358/13708581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1750년대 초) 역시 ‘조선인(朝鮮人)이 그린 지도’답게 특유(特有)의 트릭(tric)과 비밀
(秘密)-코드(code)가 있고, 또 이 지도(地圖) 역시, 이미 현장 지리를 아는 사람에게 ‘국가기밀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으면서 전달하는 방법’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독도(讀圖)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령회하(井嶺回河)와 위원보(威遠堡)를 연결하는 수로(水路)가 정령(井嶺)산맥 서록(西麓)에는 위원하(威遠河)가
흐르고, 정상(頂上)-능선(稜線) 쪽에서는 파저강(波猪江)이 흘렀음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여진분계도’는 장성(長城)모양이 서류(西流)하는 8개의 강을 꿰고 곤(丨)자 모양으로 된 장성(長城)속에
“수로(水路)가 은익(隱匿)된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놀랍게도 정령회하(井嶺回河)와 위원보(威遠堡)에 수로(水路)
가 노출(露出)된 상태로 연결하고 있는 모양을 그대로 뚜렷하게 그려낸 ‘조선인(朝鮮人)이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최초, 최고의 세계지도’로써 유명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입니다.
이 지도를 제공한 ‘향고도 님’께서 <네번째 지도>를 특별히 강조하고 계신데, 이 <네번 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보면,
[1] 오늘날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가 ‘하나’로 연결되어서 만주(滿洲)쪽으로 수로(水路)를 통해서 선박을
타고 들어갈 수 있음을 뚜렷이 그려져 있습니다.
[2] 또 오늘날의 압록강이 정령(井嶺)산맥 정상(頂上)-능선(稜線)을 통해서 동요하(東遼河)와 연결되어 있는 파저강
(波猪江)이 뚜렷이 나타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중요(*)
‘안타까운 것’은 이 지도(地圖)가 ‘클릭(clic)해서 확대를 하였을 때’에, 지도(地圖) 속에 글씨며 주기(注記)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모습으로 확대가 되지 않아서, 정령(井嶺)산맥 쪽에서 이런(⊃)모양으로 그려진 강(江)이 “정령
(井嶺)산맥 서록(西麓)의 위원하(威遠河)인지? 아니면 정상(頂上)-능선(稜線)에 있는 파저강(波猪江)인지?”를 지명
(地名)을 통해서 명확하게 고증(考證)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동요하(東遼河)와 오늘날의 압록강을 연결하는 이 강이 위원하(威遠河)가 아니라, 파저강(波猪江)임을
확신하는 까닭이 2가지가 있습니다.
(1)첫째는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를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 ‘위원보(威遠堡)’가 있는 곳 만치의 거리를
두고 남(南)쪽에서 동요하(東遼河)와 오늘날의 압록강을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위원하(威遠河)가 아니라 파저강(波猪江)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둘째는 이 세계지도에 오늘날 압록강의 해구(海口)쪽으로 가는 고림천(古臨川)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수차 말씀드린바와 갈이 고림천(古臨川)은 백마성(白馬城)과 망일산(望日山) 사이에 갑문을 쳐서 수위(水位)가
올라가게 하여서 <서(耳亇)-곶(串)>의 ‘깔대기 판’을 활용해서 <학현(鶴峴)-서(耳亇)>를 넘어서 왕강(王江)수구
(水口)로 나가서 그 맞은 편에 있는 포석하(蒲石河)로 해서 위원하(威遠河)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네번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는 고림천(古臨川)에서 넘는 <학현(鶴峴)
-서(耳亇)>와 왕강(王江)수구(水口)가 있는 위치에서 훨씬 동(東)쪽에서 오늘날 압록강과 동요하(東遼河)가 연결된
것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동요하(東遼河)와 오늘날의 압록강(鴨綠江)을 연결하는 것이 위원하(威遠河)가 아니라 오늘날의 혼강(渾江)인
파저강(波猪江)임을 의미하는 증좌(證左)인 것입니다.
(*) 위 [1],[2],[3]-(1),(2)를 살필 수 있는 <네번 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향고도 님 제공>
http://blog.daum.net/sabul358/18198435
향고도 선생은 이 <네번 째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 -이를 소장(所藏)하고 있는 본광사
(本光寺)의 이름을 따서 본광사-본(本光寺-本)으로 칭합니다.- 등장하는 지명(地名)이 사용된 시기(時期)를 고증
(考證)해서 이 지도 제작시기를 1513-1549년, 1567-1592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1592년)이전(以前)에 이 지도가 제작된 것입니다.
이 지도(地圖)는 ‘조선인(朝鮮人)이 만든 지도’가 “수로(水路)가 어찌 연결되었는지?”를 ‘국가기밀’로써 은익(隱匿)
있기 때문에, 지도의 트릭(tric)과 비밀(秘密)-코드(code)를 해독(解讀)해야만 비로서 알수 있게 한 것과는 달리,
누구나 보면 “이 강과 이 강은 서로 연결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들어나게’ ①동요하(東遼河)-이통하(伊通河)
-송화강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 ②동요하(東遼河)-위원보(威遠堡)-파저강(波猪江)-혼강(渾江)-오늘날의 압록강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2개의 연결된 강(江)은 갑문과 제방(堤防)을 활용해야만 비로소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강(江)’이지 절대로
자연 상태에서는 연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정령(井嶺)산맥의 서북단(西北端)의 위원보(威遠堡)와 동남단(東南端)의 정령회하(井嶺回河)를 연결하는
강이 ①위원하(威遠河)와 ②파저강(波猪江)으로 2개가 이런(乀乀)모양으로 병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강을 연결하는 동남단(東南端)의 정령회하(井嶺回河)에 대해서는 상세한 검토를 했지만 위원보
(威遠堡)는 ‘양계만리도’의 비밀-코드(code)를 통해서 위원보(威遠堡)가 ① 동요하(東遼河) ②이통하(伊通河) ③구하
(寇河) ④사하(沙河) ⑤매하(梅河) ⑥ 대사하(大沙河)라는 6개 강을 절취(截取)해서 만들어진 호수(湖水)이되, 가운
데가 물(水)이 가득 채워진 형태가 아니라, ‘언덕을 연’ 즉 개원(開原)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인 것
입니다.
따라서 이 위원보(威遠堡)의 구조(構造)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6개의 강(江)을 절취하게 되면, 호수(湖水)가 형성되게 되는데, 이 위원보(威遠堡) 속에 있는 호수를 “무엇
이라고 칭(稱)해야 하는가?”부터 검토하기로 합니다.
이는 완목호(腕目湖)라고 지칭하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왜냐?
동요하(東遼河)가 이런 (↙ㄱ)모양으로 돌아나가고 또 이통하(伊通河)가 이런(Γ↗)식으로 돌아나가는 외곽에 보(堡)
를 쌓게 되면, 결국 한자(漢字)의 <건(巾)>자 비슷한모양이 됩니다.
즉 동요하(東遼河)는 경(冂)자 모양이 되고, 여기에 곤(丨)자 모양으로 나가는 이통하(伊通河) 우측에 보(堡)를 쳐주기
때문에, 고인 물(水)은 동요하(東遼河)와 이어지게 되어서 결국 곤(丨)자 모양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건(巾)자 모양은 ‘눈썹’처럼 생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래 ‘솟대님의 만주(滿洲) 수계(水系)지도’를 보게 되면, 이런 ‘눈썹(巾))’모양의 밑에 위원보(威遠堡)에 절취
되는 강이 <눈 목(目)자(字)>형태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① 즉 동요하(東遼河)가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 경계로 북류하고 요원시(遼遠市)에서 서북류하는 이런(↑↖) 모양을
람다(Γ)로 보고, 대사하(大沙河)가 우측의 위원보(威遠堡)에 의해 남류(南流)하는 곤(丨)자 모양을 합치면 (Γ+丨=冂)이
되어 경(冂)자 모양이 됩니다.
② 그런데, 이런 경(冂)자 모양을 이루는 동요하(東遼河) 원류(源流)와 대사하(大沙河) 원류(源流) ‘사이’에 북(北)쪽
에서 사하(沙河)가 가로지르고 있고, 남(南)쪽에서 매하(梅河)가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이 두 하천(河川)이 <이(二)>
비슷한 모양을 하게 됩니다.
[경(冂)+이(二)=목(目)]의 형태를 이루기 때문에 결국 ‘눈 목(目)’자가 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이런 눈(目)의 중간 - 즉 사하(沙河)가 있는 곳과 등(背)진 방향으로 구하(寇河)가 나가기 때문에 이 구하
(寇河)는 ‘눈빛(=안광(眼光)’ 혹은 ‘눈총’이 뿜어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위 ①, ②, ③의 모양을 그릴 수 있는 ‘솟대님의 만주(滿洲) 수계(水系)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즉 위원보(威遠堡) 내부(內部)에서 하천(河川)이 흐르는 모습은 마치 ‘눈썹(=건(巾))’ 아래에 눈(目)을 뜬 형국(形局)
에서 수위(水位)가 높아지면, ‘눈빛’이 구하(寇河)쪽으로 나가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① 이 구하(寇河)(←)가 나가는 방향 이외에도 ‘눈빛’이 나가는 것은 ② 동요하(東遼河)(↖)와 ③이통하(伊通河)
(↗), ④또 대사하(大沙河)(乀→), ④또 위원보(威遠堡)의 남문(南門)을 통해서 파저강(波猪江)(↓)으로 나가는 것이
있기 때문에 ‘눈빛’은 총 5개의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원보(威遠堡)를 둘러쌓인 호수(湖水)를 ‘위원호(威遠湖)’로 부르지 않고, <완목호(腕目湖)>로 칭하는 것이
합당한 것은 위원보(威遠堡) 내부에 흐르는 수류(水流)의 모양이 “눈썹(=건(巾))아래 목(目)자처럼 생긴 수로(水路)”
가 5방향으로 ‘눈빛’을 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눈 목(目)>자 앞에 “팔뚝”을 뜻하는 <완(腕)>자를 덧붙여야하는가?
이는 ‘양계만리도’의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에서 조선의 지형(地形)을 논하는 감여가(堪輿家)의-풍수지리학을
뜻합니다. -정론(正論)으로 ‘하늘에서 하강한 여신(女神)’께서 오늘날 요동반도가 팔을 구부려서 칠성닙자산 인 백두
산을 턱을 고이며 허리를 젖히면서 오늘날 동경(東京)쪽으로 돌아다보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요동반도가
’구부린 팔뚝‘에 해당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팔뚝에 있는 눈(目)’은 말(馬)과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내는 민족(民族)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말(馬)의 앞다리 정강이 부분에는 ‘흰 반점(斑點)’이 있는데, 이를 ‘다리(=각(脚))의 눈(目)’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달릴 때, 발(足)이 땅에 닿을 때 느끼는 진동(振動)을 이곳에서 감지해서 ‘달릴 때의 균형감각’을 잡기 때문입
니다.
(*)부탁의 말씀 - 이는 인터넷(internet)에서 말(馬) 조련사(調練師)가 쓴 글을 읽고, 알게된 사실인데, 인용하려고
검색을 해보았더니, 잘 찾아지질 않습니다. 혹 이 ‘말(馬) 다리의 눈(目)’에 대한 글을 발견하신 분은 꼭 ‘댓글’로서
글의 주소(住所)를 알려주길 바랍니다. (*)
특히 위원보(威遠堡)속의 완목호(腕目湖)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경병(炅兵)의 ‘저구루’ 신화(神話)와 관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경병(炅兵)은 ‘빛의 군대(軍隊)’라는 뜻인데, 이 군(軍)은 ①소도(蘇塗)와 순방(淳庬)체제를 지키는 육부군(六部
軍)과 ② 국가(國家)가 지닌 군사력을 ‘특정 위수(衛戍)사항’에 의해서만 발동되도록 맡긴 군사력 - 즉 ‘벅수 군’과
③ 패자(沛者), 이령(伊令)과 같은 재판관이 지휘하는 금관군(金官軍), ④ 천독(天毒)들이 화백회의에 주권(主權)행위
에 대한 명령을 전달하는 죽지군(竹旨軍)등을 총괄해서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이 경병(炅兵)이라는 말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삼한(三韓)편(篇)’에 나오는 말입니다.
관련된 원문(原文)을 옮기고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跪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冢,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 (삼한(三韓)사람들은 난함선(欄檻船)을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관계로) 그 풍속(風俗)이 (육지(陸地)생활만 하는
사람에 비해서) 기강(紀綱)이 적어서 엄격하지 않다. (소도(蘇塗)라는 호수(湖水)를 지닌 곳의) 국읍(國邑)들은 비록
주사(主帥)가 있어도, (선박(船舶)으로 구성된) 읍락(邑落)은 서로 섞이어 거주하게 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서로
다른 읍락(邑落)을 함부로 제어(制御)하지 못한다.
(이 선박(船舶)에 들어가면,) 꿇어 앉아 절하는 예의(禮儀)를 취하지 않는다. 거처(居處)하는 곳은 (대형 선박을 타고
몇개월동안 장거리 여행을 하게 되므로 선박 위에) 흙집(=토실(土室))을 짓고, 그 위에 야채(野菜)를 키우는 초옥
(草屋)을 만들어 거쳐하는데 형용(形容)이 무덤과 같은데, 들어가는 호유(戶牖)가-이는 ‘들어가는 입구’가 ‘게 다리
(=해족(蟹足))’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중국인(中國人)들이 칭하는 용어입니다.
호(戶)는 ‘지게문’을 뜻합니다. - 선박 ‘위’에 있다. (이는 선박위에서 ‘게 다리’가 선박 밖으로 이런(Γ ㄱ)모양으로 내려
짐을 의미합니다. 호유(戶牖)는 선박 위의 대형마차인 선(單)을 내려놓고, 선박이 이 위에 타려고 할 때 ‘유압(油壓)의
힘’으로 걸어가는 장치입니다.) 이 무덤과 같은 흙집 속에 가족(家族)별(別)로 있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들, 남자가
있는 곳, 여자가 있는 곳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선상(船上) 갑판 위의 풍경을 적은 곳이고, 선상(船上) 아래로 내려오면, 구별이 엄격하였음을 의미합니다.)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그 장례(葬禮)를 할 때에는 곽(槨)은 쓰지만, 관(棺.)은 쓰지 않으며, 소(牛)와 말(馬)을 직접 올라타는 것을 알지 못
하며 (이는 우마(牛馬)에 멍에목을 메워서 도는 힘을 유압(油壓)으로 선박의 동력(動力)에 활용하였음을 뜻합니다.)
우마(牛馬)가 죽으면(=진(盡)) 장례(葬禮)를 치른다.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곡옥(曲玉)과 같은) 영락(瓔珞)과 구슬 등을 재보(財寶)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가끔 옷에 꿰매서 달아 장식하기도
하고, 또 귀(耳)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金銀)과 비단은 진귀(珍貴)하게 여기지 않는다.
其人性彊勇, 魁頭露紒,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蹻蹋.
: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 위에 상투를 트는데,(= 괴두(魁頭)) ‘갓이나 건(巾)을 쓰지 않는’ 노계
(露紒)를 하는데, 그 모양이 경병(炅兵)과 같다. 옷은 베(=포(布))로 도포(道袍)로 입으며, 발은 발돋음 질(=교(蹻))하기
좋고, 공차기 좋은(=답(蹋)) 가죽신을 싣는다. .
위 내용에 보면, 삼한인(三韓人)들이 괴두노개(魁頭露紒) -즉 상투를 트는데, 갓이나 건(巾)을 쓰지 않는 노개(露紒)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주먹같은 뭉치 상투’ 즉 막상투를 함을 의미하는데, 이런 모양이
경병(炅兵)의 모습과 같다는 것은 삼한인(三韓人)들이 주로 경병(炅兵)의 - 이는 ‘빛의 군대’라는 의미입니다.
- 주(主)된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에, 뭉치상투를 하는 습속(習俗)이 경병(炅兵)의 ‘표준 상투’로써 굳어졌음을 의미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한인(漢人)은 물론 다른 여러 민족이나 종족들도 경병(炅兵)에 많이 참여를 했기 때문에, 경병
(炅兵)의 상투하면, 이 <삼한(三韓)전(傳)>을 읽는 사람들이 “아!! 그 상투”하고 알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육부군(六部軍), 벅수군, 죽지군(竹旨軍)등에 대한 총칭이 ‘빛(=경(炅)의 군대’라고 변하게 되었는가?
이는 마고(麻姑)여신과 관련된 저구루(者古魯) 신화에서-저구루(者古魯)는 여진(女眞)말로 ‘가슴 돛(=고슴 도치)’를
뜻합니다. - 유래(由來)된 것입니다.
‘양계만리도’에서 조선(朝鮮)의 지형이 ‘하늘에서 잠자리를 타고 내려온 여신(女神)의 모습’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 여신(女神)은 바로 마고(麻姑)여신입니다.
신화(神話)는 문명(文明)의 본질을 조명(照明)하는 장치이고, 또 세상이 세상으로 나타난 현상을 직관과 감성에서
직접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된 문명’에는 반드시 신화체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라진 우리 신화 복원(復元)작업’을 하다가 알게 된 것이 바로 여진인(女眞人)을 통해서 내려오는
마고(麻姑)여신과 마왕(魔王)과의 싸움을 기본 줄거리로 해서 설명하는 천궁대전(天宮大戰)입니다.
여기에는 마고(麻姑)여신이 ‘하늘 여신’이란 뜻의 ‘아부카허허’로 나옵니다.
‘사랑의 여신’인 것이지요. 그런데, 사랑의 여신이면서도 늘 마왕(魔王)과 싸워야만 하는 입장이 서러우셔서 늘 눈물
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이 변해서 고슴도치인 저구루(者古魯)여신으로 변했다는 것이지요.
‘아부카허허’의 피는 은하수(銀河水)로 되어 있으며, 그 가슴은 ‘허브’밭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왕(魔王)과 싸우시다가 지쳤을 때에는 원래 자신의 가슴 속 - 즉 ‘허브’ 밭에 와서 그 향기(香氣)를 맡으면서,
다시 원기(元氣)를 회복하셔서 마왕(魔王)과 계속 싸움을 하시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이 허브(herb)밭이 바로 소도(蘇塗)의 ‘푸른 언덕’인 청구(靑丘)를 신화(神話)로써 조명(照明)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허브 밭’을 지키는 여신(女神)이 바로 저구루(者古魯)였던 것이지요.
만주신화에서는 별, 태양과 달, 그리고 북두칠성이 자작나무(=화(樺))껍질로 꼬아진 그물에 체포가 되는 것으로 설명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고대인들은 자작나무를 신수(神樹)로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왕(魔王)이 이 자작나무를 훔쳐서 모든 우주의 태양과 달, 별, 북두칠성을 체포한 사건이 터집니다.
우주(宇宙)가 암흑으로 가득 차고, 지구(地球)에 빙하기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마고(麻姑)의 가슴 밭인 ‘허브’에도 빛이 안 들어 와서 ‘허브’는 하나, 둘 씩 말라죽어가게 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마왕(魔王)과 싸우다 상처(傷處)를 입어 이 ‘허브 밭’에서 잠을 자며 쉬시는 마고(麻姑) 즉 ‘아부카허허’께서는
회복할 수 있는 약(藥)들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저구루(者古魯)들 즉 고심도치들은 그 ‘까시 털’을 부지런히 움직여 하늘로 날아가서 멀고 먼 하늘 끝에 쳐진
자작나무 그물 틈새로 들어가 태양 빛, 달 빛, 북두칠성의 빛 등을 ‘찍어서’ 다시 날라 옵니다.
이윽고 돌아와서는 죽어가는 ‘허브’를 향해서 이 ‘빛 까시’를 발사하는 것이지요.
고슴도치가 ‘까시’가 없으니 꼭 ‘생쥐’ 모양이 될 것이 자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구루(者古魯)는 바로 마고(麻姑)
의 눈물에서 연원(淵源)이 된 것이기 때문에, 본신(本身) 자체가 ‘물’인 셈인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몸을 해체(解體)해서 죽어가는 ‘허브’에 물을 공급합니다.
이런 식으로 저구루(者古魯)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면서 사라져갔던 것입니다.
마고는 “내가 왜 사랑의 여신인데 악(惡)과 싸워야하는가?”하고 엄청 우셨던 모양입니다. 허브 밭의 모든 ‘허브’를
하나씩 살리는 저구루(者古魯)들이 그리 많이도 사라진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마왕(魔王)은 드디어 마고(麻姑)여신이 “어디서 쉬면서 원기(元氣)를 회복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빛 까시’를 움직이는 ‘가슴-돛’들이 열을 지어서 허브-밭으로 가니깐 ‘빛의 통로’가 생겨서 ‘마고
(麻姑)여신이 숨어서 원기(元氣)를 되찾는 장소(場所)’가 발견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마왕(魔王)은 수억(數億)의 마군(魔軍)을 이끌고 마고의 가슴인 ‘허브 밭’에 들이닥친 것이지요.
마고(麻姑)여신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주 드넓은 ‘허브밭’을 수색하다가, ‘함박 꽃’이 핀 지역을 만났습니다.
꽃이 하도 아름다워서 마군(魔軍)들은 이 ‘함박 꽃’을 각기 하나씩 꺽어 들면서 그 꽃 향기와 아름다움을 감상(感賞)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함박꽃’이 바로 ‘저구루(者古魯)’가 변신(變身)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함박꽃’이 표풍(飄風)속에 ‘꽃잎’을 털쳐내고, 고슴도치로 변하면서 남아있는 모든 ‘빛까시’를 마군(魔軍)의
눈(眼)에 발사(發射)하였던 것이지요.
이때 하늘의 빛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현상을 반복하였으며, 땅은 지진(地震)을 일으킬 정도로 켰던 것입니다.
문득 ‘함박꽃’이 고슴도치로 변하는 과정에서 꽃잎은 회오리 바람(=표풍(飄風))에 그야말로 산화(散花)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군(魔軍)들은 놀라서 “악~”하고 소리를 쳤고, 이 소리에 마고(麻姑)는 깨어나셔서 도망을 가셨고, 눈(眼)이 먼 마군
(魔軍)들은 ‘빛까시’를 뽑아냈는데, 그것이 땅에 떨어져서 ‘소나무’가 되었다는 신화입니다.
- 즉 육부군(六部軍), 벅수군, 죽지군(竹旨軍), 금관군(金官軍)들을 모두 총칭해서 ‘빛의 군대’로 불리우이 있었던 것
입니다. 그것은 이런 군(軍)에 가입한 사람들이 ‘천독(天毒)들께서 소도(蘇塗)의 청구(靑丘)에 와서’ 원래 자기 가슴
에 핀 향기(香氣)를 맡으면서 원기(元氣)를 되찾을 수 있도록 지키는 “저구루(者古魯)’로써의 소임(所任)을 다한다.”
는 의식에 투철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경병(炅兵)들은 자기자신을 ‘빛까시’를 발사하면서 사라지는 ‘저구루’로써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저구루(者古魯)’신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차돈(異次頓, 502/506 ~ 527)의 순교(殉敎)를 다룬 <원종흥법(原宗興法) 위촉멸신(猬髑滅身)>입니다.
여기서 위(猬)는 우리말 ‘잋’인 오늘날 ‘고슴 도치’를 뜻하고, 이 ‘고슴 돛’은 ‘가슴 돛’이 원래 어원(語源)입니다.
따라서 ‘이차돈(異次頓)’이란 말도 ‘잋-돈’ “돌아온 잋”의 뜻이기 때문에, 당시 전통종교인 마고(麻姑)신앙과 불교(佛敎)
가 갈등을 일으키자, 이차돈은 종교(宗敎)통합을 위해서 ‘저구루(者古魯)’로써 순사(殉死)하였음이 원문(原文)을 보면
잘 나타납니다.
순사하실 때의 모습을 설명한 글이 세상의 모든 빛이 피(血)속에 빨려 들어가 ‘빛까시’를 뿜는 모양이었기에 ‘흰 젖’
모양으로 보였으며, 또 ‘함박꽃잎’이 표풍(漂風)에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위원보(威遠堡)의 완목호(腕目湖)는 “마고(麻姑)여신의 팔뚝에 난 눈(眼)”이지만, 이곳은 ‘마고(麻姑)의
눈물’이 샘솟는 곳이어서 ‘저구루(者古魯)’의 고향인 것입니다.
이는 ‘양계만리도’를 독도(讀圖)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화적-코드(code)가 됩니다.
왜냐하면, 마고(麻姑)여신의 신체(身體)와 ‘조선(朝鮮)의 강역’을 일치시키고 있는 ‘양계만리도’ 우하단(右下端) 서문
(序文)은 결국 “요동반도 외곽으로 흘러나오는 동요하(東遼河)까지만, 조선의 영토인가?”하는 지레짐작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신(女神)이 입은 옷이 도포(道袍)이고, 완목호(腕目湖)에서 흘리신 눈물 - 즉 ‘저구루(者古魯)’가 서문
(西門)을 통해서 위원하(威遠河)로 나가되, 갑문을 열고서 계속하는 것이 이윽고 대능하(大陵河)까지 연결되면,
이는 도포(道袍)를 늘린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이 말하고 있는 “여신(女神)의 신체(身體)
와 같은 모습이다.”라는 것이 조선의 강역의 한계를 제약하는 모순이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朝鮮)이란 나라가 여진(女眞)과 더불어 세운 연합정부였고, 따라서 조선(朝鮮) 왕(王)의 왕권
(王權)을 자제하는 임내(任內)지역이 있는데, <여진(女眞)임내(任內)>와 <청구(靑邱)-임내(任內)>로 양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청구(靑邱)-임내(任內)>는 조선(朝鮮)과 여진(女眞)을 뛰어넘어 까마득한 고대(古代)로 부터 내려오는
내재율(內在律) - 즉 배달화백을 비롯한 고대의 제도에 의해서 조선과 여진 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계속 통합해 나
가는 것을 시행하고 있었고, 이런 청구조선(靑邱朝鮮)을 지키는 군대가 바로 경병(炅兵)이었던 것입니다.
이 ‘경병(炅兵)의 사령부’는 오늘날 옥정호(玉井湖)인-‘섬진강 댐(dam)’을 뜻함 - 구고호(九臯湖)에 있었습니다.
이 구고(九臯)는 ‘호수(湖水)가에 구비진 9개의 언덕(=고(皐)’이란 뜻인데, 놀랍게도 시경(詩經)에서 언급될 정도로
매우 오래된 인공호수(人工湖水)여서 이런 구고호(九臯湖)가 있었던 것이 고조선(古朝鮮)시대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조선조(朝鮮朝)때 군(軍)조직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지키는 군(軍)과, 청구조선(靑邱朝鮮)을 지키는 경병
(炅兵)이 구분되어 있었고, 이 양자 사이를 넘나드는 호군(護軍)이 있는 독특한 체계였던 것입니다.
[양계만리도(3)]에서 <전사부(田師付)-호(湖)>가 환룡(丸龍) 즉 허달성(虛達城)-금성(金城)이 32면체 부구(浮具)에
쌓인 것을 운영하는 군사훈련을 하는 곳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를 담당하는 군대가 바로 경병(炅兵)이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청구조선(靑邱朝鮮)의 경병(炅兵)들이 중요하게 보호하는 호수가 바로 위원보(威遠堡)속의 완목호(腕目湖)
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저구루(가슴-돛)’으로 인식하고 있는 경병(炅兵)들에게는 ‘마고(麻姑)여신의 팔뚝에
난 눈(目)’이 정신적인 출생지(出生地)와 같은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갑문과 제방을 활용해서 형성된 인공호수(人工湖水)는 이 호수(湖水)를 만든 갑문과 제방이 철회된 후에는 이런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있었을 때의 모습을 그려내기 힘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양계만리도’를 비롯한 ‘조선인이 만든 지도’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엉뚱하게도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있었을
때의 정확한 모습을 그려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트릭(tric)과 비밀-코드(code)는 ‘정확한 모습’을 되찾게 하는 ‘수수께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면(面)에서 우리는 위원보(威遠堡)에 의해서 형성된 완목호(腕目湖)의 주변지리를 상세히 규명할 필요가 있습
니다.
맨 처음 규명해야할 것이 "이 위원보(威遠堡)가 해발 몇 미터(m)로 산상보(山上堡)와 갑문(閘門)의 높이가 정해져
있었겠는가?" 입니다.
이는 아래 ‘솟대님의 만주(滿洲) 수계(水系)지도’를 보면, “완목호(腕目湖)에서 한문(漢文)의 ‘두 이(二)’모양으로
가로지르는 남(南)쪽의 매하(梅河)와 북(北)쪽의 사하(沙河)가 오늘날 요녕성(遼寧省)과 길림성의 경계로 북류(北流)
하는 동요하(東遼河)의 <원류(源流)인 대이수구(大梨樹泃)>가 서로 이어질려면, 해발 몇 미터(m)가 되어야하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 동요하(東遼河)의 <원류(源流)인 대이수구(大梨樹泃)>, 사하(沙河), 매하(梅河)
‘솟대님의 만주(滿洲) 수계(水系)지도’
http://www.coo2.net/bbs/data/new_con_4/Chosunjido.jpg
그런데 미군사지도(1950년대)에서 이 3하천(河川)이 발원(發源)되는 곳을 보면,
① 매하(梅河)는 ‘TA-TING-TZU-SHAN’(=대정자산(大頂子山): 871m)에서 발원해서 동류(東流)하는데, 그 북(北)쪽에서
동류하는 사하(沙河)와 ‘사이’에 사하둔(沙河屯)이라는 서(耳亇)가 있는데, 이는 등고선 높이가 400m입니다.
따라서 해발 410m로 수위(水位)를 올리게 되면, 매하(梅河)상류와 사하(沙河) 상류는 ‘하나’로 이어지게 됩니다.
[*]경도(經度)표시선: XH7과 위도(緯度)표시선: 1의 교점(交點)에 ‘TA-TING-TZU-SHAN’이 있음{*]
② 사하(沙河)는 자신이 발원해서 동류(東流)하는 서북(西北)(↖)쪽에서 동요하(東遼河)의 북류하는 원류인 대이수구
(大梨樹泃)와 오명둔(烏鳴屯)이라는 서(耳亇)를 가지고 있는데, 이 오명둔(烏鳴屯)을 넘는데도 역시 등고선 높이가
400m입니다.
{*} 오명둔(烏鳴屯)은 경도(經度)표시 XH6~XH7, 위도(緯度)표시: 2~3 ‘사이’에 있음 [*]
(*)위 ①, ②를 확인할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6.jpg
따라서 ①동요하(東遼河)의 <원류(源流)인 대이수구(大梨樹泃)>, ②사하(沙河), ③매하(梅河)를 넘으려면 해발 400m
에서 10m를 더 보태준 해발 410m가 되어야하는데, 이 해발 410m가 결국 완목호(腕目湖)의 수위(水位)높이가 되는 것
입니다.
이는 이런 완목호(腕目湖) 주변에 여러 강들을 절취(截取)하는 갑문의 높이와 제방(堤防)의 높이가 해발 420m가 되어
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정령회하(井嶺回河)가 정령산맥을 넘는데, 필요한 수위(水位)가 해발 510m였음에
비해서 완목호(腕目湖)의 수위(水位)는 이보다 100m낮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양계만리도’가 청하(淸河) 북(北)쪽에서 구하(寇河)를 건너뛰어 이통하(伊通河)와 합류하는
동요하(東遼河)를 오(ㅗ)자 모양으로 그림으로써 구하(寇河)를 위원보(威遠堡)가 절취(截取)하는 강으로 그려져
있는가?”
또 이 구하(寇河)가 오룡산(烏龍山: 636m)의 남(南)쪽에 있는 <서(西)-개원(開元)>으로 부터 서류(西流)하는 것으로
청구조선도(靑邱朝鮮圖)에서는 그려져 있는데, “위원보(威遠堡)와 <서(西)-개원(開元)>은 ‘어떤 관계’로 맺어지고
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대)를 보면,
① 오룡산(烏龍山: 636m)가 있는 곳의 남(南)쪽에서 구하(寇河)가 발원해서 서류(西流)해서 서풍(西豊)을 지나서
33Km정도 나가면 서남류(西南流)(↙)하는 길림소하(吉林小河)의 진행방향을 따라 꺽이어서 약 20Km정도 가면
오늘날의 개원(開原)에 도달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 오룡산(烏龍山: 636m)이 있는 곳: 경도(經度)표시선:XH6, 위도(緯度)표시선: 4의 교점(交點) [*]
② 그런데, 오룡산(烏龍山: 636m)에서 남(南)쪽으로 16Km로 <경도(經度)표시선:XH6>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Chu-
chia-p'u-tzu’ 산(山: 595m)가 있는데, 이 ‘Chu-chia-p'u-tzu’ 는 한자(漢字)로 추가보자(秋家堡子)를 영어로 표기한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이 추가보자-산(秋家堡子-山: 595m) 북록(北麓)에 보면, 관가가(關家街)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조
(朝鮮朝)때 <서(西)-개원(開元)>이란 도시가 있었던 곳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관가(關家)라는 말이 ‘관문(關門)을 맡는 가문(家門)’이란 의미이고, 그 뒤에 ‘거리(=가(街))’가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하(寇河)의 원류(源流)중에 하나는 <추가보자-산(秋家堡子-山: 595m)>서록(西麓)에서 발원해서 관가가
(關家街)의 바로 서(西)쪽에서 꺽쇠(>)모양으로 돌아서 나가 잠시 서북류(西北流)하다가 다른 구하(寇河)의 원류
(源流)와 합쳐서 서류(西流)하게 됩니다.
그런데 북류(北流)하는 동요하(東遼河)의 원류(源流)인 대이수구(大梨樹泃)는 한글의 어(ㅓ)자 모양으로 관가가
(關家街)바로 북(北)쪽에서 동류(東流)하서 다시 북류(北流)하는 흐름에 합치게 됩니다.
이 꺽쇠(>)모양 꺽이는 구하(寇河)원류(源流)와 어(ㅓ)자 모양의 대이수구(大梨樹泃)가 팔(手)을 뻗은 곳은 별(丿)
자 방향으로 2Km밖에 안되고, 더욱더 이 별(丿)자 모양으로 된 관가가(關家街) 계곡 맞은 편에는 489m가 되는 산(山)
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 <위원보(威遠堡)의 서문(西門)>이 되는 갑문(閘門)을 설치할 수 있는 최적지(最適地)인 것
입니다.
(*) 위 ①,②를 살필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6.jpg
그런데 이처럼 위원보(威遠堡)의 서문(西門)이 되는 <서(西)-개원(開元)>의 관가가(關家街)갑문은 완목호(腕目湖)의
수위(水位)가 해발 410m이기 때문에, 자연 10m를 보탠 해발 420m의 높이로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 위원보(威遠堡)의 서문(西門)에서 위원하(威遠河)가 서류(西流)(←)하면서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원보(威遠堡)에서 나간 위원하(威遠河)가 종(縱)으로써 흐르면서 불(乀)자 모양의 정령(井嶺)산맥에서
서류(西流) 혹은 서남류(西南流)하는 강을 8개가 횡(橫)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시한 지도는 ‘조선(朝鮮)
사람들이 만든 지도’에서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1750년대초)’가 유일합니다.
이 ‘조선여진분계도’에서 정령(井嶺)산맥 서록(西麓)에서 서류, 혹은 서남류하는 8개의 강(江)을 -이 중에 하나는
완전히 갑문을 닫아서 밀폐(密閉)한 것으로 그려져 있음 - 절취(截取)하면서 흐르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일단 이 8개의 강을 통합해서 칭하는 용어를 ‘여덟(8)개의 가지(=조(條))가 되는 하천(河川)’이란 의미에서 팔조하
(八條河)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또 각 가지인 조(條)에 그 앞에 숫자를 붙여서 “몇 조하(條河)”로 표기 하기로 합니다.
‘조선여진분계도(1750년대 초)’를 보면, 팔조하(八條河)가운데, 4번째 강에- 바로 위에 있는 강이 갑문을 닫아 밀폐
(密閉)시킨 강이기 때문에, 이를 포함한 것입니다. - “서(西)쪽으로 요심(遼審)과-심양(瀋陽)을 뜻함-무순(撫順)을
다하게 하여(=극(極)) 흐른다.(西極遼審撫順)”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요녕성(遼寧省)수계(水系)지도’와 비교하면
이 4조하(條河)는 바로 혼하(渾河)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 1750년대초)의 팔조하(八條河) 중 4조하(條河)
http://blog.daum.net/sabul358/13708581
(*) 4조하(條河)가 혼하(渾河)가 됨을 볼 수 있는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그런데, 팔조하(八條河)가운데,
(1) 1조하(條河)는 청하(淸河)이고,
(2) 2조하(條河)는 시하(柴河)이고
(3) 3조하(條河)는 앙방하(昻邦河)입니다.
[이 앙방하(昻邦河)는 ‘요녕성(遼寧省) 수계(水系)지도’에서 막일홍산(莫日紅山:1013m) 서록(西麓)에서 발원해서
봉자령(棒子岭)수고(水庫)를 경유해서 철령시(鐵岭市) 남(南)쪽으로 흐르는 강을 뜻합니다.]
(4) 4조하(條河)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혼하(渾河)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 팔조하(八條河)를 갑문으로 절취(截取:cut off)하면서 위원하(威遠河)가 종(縱)으로 흐르게 하려면, 1조하
(條河)인 청하(淸河)가 이런(--<)식으로 두 지류(支流)를 합류시키는 곳을 절취(截取)하는 것이 효과적이고,
또 이런 절취를 하려면, 구하(寇河)가 ‘길림소하(吉林小河)와 만나는 곳(<)에서 청하(淸河)가 만나는 곳(<)을 연결
’사이‘에 있는 서(耳亇)를 발견해서 그 외곽(外廓)에 420m에 산상보(山上堡)를 쳐주고, 원래 구하(寇河)가 나가는
곳에는 갑문(閘門)을 쳐주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西)-개원(開元)>의 관가가(關家街)-갑문이 자반(雌盤)갑문으로써 완목호(腕目湖)가 해발 410m로
수위를 유지하게 하는 갑문이라면, 이 해발 410로 올려주는 웅반(雄盤)-갑문이 있어야하는데, 웅반 갑문은 두물
머리에서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다 받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 구하(寇河)의 합류점(<)과 청하(淸河)의 합류점(<)을 연결하는 곳을 종(縱)으로 위원하보(威遠河堡)를 쳐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상상할 수 있는 ‘요녕성 수계 지도’
http://www.coo2.net/bbs/data/con_4/liaoning_stream.jpg
이런 이야기는 결국 오늘날 구하(寇河)는 조선조(朝鮮朝)때 완목호(腕目湖)에서 위원하보(威遠河堡)로 나가는
매개(媒介) 하천(河川)으로써 ‘자리매김’을 하였기 때문에, ‘양계만리도’에서 구하(寇河)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지도(地圖)에서 ‘빼버린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조선인(朝鮮人)이 만든 지도’는 비록 ‘국가기밀’을 유지하기 위한 독특한 트릭(tric)과 비밀
(秘密)-코드(code)가 있긴 하지만, ‘조선인이 만든 지도’끼리 서로 비교보완해 보면, 깜짝놀랄 만큼 정확함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하(寇河)의 두물머리 합류점(<)과 청하(淸河)의 두물머리 합류점(<) 사이를 연결하는 서(耳亇)가
과연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아래 미군사지도(1950년도)에서
①구하(寇河)의 두 물머리(<)에서 서남(西南)(↙)쪽으로 7Km를 가면, 서류(西流)해 들어오는 금채자하(金寨子河)가
있습니다.
이 금채자하(金寨子河)의 뜻은 “금(金)과 같이 귀(貴)하게 울타리(=채(寨))를 트는 하천(下賤)”이란 의미입니다.
②이 금채자하(金寨子河) 남(南)쪽에는 왜석뇌자-산(歪石磊子-山: 406m)이 있는데, 그 뜻은 “‘사다리꼴’처럼 비틀
어진 돌(=왜석(歪石))들을 돌무더기(=뇌(磊))로 쌓은 산(山)”이란 의미입니다.
이 왜석(歪石)은 거대한 링(ring)모양으로 된 돌(石)의 낱낱을 뜻합니다.
즉 미미(微微)한 ‘사다리꼴’로 되어 있어서 이를 이어붙이면, 링(ring)모양의 ‘돌(石)로 된 둘레’가 되는데, 이런 돌을
‘약간 비틀어졌다.’고 해서 왜석(歪石)이라고 하지만, 조선조 때의 정칭(正稱)은 정석(貞石)입니다.
정석(貞石)은 정면도(正面圖)로 미미(微微)하게 ‘사다리꼴’인데, 6면체의 각 면(面)을 마치 <회(回)>자 모양으로 ‘턱’을
판 것을 뜻합니다. 이 ‘턱’은 ‘대나무 올실’을 가늘게 낸 걸을 꼬아서 만든 죽사(竹絲)로써 낱낱의 왜석(歪石)을 묶으면,
결국 링(ring)모양이 되고, 이런 링(ring)모양을 역시 죽사(竹絲)로써 엮어나가면, 돌(石)로 된 대형(大形) 통로(通路)
가 형성되게 됩니다.
이 죽사(竹絲)는 매우 강해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쓴 조셉니담에 의하면, 강철(鋼鐵)과 같은 강도가 나오는데,
장점은 물기(=수기(水氣))를 만나면 죽사(竹絲)는 더욱 질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달화백을 하는 호수(湖水) 주변에는 사대원로(射臺垣路)와 폐섭원로(蔽涉垣路)라는 2개의 제방인 백마복원로
(白馬複垣路)를 쌓을 때에 이 정석(貞石)을 활용합니다.
<원통(圓筒)-통로(通路)>로 된 정석(貞石)을 땅을 파고 이를 땅에다 반원(半圓)가량만 땅 표면 아래에 오게한 후에
묻고, 파낸 흙으로써 위부분의 반원(半圓) 위에 묻고, 그 ‘위’에 잔듸를 깔아서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제방이 설치된 소도(蘇塗) 전체를 철회(撤回)하고져 할 때에는 정석(貞石)의 원통(圓筒) 통로를 파낸
다음에, 그 흙을 다시 묻고 다지면, “예전에 이곳에 백마복원로(白馬複垣路)가 있었는가?”를 도저히 알 수가 없는
평지(平地)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기술이 우리 민족 - 청구조선(靑邱朝鮮) 때까지 계속 전래(傳來)된 이유는 극히 간단합니다.
그것은 정석(貞石)을 이동해서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런 정석(貞石)기술은 매우 높은 100m~200m 로 높은 제방을 쌓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마치 동전(銅錢)으로 탑(塔)을 쌓듯이, 정석(貞石)-통로(通路)를 맨 밑바닥에 쌓고, 밑의 두(○○)원통(圓筒) 위의
오목한 위에 또다시 원통을 올려놓는 식으로 쌓었기 때문에, 쉽게 제방을 올릴수도 있고, 또 쉽게 해체해 이동도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석(貞石)을 전문적으로 양산(量産)하는 장인(匠人)구룹(group)을 <정석(貞石)-부곡(部曲)>이라고 칭하였는데,
그 위치는 ‘경병(炅兵) 사령부’가 있었던 구고호(九臯湖)를 지원하는 담양(潭陽)도호부(都護府) 관할에 있었던 것입
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담양 도호부)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정석(貞石)부곡(部曲)이 소개되어 있
습니다.
◎ 담양 도호부(潭陽都護府)
사(使) 1인.
본래 백제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는데, 신라에서 추성군(秋成郡)으로 고쳤고, 고려 명종(明宗) 임진에 감무(監務)
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4년 을해에 국사(國師) 조구(祖丘)의 향(鄕)이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공정왕(恭靖王)이 즉위(卽位)하던 해인 무인에 중궁(中宮)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 김씨(金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또 부(府)로 승격하였고,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옛 속현(屬縣)이 1이니, 원율(原栗)은 본래 백제의 율복현(栗攴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율원현(栗原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원율현(原栗縣)으로 고쳤다. 부곡(部曲)이 1이니, 정석(貞石)이다.
또 이런 정석(貞石)에 죽사(竹絲)를 공급하는 장인(匠人)들의 부곡(部曲)을 <장죽(長竹)부곡(部曲)>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집결해 있는 장소는 안강호(安康湖)를 형성하기 위해서 남류(南流)하는 기계(杞溪)의 상류(上流)에 있었음을
선역도(鮮域圖)<4.경상도>의 지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장죽(長竹)부곡(部曲)’이 있는 위치를 보여주는 선역도(鮮域圖)<4.경상도>
http://blog.daum.net/sabul358/18321762
따라서 이런 소도(蘇塗)기반(基盤)을 형성하는 2 부곡(部曲)이 수천년동안 농축된 기술로 제방을 쌓았기 때문에,
높은 제방을 쌓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 각설(却說)
아무튼 금채자하(金寨子河) 남(南)쪽에 있는 왜석뇌자-산(歪石磊子-山: 406m)은 이 산(山)의 정상이 406m이기 때문에,
웅반(雄盤)갑문의 높이 420m에 따른 420m의 산상보(山上堡)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14m를 더 높혀주어야 합니다.
③ 그런데, 금채자하(金寨子河)가 구하(寇河)와 합류되는 하구(河口)남쪽의 ‘모가와붕(毛家窩棚)’은 200m에 불과합
니다. 따라서 220m를 높여야하는데, 이러자면, 왜석(歪石) 다시말하면, 정석(貞石)을 그야말로 ‘무더기(=뇌자(磊子))’
로써 쌓아야하는 것입니다.
‘모가와붕’의 와붕(窩棚)은 ‘움집 시렁’이란 의미인데, 이는 정석(貞石)으로 된 ‘원통(圓筒)통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장지도’에는 정석(貞石)을 활용해서 제방을 420m까지 올렸던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구하(寇河)의 <웅반(雄盤)-갑문>은 이 모가와붕(毛家窩棚: 200m)와 구하(寇河)를 건넌 맞은 편의 천교산(天桥山:
435m-200m)에 산상보(山上堡)를 420m로 만들고 여기에 갑문을 연결하면 되겠지만, ‘조선여진분계도’에 의하면,
이 구하(寇河)의 ‘두물머리’되는 곳에서는 갑문이 없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교산(天桥山)의 교(桥)는 ‘다리 교(橋)’와 그 뜻이 같지만, 때로는 빠를 고(桥)로도 읽힙니다.
천교(天桥)는 ‘하늘 다리’라는 의미인데 ‘빠르다’는 느낌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 구하(寇河)가 이곳 다시 말하면, 금채자하(金寨子河)-서(耳亇)를 통해서 청하(淸河)의 두물머리로 ‘빠른
다리(=교량(橋梁))’로써 연결되던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는 산명(山名)인 것입니다.
이는 갑문(閘門)없이 정석(貞石)으로 구하(寇河)의 방향을 차단(遮斷)시키고, 또 모가와붕(毛家窩棚) 역시 ‘움집
으로된 시렁’으로써 구하(寇河)의 방향을 차단(遮斷)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채자하(金寨子河)가 서류(西流)(←)하는 바로 남(南)쪽에서 이런(<)모양으로 만나게 되는 청하(淸河)의
빗변(/)모양의 지류인 안정구(安靜泃)가 흘러나가고 있는데, 이 안정구(安靜泃)와 금채자하(金寨子河) 원류(源流)
와의 사이는 등고선 높이가 300m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금채자하(金寨子河)와 안정구(安靜泃)가 연결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청하(淸河)의 두물머리(<)에 수위(水位)를 410m로써 올릴 수 있는 갑문을 쳐줄 때에, 두물머리 남(南)쪽에
산상보(山上堡)를 쳐줄 만한 산(山)이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④ 그런데 청하(淸河)의 두 물머리 남(南)쪽에는 서로호욕(西老虎峪: 465m-200m)이 있습니다.
<서(西)-노호욕(老虎峪)>의 의미는 서(西)쪽에 있는 ‘노숙(老熟)한 호랑이의 골짜기(=욕(峪)’이란 뜻입니다.
‘노숙한 호랑이의 골짜기’란 명칭이 붙게 된 까닭은 구하(寇河)의 두 물머리에 갑문을 치지않고, <금채자하(金寨子河)
-서(耳亇)>를 통해서 청하(淸河)의 두물머리로 된 곳까지 수류(水流)를 에스(S)자처럼 돌리게 되면, 구하(寇河)의
수량 전체를 절취(截取)하고도 누수(漏水)됨이 없어서 쉽게 수위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노숙한 호랑이의
솜씨이다.”라는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청하(淸河)의 웅반(雄盤)갑문은 이 서로호욕(西老虎峪)의 북록 200m와 청하(淸河)를 건넌 곳의 285m되는 왜석
뇌자-산(歪石磊子-山: 406m)의 남단(南端)에 산상보(山上堡)를 420m로 올리고 그 끝에 갑문격납고를 만들어서 갑문을
쳐주면 되는 것입니다.
(*) 위 ①,②,③,④를 볼 수 있는 미군사지도(1950년대)
[*] 금채자하(金寨子河) 하구(河口)는 경도(經度)표시: XH0~XH1, 위도(緯度)표시: 2~3 [*]
http://www.lib.utexas.edu/maps/ams/manchuria/txu-oclc-6614368-nk51-6.jpg
우리는 지금까지 위원보(威遠堡) 속에 완목호(腕目湖)가 해발 수위(水位) 410m로써 자리잡고 있고, 이것이 오룡산
(烏龍山: 636m)의 남(南)쪽에 있는 <서(西)-개원(開元)>의 관가가(關家街) 자반(雌盤) 갑문을 통해서 나갔기 때문에,
410m로 수위를 올려주는 웅반-갑문을 쳐주는 곳은 구하(寇河)의 두물머리가 아니라 에스(S)자로 돌아서 청하(淸河)
의 두물머리 바로 앞인 서로호욕(西老虎峪)에 갑문을 쳐주는 것임이 밝혀 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계만리도’에서 구하(寇河)가 존재하지 않는 양 지도를 그리고, 또 ‘조선여진분계도’에서 위원하보
(威遠河堡)에서 1조하(條河)가 구하(寇河)가 아니라 청하(淸河)로 그려진 까닭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가 있는 것은 ‘조선인이 만든 지도’는 ‘현실을 그대로 지도(地圖)’에 옮긴 지도가 아니고, 오히려
‘국가기밀로써 감춘 지리(地理)의 내용’을 찾아갈 수 있게하는 지도이기 때문에, 힘들지만 “현실에서는 어찌 지리
(地理)가 형성되어 있는가?”를 대조해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끈질지게 지도(地圖)를 살펴야하는 부담’이 따르는 작업입니다.
“또 과연 그럴까?”라는 회의도 많이 드는 작업이 되기 때문에, 회피하고픈 연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양계만리도’에서 트릭(tiric)과 비밀-코드(code)를 넘어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갑문(閘門)과 제방(堤防)을
설치하였을 때에 물(水)이 역류해서 통하게 하는 서(耳亇)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서(耳亇)를 바탕으로 해서 ‘조선의 운하학(運河學)’이 발달한 만치, 현실지도에서 서(耳亇)를 통해서 찾으면,
그것이 바로 ‘조선인(朝鮮人)이 만든 지도’에서 말하고져 하는 핵심(核心)이 다 들어남을 <우하단(右下端) 서문(序文)>
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위원보(威遠堡)가 형성하는 완목호(腕目湖)가 어찌 생겼는지?”를 이런 서(耳亇)의 관점에서 위원보
(威遠堡)의 자반(雌盤)-갑문이 쳐진 곳을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하나씩 찾아보도록 합니다.
구하(寇河)가 나가는 위원보(威遠堡)의 서문(西門)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동요하(東遼河)와 이통하(伊通河)가 이런
(↙ㄱΓ↗)식으로 나가는 <서북(西北)문(門)>과 <동북(東北)문(門)>쪽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좌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