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35/191121]손자의 어록語錄
지난 11월 9일 아들내외가, 리모델링 작업 시작 이후 고향집을 처음으로 다녀갔다. 애비가 삼복더위에 땀 뻘뻘 노가다하며 고생하는데도, 저희들 살기 바빠서 오지 못하는 걸 서운하다거나 나무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혼을 하고, 떡두꺼비 손자를 터억 허니 안겨주었을 때, 나는 말했다. 앞으로 너희가 어떤 불효를 한 대도 절대로 섭섭하게 생각지 않겠다. 이것으로 너희는 우리에게 효도를 다한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내의 생각은 많이 달랐지만, 참말로 나의 생각은 그렇다. 나의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도 괜찮다. 물론 안챙길 아들며느리가 아님을 알기에 하는 소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무엇을 애달라 할 것인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손주가 처음으로 나의집(우리집)에 온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온 사람들 중 최고의 방문객인 셈. VIP를 넘어선 VVIP. 우리집 최고의 상전이 왕림하는데, 잠이 오겠는가. 숫제 설레기까지 한다. 토요일 새벽 1시 30분. 4시간여 운전 끝에 도착. 자정부터 애가 단 나는 찬 날씨가 걱정돼 손자를 감싸안을 포대기를 들고 대문에서 서성거렸다.
2016년 4월생. 불과 네 살. 나를 닮아서인지 ‘반짝잠’을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깨어나 잘도 논다. 그날도 3시까지 놀다 잤으니. 거실을 돌아다니며 신기해 한다. “여기가 할아버지 시골집이야?” “1층이네” 신이 났다. 나는 말했다. “이게 윤슬이집이야. 할아버지가 애써 고쳤어” 오늘 새벽, 불현듯, 그 녀석의 말, 말, 말들이 떠올라 자판을 두들긴다. 아침, 흰 고무신을 신고 겅중겅중 마당을 나선다. 컨테이너 옥상에는 독수리연이 손자를 환영하듯, 바람에 따라 하늘을 난다(독수리연은 원래 새를 쫓는데 쓰는 것으로, 사려 깊은 친구가 손자가 오면 화들짝 좋아할 거라며 하나로마트에서 사온 따봉선물이다. 새삼스레 고맙다). 역시나 좋아 팔짝팔짝 뛴다. 나무대문을 나선다. 동네 고샅을 조손祖孫이 손을 잡고 걷는다.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처음 보는 할머니인데도 고개를 까닥이며 배꼽인사도 잘 한다. “안녕하세요” 한 할머니는 “피도둑은 못한다더니, 그 말이 맞네. 지 할래비 빼박았네”. 듣기에 심히 좋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녀석 하는 말을 보아라. “할아버지 집이 두 개인 줄 처음 알았네” “판교집은 12층, 시골집은 1층” 허허-, 어찌 이런 속내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제 또래보다 말을 잘 한다(어휘력이 풍부한 것은 제 어미의 끊임없는 언어훈련 덕분일까)고 하지만, 이런 말을 하다니? 기특하고 신기할 뿐이다. 게다가 요즘 애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헬로 카봇’이라는 조립식 로봇장난감이 있는데, 시리즈별로 사느라 정신이 없다. 그중에 하나가 없는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헬로 카봇 드래곤엑스를 사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하는 게 아닌가. “뭐라고? 사주면 그렇게 좋겠어?” “응. 엄청 많이. 인터넷으로” 어안이 벙벙하다. 인터넷으로 사는 것까지 안다. 이렇게 나오는데야 어느 할애비가 사주지 않을 방도가 있을까? 누구나 그러겠지만, 이렇게 말을 잘하는 네 살박이가 있을까싶다. 흐흐. 밥을 나 혼자 떠먹이는데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기에 “아이고, 내 새끼 예쁘다”했더니 대뜸 “새끼 아니거든요” 하는 게 아닌가. “그럼, 뭐야?” 했더니 “나, 윤슬이야”하며 제 가슴을 손으로 가리킨다. 이 정도이면, 한때 ‘언어의 조탁사’를 자처했던 할래비를 분명 뺨치는 거렷다. 얼마 전에는 같이 샤워를 했었다. 나의 사타구니를 유심히 보더니 "할아버지는 왜 여기가 까매졌어?" 묻는 게 아닌가. "으응, 어른이 되면 그렇게 돼" 하니까, 이 녀석 하는 말 좀 보라. "나도 크면 그렇게 돼?" "그럼, 그렇지, 그렇게 되고 말고"하며 실소했던 기억도 있다.
오늘 새벽, 손자의 몇 가지 기똥찬 ‘어록語錄’을 더듬다, 갑자기 독일의 철인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언이 생각났다. 이 말은 무엇인가?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고,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채널이라는 뜻일 듯. 시인 김춘수의 ‘꽃’의 한 구절도 겹쳐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그렇다. 그녀석의 행동도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을 터이나, 말을 하고나서부터 제 자신 존재의 의미를 확고히 하게 된 것이다. 제 생각을 확실히 표현할 수 있는 나이는 네 살부터일까. 말귀를 알아듣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과 제법 의사소통이 되는 게 신기함을 넘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녀석을 보면서 언어言語가 존재存在의 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실히 알게 된 아침. 어린이집을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고 떼를 쓰다 포기하고 간 이 녀석만 생각하면 절로 입이 벙그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