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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억 회장님, 한희민 감사님과 함께 하는 강촌묵진회원들과 지난 14일 수요일에 인제를 다녀왔다.
만해축제에서 11회를 맞는 님의침묵서예전에 한감사님이 출품하여 입선한 것도 둘러보고, 또 이달초
개관전 소식을 들은 여초서예관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여초 선생 말년의 모습이다(강원
도민일보).
인제군수가 관장으로 되어 있는 서예관은,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1927-2007년) 선생의 작품과 유품들을 전시하는 여초서예관은 지난 6월5일 개관과 더불어 박물관 등록에 필요한 서류준비와 현장실사를 거쳐 지난달 24일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정식 등록됐다."
고 보도하면서 7,000여 점의 자료를 수장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지난 6월에는 금호석유화학이 보유하고
있던 여초 서예작품 69점을 개관에 맞춰 서예관에 기증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길지만 인용한다.
"선생은 안동 김씨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일중 김충현, 백아 김창현과 더불어 3형제가 명필로 명성을 떨친 인물로 정, 예, 해, 행, 초서 등 5체에 두루 능통했다.
‘광개토대왕비체’를 최초로 작품화하여 국내외 큰 명성을 떨쳤으며 ‘동방연서회’라는 학술단체를 만들어 한문화권인 중국, 대만,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폴, 홍콩 등과의 교류를 정례화하며 ‘국제서법교류대전’이란 정기교류전을 이끌어왔다.
특히 여초 선생은 일제시대 암흑기를 거치면서 침체된 한국의 서예문화를 다시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6월)5일에 개관한 여초서예관은 여초선생이 질병치료차 인제에 머물며 여생을 마감한 것을 기념해 개관한 건물로 3천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이며 상설전시관, 수장고, 자료실, 연구실로 구성되어 있다. 건립에 8년간 총 1백억원이 투입 되었으며 ‘2012년 올해의 BEST건물 7선’에 선정될 정도로 건물 자체의 예술적 가치도 인정 받고 있다."(뉴스웨이 6월 7일자)
또한 "69점은 1979년 故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이 대만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던 여초 선생의 서예작품을 회사가 구입 후 보관하던 작품"으로 필력이 가장 왕성하다고 알려진 50대의 작품들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명필의 서예작품과 근사한 건물로 전문박물관이 개관하였다니, 고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만해축제로 서예전 전시중에 일정이 잡혔다.
고속도로에서 홍천을 거치지 않고 바로 동홍천으로 가니 인제가 금세였고, 원통에서 용대리로 가는
길도 4차선이었다. 예전의 길이 아닌 것이다. 설악산을 오를 때면 늘 설레이던 길이었지만, 원통을
거쳐 용대리로 간다니 늦게 간 군대생활의 쓰린 기억 때문에 처연한 기분이 차오름을 어쩌지 못하였다.
펀치볼 아래 서화에서 민통선 안쪽인 향로봉 아래 대곡리 골짜기에서 꼬박 30개월을 보내고 나자
내게는 젊은이의 패기가 가신 듯하였으니, 말년에 산꼭대기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다가 제대해 서울에
가서 바로 86, 87년의 '서울의 봄'을 맞았었다. 요주의 사병으로 편지 검열을 피하려고 이빨 치료를
핑계로 사단의무대에 외출을 나와 몰래 원통 우체국에서 부쳤던 그 원통함의 편지들을 친구들은
나중에까지 기억해주었다.
먼저 인제 읍내에 들러 님의침묵 서예대전을 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인제하늘내린센터가 어딘가
했더니 바로 인제문화원 같은 곳이었다. 인근에 박인환문학관과 인제산촌민속박물관도 있으니 이참에
둘러보기로 했다.
올해로 11번째인 서예전은 예상보다 응모자가 많았다. 수백 명의 출품자에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특선, 입선 작품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아래가 대상작인 행초서 작품이다.
일단 근처의 횟집에서 물회로 점심 요기를 하고 문학관과 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박인환은 인제 태생으로 서울에서 일찍 타계한 도시적인 모던 감성의 시인이었다. 의외로 그의 시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학관이라고 하지만 사진처럼 50년대 후반 그가 타계하기 전의 서점이나 주점, 다방 등을 재현해놓은 것으로 전시 내용을 채웠다. 정작 관람객이 읽어볼 만한 그의 시집은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바로 옆에 자리한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이다. 여초 선생이 제호를 썼다.
입구 2층 로비에는 역시 여초가 쓴 율곡선생의 <풍악기> 대작이 표구되어 걸려 있었다.
전시물은 산촌생활 풍경들을 재현해 보여주는 내용이었고 농기구 등이 약간 있을 뿐, 별다른 '산촌'의
특징은 그다지 느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늦어져 서둘러 용대리로 향했다. 계곡가를 돌던 옛길 대신 터널을 지나는 4차로다. 만해마을
곁에 자리한 여초서예관을 찾았다(북면 만해로 154번지).
길가에 화강암을 매끄럽게 치석하여 세운 표지석이 서 있었고, 소나무들 사이로 잔디가 심어진 뒤편에
현대식 서예관 건물이 보였다.
입구의 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벽에 멋진 각자가 보이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칫 섰다.
이 시를 직접 써서 이처럼 벽서로 내세운 데는 여초 선생의 내력과 작가적 자존심이 담겨 있다고 보였다. 시를 찬찬히 여기에 소개해본다.
마지막 줄에 "청음 선조 서간시"라고 썼다. 바로 안동김씨 여초 선생의 조상인 청음(淸陰) 김상헌(金
尙憲:1570-1652년)의 <서쪽 도랑의 초당에서 우연히 읊다(西磵草堂偶吟)>라는 시를 썼단 말이다.
석실선생일각건(石室先生一角巾) 석실 선생은 일각건 쓰고서
모년원학여위군(暮年猿鶴與爲羣) 저무는 나이에 원숭이나 학과 더불어 어울리네.
추풍낙엽무행적(秋風落葉無行跡) 가을바람 지는 낙엽은 행적조차 없거니와
독상중대와백운(獨上中臺臥白雲) 홀로 중대사에 올라 흰구름 속에 드러눕네.
마지막 구절에는 "집 가까운 곳에 중대사(中臺寺)라는 절이 있다"는 주가 달려 있다. 처음 두 구는 청음
선생이 자신의 만년 삶을 객관화하여 스스로 묘사해 보여준 것이다. 또 뒷 부분의 청음선생 시처럼,
그 후손인 여초 자신도 말년에 서울을 등지고 백운이 넘나드는 이 설악산 자락 산골에 와서 누웠다는
말을 대신 전하는 것이다. 절묘한 비유적 표현이다!
청음 선생은 아다시피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끌려가서도 살아돌아온 조선시대 선비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말년에 한강가 석실에 자리잡고 후학을 키워 '석실선생' 또는 '석실선인(仙人)'이라 불렸다. 지금의 경기도 미금시 수석동(水石洞) 석실마을이란 곳으로 덕소(와부읍)가 원래의 터다. 겸재 정선도
<경교명승첩>에 '석실서원'도를 남겼으나, 대원군이 지금의 홍릉에 왕실(민비)의 산소 자리를 잡을 때
거기에 원래 자리하고 있던 양주조씨의 조말생 묘를 안동김씨의 근원지인 서원터로 옮기게 했다고
전한다. 거기다 일제시대에 서원의 묘정비도 인근으로 옮겨서 원래 자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물
정도로 잊혀지게 만들었다. 최근에야 남양주시청에서 겨우 서원터 표석만 세워놓았다. <석실서원
묘정비>는 손자였던 곡운 김수증이 예서체로 비문을 썼다(비문은 송시열이 지음). 서원터 앞의 굽이진
한강을 미호(渼湖)라고 불렀고 후손인 김원행이 그런 호를 썼었다. 겸재의 그림에도 '미호'란 표현이
들어가 있다. 석실서원은 조선후기에 화양동서원이나 돈암서원과 함께 서인 및 노론계 학맥의 중추역을
해왔던 서원이었다. 정조 사후에 들어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와굴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니 안동
김씨의 세도와 알력이 있던 대원군의 앙심을 산 것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노론 기호학맥은 강원의 산천을 떠돌던 삼연 김창흡 선생에게서 보듯, 내가 보기에도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미호 선생 이후에는 "신불출 언불출(身不出言不出:몸이 출사하지 않았으면
말도 함부로 내놓지 않는다)"이란 말을 부적처럼 맹신하면서 현실정치와 거리를 둔 점이 특히 그렇다.
이 말은 결국 화서학파의 중암 김평묵 선생과 성재 유중교 선생에 의해서 철저히 공격을 받았고, 이후
유생의병의 거의를 통해 그 처의관(處義觀)의 잘못됨이 증명되었던 바다. 대신, 미호 선생에게서 담헌
홍대용이 나오고 연암 박지원 등의 북학파로 이어지는 혁신적인 흐름이 생겨나긴 하였으나, 서구열강의
침탈 앞에서 마냥 주자의 글만 읽으며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어찌 청음선생의 절의정신이 보였던 기백에
비견되기나 할까.
위 오른편이 묘정비이고 가운데 '석취'는 송시열 글씨, 뒤편의 가느다란 비가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
)'라는 세거지 표지석이다. 서원터에서 이처럼 다른데로 옮겨져 있는 현재 상태가 안타깝다.
일제 말기에 형님인 일중 선생이 한글서예를 주장하였듯이, 여초 선생은 소전 손재형, 운곡 김기승,
청명 임창순 선생들의 뒤를 이어서 현대서예계에 큰 획을 그었던 분이다. 예서체, 호태왕비체 등은
물론이고 특히 그의 행서를 보노라면 어느 한 글자도 긴장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점 하나 획 하나가
모두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행초서는 흔히 중국 서예가 앞선다고들 말하지만, 여초 선생이 중국의
대가인 계공(啓功)과 함께 북경과 서울에서 서예교류전을 가졌던 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추사 선생의
나라 후예다운 기상과 격조를 이 한글세대 속에서 다시금 되살려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아래는 출입문을 들어서서 보이는 로비의 휘장 모습이다.
1층에는 여초생애관이라고 책상과 지필묵 및 서가와 책들이 옮겨져 전시되고 있었다.
만년의 왼손글씨인 좌서(左書) 관련 유물들이다.
이어서 2층으로 올라가 기획전시실로 들어섰다. 거의가 1979년의 작품들인 금호 기증 작품들이다.
전시관 모습. 2층로비 모습.
상설전시관의 입구 모습.
서화계의 거장이었던 부친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1878-1968년) 및 형님 일중 김충현과 함께 활동
하였던 동방연서회의 기와 간판도 유물로 전시되었다.
위 오른편은 선조인 삼연 김창흡의 묘비를 쓰고 탁본한 것이다.
2층 로비 창밖으로는 건너편 산능선이 내다보였다.
내려오며 방명록에 한마디 썼다.
"백운이 가는 이곳이 바로 선경이구나!(白雲往處是仙境)"
청음 선생이 춘천을 기행하며 글을 남겼었고, 삼연 선생이 춘천을 비롯한 설악산 등지로 강원도에 발을
들인 이래 곡운 선생이 곡운구곡을 경영하며 내려와 살기도 하였으니, 여초 선생이 조상을 들어보이며
이처럼 강원도 산골에 서예관을 남기게 된 데에도 내력의 인연이 깊다. 앞으로 여초를 기념하는 전시나
서예계의 주요 전시로 제몫을 다해가는 모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솔길을 걸어나왔다.
아래는 '만해마을'이란 곳이다. 잠시 들어가 둘러보았다. 축제 중이지만 한가로운 분위기였다.
입구에 세워진 <평화의 시벽>. 유명시인은 물론이고 고교 동기로 만해상을 받기도 했던 친구(박찬일)나
다른 아는 시인의 동판들도 보였다.
마을 안에는 <만해문학박물관>도 있다. 자료들은 주로 복제한 것들로 백담사의 기념관보다 허술해 보였다. 이름에 걸맞게 만해의 문학 관련 유물을 개괄해볼 수 있도록 좀 더 내용을 알차게 채워 운영되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전시된 만해선생의 묵적 가운데는 일제 말기 환갑을 맞아 가까운 지인들이 모인 축수의 자리에서 남긴
한시 한 편이 보였다. 이 원본이 작년에 경매에 나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여기서 잠깐 이 시가 전해온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잠시 <만해수연첩>에 실려 있는 이 시가 전래된 내력을 잘 알고 있는 김영복 KBS진품명품 감정위원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70년대에 통문관 근무시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이 바로 만해 선생의 유발제자로
만해 말년 곁에서 시중을 들던 해어 김관호(海於 金觀鎬)였고, 이 서첩을 어렵사리 전해온 김관호
에게서 그 자세한 내력을 들었던 것이다.
1939년7월12일이 만해 선생 회갑날이었다. 박광(朴洸:1882-?) 선생과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년) 선생의 주선으로 여기저기 몇몇 분을 연통하여 동대문 밖에 있는 청량사(淸凉寺)란
절에서 조촐한 회갑연을 준비하였다. 심부름은 나이 어린 해어 선생이 맡았다. 점심나절 회갑연을
끝내고 쭉 둘러앉았는데, 뭔가 서운하였다.
벽초 왈 "김군이 얼른 진고개에 가서 서첩 하나 사오게" 하여,
해어 선생이 그 길로 지금의 을지로 근방에서 백면 서첩을 사가지고 돌아갔더니, 상 물린 그대로 앉아서
담소를 하고 계셨다. 이때 이 빈 서첩을 내놓고 제일 연장자인 우당 권동진(憂堂 權東鎭:1861-1947년)
선생부터 서첩에 글을 썼다. 다음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1864-1953년), 석정 안종원(石丁 安鐘元
:1874-1951년), 백강 이병우(白岡 李炳宇), 지오 이경희(池吾 李慶熙), 박광, 홍명희, 유방주(兪邦柱),
고이태(高履泰), 이원혁(李源赫), 현석년(玄石年), 노기용(盧企容), 장도환(張道煥), 박윤진(朴允進)이
쓰고 김관호 선생 차례가 오자 극구 사양했으나, 벽초의 야단을 듣고 '산고수장(山高水長)' 4자를 쓰자,
바로 주인공인 만해 선생의 그 유명한 회갑연 즉흥시가 그 특이한 글씨로 나오게 된다.
[법률신문 2012년 4월 2일자]
전쟁으로 치닫던 일제의 발광을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에 남아 그저 아는 분들만 은밀히 모여 만해
선생의 회갑연을 가진 내력이 자세하다. 벽초 선생(<임꺽정>의 저자)도 7언시를 한 수 지었으니, "탁수
(濁水)가 나날이 도도해지는" 가운데 만해선생이야말로 "황하의 물길 한가운데 있다는 지주처럼 우뚝
솟은 고절이었네(中流砥柱屹然高)"라고 읊었다. 만해선생은 광복을 맞지 못하고 1944년에 타계하셨다.
그러면 잠시 이 시를 음미해보자. 조심스럽게 우리말로 옮겨본다.
총총육십일년광(悤悤六十一年光) 빠르게도 흘러간 예순한 해의 시간
운시인간소겁상(云是人間小劫桑) 그게 바로 사람의 짧은 생애라 한다네.
세월종령백발단(歲月縱令白髮短) 세월에 비록 흰머리는 짧아졌지만
풍상무내단심장(風霜無奈丹心長) 바람 서리도 이 붉은 마음이 자람을 어쩌진 못했다네.
청빈이각환범골(聽貧已覺換凡骨) 가난대로 살아 이미 평범한 사람처럼 바뀐 줄 깨달았으나
임병수지득묘방(任病誰知得妙方) 병을 버려두니 묘한 처방 그 누가 알리오.
유수여생군막문(流水餘生君莫問) 유수 같은 여생일랑 그대여 묻지 마오,
선성만수진사양(蟬聲萬樹진斜陽) 매미소리 온갖 나무들 비끼는 석양 따라가거늘.
[몇몇 글자는 약자로 썼다. 마지막의 '진'자는 달릴 주走에 珍자의 오른편 음부를 쓴 자로, 역시
약자로 썼다. 첫 대구의 光과 桑은 光陰, 桑陰이란 말로 모두 시간, 세월이란 뜻이고, 불교에서
천지가 개벽하는 사이의 劫이란 말을 써서 인생을 小劫이라 하였다.]
전시관에는 한글 번역문도 액자 아래 있었고 <만해선생송수첩> 복제본도 보였다. 이런 내력도 함께
자세히 소개되어야 전시관을 찾는 즐거움과 감동이 전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 원모습은 아래와 같다(제9회옥션단 도록. 아래 그림에서 보듯 원래 "만해선생수첩"이었고 나중에
이당 김은호가 "만해선생송수첩"이라고 피갑의 제첨을 다시 써넣은 것이다. 김영복은 "만해수연첩
萬海壽宴帖"이라 소개하였다).
문밖으로 나서니 축제로 시인 얼굴을 전시한 것이 보였다.
어둡고 고단했던 시절 꿈과 기상을 잃지 않고 투지를 불사른 저 영혼의 얼굴들!
첫댓글 너무나 완벽한 자료수집과 설명 그리고 평가.선배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좋은 곳을 다녀오셨군요^^ 한감사님 축하합니다.
만해의 한시 마지막 구를 오늘 고쳤습니다. 먼저의 "온갖 나무 매미소리"가 아무래도 아닌 듯하여 다시 생각해보니, 이 구절의 의미는 석양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나는 나무 그림자들도 다 지는 해를 가리키며 따라가듯 움직이는 뻔한 사실에 자신의 남은 생을 비유해 말한 것입니다. 매미소리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무(그림자)가 따라 움직이는 거지요!
만해축전에서는 올해도 예년처럼 상중하 각각 900~1천쪽에 달하는 세 권의 방대한 자료집을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