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15.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강론>
<마태5,43-48>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덕이란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오늘 마태오 복음5,45 에 나와 있는 아버지 하느님 처럼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듯이,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부제품을 받기 전에 30일 침묵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10일이 지나자 분노가 올라와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백지로 내게 되었습니다. 지도신부님께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해오라 하셨는데도, 원인 모를 화가 치밀어 올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피정 후에 신학교를 나간 선배님들이 이해가 가더군요.
신학교를 나갈 때 나가더라도 한 번 이 분노가 무엇인지 보고 나가야 겠다고 마음 먹고 분노가 무엇인지 보려고 몇 시간을 앉아 있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데, 제앞에 5년전 주일학교 교사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요괴인간이 나갔습니다. 제 앞 45도 방향 1미터 앞에 씩씩거리며 양반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만화영화 주인공으로 사람이 되고싶은 요괴인데 사람은 선과 악이 있는데 이들은 선 밖에 없는 존재들이지요. 정의의 사도로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요괴들 중에 제일 힘이 센 자였습니다.
그것은 제 안에 제가 생각하는 정의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정의로움이라는 틀이 있는 한 하느님의 선을 다 담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느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악인 것이지요.
하느님의 선을 담기 위해서는 내 안의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은 선을 비워내야 합니다.
화가난 이유들이 기도중에 영화처럼 펼쳐졌습니다.
그 당시에 각자 주소지로 본당을 옮기라는 성소국장님의 지시로 본당을 옮긴지 얼마 안되었을 때인 신학교1학년 겨울방학 때의 일이었습니다.
츄리와 구유를 만들 재료들이 피정 갔다와서 다 없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들을 처음 대면했던 저는, 초등부 교감 선생님의 “성당에서 다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수고가 많다며 통닭 3박스에 1,8리터 사이다 콜라 1병씩을 사주고, “주님! 저 잘했지요! 잘했지요!” 하고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이었습니다.
착해야 한다는 병이 걸려서 감정은 동의를 하지 않았는데, 나는 신학생이니까 저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제 감정을 억압했습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 사랑을 했는데 왜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나라는 영혼이 머무는 내 몸에 악령도 공기처럼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령이 빠져나와서 그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착각을 심어주고 교만하게 “나는 착하다. 저들과 다르다.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 주님! 저 잘했지요! 잘했지요!” 라고 했지만 그 끝이 교만이고 사람들과 나와의 분열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인 것이지요.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겸손치 못하게 만들면 그것은 악령이 한 일입니다.
저는 크게 충격을 받고,
이성적으로 나는 용서해주겠다고 했더니, 제 앞에 있는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은 정의의 사도인 요괴인간 뱀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 안 되느냐?” 고 물으니 “저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물성 인간성 신성이 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모든 것을 통합시키는 것이, 즉 육신과 정신과 영혼을 통합시키는 것이 완덕이라 하셨지요.
그래서 바로 신성으로 가서 용서했지만, 내 심장은 뛰고 이해가 잘 안 된 상태에서, 즉 동물성과 인간성이 동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용서를 한 것이지요.
저는 서품 받을 요량으로 “나는 용서해주겠다!”고 했으나, 불가능했습니다. 제 몸이 떨리고 계속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으니까요.”
비참했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용서할 힘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참으로 속이 좁고 바리사이가 따로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것이지요.
주님께 용서할 힘을 달라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때 수녀님이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생각해 보니“수녀님이 창고에서 찾아보라고 하셨어요”...너무 깜짝놀라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데 바로 이어서 주임 신부님이 머리를 긁적이시며 “에이 미안하다!” 라고 하시면서 관절염이 걸린 다리로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일어서서 그분을 일으켜 세우자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화가 다 풀린 상태였습니다.
용서란 충분히 말을 해야 합니다.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1.내가 누구인지, 상대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와 정화로 계속 예수성심께 내 모든 기억을 봉헌하고, 예수성심 안에 무념무상으로 자주 머물다보면 무의식까지 정화되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상대편이 누구인지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비워내고 십자가의 성요한 처럼 욕끊기와 무의 추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6,41-42) 라고 하셨습니다.
2.소통이 필요합니다.
소통을 할 때에는 예의를 갖추고 상대편이 누구이든 생명에 대한 존중을 해야 합니다.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를 알려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물으면 됩니다.
3.문제 해결을 해야 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현실과 부딪쳐야 합니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는 자세가 되면 됩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선택을 위해서는
첫 번째 단계는 이성으로 장단점을 적고 기도로 마음이 끌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두번 째 단계는 경험이 쌓여서 내가 행복하고, 너와 내게 유익하고, 지속 가능한 것인지 보고 선택하면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관상이 된 상태에서 바로 하느님의 뜻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단계입니다.
결과적으로 나와 너의 관계에서 겸손과 사랑이 남는다면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이고, 아무리 내가 옳다해도 상대편과 나를 가르고 교만과 분노가 남는다면 악령이 작용한 것입니다.
오직 주님 만이 참으로 우리를 교만과 분노에서 구원해주실 구원자이십니다.
해결 안 된 것은 예수성심께 순간순간 봉헌하면서 성령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Mark5,43-48>
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44 But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45 that you may be children of your heavenly Father, for he makes his sun rise on the bad and the good, and causes rain to fall on the just and the unjust.
46 For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recompense will you have? Do not the tax collectors do the same?
47 And if you greet your brothers only, what is unusual about that? Do not the pagans do the same?
48 So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
<책 소개>
가족을 주제로 한 시노드에서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 시노드의 목표는 교회의 건강한 전통을 미묘하게 해석함으로써 교회가 까다로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방해하는 ‘궤변적’ 사고법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03)/
마태오 복음서 23장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궤변을 나무라십니다. 그런 식의 궤변을 사용해서 상황을 판단하면 현실의 복잡성을 올바로 파악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복음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지원하고 인도하려는 교회의 역량도 방해받기 마련입니다.
가족에 대한 시노드에서는 이혼자, 별거자, 재혼자에 대한 배력 및 그들과 성체의 관게라는 특별한 쟁점보다 훨씬 폭넓은 문제가 다루어지는 게 당연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론이 그 시노드를 특정한 집단과 관련된 것이라 규정지음으로써 그 시노드의 전체적인 목표를 하나의 쟁점으로 축소하고 단순화해버렸습니다. 게다가 그 시노드가 이혼자와 재혼자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느냐 허용하지 않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규칙을 완화해야 한다는 쪽과 엄격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양분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여론의 추세를 반영한 언론 보도는 시노드가 넘어서려던 궤변론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었습니다.(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04)/
악령이 올바른 식별을 방해하며 찬반 중 어느 한쪽을 편들며 갈등을 완화하기는커녕 부추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공동 합의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영적인 자유가 위축되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주장에 파묻히며 결국 그 주장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구해주었습니다.
2015년 10월 가족을 주제로 한 2차 시노드가 끝나갈 때쯤 돌파구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범람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 특히 빈 추기경인 크리스토프 쇤보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적 전통에서 진정한 도덕적 교리를 되살리며, 궤변적인 도덕으로 추락한 퇴폐적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사람마다 마주하는 상황과 환경은 각양각색이며 모든 경우에 적응될 수 있는 일반 법칙은 없다는 아퀴나스의 가르침 덕분에, 시노드는 각각의 사례에 따라 개별적인 식별의 필요성에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법 자체를 바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회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바(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05)/
꾸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각 사례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관계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청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누며 은총과 성장을 가로막는 이분법적 도덕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자거나 느슨하게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범주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상황들에 어느 정도 여지를 두고 규칙을 해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합의는 성령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엄청난 돌파구로, 우리 전통의 범위 내에서 진리와 자비를 새로운 관점에서 더 낫게 통합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법이나 교리를 바꾸지 않고 오히려 그 둘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린 덕분에 이제 교회는 동거자나 이혼자와 함께라며,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지켜보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충만히 받아들이도록 더 잘 도울 수 있습니다. 2016년 4월 나는 시노드의 후속 자료로 발표한 ‘사랑의 기쁨’의 제8장을 쓸 때아퀴나스의 순수한 교리를 근거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시노드를 통한 공동 합의(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06)/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결국 많은 사람이 궤변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목적과 환상 및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교회의 전통이 보호하는 공동 합의 과정조차 인정하지 못한다는 징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LET US DREAM 렛 어스 드림,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 프란치스코 교황 POPE FRANCES, 오스틴 아이버레이/김주현 옮김,(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20, p.207)/
—//—
171 모든 전례의 본질적 요소는 무엇인가요?
모든 전례를 통해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미사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전례도 어떤 면에서는 부활을 기념하는 잔치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부활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시고, 우리와 함께 그것을 거행하십니다.[1085]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탈출12,13)
세상에서 거행된 가장 중요한 전례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거행하셨던 파스카 예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사건을기념하는 예식을 거행하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 인류가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셨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천사로부터 보호했던 것은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몸소 어린양이 되시어, 당신 피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죽더라도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례가 담고 있는 본래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몸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스라엘(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156)/
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에 비유하셨습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구원의 효과는 ‘파스카의 신비’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어린양의 피가 생명을 구했던 것처럼(탈출기 12장 참조),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인류를 구원하신 참된 파스카 양이 되십니다.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157)/
—//—
II.전례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행위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1084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어” 성령을 당신의 신비체인 교회에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당신의 은총을 나누어주고자 세우신 성사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성사들은 우리 인간이 감지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표징(말씀과 행위) 이다. 성사들은 그리스도의 행위와 성령의 힘으로 그것들이 가리키는 은총을 실제로 이루어 준다.
->1085 교회의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당신 의 파스카 신비를 나타내시고 실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생활 동안 가르침을 통해 파스카 신비를 알려 주시고, 이를 행동으로 예고하셨다. 당신의 때가 이르자(요한13,1; 17,1 참조) 예수님께서는 지나가버리지 않는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로마6,10; 히브7,27; 9,12)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이는 우리의 역사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면서도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다른 모든 역사상의 사건들은 한 번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과거에 묻혀 버린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과거 안에만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43)/
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몰리치셨으며ㅡ, 그리스도의 모든 것, 곧 모든 인간을 위하여 그분이 행하고 겪으신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영속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생명으로 이끌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4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