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1950년 5 호 제44권 제5 통권 1022 (78〜80쪽)
최도마 신부 (十三)
조바오로의 동생은 불행하게도 자기 식견을 과신하여 교회의 진리를 궁구하고저아니하고 도리어 자기 궤변을 이용하여 새로 입교한 형의 마음에서 신앙을 깨트려버리려하였다. 감히 형을 대적할수없으므로 은근히 자주 형을 괴롭게하였다.
하루는 그가 자리에 누어 형의 배교한다는말을 듣기전에는 나 식음을 전폐하겠노라 고 맹서하였다. 동생은 八일간 굶어 기진하게되었다. 바오로는 보다못하여 동생을 책하여 말하였다.
너 어찌 이렇게 미련을 피느냐? 네가 날보고 멍헤목에 가지말라니 나 가지 않으리라. 그러니 너 남은 생명을 보존하기위하여 음식을 먹어라.
젊은 학자 형에게서 아무소득이없으므로 분푸리를 모두 교우들에게로 옮겼다. 그는 교우들을보고 말하기를 나 포교들을 불러 너희를 모두 포박시키겠다 하였다.
이 위협에 교우들이 공소를 폐하고 농사를 내어버린후 산협에로 피신하니, 거기서 그들은 무수한 간고와 싸우며, 처참한 환경중에 사로잡히게되었다. 교우들의 불행이 외교인들에게 걸려너머지는 돌부리가 아니된다면 오히려 다행하겠다. 그는 다름이 아니다. 우리 교인들이 산협지대에서 보내고있는 외롭고 슬픈 생애를 목격한다든지, 박해가 비저내논 교우들의 궁핍과 능욕이나, 흉악무도한자들과같이 처벌되여, 감금을 당하고 체형을 받게되는 것을 외교인들이 목도하면, 입교할 원이 다소있다가도 물러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련하게도 추방된 무리위에, 자유의 서광이 한줄기 나린다면 아직 겁을 집어먹고 망설이는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많이 복음의 빛을 받게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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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주교님의 남기신 문헌을 보면 당시 삼천리에 산재한 교도의 수는 만 一천여명이었다.(9)
이렇게 산산이 흩어저있는 양들을 찾아다니며 그 기갈을 풀어줄 목자는 단 셋이오, 그중에도 두분은 외국인으로 불편이 많은외에 건강이 대단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주소분망하는 세 일군은 무엇보다도 「추수주인에게 간구하여 하여금 그 추수하는데 일군을 보내주시게하였다」(마두 九, 38). 이들의 꾸준한 노력과 기도는 유향과같이 하늘높이 사무처 이윽고 주의 인자를 움지겼다. 그리하여 一八三二년 八월 二十九일 신부한분이 고군도에 비밀히 상육하였으니, 이는 복자 김안드레아신부 입국하실때부터 과거 十년간 한국내에 들어오시러겨 온갖 모험과 아울러 가진 방법을 다하여보섰으나, 항상 실패의 쓴잔을 맛보시고 계시던 「매스뜨르」신부이시다.(10)
교역자 한분을 얻은 한국교회의 기쁨은 컸으나, 미구에 기쁨은 슬픔으로 변한다. 다년간 병고에 시달리신 「페레올」주교께서는 마침내 一八五三년 二월 三일 오후 열시 서울시내 초라한 집 한간방에서 四十八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섰다. 별세하시기 며칠전에 「다블류」신부는 주교께 최후성사를 주시고 머물러계섰으나, 즈교 전교떠나기를 명하시매, 가까운 몇공소를 순회하고계시던중 급보를 접하고 곧 달려오섰으나, 주교운명하신후 이틀만이었다.(11)
주교는 입관을 시켜 다른 조요한 장소에 이개월간 뫼섯따. 그는 아직 땅이얼어 장예를 허락지않기 때문이다.
一八五三년 四월 十一일밤 페레올주교의 관은 가장 가난한이의 시체와도같이 서울을 떠나 안성군 양성 미산리(安城郡陽城 美山里) 산중에 묻히섰다. 이는 복자 김안드레아신부의 분묘옆이였고 주교생시에 원하시던곳이였다.
주교를 잃은 한국교회는 세위신부가 책임지시게되었고 입국은 늦었으나 지정을 먼저 받으신 매스뜨르신부께서 수반으로 임시 계섯다. 두목을 잃은 부하들의 심리는 오직 서글푸다 뿐이랴! 그중에도 「다블류」신부는 같이 입국하서서 다년간 이 손잡어 일하시던터이라 일층더 비통하섰을 것은 추측으르도 알일이다. 一八五三년 九월 十八일부로 본국에 보내신 눈물겨운 기록이 더욱 익익히 증명한다. 그러나 그 원문을 여기에는 성약한다.(12)
「페레올」주교께서는 생존시에 당신후임으로 당시 만주지방에 부주교로 계시던 「베르뇌」신부를 지정하섰다. 이 소망을 「로마」에서 가납하사 베르뇌주교는 만주교회에서 손을 떼시고 한국에 들어오시려고 기회를 엿보신다.(13)
一八五四년 三월 과거 매스뜨르신부와 함께 입국을 꾀하시다가 못하신 「양수」신부 그 희망하던 포교지에 들어왔으나, 입국이래 곧 병석에서 신음하다가 동년 六월 十八일 임종하였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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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다시 최신부께로 옴기자.
一八五四년 최신부께서는 특히 위험지대를 포교하시던만큼 고통이 우심하섰고, 한번은 공소중에 十여명외교인이작당하여 침입하였으나, 신부는 신기하게 피신하섰다.(15)
탁덕은 타인의 구령을위하여 희생된 몸이나, 자신의 구령을 일시도 잊을수없는 것이다. 탁덕 자신의 구령사는 곧 그 부하 교인들의 구령에 크게 관련된다. 그러므로 탁덕일생에 묵상회가 필요한 것이다. 본무를 일시 떠나 일층 열열히 기구에 전심하는 기간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호기요, 자기 자신만에 사로잡혀 잘못가는길을 바루잡기에 이보다 더좋은 방법이 없으며, 앞으로의 취택할 길을 찾는데 크나큰 도움이된다. 박해시에 분방하던 우리신부님들은 이 행사를 채우기에 게으르지 않으섰다.(16)
一八五四년이후로 한국에 남어계신 세위 신부들의 운동은 더욱 활발하여진다.
위선 신학생 셋을 「비낭」에 유학보내시고(17) 「다블류」신부께서는 포교하시는 일방 시간을 이용하여 한불자전(韓佛字典)을 위시로 기타 교회사에관한 문헌수록과 신자들의 신앙이나 신심에 도움이 될만한 책자 발간 준비를 하섰다. 여기에 최도마신부의 도움이 많었음은 다언을 요하지않는바이다.(18)
매스뜨르신부께서는 고아원을 생각하사 위선 무의무탁한 어린이들을 교우집에 맡겨 양육시키사 그들의 구령사정을 돌보아주섰다.(19)
신부들외에 교회사업에 도움을 줄만한이들을 택하여 남녀간 전도사들을 사용하였다.(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