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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원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권철호 신부
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나 모아진 봉우리로 말을 걸어오고 초록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대지를 서서히 물 들여 갑니다. 봄은 그렇게 우리 마음에 꽃씨를 뿌리고 연초록의 붓질로 밑그림을 그려가지만 마음의 캠퍼스 한 곁에서 솟구치는 애잔함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연초록의 붓질도 봄의 토양 속에 자리한 뭇 생명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일겁니다.
봄은 그렇게 생명이란 단지 살아 숨 쉬는 이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의 손길 위에 놓여져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아마도 사순절이 영원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사랑하시던 나자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죽은 나자로의 부활이 단순한 기적으로만 다가오지 않음은 흔하게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눈물과 더불어 나자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인간에게 죽음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영원한 박탈이며 동시에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의 영원한 상실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앞에서는 영원한 단절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더욱이 사랑하는 이들 마음속에서는 영원한 단절이란 있을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 나자로의 부활입니다.
우리 신앙이 성인들의 통공을 말하고 하늘과 땅, 죽은 이와 산 이의 통교를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이들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이 생명인 것처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의 바다에 담겨질 때, 우리 사랑의 원천적인 기회 박탈은 없으리라는 믿음이 우리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바닷속에 머무는 한, 물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생이든 죽음이든 하느님의 손길 위에 자리하는 한 영원한 생명의 바다에 자리합니다. 해서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들 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것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그분을 떠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참 신앙이고 참된 믿음이기도 합니다.
연초록의 붓질로도 다 지울 수 없는 뭇 생명의 흔적처럼 죽음조차 영원히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임을 알기에, 오늘도 우리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물감이 되어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이지만 아름답게 채색되어지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절실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처럼 간절함으로 두 손끝이 모아지는 사순절입니다.
[대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이영동 신부
부활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오늘 생명의 주님을 만납니다.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는 분,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풀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원한 샘물이십니다.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눈 뜨고도 못 보는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우리의 갈증과 어둠을 해소시켜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드러내십니다. 죽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갈증과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생명과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키시면서 생명과 자유의 주인으로 드러나십니다.
생명과 자유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부활의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살리셨듯이 세상에 파묻혀 세상의 냄새에 찌든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손과 발이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온 라자로를 풀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힘과 죄에 손과 발이 묶이고 얼굴이 가려져 있는 우리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는 그분은 의사이시며
고열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한줄기 시원한 샘물이십니다.
우리가 죄악에 억눌렸을 때 그분은 화해이시며
도움이 필요할 때, 그분은 힘이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생명이시며
천국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에게 그분은 길이시며
어둠을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빛이시며
굶주린 우리에게 그분은 양식이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분께 희망을 두는 자.
<성 암브로시오>
[원주] "주님이 계셨더라면…"/박용식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스테파노와 마리아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초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아들이 하나 생기고부터는 차츰 신앙심이 약해지더니 급기야 냉담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 장래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맞벌이에 나섰고, 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으며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줬습니다.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잘못하는 것조차도 예뻐 보였는지 잘못을 고쳐주지도 않았습니다. 맞벌이하느라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돈으로, 물질로 보상해 주려는 듯 온갖 것을 다 사줬습니다. 자신들이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던 것을 자식에게서 보상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평일이면 직장에 나가느라, 주일이면 아들 데리고 놀러다니고 아들이 갖고 싶은 것 사주러 다니느라 주일미사에 참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앙은 뒷전으로 밀려나 예수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돈도 제법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다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갈 의미도, 일을 할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부부는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동반자살을 생각하던 중 우연히 장애인시설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시설에서 장애아들과 몇 시간을 지내면서 생애 처음으로 엄청난 것을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중증 장애아들은 말을 못하고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표정은 한없이 밝았고, 얼굴에는 천사 같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기 아들은 왕자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밝은 표정보다는 늘 불만에 싸여 투정만 부렸는데, 부모도 없는 이 천덕꾸러기 장애아들이 어떻게 이토록 행복해 보일까?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아들은 주님이 누구신지도 몰랐고 우리 부부도 주님을 떠난 지 이미 오래지 않은가!'하고 부부는 생각했습니다. 죽은 자식에게 주님 사랑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아쉬웠고 그 동안 주님을 떠나 산 것이 한없이 후회스러웠습니다.
부부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돈 때문에 맞벌이 하느라 집을 비우지도 않았을 텐데, 엄마가 집에서 기다렸더라면 아이가 사고지점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곧장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주님을 그렇게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주님께서 혹시 사고를 막아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사고를 당했어도 주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 있을 텐데. 주님이 계셨더라면 내 아이가 죽지 않았을 텐데…."
부부는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설의 장애아 중 한 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아 세 식구가 온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가 한 절규입니다. 평소 예수님이 사랑하던 가족 중에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니 이미 장례를 치른 뒤였습니다. "주님께서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하는 마르타에게 예수께서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십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는 말씀을 바로 그 자리에서 당장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셨더라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이 즉시 달려가셨더라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안 계셔서 라자로가 죽었지만 죽은 후에라도 주님이 오심으로써 라자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주님이 계셨더라면 우리가 그동안 겪은 불행은 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불행을 당했더라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 불행에서 벗어나 오히려 행복해 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주님이 계셨더라면…." 이 말을 열 번쯤 중얼거려 봅시다. 내 삶에 주님이 계셨더라면, 내가 주님 뜻대로 행동했더라면 현재 상태와 달라졌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주님이 계셨더라면…."
[제주] “돌을 치워라”/주 에레미야 신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들 중에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은 둘도 없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 때문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이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오늘의 복음 말씀대로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생명의 주인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네 번이나 다시 살리십니다. 나인이라는 고을에 살고 있던 과부의 외아들(루카 7,11~17), 야이로의 딸(루카 8,49~56), 라자로(오늘의 복음)와 사흘 안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적이 그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다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주님 덕분으로 다시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 대로 우리들도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주제는 부활입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부활의 뜻도 됩니다. 죄로 인해 냉담자가 되어 영혼이 죽고 있을 때는 라자로의 육체적 부활보다 더 큰 영성적인 기적이 있어야만 영혼이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큰 기적� 우리들에게 생명의 주재자이신 주님을 드러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중 부모나 형제, 자매, 그리고 친구들이 냉담 중에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분명 다시 일어나게 해 주신다는 믿음을 전하십시오.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본받아 천주교인으로서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냉담자를 위하여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청하시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셨듯이 기도드릴 때 마르타와 마리아와 같은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냉담자를 위해 기도 드리며 냉담자도 회개하여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분이 “냉담자를 위해 몇 년 동안 기도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라고 말하며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라고 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나흘이든 사년이든 사십년이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오래 되었어도 죽은 영혼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며, 무덤에서 라자로를 못 나오게 하는 장애물을 없애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냉담자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냉담자들이 느끼는 미움과 두려움을 없애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나 신부님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도록 냉담자에게 위로를 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언제나 환영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정남진 안드레아 신부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부활에 대한 예표를 보게 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러한 묵상을 해본다.
‘죽음은 부활을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다.’ 특히나 이 물음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왜 라자로가 죽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예수님은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고, 라자로가 죽을 것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계셨다. 마르타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미리 와 계셨다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왜 그러셨을까? 마지 그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다는 듯이....혹시 예수님은 눈물까지 흘리시면서도 어찌하지 못하셨던 것은 아닐까? 죽어야만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죽어야만 하느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추가 김치가 되기 위해서는 소금에 절여져 완전히 죽어야 한다. 배추가 완전히 죽어야 사람의 손에 새로운 것으로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의 의지, 우리의 욕망, 우리의 생각들... 그 모든 것이 정지되고 그 모든 것을 비워지고 그 모든 것이 죽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을 위해 라자로는 죽어야 했다.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릇을 비워야만 하고,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을 놓아야만 한다. 우리가 죽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시작하실 수 없다. 밀알 하나가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섭리이자 신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희생하며 한 알 한 알 땅속에 심는 밀알들이 이제 하느님의 손에 의해 열매 맺게 되리라는 믿음이며, 우리를 죽음으로 던져보는 것이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 부활을 준비하는 이 사순시기,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욕심 부리는 나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게으른 나 자신을, 교만한 나 자신을 이 순간 라자로와 함께 무덤 안에 묻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부활도 없을 것이다.
그분을 믿고 우리를 던져보자.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미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선물을 들고 무덤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부산]이틀을 더/장재봉 신부
우리는 위급한 상황을 만나면 주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날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급히 오시도록 청했던 마음도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딴전을 부리십니다.
문제가 해결 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응답이 따로 놀 때,
엉뚱한 하느님의 뜻만 늘어놓을 때,
야속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원대로
내가 생각한대로 일이 좌르르 풀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이를테면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일은 하느님께도 덕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더 서운하고 섭섭하고 갑갑합니다.
나를 버린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이틀을 더” 미루시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따져보면 오늘 주님께는 더 급하고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눈빠지게 기다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마음을 모르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들은 둥 만 둥 하시니
주님께서 늦장을 부리신 이유가 속상합니다.
믿고 고대했던 만큼 타 들어갔을 그들의 속이 보이는 듯 싶고
그만큼 원망하게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니 그렇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처리되지 않을 때,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마르타처럼
조금만 더 빨리
조금 더 일찍 서둘러 주지 않은 주님을 원망하고
오빠가 죽고 나서, 다 끝나버린 후에야 오신 주님을 탓하게 됩니다.
이렇게 선하신 하느님의 뜻이
때로 혹독하고 잔인한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르타가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라고 축소 해석한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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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응답은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시간에, 하느님의 방법에 의해서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뜻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실 때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펼쳐집니다.
그 때 우리는 “죽음으로 몰리는” 위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죽음조차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믿으며
우리 삶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과 하느님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이 드러내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도
이 모두가
우리가 죽은 후에 벌어질 사건인 줄 여기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서 천국을 보장 받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좁고 편협한 우리 믿음의 본질을 봅니다.
기도하며 주님의 도움을 청하되
그분의 뜻을 내 좁은 생각 안에 가둔 채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주님의 방식과 방법을
어쩔 수 없는 ‘차선’인양 수용하고 있며
믿음을 흥정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시간이나 요구에 맞춰 움직여 지지 않으며
하느님의 시간에 맞추어 실현된다는 점을 일깨워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되
철저히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시간을 준수하신다는 점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여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죽음을 요구하고 기다리신다는 엄청난 사실을
선포하신 것을 깨닫습니다.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막바지 상황을 기다리는 잔혹한 하느님,
온전히 당신께서 다시 일으키는 분이라는 걸 깨닫기 바라고
우리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며
우리 삶의 부활을 통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원하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방법이
주님의 최상이며 하느님의 최선이라 선포하시니
믿음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것인지 감이 옵니다.
마르타처럼 믿음을 자신의 이해의 폭에 가두고
내세의 신앙관에만 치우치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능력을 아주 작게 만드는 일이며
하느님의 능력을 폄하시키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의 양을 물으시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믿음의 크기를 물으신 것이라 헤아립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앞에서 죽음도 변화의 과정이며
믿음의 과정에 있는 필수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슬플 수 있고 통곡할 수 있다고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아픔과 형편들을
연민으로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신다는 것을 고백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오해와 작은 믿음이
그분을 울게 하신다는 진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울고
겟세마네와 골고타에서 울었던 주님께서는
오늘 눈물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살리고 계십니다.
눈물젖은 음성으로 명령하십니다.
죽은 듯
무감각해 진 마음의 돌문을 열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며
마음 문을 단단히 막은 채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마르타처럼 “이제는 완전히 끝났다”고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우리 기도에 모른 척
“이틀을 더” 기다리고 사흘 정도 미루시기도 합니다.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임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이틀을 더 미루고 기다리기도 하십니다.
오늘, 그분의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삶에 가득 가득
거룩한 욕심을 채우고 살아가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부산]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박경빈 신부(전포성당 주임)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 말씀은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가 깊이 새기며 간직해야 할 물음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이 물음에 대한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마르타의 대답이 부활을 준비하는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 사랑하는 이를 잃어 보신 분들은 그 가슴 먹먹함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비록 성당을 다니고 부활을 믿고 고백하더라도 막상 죽음이란 현실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왜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냐?”는 식으로 꾸짖거나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신 주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부활에 대한 신앙 부족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겪어 왔고 또 겪고 있는 죽음이라는 아픔을 그분도 함께 느끼며 우십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죽음을 부수시고 오늘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 죽음을 함께 아파하시며 눈물 흘리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우리에게 산 희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화답송 시편은 우리가 주님께 불러드려야 할 적절한 찬미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주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무덤 입구를 여시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복음은 말합니다. 이 일로 많은 유다인이 믿게 되었다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시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의정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김재근 신부
찬미 예수님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에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의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의지로 극복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내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으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스스로 힘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살리십니다.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 또한 당신의 뜻대로 하실 수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기적은 우리가 지금 살아 숨쉬며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즉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또한 우리는 라자로의 죽음과 그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신비를 미리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도착하셨을 때, 라자로는 이미 숨이 끊어져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주위에는 죽은 그녀들의 오빠, 라자로를 애도하고 그녀들과 함께 슬픔을 나누려는 많은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였지만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세상 마지막 날에 살아나리라는 일반적인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그들의 믿음을 꾸짖고, 라자로를 살리시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보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죽음의 그늘 속에서 지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죽음의 문화 영향 아래에서 우리는 흔하게 죽음을 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소중함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보다는 지금의 삶 안에서 보다 더 많은 힘과 돈을 지니며 한순간이라도 남보다 더 잘난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끝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시고 이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부르십니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신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얽매고 있는 죽음의 어두움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을 갖고 생활할 때 우리는 라자로와 같은 영광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산]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아, 이리 나와라!/ 이 민 신부
어느 마을에 모든 것을 통달한 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작고 초라한 동굴에 살았는데,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진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자가 그 스승의 소문을 듣고 그 동굴로 찾아가는 길에 투덜거리며 그곳에서 오는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여행자가 “왜 그렇게 화를 내며 오세요? 야단이라도 들으셨나요?” 하고 묻자, 그 사람은 “작은 동굴에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갔지만, 얻기는커녕 도대체 이상한 냄새가 나서 앉아 있을 수 있어야지요. 사람들이 찾아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네요! 당신도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면 안 가는 게 좋을꺼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여행자는 먼 길을 왔기에 그냥 한번 만나보기로 하고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그 스승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아름다운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 향기는 몸에서 나는 향기가 아니라 영혼에서 샘솟는 향기였습니다.
사실 그 스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몸에서 나는 냄새만 맡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말 속에서 풍겨나는 영혼의 향기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인간을 만납니다.
라자로……. 그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만나보려고도 더 이상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다가오십니다. 사람들의 시선과는 또 다른 시선으로 다가오십니다. 당신의 사랑스런 목소리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주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손과 발이 묶이고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움직일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한 인간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걸어 나옴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은 주님의 품 안에서 생명의 향기를 맡으며 살아가야 하며, 주님께 받은 향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냄새를 풍기려고 향수를 뿌리지만, 우리는 주님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과의 약속과 우리의 의무를 잊어버리고 하느님의 향기보다 세상의 냄새를 풍기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사랑스런 목소리로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이리 나와라!” 이 부르심에 “예”라고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로 나아가서 세상의 냄새를 털어내고 주님의 향기로 생명의 기운을 다시 채워야 합니다. 주님께 응답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주님의 향기를 풍기며 살겠노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은총의 사순시기의 막바지, 부활을 준비하는 우리가 풍기는 향기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당신의 자녀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천] 신뢰의 침묵/황성진 신부
찬미예수님!
주님 수난의 때가 가까워지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더 큰 사랑을 준비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마르타의 기도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들은 시련과 고통 중에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이라 말하며 마르타처럼 청원과 탄식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더 큰 믿음이, 더 큰 사랑이 자리잡을 것에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자녀의 모든 청원을 들어주기보다는 때로 침묵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예수님께서도 침묵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는 분으로 2009년 시성된 성녀 쟌 쥬강 십자가의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자가 되십시오. 날 때부터 작은 자인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가며 되는 것입니다. 가끔 기분 내킬 때마다 시간을 내어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귀부인이 되려 하지 말고 스스로 작아지십시오. 다른 이들의 시선이나 칭찬에 개의치 마십시오. 장미는 사막에서도 피어나고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성녀 쟌 쥬강은 수도회의 설립자였으면서도 다른 이들에 의해 죽는 순간까지 잊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과 온유, 신뢰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든 활동을 금지당한 채 잊혀질 처지에 놓였을 때 그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성취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원하시고 계심을 깨닫고, 오직 주님 앞에 홀로 마주앉아 하느님의 겸손을 배우며 살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에서 보여주셨던 기도는 침묵의 기도였습니다. 온갖 고소와 질책을 받으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 성녀 쟌 쥬강의 침묵은 무력감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곁에 계심을 믿고, 또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신뢰의 침묵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찾을 때마다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깨어있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다른 복음 묵상
그때에 1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2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3그리하여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 하자, 9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1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2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13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16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17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8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9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 27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28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29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0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32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 하고 말하였다. 37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 ?” 하였다. 38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 41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의 말씀에 우리 삶을 맡기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라자로를 되살리는 기적을 통해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 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 기적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는다는 것’ 은 예수님이 기적 자체로 존경받거나 찬양받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11, 14 이하 참조), 이 기적이 장차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게 될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11, 46 – 54)
예수님은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 후에야 ‘사랑하는’ 친구를 찾아가는 데, 슬퍼하는 마르타한테 당신이 ‘부활이며 생명’ 이심을 알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17 – 27절) ‘부활이요 생명’ 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라는 8장 12절의 말씀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을 계시하는 것으로, ‘인간은 나를 통해 부활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기준은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그분께 믿음으로 응답한다면, 그 사람은 그분과 지속적인 관계 안에 머묾으로써, 이미 이 지상에서 ‘영원한 생명’ 을 소유하게 됩니다. (5, 24 참조) 라자로의 부활은 장차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서 장엄하게 드러나게 될 이 진리를 사람들한테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마르타한테 ‘너는 이것을 믿느냐 ?’ 라고 물으시는데, 이는 기적이 ‘믿음’ 과 관련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타는 이미 요한복음 1장에 소개된 예수님의 칭호들을 사용해서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메시아(1, 41), 하느님의 아드님 (1, 49; 10, 36 참조),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 (1, 27; 30)이신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마르타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시기 위해 무덤 앞에서 다시 가르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4절에서 라자로의 질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이라고 하신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증명합니다. 이 기적은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시며,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기 위해 하느님이 보내신 분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영광이 극적으로 드러나게 될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기 전에 먼저 준비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41절) 기도하십니다. 눈을 들어 올린다는 것은 성경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상징합니다. 그분은 감사로 기도를 시작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1절) 오늘 화답송은 예수님 기도의 영적 배경을 이룹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130, 1 – 2) 이 기도 후에 죽었던 라자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옴으로써, 하느님이 무덤을 파헤치고 당신 영을 불어넣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환시를 보리라는 에제키엘의 예언이 실현됩니다. (에제 37, 12 – 14) 나아가 이 기도는 라자로를 살리는 일과 관련된 것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이 장차 겪어야 할 죽음의 공포에서 그분을 살리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신뢰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굳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신 것은 기적을 행하기 위해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도, 군중이 들으라고 크게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회개시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데’ (요한 11, 42)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앞으로 그 기적뿐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친교를 증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서 더욱 길고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묵상 (Meditatio)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과 예수님의 기도는 ‘부활이요 생명’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이 신앙 체험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로마 8, 11) 모든 인간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기도 (Oratio)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시편 130, 5)
[전주] 마른 뼈들이 생명으로 다시 되돌아 온다/ 나궁열 신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환시 속에서 사람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에제키엘,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마른 뼈들이 생명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겠느냐?” 그 예언자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주 야훼님, 당신께서 그것을 가장 잘 아십니다”(에제 37,3). 뼈 하나하나가 그것의 다른 반쪽을 찾듯이, 뼈들과 뼈들이 털거덕털거덕 소리를 내었다. 그 뼈들은 근육들에 의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살은 그것들을 에워싸고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살가죽이 살을 덮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그 몸들 위에 숨을 불어넣고 그들은 생명으로 되돌아왔다!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저 깡마른 뼈들의 처지와 비슷했다. 하지만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해내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계약이 처음으로 체결되었던 날처럼(레위 26,12), 다시 한 번, “주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얼마 후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되돌아왔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제키엘이 환시에서 보았던 일이 예수님에게서 현실로 드러났다. 죽었던 나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과 나자로 가족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있는 라자로를 보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슬픔에 함께 하셨다.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파괴하는 우리의 죽을 몸들까지도 다시 살리실 것을 확신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사랑하는 이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죽어가는 오빠 라자로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한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가족의 우환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자.
[부산] 요한 11, 1-45./서공석 신부
요한복음서는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초기 신앙인들의 명상록입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그 때 이미 있던 다른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 9장은 예수님이 어느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회복해 준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자 예수님에게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보고, 새롭게 믿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에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인 11장입니다. 착한 목자가 자기 양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고, 당신은 죽임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읽지 않았지만,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요한복음서 11장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고 그 사실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예수님의 위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70년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분의 죽음에 대해 명상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 계시며, 그분의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역사에 흔하디흔한, 무죄한 자의 억울한 죽음의 하나였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셨고, 그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기 전에 ‘비통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그분이 라자로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이 명상의 자료로 제공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시듯이, 예수님도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셨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무릅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라자로를 살린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를 살린 이야기들은 다른 복음서들 안에도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린 이야기가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서들 안에 있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이야기가 루가복음서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료로 삼아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질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답하시기를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진다.”(11,5)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남긴 말이고, 초기 교회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기 위해 인용하던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오늘의 이야기를 구성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을 ‘라자로’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도 요한복음서가 의도적으로 한 일입니다. 루가복음서에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예화(16,19-31)가 있습니다. 그 예화에서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이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청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오늘의 이야기에 라자로를 등장시켜 죽었던 라자로가 실제로 살아 돌아왔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사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끝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이 복음서는 “다 이루어졌다.”(19,30)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끝까지 당신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같은 실천을 하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실천들이 있는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마르타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주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요한복음서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여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이 반영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삽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려 합니다. 재물과 권력을 얻어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질을 보장하려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보장해 주시는 생명을 찾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에서 그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비통해 하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실천이 비록 자기 목숨을 대가로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랑에서 우리 생명의 의미와 삶의 질을 보고 배우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흐르는 생명 현상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
[춘천] 새로운 삶의 기적/송병철 신부
어떤 성인은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썩어서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존재이지만 오늘 복음의 기쁜 소식은 주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력으로 부활을 이룰 수 있는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이것은 죽어서 부활하리라는 암시가 들어있는 희망이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는 현실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현실적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기적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기적이 일어난다는 루르드 성지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정말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을까” 하는 기대에 차서 떠났습니다. 그곳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며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열성을 다해 순례를 마쳤습니다. 그런데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죄가 많아서 그런가?” 하며 자신을 반성하기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기적을 기대하고 그곳을 찾아 갔으나 돌아 올 때는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고 부족함을 느끼며 돌아 왔습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는 본당 신부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본당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게 루르드의 기적은,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아니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향하게 되었으며 자신을 반성하게 했던 그것이 바로 더 큰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그런 큰 기적은 다시 재현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르타와 마리아가 고백했듯이 생명이신 하느님 부재 체험 같은 죽음은 항시 존재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의 소식을 듣는 순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더 큰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라는 말씀을 믿는 우리들도 새로운 생명의 마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라자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에서 벌떡 일어났듯이 우리도 그분의 소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육체에 끌려 살았던 죽을 운명에서 영으로 살아가는 부활의 생활로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어 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벌떡 일어 납시다.
[군종]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김혁민 신부
찬미 예수님!
제가 좋아하는 생활성가 중에
길이 없는 듯 보이는 곳이라도
나의 주님 나를 위해 길 만들어 주시네.
날 이끄는 분 나를 안아 주시니
사랑과 용기 솟아나 바른 길 가네 바른 길 가네
사막을 걸을 지라도 날 인도하시니
난 보게 되리라 그 분의 손길
모두 사라져도 그분 말씀은 남아
영원히 새로우리라
길이 없는 듯 보이는 곳이라도
나의 주님 나를 위해 길 만들어 주시네
날 이끄는 분 나를 안아 주시니
사랑과 용기 솟아나 바른 길 가네 바른 길 가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 라자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죽음마저도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는 은총으로 변화됨을 묵상하게 됩니다. 모두가 끝이라 여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통해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선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여정 속에서도 각자마다 죽음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가난, 질병, 미움, 분노, 욕심, 죄의식 등에 얽매여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희망을 잃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곤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속박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통해 우리를 풀어 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신다는 믿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마음에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번 한 주간 정성되이 함께 기도드립시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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