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벽돌 무당집

기억력 “인간의 기억력이란 건.” Z가 말했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것은 참으로 이상한 능력이야. 자기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기억은 아무리 오래 전 일이라도 신기하게 모두 기억해 내면서 어떤 기억들은 아무리 가까운 시간에 벌어졌어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네.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이 명백한 경우에도 그 기억이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져서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지.” R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흠, 글쎄. 난 기억이 지워진다는 자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네. 인간의 뇌란 것은 말야,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한번 경험한 기억은 절대로 잊어먹지 않는다고 알고 있네. 방금 전에 겪은 기억이든, 오래 전에 경험한 기억이든 뇌는 모든 기억을 저장하고 있어. 저명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우리는 우리의 뇌의 능력의 10%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지 않았나? 다만, 그렇게 저장된 뇌의 기억을 우리가 끄집어내는 능력이 부족해서 기억을 잊은 것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 우리는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어.”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전까지 그들은 기억력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꺼낸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들이 그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저녁식사 자리에서, 스테이크에 포도주를 곁들여 먹는 자리에서, 고요한 연못에서 개구리가 튀어 오르듯 기억력에 대한 화제는 그렇게 갑자기 그들의 식탁에 튀어 올랐다. 식당의 다른 손님들은 그들의 식탁에 튀어 오른 다른 개구리들을 화제로 삼거나, 묵묵히 요리를 음미하며 기분 좋은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Z는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럼 R, 자네는 인간이 겪은 모든 기억이 뇌 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고 말하는 건가? 그리고 그 기억을 끄집어 내는 능력만 있으면 아무리 오래 전 기억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R은 고기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렇게 생각해. 실제로도 태어날 때부터의 모든 기억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모두 기억해내는 사람이 있어. 그의 경우에는 선천적으로 기억을 들추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경우라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 같은 사람들도 훈련만 한다면 아무리 오래 전의 기억이라도 끄집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네.” Z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포도주를 음미하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우리 간단한 내기 하나 할까? 자네가 뇌 속의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고기를 먹던 R은 Z의 제안이 흥미로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내기를 하자고?” “그래, R 네 말대로라면 너 역시 머릿속에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지. 네가 그 기억을 이 자리에서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면 네 주장이 맞는 거고, 그렇지 않다면 내 주장이 맞게 되는 거지.” “난 뭘 기대하면 되는 거지?” Z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안주머니에서 잠자고 있던 지갑을 꺼내더니 작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R이 사진을 무심코 보려고 하자, Z는 사진을 급히 숨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이런.” 그가 퀴즈문제를 내는 사회자처럼 격식을 차렸다. “내기를 하려는 도전자가 정답을 보려고 하면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고.” “그게 자네가 낼 문제 였나?” “물론이지. 이 사진은 지난주에 나와 자네, 그리고 우리의 친구 D가 술자리에서 찍은 사진이야. 자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때 우리 친구 D가 입었던 모자, 옷, 반지 등의 차림새를 기억해 내는 일일세. 어때? 사진 속 그의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겠나?” Z는 R의 눈앞에서 사진 뒷면을 흔들어보였다. R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Z는 애초에 이 내기를 위해 R에게 기억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진을 꺼낸 것과 그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R은 직감적으로 그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R은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함이 감도는 것을 억누르면서 대답했다. “그래, 이 내기에 뭘 거는 거지?” “자네와 내 왼쪽 손목.” Z가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R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을 걸라는 Z의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난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 “아무래도 자네가 장난이 심한 것 같아. 자, 그런 이야기는 그만 두고 식사나 마저 즐기자고. 좋은 식사시간 아닌가.” R이 기겁을 하며 Z의 제안을 거절하자, Z의 표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변했다. 거칠게 스테이크를 썰며 느릿한 투로 비꼬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멱살을 잡아채고픈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래, 뭐 내기고 뭐고 집어치우지 뭐. 자네가 그토록 확신하는 이 일에 대해서 왜 그렇게도 겁을 내는지 모르겠어.” R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Z 녀석은 예전부터 R에게 빈정대는 태도를 취하면서 종종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 웃고 있는 저 입을 위아래로 찢어버리고 싶다. 그의 건방진 태도는 환상적이던 이 식당의 스테이크 맛마저 떨어뜨리게 할 정도였다. R은 포크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아, 내기를 받아들이지.” “그래, 그거야.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는 손목 하나쯤은 걸어야 그게 남자지.” Z는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분주히 이런저런 준비를 시작했다. 차에서 이상한 기계를 가져온 그는 테이블 한 가운데에 그것을 놓더니 작동 스위치를 누르고는 기계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R이 Z에게 물었다. “이 기계는 뭐지?” “손목을 자르는 기구라네.” Z가 이지러진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내기를 좋아하는 한 노인에게 돈을 주고 샀지. 그 노인은 아마 내가 준 돈으로 다시 내기를 시작하겠지, 흐흐. 이 기계는 이렇게 쓰는 거네. 왼쪽 손목을 서로 이 구멍에 넣고 족쇄를 잠그네. 이 족쇄는 열쇠로 열지 않으면 절대로 풀리지 않아. 족쇄 위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는데, 내기에 패한 자는 과자를 좋아하는 마리 앙투아네트 처럼 단두대의 고통을 맛보게 될 거야.” “그런데 그렇게 공정할 거라고 어떻게 보장하지? 내가 내기에 이겨도 자네가 내 손목을 자를 경우는 없을 거란 것을 어떻게 보장하지?” Z는 껄껄 웃으면서 R을 안심시켰다. “이 기계는 그렇게 허술한 기계가 아냐. 여기 세 개의 리모컨이 있는데, 두 개는 스위치가 하나고 하나는 스위치가 두 개이지. 일단 스위치가 하나인 이 리모컨 중에 하나는 내가 가지고 하나는 네게 주지.” Z는 파란 버튼이 있는 리모컨을 R에게 주고 빨간 버튼이 있는 리모컨은 자기가 가졌다. R은 괜히 테이블에 남아 있는 빨간 버튼과 파란 버튼이 달린 리모컨에 눈길이 갔다. “나머지 리모컨은 누가 가지는 거지?” “이 재미있는 내기를 공정히 봐 줄 심판의 것이지. 심판이 이 내기에서 진 사람의 스위치를 누른 다음에 내기의 승자가 자신의 리모컨의 스위치를 눌러서 손목을 자르는 거지. 이 놀라운 기계는 그저 스위치 하나로 작동하지 않는다네. 우리가 가진 리모컨의 스위치를 누르고 심판이 가진 리모컨의 스위치를 눌러야만 이 기계가 작동하는 거지, 한번 볼 텐가?” Z는 심판의 리모컨에 달린 빨간 버튼과 자신의 리모컨에 달린 빨간 버튼을 눌렀다. Z가 앉아 있는 자리 앞에서 철커덩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사를 즐기던 손님들이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기계는 정상인 것 같군.” “완벽히 정상이지. 내기하기엔 딱이야.” Z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비볐다. R은 혹시 속임수가 없나 기계를 꼼꼼이 살피며 물었다. “그래, 이 게임의 정확한 규칙은?” “규칙은 세가지.” Z가 손가락을 꼽아 들었다. “첫째, 사진 속 D의 모습 중 특징적인 것들을 기억해 낸다. 단, 선천적 흉터 등은 제외한다. 둘째, 세 번까지는 오답이 가능하다. 하지만 네 번째 오답일 때는 손목을 자른다. 셋째, 30분 이내에 모두 기억하지 못할 시에 손목을 자른다.” “왜 하필 30분이지?” R이 물었다. “오, 1시간 이상 도전자에게 기회를 주는 퀴즈쇼는 없거든.” Z가 미소를 지었고, R도 그에게 부자연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사진 속 특징을 찾아주고 그게 일치한다는 건 누가 확인하지? 심판이 누구지?” Z는 네거리에서 길을 찾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크게 선심 쓰는 투로 말했다. “이번에는 R 네게 결정권을 주지. 심판을 선택할 권한은 R이 갖는다. 다만, 심판은 이 식당 내부의 모든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한다.” “철저하군.” R이 빈정거리자, Z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야 나도 최악의 경우는 피하니깐.” “끝까지 잘났군.” R은 툴툴거리며 식당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지지배배 거리며 식사를 즐기는 두 명의 숙녀들과 혼자서 야채스프를 홀짝거리는 틀니를 뺀 노인, 포도주를 음미하는 두 부부와 그리고 식당 한 구석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잘 교육받은 웨이터가 있었다. 웨이터는 R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 R은 Z에게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가리키며 선언했다. “저 웨이터, 저 웨이터가 심판이야.” R은 웨이터에게 이번 내기의 심판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고, 웨이터는 정중히 이 제안을 수락했다. 두 사람의 왼손은 냉정한 한 발명품에 단단히 고정되었고, 열쇠와 버튼이 두 개인 리모컨, 그리고 문제의 사진은 웨이터의 손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계약서도 작성했는데, 이 내기에 대해서 자신의 생명을 잃더라도 서로의 탓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계약서였다. 웨이터는 사진 속 D의 소지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적어갔는데, 꼼꼼한 손놀림은 흡사 속기사를 보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던 손님들이 이 진귀한 내기에 관심을 보이며 몰려들 때 즈음, 필기를 마친 웨이터가 말했다. “모두 끝났습니다, 손님. 사진 속 대상의 특징은 모두 열 가지입니다. 참고로 사진에는 하반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상반신에 대한 기억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Z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R은 이유도 모르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각오를 다졌다. 웨이터는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내기의 시작을 알렸다. “7시 30분입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종료시간은 8시입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