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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허베이성 박물관의 청동기유물이 사진으로 올라온게 있더군요.
그중 한 유물에 시선이 갑니다.
바로 숟가락 입니다.
모양이 화하족의 것이 아닌 한국의 것과 무척 흡사합니다.
사진출처:
상나라. 흔히 은허문명으로 불리던 시대의 것입니다.
탐원공정이 진행되기 전만 해도 이 상나라를 주나라의 화족과 다른 민족으로 많이 분류했었죠.
그리고 사진처럼 상나라가 숟가락을 사용했는데 과연 주나라는 어땟을지 궁금한데....
네이트 지식인엔 이런 지식글이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 숟가락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가장 오래되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000년 전의 것으로 여기는 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주나라 때에는 국자모양으로 생긴 숟가락을 사용하였다. 이 숟가락은 솥에서 삶은 고기를 꺼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 후기에 국자형 솓가락은 사라지고 입과 손잡이가 분리된 주걱 모양의 숟가락이 사용되었다. 밥 먹는데 편한 모양으로 개량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명나라 이후 숟가락은 점차 쇠퇴하고 젓가락 중심의 음식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중국 음식이 뜨거운 기름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데 이것을 먹기에는 젓가락이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나라 이후 차 마시는 문화가 일상 생활에 자리 잡으면서 점차 국물이 있는 음식을 적게 먹게 되면서 자연히 숟가락이 퇴보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늘날 중국 북쪽의 사람들은 만두국을 먹을 때에만 숟가락을 사용한다.
윗글에 보면 주나라는 국자모양의 숟가락. 그것도 고기를 꺼내는 그냥 국자라고 불려야 할 물건을 사용했다고 나오는군요.
결국 상나라때의 식기문화는 주나라로 이어지질 않거나 이어졌어도 많이 변용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숟가락 문화는 좀더 나중인 진나라때 제데로 사용되는걸로 보여지는데요.
다른곳의 자료를 좀더 보겠습니다.
중국인의 주식인 판은 밀과 벼농사의 상태, 환경적 조건에 따라 지역적으로 구분된다. 가장 북쪽은 대체로 밀농사 지역에 속해 이곳의 중국인들은 밥으로 멘타오[麵條 국수]나 만토우[饅頭 찐빵], 쟈오츠[餃子 물만두]를 주로 먹는다. 아침으로는 만토우, 점심과 저녁에는 멘타오와 자오츠를 주로 먹는다. 이 북방인들이 음식물을 입에 넣을 때는 반드시 젓가락을 쓴다. 그들은 모든 음식을 먹을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숟가락은 쓰지 않는다. 면류로 대표되는 그들의 주식으로 인해 숟가락 사용이 보편적이지 않다.
1-2. 남방에서는 주로 쌀농사를 한다. 쌀밥은 그 지체만으로는 먹기 어렵다. 이로인해 남방인은 쌀밥과 함께 두세 가지 채소 볶음 요리와 탕으로 구성된 식단을 갖춘다. 따라서 남방인의 식탁에는 언제나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이 준비된다. 그러나 숟가락은 밥을 떠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탕을 먹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숟가락은 탕숟가락이다. 현제 중국인들은 이 탕숟가락을 구어체로 사오즈[勺子], 문어체로는 찬츠[餐匙]라 한다. 사오즈는 어떤 것을 떠낼 대 사용하는 기구로 자루가 있으며 주로 술단지에서 술을 떠낼 때 사용했다.
1-2-1. 秦나라(221~206 BC) 이전까지는 匕라 불렀다. 중국 신석기유적에서 이 고대형 匕가 많이 발굴되었다. 당시 쓰는 匕는 주로 동물의 뼈로 만들었다. 평평한 긴 막대기형으로 끝부분이 특히 얇게 제작된 것과, 오늘날 우리의 주걱과 비슷한 형태를 한 것으로 숟가락의 입과 자루가 분명하게 구분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황하 중류 신석기유적인 河北省 츠산[磁山, 6000~5000 BC 유적지]과 서안 양사오[仰韶 5000~3000 BC]에서 匕가 각각 23점과 27점이 출토되었다. 황하 하류인 산동성 다먼코[大汶口, 산동성 泰安, 4000~3400 BC]에서는 주걱형 몇 점을 포함하여 총 24점의 匕가 나왔다. 그중에는 방합 조개껍질로 만든 것도 있다. 무덤 유적지에서는 사자가 손에 匕를 쥐고 있는 채로 발굴되었다. 비교적 늦은 시기인 황하 상류 치쟈[齊家, BC 2000년 전후]유적지에서는 총 128점의 평평한 형태의 骨匕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무덤 속 사자 허리 부분에 놓여있었다. 이 지역 출토 骨匕는 모두 한쪽 끝에 구멍이 나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끈으로 골비를 묶어서 허리에 차고 다녔을 것이다.
이들 중원지역 신석기유적 숟가락은 대부분 평평한 형태이다. 신석기시대 황하 유역에서는 주로 조가 재배되었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갈돌에 갈아 가루를 낸 후 토기에 넣고 물에 반죽하여 익혀 먹었을 것이다. 이렇게 익힌 음식은 떡과 죽의 중간 정도 상태였을 것이다. 평평한 형태의 숟가락을 이용하면 이것을 먹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산동성 대문구지역과 장강 이남 절강성 허무두[河姆渡, 5000~3300 BC 유적지]에서는 소량의 주걱형 숟가락을 발견했다. 조에 비해 찰진 성향을 지닌 쌀로 익힌 음식을 먹을 때는 주걱형 숟가락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내몽골 샤쟈덴[夏家店 2000~1500 BC]에서도 청동 주걱형 숟가락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그 용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 숟가락은 일반적으로 밥을 먹는데 사용한 주걱과 고기나 술을 떠낼 때 사용한 국자로 구분된다. BC 2000년경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중원의 한족과는 달리 수렵 채집생활를 주로 했다.
하남성 얼리두[二里頭, 1900~1500 BC] 지역에서 숟가락의 입을 세밀하게 깎은 주걱형 骨匕 2점을 발굴했다. 이후 西周시대(1122~770 BC) 비로소 청동으로 만든 주걱 형태의 숟가락이 보편적으로 쓰였다.
1-2-2. 東周 때(곧 춘추시대, 770~453 또는 403 BC) 유지에서 발견되는 숟가락은 일반적으로 주걱형인데 大小 2종이 있다. 작은 것은 10cm 이내, 큰 것은 57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대소를 막론하고 청동 匕는 청동으로 만든 三足의 솥인 鼎과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 숟가락이 솥에 담긴 음식을 떠내는데 주로 쓰였음을 암시한다. 즉 고대 중국의 숟가락은 밥을 먹는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국자로 사용한 것이다.
주나라 때의 의례서인 “儀禮”에 당시 쓰였던 匕는 飯匕, 挑匕, 牲匕, 疏匕의 네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반비가 밥을 먹을 때 사용한 것은 명백하지만 나머지 3개의 용도에 대해서는 아직 정론이 없다.
王仁湘은 “도비, 생비, 소비는 모두 제사와 접객 때 솥에서 육고기를 꺼낼 때 사용되었다. 육고기를 잘 건져내기 위해 국자의 입이 많이 굽어있다. 반비는 비교적 작은 것으로 직접 밥을 떠먹을 사용했다.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주나라 때의 의례가 붕괴되면서 大匕는 점차 소실되었고 小匕가 실용적으로 개량되면서 보편적으로 쓰였다”고 했다.
주나라 때의 육고기는 주로 겅[羹]이란 음식에 담겨 있었다. 오늘날 겅은 탕으로 이해되지만 주나라 때의 겅은 육고기, 채소, 열매 등의 건더기가 매우 많은 진한 국이었다. 이것은 육고기를 익혀 먹는 조리법이었다. 이 겅 속에 있는 건더기를 건져낼 때 大匕를 썼다.
도비는 향신료로 쓰인 열매를, 생비는 육고기를, 소비는 채소를 각각 꺼낼 때 사용했던 국자일 것이다. 반비는 오늘날 우리의 숟가락과 비슷한 형태로 전국시대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이후 前(西)漢시대(BC 202~AD 8)까지 漆木의 것과 청동으로 만든 것이 함께 쓰였다. 後(東)漢 때(25~220)는 은으로 만든 숟가락도 등장한다.
1-2-3. 송나라(960~1279)와 원나라(1206~1368) 때까지는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명나라(1368~1644) 이후 숟가락은 점차 쇠퇴하고 젓가락 중심으로 바뀐다. 周達生은 “송나라에서 원나라에 이르는 시기에는 적어도 북경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 사람들은 조로 지은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했다. 그것이 명나라에 들어와서 장강 이남에서 재배되던 멥쌀이 화북지역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고, 이 멥쌀로 지은 밥은 적어도 그 이전의 잡곡밥에 비해 찰진 성질을 지닌 것이라 숟가락보다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라 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남방의 멥쌀에 비해 더 찰진 성향을 지진 자포니카계 쌀을 먹어왔지만 오늘날까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명나라 때(1368~1644) 화북지역 사람들은 주식으로 멥쌀을 먹게 되면서 젓가락을 사용한 것과 함께 다른 변동 요인이 있을 것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은허에 있는 묘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銅으로 만들었다. 춘추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젓가락은 대부분 강남과 서남지역에서 발견된다. 한나라 유적에서는 비교적 적은 양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청동과 대나무로 만들었다. 호남성 장사에서 발굴된 馬王堆1호 漢墓에서 나온 한쌍의 대나무 젓가락은 길이 17cm로 옻칠을 한 술잔, 사각반과 함께 출토되었다.
수나라 유적에서 나오는 젓가락은 은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길이가 30cm 이상이며 지름 0.5cm의 아주 가는 것도 이 시대 등장한다. 당나라 때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둔황 473호 당나라 때 그림인 宴飮벽화 摹本에는 장방형 식탁에서 의자에 앉은 남녀가 각각 숟가락과 젓가락을 본인 앞에 두고 연회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출처:http://blog.daum.net/muaedongcheon/604
바로 아래에 이어지는 내용은 당나라 대에야 겨우 북방으로부터 식탁문화를 전수받았는데 그 북방과 긴밀한 한반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분리하는 식문화를 되려 전파했다고 서술하는군요.
당나라 때 숟가락과 젓가락의 분리 사용은 금시 한반도와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철제 숟가락과 젓가락 세트는 그 모양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
좀더 가면 근세조선의 식문화가 주나라의 것을 물려받은거란 주장도 있군요. 주나라땐 수저는 없고 국자만 있었는데
앞뒤가 맞질 않는 소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고대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다. 우리의 수저 사용은 우리의 일상 식사가 국물 음식과 국물이 없는 음식을 항상 병용해서 구성해 왔기 때문이라고 보고있다. 특히 국물음식을 즐겨 먹고 찌개와 같은 고대의 羹을 함께 먹는 습관은 반드시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게 했다. 주달생은 한국의 이러한 현상을 숭유사상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한국의 숟가락으로 밥, 탕, 국, 찌개를, 젓가락으로 다른 반찬을 먹는 것은 “周禮”에 나오는 예법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철저하게 주나라의 것을 모범으로 삼아 식사를 했다는 점이 한국의 전통적인 식사법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의 숟가락이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중국의 것과 유사한 형태로 변화되다가 조선 중기 이후 독자적인 형태를 띠었다는 사실에서도 중국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반증한다.
그럼 한국의 수저유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리
신라
거푸집
신라 왕경유적의 숟가락
인용글에 나온 무령왕릉의 유적.
백제
후기신라
고려
근세조선
위 사진을 보면 고려때에 숟가락의 형태가 갸름한 형식을 띄었지만 전체적으로 맨 위에 나온 상나라의 숟가락과
큰 차이가 없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주나라때의 국자는 숟가락과는 형태도 쓰임도 다릅니다. 수저의 시초가 국자일수도 있겠지만 주나라는 상나라의
문화와 민족성을 이어받지 않았으며[중공이 예전 발표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요즘 말이 바뀌었지만] 주나라의 국자
를 동북아 숟가락문화의 전파와 연결짓는것은 무리입니다.
그저동북아 식문화의 종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짜집기논리오 생각됩니다.
실제로 현재 볼수있는 국자형태의 화족식 숟가락찬츠[餐匙]은 암만 국을 뜨는데만 쓴다해도 비 실용적이죠.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아닌 북방의 고구리 숟가락이 되려 상나라와 흡사하단건 짚어볼 문제입니다.
진나라때 주걱형 匕가 쓰였다지만 위 참조글에선 고대 화족들은 이 걸 국자의 용도로 주로 썻음을 밝힙니다.
은나라, 은허라고도 불리우는 저 상나라의 청동기문명은 중공 스스로도 예전 화하족이 아니란 중론을 최근에 와서
야 말을 바꾼 전적이 있습니다. 과연 주나라가 제대로 이어받지도 못한 저 청동기 문물들이 화하족과 동이족중
어느쪽에 더 가까울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화족의 숟가락. 수저라기 보담 국자의 일종이다.
고조선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했다.
함경도 서포항 유적지등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청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동물의 뼈로 만든 숟가락이 있는데,
손잡이 부분에 아름다운 조각까지 새겨져 있었다...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숟가락도 있었을 것이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엿다"-이덕일,김병기 저.
또 최근 평양에서 단군조선때의 숟가락 유적을 발굴햇단 소식도 있는데 사진자료는
없는 모양입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집단이 고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표대유적 고대 집자리(집터)에서 돌숟가락을 새로 발굴했다고 <조선신보>가 24일 평양발로 보도했다.
표대유적은 1994년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의 표대마을 앞 벌에서 발견된 대규모 부락터 유적으로 집자리와 유물의 분포범위는 60만㎡ 이상에 달한다.
신문에 따르면, 이번에 표대유적 4호 집자리와 6지점 밭갈이층에서 새롭게 발굴된 숟가락은 지금의 아동 숟가락과 비슷한 생김새를 띠고 있으며, 화강암을 갈아서 만들었다.
자루 부분이 절반 정도 부러져 없어져 남은 길이는 6.5㎝정도이며, 그중 술 부분의 길이는 4.5㎝, 너비 3.1㎝, 두께 0.4~0.8㎝라고 한다.
숟가락은 시기마다 그 재료에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만 대체로 뼈와 나무 그리고 금속 등의 재료로 만들었으며, 이미 국내에서 오래 전에 원시 및 고대 유적들인 라선시 초도유적, 라선시 굴포리 서포항유적, 무산군 범의구석유적 등에서 뼈로 만든 숟가락이 나왔다고 신문은 설명했다.
또 일반적으로 뼈나 나무는 돌에 비하여 가공하기가 훨씬 쉬우며 금속재료인 경우에도 용해물을 형틀(거푸집)에 부어 넣으면 각이한 형태의 물건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지만 화강암과 같이 굳은 돌로 숟가락과 같은 자그마한 물건을 섬세하게 가공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고 신문은 해설했다.
신문은 이번 발굴로 당시 선조들이 높은 돌가공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식생활에 필요한 도구제작에서도 자기식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재능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225
그리고 위 허베이성 유물사진을 올린 페이지의 또 다른 유물.
이게 그 유명한 도금청동검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칼날이 은근 곡선인게....비파형청동검의 거의 마지막 형태가 아닌가 하기도 하지만
손잡이가 통짜라는 것 등, 차이점도 많습니다.
이건 도금이 없는 보통의 세형동검. 이것도 칼날이 완전한 직선은 아닙니다.
민감한 걸수도 있지만요.....
사진들이 있는 커뮤니티 주소에 좀더 많은 유물들 사진이 있는데 눈이 즐겁습니다.
단, 역사완 무관한 게시판의 글이니 댓글은 안 다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첫댓글 쇠젓가락 놋쇠 숫가락 쓰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음식문화가 최고도로 발달한 우리민족이 젓가락 숫가락의 원조가 아니면,
어느민족이 감히 발달 시킬 수 있겠나이까~
음식조차도 장깨서 들어왔고,
거기에 따라서 숫가락 젓가락이 들어왔다고 하는 종자들,
뇌구조가 저는 참으로 궁금합니다.
된장찌게, 짐치찌게, 콩나물국, 비지국
물짐치, 기타 국물류와 콩자반, 까시락지, 멸치볶음,
각종 수많은 나물종류...이런것 숫가락,젓가락 없으면 못먹어요.
이런 고도의 진화되고 다양한 음식이 있어 숫가락, 젓가락이 나온거죠.
그리고 놋쇠, 쇠 숫가락 젓가락으로 진화한거구요.
장깨와 족바리는 나무젓가락 숫가락 수준입니다...
서양흰둥이들은 쇠스랑가지고 먹고,
동남아나 중동 인도 아프리카는 손으로 줏어 먹고요.
인간은 환경의 동물인데 우리나라가 가장 숫가락 젓가락을 최초로 만들고
발전시킬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거라고 봐요.
쇠를 최초로 만들어 쓴 민족 답게 우리는 ,
아무리 없어도 놋쇠젓가락 숫가락 음식문화 생활을 했어요.
시대별 수저의 변화가 흥미롭습니다. ^^
잘 보았습니다. 수저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는데... 고맙습니다.^^
댓글로도 공부가 많이 되네요.
동양3국에서 숟가락을 사용한 민족은 우리 민족뿐입니다. 지나인들은 물이 귀한 탓에 국물요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물요리가 많죠... 물론 국물요리가 부족한 식량을 대신했겠지만... 아무튼 숟가락은 국물요리를 즐겼던 우리민족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숟가락 유래가 궁금했는데 이곳에서 자료를 찾게 되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