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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라파의누이
▶ 일본이 세계 문화의 중심 국가라는 허장성세(虛張聲勢),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과대망상(誇大妄想), 그리고 이 허장성세와 과대망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역사날조(歷史捏造)의 정신 병력을 캔다!
⑴ 미야모토 무사시의 생애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무사(武士)는 검술(劒術)의 귀재(鬼才)로 일컬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저서로 알려진『오륜서(五輪書)』에 의하면, 무사시는 1584년생으로 지금으로부터 420여년 전의 인물이다.
무사시의 출생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본에서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곳이 여럿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오카야마현[岡山縣] 오하라쵸[大原町], 효고현[兵庫縣] 타이시쵸[太子町]와 가코가와시[加古川市]가 유력하나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16세 경에 고향을 떠나 수행의 길에 들어선 무사시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戰鬪]’에 참전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4년이 지난 1604년에 교토에 나타난 무사시는 검술의 명문 요시오카 일문의 당주(黨主) 요시오카 세이쥬로[吉岡淸十郞]오 그의 동생 덴시치로[傳七郞]와의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어서 세이쥬로의 아들 마타시치로[又七郞]마저 쓰러뜨려,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의 ‘쇼군 사범[將軍師範]’을 지낸 요시오카 일문을 초토화시키며 이름을 날렸다.
무사시는 계속해서 나라[奈良]의 호조인[寶藏院] 창술(槍術), 이가(伊賀)의 쿠사리가마[鎖鎌] 달인 시시도[ 戶]를 격파하고, 스스로의 검술 유파 엔메이류[圓明流)]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1612년 4월 13일, 마침내 미야모토 무사시의 최대 숙적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小次郞]와의 전설적인 ‘간류지마[巖流島]의 결투(決鬪)’가 벌어진다. ‘간류지마의 결투’에서 무사시는 일부러 약속시간보다 늦게 나타나 고지로를 초조하게 만들어 심리적 우위를 점하였다. 여기에서 무사시는 고지로의 트레이드 마크인 1미터 5센티미터의 장검(長劍) 모노호시자오[物干竿]에 맞서 배의 노를 깎아 만든 목도(木刀)로 이겼다고 한다. 무사시와 마찬가지로 이제까지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고지로는 무사시의 일격에 최초의 패배이자 마지막 패배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무사시는 ‘간류지마의 결투’ 이후 다른 유파와의 검술시합(劍術試合)은 일체 하지 않는다.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의 마지막 장면이 ‘간류지마의 결투’인 것도 그 때문이다.
무사시는 1614년 ‘오사카 후유노진[大阪冬之陣]’, 1615년 ‘오사카 나츠노진[大阪夏之陣]’ 등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추종 세력을 소탕하는 전투에 여러차례 참전한 것으로 알려지나 그가 도쿠가와 편이었는지, 도요토미 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사카 후유노진’ 이후 무사시는 각지를 돌아다니는데, 에도[江戶]에서는 도장을 열기도 했다고 한다. 나중에 무사시의 양자가 되는 이오리를 만나게 된 것이 이 때라고 한다.
이오리는 ‘간류지마의 결투’가 벌어진 1612년, 반슈[播州] 수호직(守護職) 아카마츠가[赤松家]로부터 갈라져 나온 다와라가[田原家]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오가사하라가[小笠原家]의 가로[家老]로까지 출세하게 된다. 무사시의 입장에서는 양자 이오리의 출세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한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1637년, 큐슈의 시마바라[島原]에서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가 주도한 농민과 기독교도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다. '시마바라의 변란'이다. 마침 큐슈의 고쿠라[小倉]에 있던 무사시도 진압군에 가담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못 올리고 다리 부상만 입고 말았다.
1604년, 무사시는 병법을 좋아하고 무(武)를 숭상하는 인물인 구마모토번주[熊本藩主] 호소가와 다다도시[細川忠利]의 초청을 받았다. 이듬해 무사시는 평생 동안 닦아온 병법 니텐이치류[二天一流]의 진수를 기록한『병법 35개조』를 다다도시에게 바쳤다.
무사시는 일개 검객(劍客)으로서가 아닌, 자신의 병법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이상을 다다도시를 통해 만인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실천해 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었던 다다도시가 불행하게도 54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자 실의에 빠진 무사시는 모든 세속적인 야심을 버리고 구마모토 교외의 금봉산(金峰山) 영암동(靈巖洞)으로 운둔생활에 들어가 좌선 및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1643년 10월부터 무사시는『오륜서(五輪書)』집필에 들어가 2년 후인 1645년 4월에 마쳤다. 그리고는『오륜서』를 탈고한지 1개월 후인 1645년 5월 19일, 수명의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상이 개략적으로 살펴 본 검신(劒神)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의 일생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이 모두 사실일까, 아니면 허구일까?
⑵ 사사키 고지로에 대한 의문점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숙적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小次郞]이다. 특히 무사시와 고지로 사이에 벌어진 ‘간류지마[巖流島]의 결투(決鬪)’는 일본의 문학 작품과 연극·영화의 백미요, 크라이맥스를 이룬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미야모토 무사시』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의 하나인 사사키 고지로의 실체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니텐기[二天記]』에 의하면 고지로는 에치젠[越前] 출신으로 츄죠류[中條流]의 도다 세이겐[富田勢源]으로부터 검술(劒術)을 배웠다고 되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세이겐의 동생 도다 가게마사[富田景政]와 시합을 벌여 이긴 후, 세이겐 문하에서 계속 수련하기 어려워 병법 수행을 위한 여행에 나섰다고 한다.
고지로의 트레이드 마크인 5척의 장검(長劍) ‘모노호시자오[物干竿]’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검법(劒法)을 간류[巖流]라고 한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무사(武士)와 결투를 벌여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니텐기』에서는 후나지마[舟島]의 결투가 벌어진 1612년에 사사키 고지로가 18세였다고 한다. (1595년 출생설) 무사시보다 11세나 어리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지로의 검술 스승인 세이겐과의 관계가 복잡해진다.
도다 세이겐이란 사람도 생몰년이 확실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다만 그의 동생 도다 가게마사의 생몰년을 고려해 보면 대체로 1520년 전후 출생으로 보여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세이겐과 고지로와의 나이 차이가 75년이나 된다. 또 고지로가 무사시와의 ‘간류지마의 결투’ 3~4년 전인 14, 15세쯤에 90세의 세이겐이 고지로에게 검술지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연 90세의 노인이 혈기왕성한 소년과 과격한 훈련과 검술지도를 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모순은 따로 있다. 고지로가 세이겐을 떠나게 된 이유가 세이겐의 동생 가게마사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하나,『가가한시코[加賀藩史稿]』 라는 책에 의하면 가게마사는 1593년에 70세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1612년의 간류지마의 결투시 고지로가 18세였다면, 가게마사는 고지로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제 반대로 도다 세이겐이나 가게마사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도다 세이겐은 생몰년이 불확실하지만, 동생 가게마사의 출생년도는 1524년으로 확실하다. 가게마사의 아들이 1559년에 태어나 1583년 25세의 나이로 죽은 것도 확실하다.
그러므로 고지로와 가게마사가 같은 세대라면 ‘간류지마의 결투’ 당시 고지로의 나이는 90세, 고지로가 가게마사보다 10세가 젊다면 80세, 20세 정도 젊다고 해도 70세 정도의 노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고지로 사이의 ‘간류지마의 결투’는 29세의 한창 나이의 젊은이와 칠순이 넘은 노인네의 결투다. 무사시가 이겨서 당연한 시합이 아닌가?
⑶ ‘간류지마의 결투’에서 생각되는 이상한 점
일본의 혼슈[本州]와 큐슈[九州] 사이의 좁은 해협을 간몬[關門]해협이라고 한다. 좁은 곳은 폭이 680미터 밖에 안 되어 바다라기보다는 강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살이 빨라 예로부터 단노우라 전투[壇之浦戰鬪] 등 전쟁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 해협 가운데 시모노세키항[下關港] 근처에 떠 있는 섬이 간류지마[巖流島]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간류지마의 결투’에 무사시가 요시오카 일문 등과의 시합에서처러 일부러 늦게 도착해, 고지로를 초조하게 만들어 심리적인 우위에 선 무사시가 자기 페이스로 결투를 전개해 이긴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진상은 알 수 없다.
기타큐슈시[北九州市] 동쪽 외곽, 멀리 간류지마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다무케야마 공원[手向山公園]이 있다. 이 공원의 정상 부근에 세워져 있는 고쿠라비문[小倉碑文]에 의하면 “나가토[長門]와 부젠[豊前] 사이 해중에 후나시마(간류지마)라는 섬이 있다. 양웅(兩雄)이 동시에 맞서서...”라고 적혀 있다.
1654년에 이 비를 세운 사람은 무사시의 양자 이오리였으므로 ‘지각전술’이 무사로서의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동시에 결투를 시작한 것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실제 ‘지각전술’을 구사했다는 증거도 없다.
무사시의 생애 60여회의 시합 중에서도 ‘간류지마[巖流島]의 결투(決鬪)’는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무사시가 만년에 썼다고 하는 병법서『오륜서(五輪書)』에는 ‘간류지마의 결투’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그가 13세 때 벌였던 신토류[新當流] 아리마 키헤에[有馬喜兵衛]와의 최초의 시합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언급하면서 말이다.
‘간류지마’라는 이름의 유래도 이상하다. 이 섬은 원래 후나시마[舟島]라고 불렀었는데, 무사시와 고지로간의 세기의 결투 이후 고지로의 별명인 간류[巖流]를 따서 간류지마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그러나 이 시합의 승자(勝者)는 무사시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따서 ‘무사시지마[武藏島]’ 또는 다른 이름인 ‘겐신지마[玄信島]’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어째서 패자(敗者)의 이름을 따서 섬의 이름을 지었을까?
⑷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의문점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는 생애 60여회의 시합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전설적인 검객(劍客)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영화, TV 드라마나 소설, 만화 등의 소재로 끊임없이 사랑을 받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조차 무협소설이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검술(劒術) 실력을 가진 미야모토 무사시가 막상 대규모의 공식적 전투에서는 그 이름값을 못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무사시는 ‘오사카 후유노진[大阪冬之陣]’·‘오사카 나츠노진[大阪夏之陣]’ 및 ‘시마바라[島原]의 변란(變亂)’ 등 실제 전투에 참가한 회수가 여섯 번인데, 간죠[感狀]를 한 장도 못받았다. 국가대표선수 선발경기에서는 세계 신기록이나 올림픽 신기록을 가볍게 작성하다가도 막상 올림픽 본선이나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서는 메달권에 진입하지도 못하고 예선탈락해 버리는 식이다.
무사시가 에도에서 검술도장을 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도 신빙성은 없다. 당시 에도에는 유명한 검객이나 무사들이 많았는데 시합을 한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무사시가 모두 이겼다고 하는 60여회의 시합 상대 대부분이 실력이 별로 없는 자들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요시오카 형재와의 시합이나 사사키 고지로를 상대한 ‘간류지마의 결투’에서처럼 강한 상대에게는 ‘지각전술’이라는 치사하고 비겁한 무인(武人)답지 않은 전법을 구사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무사시는 자기의 검법을 엔메이류[圓明流]라고 했었다. 그 후「병법 35개조」에서는 니토이치류[二刀一流]라고 하다가,『오륜서』에서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와 니토이치류를 혼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사시의 니토류[二刀流]를 흔히 실전에서 갈고 닦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검법으로 칭송하고 있으나, 실제로 무사시가 니토류를 사용해서 시합을 한 예는 없다. 단순한 이론적 허세일 뿐이다.
무사시가 성격적으로 오만불손하여 제자를 키우는 재능이 없었다는 점, 그래서 그의 제자들 중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 없었다는 점도 무사시에게는 악재이다.
그렇다면 왜 이 정도로 형편없는 필부(匹夫)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검신(劒神)으로 과장되어 오늘날 그처럼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을까? 정답은 바로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소설『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에 있다.
⑸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의『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臧]』와 창작적인 역사날조(歷史捏造)
소설『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의 국민작가 요시가와 에이지가 ‘아사히 신문’지상에 1935년 8월부터 1939년 7월까지 4년간 연재한 작품이다.
당초 에이지는 에도시대의 야담「소데니시키 간류토[袖錦岸柳島]」등을 원전으로 삼아 1년 정도의 연재 예정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그런데 독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오늘날에도 TV드라마의 경우 시청률이 높으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연장 방영으로 빈축을 사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빈축은커녕 독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도저히 조기 중단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문제는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역사적 근거자료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역사적 사실이 아닌 사건도 작가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사시가 에도에 들어와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일본 치바현[千葉縣]의 향토사를 다룬『호덴의 옛날 이야기[法典の昔ばなし]』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우리 절[德願寺]에 들러 잠시 체재한 일이 있습니다. 무사시는 그 때 자신의 이름을 후지와라 겐신[藤原玄信]이라 하였으며, 또한 몸에 승의(僧衣)를 걸치고 일도삼례(一刀三禮)하며 무사시가 직접 만들었다는 호신관세음상(護身觀世音像)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후 나카야마 호덴가하라[中山法典が原]에 집 한채를 지어 그 불상을 안치하고 이 토지를 자신의 성을 따서 후지와라 신덴[藤原新田]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사의 과거장(過去帳)에 의하면, 무사시는 쇼도쿠[正德] 2년 7월 24일 75세로 사망하여 유골을 당사에 매장했습니다. 또한 당사에는 무사시의 유품인 직필(直筆)의 그림과 서(書) 두 폭을 보존하고 잇습니다.’
위 내용대로라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1712년에 75세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사시는 1638년생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요시가와 에이지의 소설에서 무사시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關ケ原戰鬪]에도 참가한 것으로 되어 있고,『오륜서』에도 스스로 1584년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전혀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사실은 에도 막부 말기「소데니시키 간류토」등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연극을 공연할 때, 극적 효과와 에도에 살던 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그렇게 무사시가 에도에 들어와 활동하는 내용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요시가와 에이지의 소설『미야모토 무사시』 에서도, 무사시가 훗날 양자로 삼게 되는 이오리를 만나 황무지를 개간하고 도적떼를 물리치는 등의 에피소드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도쿠간지 및 호덴가하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이 지역이 소설의 무대로 등장하게 되자,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소설상의 허구가 역사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즉 후대의 문학작품이 과거의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실제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호덴의 옛날 이야기』같은 책을 보면 정말로 무사시가 이곳에 와서 토지를 개간하며 살다 작품 관음상도 남기고 떠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에이지가 이러한 자료에 근거를 두고 소설을 쓴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요즈음에도 그 지역 주민이라든가, 미야모토 무사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에이지의 소설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치바현[千葉縣]의 후나바시시[船橋市] 호덴쵸[法典町] 기념식에서는 그곳 지명의 유래가 미야모토 무사시와 관련이 있다고 단정하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인물이 17세기 경에 존재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사시가 곧 간에이기[寬永期]에 구마모토 번주 호소가와 다다도시의 가신으로 서도 및 조각작품을 남기고 죽은 니토류[二刀流] 검객과 동일인이란 확증은 없다. 또 미야모토 무사시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는『오륜서』도 실제 무사시가 썼다는 증거는 없고, 후대의 위서(僞書)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결국 검성(劍聖)이자 구도자(求道者)로서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해 놓은 것은 오로지 소설가 요시가와 에이지의 공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출처; 최천기(崔川基) 著『황당무계(荒唐無稽)한 나라 일본(日本)』학민사版(2005년編)
<이상>
첫댓글 일본인 가운데 무사시를 검신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는게 현실...
일본에서 '검성'이라하면 보쿠덴이나 이세노카미고, 그것도 聖이지 神이 아님.
무사시는 그냥 가장 유명한 검호일 뿐.
소설가가 소설썼다고 까이는 세상.
앞에 빨간 글씨는 열폭인가요
그냥 성공한 밀덕이고 딱히 추앙하지도 않음. 오히려 사사키같은 애들 팬이 많지.
거 참...
충주같은데 가면 임경업이 막 산을 몇발자국만에 올라갔다 내려갔다했다는 전설이 있는곳도 있는데 이건 충주사람들이 자기 고향인들이 조선제일의 사람이라고 과대망상해서 만들어진 전설이겠구만요
일본 전국시대 보병전의 주역은 활->철포 이고 또한 칼이 아니라 창이죠.
그러니 오사카 겨울,여름의 진이나 시마바라의 란에서의 활약에서 감장을 받지 못했다 해서 칼 실력이 없다고 하긴 좀 그렇죠.
검성장군으로 유명한 아시카가 요시테루도 최후는 비참했죠. 다다미를 방패로 포위된 상태에서 분전했지만 결국은 마쓰나가 잡병들의 집단 전술 앞에서 결국은 ....
과장으로 유명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도 칼이 아니라 창.
사무라이=칼 이란 등식은 에도시대를 거치며 정착된 이미지라 보여집니다.
그냥 유명세를 잘 탄 검호일 뿐이에요. 너무 잘타서 문제지.
바키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력 높다고 통솔력도 높으란 법은 없으니 전장에서 업적이 없다고 검술 깎아내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체 누가 무사시를 검신이라고 하죠??? .. 애시당초 일본에선 검신이라는 표현조차 잘 안쓸뿐더러... 일본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검성은 신카게류를 처음 창시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