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틀니
신웅순
그동안 여러 개의 임플란트를 했다. 그런대로 견디어왔는데 얼마 전부터 말썽이다. 오른쪽 윗니들이 시끄럽다. 조용하라 달래면서 근근이 여기까지 왔다.
“아빠, 잇몸이 무너지면 임플란트도 못해 당장 치과 가.”
반강제로 딸아이에게 끌려갔다.
수리비가 나왔다. 꽤 많이도 나왔다.
40년도 훌쩍 넘었다. 아버지 회갑잔치를 마지막으로 할 일 다했다싶어 미련없이 학교 사표를 냈다. 그리고는 대학에 편입학했다.
장농 속에 깊숙히 감추어 두었던 육십만원이 있었다. 아버지 틀니를 해드리려고 마련해둔 돈이었다. 나는 이 돈을 훔치듯 신문지에 둘둘 말아 푸른 꿈을 안고 버스에 올랐다. 놀음하다 장롱을 뒤진 것처럼 뒤통수가 뜨거웠다. 멀어져가는 뿌연 신작로 플라타너스들만 되돌아볼 뿐이었다. 그 길로 등록금을 냈다. 5년 동안 부모 빚을 다 갚아드렸으니 어머니인들 무슨 말씀을 할 수 있었으랴. 내 직접 마련한 돈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도둑질이나 다름 없었다.
아버지는 앞니와 윗니 치아 두 개와 아래 치아 하나 정도였다. 어금니는 기억에도 없다.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 이를 자주 앓다보니 그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성 싶다. 아버지는 치과를 엄두도 못 냈다. 물론 돈 때문이다. 틀니 값을 갖고 내 도망쳤으니 이런 불효가 어디 있단 말인가. 두고두고 마음이 짠하고 아리다.
아버지는 얼마 후 가셨다. 이빨이 아프고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의 누런 앞 치아 몇 개가 떠올라 지금도 가슴에선 눈발 날리고 찬바람만 분다.
그 길로 나는 야간대학을 졸업해 중학교 선생이 되었고 얼마 후 결혼했다. 또 얼마 후 다시 중학교 교사를 사표 냈고 대학원을 졸업, 박사 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었다. 내 인생과 아버지의 틀니 값을 맞바꾼 것이다. 무엇이 더 중하길래 허둥지둥 그리해야만 했는가. 평생의 한이 되어 지금도 가슴이 산란하다. 살면서 참회해야할 나의 몫이 남았으니 그나마도 다행이다.
세월은 흘러 이젠 배역이 바뀌었다. 내가 당시의 아버지가 되었고 딸이 당시의 내가 되었다. 나는 틀니를 해드리지 못해 불효였는데 딸은 내게 임플란트를 해주었으니 효녀였다. 부녀간의 무슨 조화속이 이렇단 말인가.
부모는 세월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왜 이리도 사무치는가. 그 때의 아버지보다 10년 더 살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철딱서니 없는 십대 소년이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아버지 산소를 가뵙지 못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어버이처럼 높아서 저리도 새파란 것인가. 밤하늘은 깊어 저리도 반짝반짝 거리는가.
이제와 시조 한 수를 읊는다.
아버지가 생각이 나면 부엉새가 울고
어머니가 생각이 나면 소쩍새가 운다
한 평생 가슴 속에선 새 두 마리 살고 있다
- 신웅순의 「목어-묵서재일기 13」
첫댓글 가슴뭉클합니다
고귀한 성품에 하늘의 아버님도 방그레 하실듯요
겨우 미천한 성품만 면했습니다.
참회해도모자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뜨거워 지는 가슴을 느낍니다.
아마 아버님도 당신 틀니보다 아들의 대학을 더 아끼셨을 듯 합니다.
따듯한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