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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진주..... "논개의 애국심과 한이 서린 진주성 촉석루"
2019년 4월 햇살이 따사하게 온누리를 비치던 어느 날 경상남도 남서부 지역에 위치하여 교육과 행정의 주요도시로 자리매김되어 있는 진주시를 찾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기에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역사 장소인 진주성과 촉석루만을 보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남강유등축제도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시기가 맞아야 하므로 깨끗하게 포기하고 밀양의 영남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인 촉석루만을 찾기로 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진주의 명소는 나의 짧은 지식탓도 있었겠지만 촉석루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터넷이나 서적을 통한 검색을 하여 여행하기에는 시간적 사정이 있었다.)
촉석루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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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矗石樓)--------------------------------------------------------------------------------------------------위키백과
촉석루(矗石樓)는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변 절벽 뒤편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이기도 했다. 일명 장원루라고도 한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그 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으며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追憶往事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百有餘年 1년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印篆宛然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想像愴先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영남의 병영애 보관토록 하여
以竪忠焉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또 한번 소실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인간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군사시설과 과거 시험장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루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진주에서 하룻밤을 유하고 그리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거리로 나온 나는 바삐 달리는 차량과 분주한 시민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생동감과 활기참을 만끽하였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촉석루가 있었다. 강변에는 많지는 않지만 부지런한 시민들이 나와 아침을 즐겼다.
우리나라 3대 누각 가운데 한 곳인 촉석루에는 출근시간을 갓 넘긴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개가 학생들로 진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견학 겸 놀러 온 학생들이었다. 간간이 나이가 지긋한 부부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고 등산객 복장을 한 장년의 남성들로 여럿 있었다.
진주하면 촉석루요 촉석루하면 논개가 떠오른다.
의로운 기생, 논개 ------------------------------------------------------- 한겨레(2019-03-08 06:00)
논개(論介, ?~1593)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녀(義女)다. 1593년 7월, 왜적에 맞선 진주성은 군관민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함락되고 말았다. 이 참사로 성 안에 있던 군인과 민간인이 전멸했는데, 죽은 사람의 수가 조선 쪽 기록으로 6만 명, 일본 쪽 기록으로 2만 명이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당시 인구를 감안할 때 전투의 참상을 전해주기에 충분한 숫자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촉석루에서 전승 축하연을 벌이게 되고, 기생 논개는 그들의 여흥을 돕게 된다.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시퍼런 강물에 몸을 던져 함께 죽는다. 그녀의 거사는 승리에 도취된 왜군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논개의 순국 사실은 바로 다음해인 1594년 순안어사로 하삼도의 피해상황을 살피러 온 유몽인에게 전해지고, 나중에 그의 저서 <어유야담>(1621)에 수록된다. 지역사회에 파다했던 논개의 순절이 기록으로 등장한 것은 일이 있은 지 30여년이 지나서이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나라의 충신이 되는 상황이 어색했다. 남자는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원화된 성별 구도에서 논개의 거사에 이름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열녀라고 해야 할지 충신이라 해야 할지, 이후에 전개된 논개 담론의 역사에는 이런 고민이 들어 있다. 아무튼 당시 순국한 장수들은 충렬의 이름을 얻어 사당으로 들어가지만, 논개의 넋은 150여년이 지난 1740년(영조 16)에 비로소 사당 의기사(義妓祠)에 안치된다.
충렬로 나라의 승인을 받은 논개는 대부분의 역사 인물이 그렇듯 각색되고 첨가되는 과정을 거친다. 최초의 기록 <어우야담>에서 진주 기생이던 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의 주논개(朱論介)로 보완된다. 진주성 3장사의 한 사람인 황진(黃進)을 따라 왔다고도 하고, 의병장 최경회의 후처 또는 첩으로 함께 왔다고도 한다. 최근 해주 최씨 종회에서는 최경회 장군의 부실 ‘주논개 부인’으로 확정하고 있다. 즉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최장군이 전투의 패배로 자결하자 기생으로 가장, 적장에 접근하여 남편의 원수를 갚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개는 충신이 아니라 충신의 아내 열녀가 되는 것이다. 논개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짓밟힌 나라의 자존심에 몸을 떨었을 한 어린 여성의 정당한 분노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지역이든 문중이든 논개를 자신들 가까이 두려는 것은 그녀를 ‘소유’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도 이익이려니와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가 귀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 인물 논개는 많은 사람들을 흥기시켰다. 무엇보다 그녀는 진주 기생들의 자존심이었다. 논개를 사모한 시를 남긴 진주 기생 산홍(山紅)은 을사오적 이지용을 향해 “내가 비록 기녀지만 어찌 당신 같은 역적의 첩이 되겠느냐”며 꾸짖었다고 한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온세상이 매국노 앞에 무릎을 꿇고 금과 옥이 지붕보다 높지만, 산홍을 얻기는 어렵구나!’라며 이지용을 기롱한다. 황현은 논개를 기리는 시에서 “천년의 기생 역사에 한 줄기 빛을 발했다”고 썼다.
논개의 신분이 양반인지 천민인지, 기생인지 부인인지를 따지는 것은 논개 담론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지속적으로 논개를 소환하는 우리의 의미, 그것이 본가지다. 1780년 진주를 방문한 다산 정약용은 <진주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라는 글에서 논개 시대의 분위기를 전한다. 이에 의하면 성이 함락되려고 할 때 이웃 고을에서는 군사를 끌어안고만 있을 뿐 보내주지 않았고,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이들을 시기하여 지는 것을 오히려 기뻐했다. 그래서 아주 튼튼했던 진주성이 왜구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논개의 등장은 황현의 말처럼 한 줄기 빛이 아닐 수 없다. 당파적 이익에 빠져 적군을 응원하는 믿지 못할 상황이 옛 기록인지 어제 자 신문인지 분간하지 못하겠다.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 옛날에도 그랬다면, 지금도 이름 없는 어떤 논개는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다 하고 있지 않을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대첩의 주역인 김시민 장군의 전공비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진주성과 촉석루의 주변 환경은 깨끗하였고 둘러보는 내내 상쾌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장소나 지역 가운데 정말 가끔은 더럽고 때론 무질서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곳은 그러하지 않았다. 비록 안개가 끼고 햇살이 막혀 조금은 상쾌함이 상쇄되었다할지라도 진주의 아침은 가볍고 생동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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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달아래시원한바람
국내여행
길과 여행을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남자. 많은 길을 걷고 전국 곳곳을 거의 다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기록이 없다. 기록이라곤 저가의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어 현상된 빛 바랜 사진들과 시나브로 희미해져 가는 추억 뿐.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다시 한번 내 삶의 궤적을 기록하고자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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