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白居易)-백우선(白羽扇)(흰 깃으로 만든 부채)
素是子淵色, 圓因裁制功(소시자연색, 원인재제공)
흰빛은 자연색, 둥글게 만들어 아름다워라
颯如松起籟, 飄似鶴翻空(삽여송기뢰, 표사학번공)
쏴 하고 소나무에서 일어나는 바람, 학처럼 공중에서 펄럭인다
盛夏不銷雪, 終年無盡風(성하불소설, 종년무진풍)
한여름에는 녹지 않는 눈이요, 한 해 내내 끝없는 바람이어라
引秋生手裏, 藏月入懷中(인추생수리, 장월입회중)
가을바람 손안에 끌어들이고, 둥근달 가슴 속에 숨겨놓았다
麈尾斑非疋, 蒲葵陋不同(주미반비필, 포규루부동)
주미는 화려하여 짝할 수 없고, 종려나무 이파리는 초라하여 함께할 수 없어라
何人稱相對, 淸瘦白鬚翁(하인칭상대, 청수백수옹)
어떤 사람이 이 부채와 잘 어울릴까? 수척한 몸 하얀 수염 늙은이여라
*백거이[白居易, 772~ 846,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는 당나라 중기의 위대한 시인이자 중국 고대문학사 전반에서도 일류에 속하는 대시인으로 대여섯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아홉 살 때는 이미 음운이 복잡한 율시(律詩)를 쓸 줄 알았다고 하며, 주요 저서로는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등이 있습니다.
*참고로 백거이는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고,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되었습니다.
*백거이는 평생을 관리로 살아오면서 딱 4년간의 좌천 생활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탄하게 승진하였는데, 그는 56세 이후부터 정쟁의 회오리에 말려들지 않고 명철보신明哲保身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였고, 백거이는 이런 삶을 스스로 중은中隱이라 명명하고 반관반은半官半隱 생활을 추구하였으며, 그리하여 중책과 요직에 임명되는 것을 마다하고 지방관리나 낙양 파견 근무를 주로 하였으며, 한직에 있기에 격무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나머지 시간은 친구들과 산수 유람을 하고 음풍농월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향유하였고, 그런 자신을 풍월노인風月老人이라 칭하였다 합니다.
*백거이는 나이 73세 되는 해에 사재를 털어서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종종 앗아갔던 험난한 팔절탄八節灘(낙양 용문산 부근에 있는 여울로 워낙 물길이 좁고 험난하여 이곳을 지나던 배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한 곳) 확장 공사를 벌이는데, 좁은 팔절탄을 파고 확장하여 암초를 제거하고 험난한 물살을 잔잔하게 만들었는데, 그 감회를 읊은 시가 ‘개용문팔절석탄(開龍門八節石灘)’입니다.
*위 시는 유병례 교수님의 저서 ‘서리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붉어라’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본 것입니다.
*유병례 교수님은 소식(소동파)가 지은 염노교(念奴嬌)라는 시에 “관건 쓰고 깃 부채 부치며 담소하는 사이에, 막강한 적군은 연기되고 안개 되어 사라졌노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소식은 기라성 같은 삼국시대 인물 가운데 주유舟瑜를 가장 칭송하였다 하고, 조조의 막강한 군대를 물리치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하며, 여기서 주유의 손에 부채가 들려져 있지 않았다면 주유의 유유자적하는 모습, 그리고 이 모습과 대비되는 긴박한 외부 샹황이 잘 부각되지 않았을 것으로, 조조의 막강한 군사를 지략으로 가볍게 물리친 주유의 영웅적인 기상이 이 부채 하나로 극대화되었다 합니다.
중국 문학작품 중에 부채를 제목으로 삼은 유명한 희극작품이 청나라 작가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桃花扇)”이라 하고 여기서 부채는 사랑의 징표이기도 하고, 비극적 사랑의 결말을 암시하기도 하고, 국가의 파멸을 상징하기도 한다 합니다.
이처럼 문학작품에서 부채는 선비나 영웅, 사랑의 징표, 비극적 사랑과 국가의 운명까지 형상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활용되는 소품이었고 판소리에서도 부채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라 하고, 조선시대 천한 신분의 여자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양반 부녀자 행세를 하다 탄로나 장형杖刑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합니다.
백거이의 위 시는 부채의 기능을 여러 방면에서 노래한 시로, 부채는 처음에는 파초 잎처럼 나무의 잎을 사용하다가 가벼운 날짐승의 깃이나 날갯죽지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인데, 부채는 옛 청류명사들이 즐겨 사용한 주미와 비교하면 화려함에는 못 미치고, 넓적한 종려나무 이파리는 너무 초라하여, 백거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 부채는 거의 원시적 부채에 가까운 것으로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는 부채가 백거이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 한 것으로 역시 중용의 미를 추구한 백거이답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