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국동포들] "이젠 아메리칸 드림 꿈꾼다"
한국 IMF후 대거 몰려 LA만 3000여명…
대부분 불법체류자, 막노동-술집종업원 등 근무
중국서 산부인과 의사였던 조선족 교포 최모(42ㆍ여)씨는 몇달 전
학술회의차 미국에 왔다가 귀국하지 않고 눌러앉아 LA의 한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시간당 5.75달러의 임금으로 하루 12시간씩 일해 최씨가
버는 돈은 한달에 2000달러. 남편과 아이를 중국에 두고 와 3개월에
한번씩 1000달러의 생활비를 송금한다. 그녀는 의사가 아닌 식당
여종업원 직업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 ▲ LA 조선족들의 흥겨운 파티 장면. 이들은 1년에 두번, 설날과 '연변자치주의 날'(9월 3일)에 야유회와 파티를 연다. |
미국서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는 역부족, 미국 의과대학을 나온
이들도 인턴 자리를 얻기 힘든 마당에 제3국의 학위는 인정조차 되지
않아 자격증 시험을 본다 해도 의사 직업을 얻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해서 간호사 자격을 얻는 것이 현재 유일한
희망이다.
"처음에는 중국이 그리워 동포들도 자주 만났으나 각자 생활이
바쁘다 보니 이제는 그마저 포기했습니다. 언제 남편과 합류할지
모르는 지금 미래에 대한 설계는 전혀 할 수 없습니다다."
2년 전 이곳 LA로 온 김모(45)씨는 중국서 일류 용접공으로 한달
월급이 200달러였다. 김씨는 미국서도 용접공으로 일하기를 원했지만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페인트 용역회사에서 일하며 한달
평균 1600달러 정도 번다. 중국에 있는 부모님께 매달 300달러
정도의 생활비를 보내고 각종 페이먼트를 내면 300달러 정도 저축할
수 있다.
●10년 동안 안쓰고 모아야 미국행
| ▲ 지난 9월 3일 LA 근교 부에나 파크에서 열린 조선족 야유회. 배구를 즐기고 잇다. |
그는 미국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불법 체류자이기 때문에
기술자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잡일로 생활하고 있지만 중국에서의
생활에 비유한다면 이곳은 김씨에게 천국. 김씨는 착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코리안 드림 대신 이제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한국으로 몰려 들었던 조선족 교포들이
이제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현재 미국 전역에는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 동포들이 1만여명 가량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주변에도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3000명 정도가 사는 것으로 어림잡고 있다. 한국에 합법ㆍ불법적으로
취업하고 있는 숫자가 5만여명이라는 통계에 비추어 보면 미국
거주 조선족들도 이제 적지 않은 숫자다.
조선족 교포들이 미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한국이 IMF를
겪게 되면서. IMF를 맞아 한국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문을 닫게
되자 갈 곳이 없어진 조선족들이 미국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또
한국행을 원했던 조선족들이 대신 미국으로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에
속한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자본주의 미국으로 오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하루 100여명이 중국 미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면 2~3명
만이 통과된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 이 틈새를 이용하여
브로커들이 나서 비자를 받게 해주는 대가로 1만달러에서 3만달러까지
받고 있다. 중국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보통 사람 한달 평균
임금이 120~130달러인 것을 비교해 볼 때 미국행 비용은 보통
직장인들이 10년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가능한 엄청난
금액이다.
이같은 중국동포들의 현실은 50ㆍ60년대 일본인과 힌국인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을 연상시킨다. 몇년만 고생해 돈을 벌어 가족들을
미국으로 데려 오겠다는 희망은 미국 땅에 도착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신분 문제가 형벌처럼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을 포함해서 아시아인들이 대거 몰려오는 사태가 빚어지자
미 당국은 관광입국 6개월의 넉넉한 인심을 대폭 줄였다. 이에
따라 입국심사에서 3개월을 받으면 다행으로 알았고 15일 입국허가를
겨우 받은 동포도 있다. 이들은 아예 체류연장 신청 엄두도 내지
못한다. 미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 대부분 사람들은 2만~3만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온다.
이들은 미국에서 번 돈으로 3년 간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자동차도 한 대만 사서 여럿이 함께 쓰는가 하면 아파트도 원룸을
얻어 3명이 룸메이트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공동 생활을 한다.
그러나 합법적인 신분(학생비자)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연간
1000달러를 감당하기 어려워 스스로 불법체류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뿔뿔이 흩어져 미국에 온 중국동포들은 일년에 두번,
설날과 9월 3일 연변자치주의 날을 기념하는 정기 야유회에서
만난다. 중국에서의 신분은 고급 공무원, 개인회사 운영자, 정부
관리 등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대개 잡일로 살아간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중국에서의 생활보다는 낫기 때문에 이들의 표정은 밝다.
지난 9월 3일 LA 근교 부에나 팍 공원서 열린 ‘재미 중국동포
연합회’(회장 조현택) 정기 야유회에는 2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모처럼 만난 반가움을 우리말과 중국어로 인사말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중국에서 갓 온 동포의 직장 문제며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 소식을 묻느라 분주했다.
조선족 선교교회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날 야유회에 모인 중국
동포들의 특징은 대부분 독신이라는 점. 30ㆍ40 대 남자들이 많고
안경을 쓴 이가 별로 없다.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골초다.
담배가 그마나 유일한 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미국 생활을 하는 조선족이 없지는 않다.
흑룡강에서 2년 전 골든 게이츠 대학으로 유학, 신학을 전공하고
있는 차상근씨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있어 공부도 생활도 큰 지장
없는 성공적 케이스다. 신학을 전공하는 이유는 중국에 교회가
많아지고 있으나 교회로서의 수준이 낮고 외국인들이 전도하여
세운 곳이 많아 자발적 성장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포들이 미국을 너무 모르고 무작정 들어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중국서 조금만 정보를 알고
온다면 무모한 고생은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곳 한인 교포들과 조선족 간의 감정격차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며 한인들과 거리감을 좁혀 가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라고 말했다. 차씨는 "수십 년 전 이민 와 고생 끝에 오늘의
터전을 잡은 한인들이 보기에 부족하기 짝이 없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처우는 우리들이 감수해야 할 것"이라며 "한인들이 우리들을
무시한다고 탓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에 진출한 조선족들은 자신의 기술이나 재능을 발휘하기보다는
당장 일자리를 구해기 때문에 대부분 여인들은 웨이츄레스를,
남자들은 페인트 용역회사 인부나 청소용역 또는 전기공 등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중국 민족성이 그렇듯이 근심걱정은 그들의
표정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식당이나 공사장 잡부가 대부분
남편이 사우나 매니저를 하고 있다는 문홍련(35)씨 가족은 6년 전
남편 혼자 미국에 와 자리를 잡았으며 2년 전 아이들과 문씨가 함께
미국으로 왔다. 문씨네도 중국동포들의 꿈을 실현한 케이스. 이들도
역시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다는
기쁨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이민자들이 염원하는 미 주류 사회를 파고든 조선족도 있다. 지난
91년 USC로 유학와 현재 아마드사 R&D(연구개발)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김성진씨는 회사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한 연봉 9만5000달러의
고소득자다. 30대 초반의 김씨는 "중국동포들이 미국에 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데 그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협회나 단체가
없는 것이 아쉽다. 미국에 갓 온 이들에게 우리들 스스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는 못되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민족인 한인사회와 융합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했다.
곳곳에 교회가 성시를 이루는 한인사회와는 달리 중국 동포들에게
종교나 교회는 먼 나라 이야기다. 한인타운 유일의 조선족 교회인
새소망 교회의 목사 부인 박경신씨는 "오랜 세월 동안 공산주의 체제
아래 살아왔던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아직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3년 전 조선족 교회가 세워졌으나 등록된 교인은
70여명, 이 가운데 40여명만이 교회에 나온다. 처음 미국에 와서
교회를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솔깃하여 교회에
나오지만 쇼셜 시큐러티 넘버나 운전면허 취득 등 기본적인 도움밖에
못줘 신자들을 붙잡아 두지 못한다.
그래도 조선족의 미국 이민도 벌써 15년이란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중국 동포의 첫 이민자는 1985년 유학생으로 온 조동운씨.
80년대 10여명의 유학생 또는 정부기관 파견으로 시작된 이민
선두그룹이다. 그는 91년 중국동포들간의 친목 및 합법적 권익
보호의 목적으로 설립된 ‘재미 중국동포 연합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현재 회원은 200여명. 일년에 두 번 정기 모임을 갖는다.
이 단체의 조현택 회장은 "본래의 목적 가운데 하나인 합법적
권익 보호에 대해서는 연합회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한인 타운과 융화되어 미국 사회에 빨리 적응하고 싶은
것이 중국 동포들의 희망이며 한인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까운 곳에 차이나타운을 두고 있지만
어쩐지 한인 타운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동족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그래서 서운함도 많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한인들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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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택 재미 중국동포연합회 회장
- "왜 중국동포라 않고 조선족이라 부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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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재일 동포', '미주 동포'하면서 우리를 지칭할 때는 꼭
'조선족'이라고 합니까?"
재미 중국동포 연합회 조현택(47ㆍLA 삼라 한의과대학 행정처장)
회장은 “한국분들이 우리를 ‘조선족’이라고 부를 때면 동족이
아닌 타민족으로 취급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족’이란 단어에서의 ‘족’은 ‘만주족’,
‘몽골족’의 ‘족’과 마찬가지로 지역을 나타내는 뜻이 아니라
민족을 의미합니다. 그런 만큼 같은 민족끼리 쓰기엔 합당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조 회장의 지적대로 조선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며 영어로
표현하자면 다 같은 코리안이다. 코리안을 남쪽에서는 ‘한국
사람’이라 하고 북쪽에서는 ‘조선사람’이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과 구별짓는
의미에서 특별히 ‘족’자를 붙여 씁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조선족’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중국인이나
타민족과 구별짓기 위함이었지 한국인들과 구별짓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 ‘조선족’이란 곧 한국에서
쓰는 ‘한국인’과 같은 대상을 나타내는 같은 개념의 단어입니다.”
조 회장은 미국에 와서 한인 타운에 살면서 이곳의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특별히 ‘조선족’으로 분류함을 알았고 그들이
부르는 ‘한국인’이란 개념에는 자신들이 배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다. 부르는 쪽에서는 단순히 편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상당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같은 핏줄이요, 한 형제라는 의미의 ‘동포’라는 다정다감한
단어가 없다면 몰라도….
그는 그래서 얼마 전 ‘재미 조선족 친목회’란 명칭을 ‘재미
중국 동포 연합회’로 고쳤다고 했다. 한민족의 일원임을 부각시키자는
제안에 따른 조치었다는 설명이다. “피는 그렇게도 진한가 봅니다.
연변 사투리에 굳어 있어 죽어도 서울말 흉내를 못 내면서도 한인
사회와 하나가 되고자 명칭까지 고쳤습니다.”
수백명 중국 동포들이 차이나 타운을 지척에 두고도 이곳 한인
타운에서 삶을 찾고 있다. 차라리 중국어가 더 잘 통하는 그들에게는
차이나 타운이 더 편할 수 있을 법도 한데 기어이 한인 타운을
고집하는 이유,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들이 한국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족만이 자기들을 동정해 주고 받아 주며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멸시를 받기도
하고 가끔은 억울한 일로 눈물을 삼키면서도 한인 타운을 못
떠난다고 한다.
"동족에 대한 의지본능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한인
사회는 우리에게 든든한 '큰 집'이 되어 주었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조 회장은 중국 동포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며 언젠가는 한인 사회에 보답하리라는 마음
다지고 있다고 말했다.
(LA=오경희 미국 The Korea Pos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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