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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가두방송 두 여인
전 옥 주·차 명 숙
‘세월은 가도 상처는 남고…’
‘동지여, 우리는 왜 만나지 못하는가’
1998년 신동아 5월호
5월이 오면 산후더침처럼 해마다 반복되는 아픔을 겪는 이들이 있다. 단순히 감정불안 상태에 빠지는 이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파서 몸져 눕는 이들도 있다. 1980년 5·18을 겪은 이들. 그날의 상흔이 18년이 흐른 이제껏 아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그런 두 사람을 초대하려 한다. 가냘프면서도 애절한 목소리로 광주 시민들의 심금을 울리던 가두방송 요원 전옥주(49·본명 전춘심)·차명숙(38) 씨.
전씨는 5·18의 고통과 항거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온 반면 차씨는 그 고통을 안으로 감추고 살아온 이다. 두 사람은 그해 5월19일 전남 도청 뒤 국창근(鞠准根·61·국민회의) 의원 집에서 처음 만났다. 이들은 도청 앞쪽 관광호텔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에게 물을 떠다 주던 중이었다. 이때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 전씨와 차씨는 흔쾌히 마이크를 잡았다. 이후 이들은 눈부신 활약을 하고, 계엄군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으며 암울한 미래를 맞게 된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다. 82년 출감 뒤 잠깐 스치듯 만난 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은 이후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에둘러 말했다. 기자는 두 사람을 비롯, 주변 취재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두 사람은 계엄군에게 끌려간 뒤 수사관들의 이간질로 서로에 대해 불신하게 됐고, 5·18에 대한 재조명이 너무 늦었던 탓에 이런 감정의 앙금과 오해는 쉬이 풀어지지 못했다.
또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꾸려나가기에 벅찼던 듯하다. 고문당한 뒤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폭도 혹은 빨갱이로 몰리며 사회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기에 바빴거나 될 수 있는 한 상처를 잊고 싶었던 듯하다.
그동안 세 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 부분적이나마 5·18 피해자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 기념일 제정 등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은 12·12 및 5·18 사건으로 기소돼 2년 넘게 감옥 속에서 보내야 했다. 5·18이 「불순분자들과 폭도가 일으킨 사건」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되기도 했다.
80년 5월 당시 광주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김대중씨 석방하라』고 외쳤다. 바로 그 김대중씨가 대통령직에 오른 마당에 이제는 전옥주·차명숙 씨 두 사람이 만나 오랜 회포를 풀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전옥주씨는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차명숙씨를 찾았다. 그러나 그러나 89년 광주청문회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때도, 5·18 피해자에 대한 보상신청을 받을 때도 차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씨는 동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혹시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으로 조바심을 냈다.
그러던 96년 9월 초 차씨가 편집실로 전화를 해왔다.
『전춘심씨를 만나고 싶어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차씨는 전씨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 이후 전씨와 차씨는 전화로 서로가 살아온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그런데 통화 이후에도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만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먼저 그들의 기구한 사연이 시작되는 그해 5월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광주를 알려야 한다」
1980년 5월13일 민주화 대행진의 열기는 서울지역 학생들의 가두진출로 각 지방으로까지 확대됐다. 16일 서울을 비롯한 각 대학이 일단 시위를 중단하고 정국을 지켜보겠다는 결정을 내린 반면, 전남의 학생운동 연합지도부는 16일에 횃불시위를 하기로 했다. 시위 인원도 전날보다 3만명이나 늘어났다. 전남 지역 학생들의 판단으로는 이날이 5·16 쿠데타가 일어난 날이었고, 탄압국면이 오더라도 전국적으로 동조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던 것이다.
16일 밤 11시부터 1시간 동안 최규하대통령을 포함, 신현확 국무총리,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김종환 내무, 주영복 국방, 이희성 계엄사령관,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참석한 시국관련 심야회의가 열렸다. 정부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겉으로는 그동안 제외돼 있던 제주도를 추가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실상은 신군부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등 내각을 따돌리고 직접 대통령과 담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80년 초 「민주화의 봄」에 대한 신군부의 전면적 부정의지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18일 모든 관공서와 거리에 계엄군이 배치됐다. 광주에서는 전남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위가 이뤄졌다. 그들은 『계엄령 철폐하라』『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곧이어 진압이 시작됐고 학생들은 거리로 나가면서 시위대는 불어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에 많은 시민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19일 오전부터 시위대의 중심 세력이 학생에서 일반 시민 대중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18일부터 19일 오전까지 공수부대의 진압에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으로 저항하면서 쫓기고 당하기만 하던 시민들이 적극적인 공세를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은 시민들의 힘을 잠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출시키는 자극제가 됐다. 이때부터 계엄군과 시민 학생들간의 싸움은 치열해졌다.
오후에는 고등학교에서도 교내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날 거리에서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을 목격한 학생들이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고, 자신들의 형 오빠 언니 부모가 쓰러져 가는 상황에서 공부가 머리에 들어올 리 없었던 것이다. 계엄군들이 교문을 지키고 있어 이들은 가두로 나서지 못했지만 방과 후 수십 명씩 짝을 지어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고교생들이 희생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 갔다(『5·18 그 삶과 죽음의 기록』, 풀빛).
오후 4시 30분 광주시 옛 광주역 앞 사거리. 중년의 아주머니가 확성기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닙니다. 난동자도 아닙니다. 단지 선량한 광주 시민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무 죄 없이 우리 학생, 시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
이 가두방송으로 더욱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수천 명으로 불어난 시위 대열은 시내 중심가 쪽으로 진출을 기도했다. 잠시 후에 차량으로 수송돼온 공수부대와의 혈전이 벌어졌다. 시위대열은 공용터미널 로터리 부근으로 밀려났다.
이때 가두방송을 한 여인은 그동안 전옥주씨로 알려졌으나 전씨는 이때 다른 곳에 있었다. 이 여인처럼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대항해 스스로 마이크를 잡은 이들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공수부대가 퇴각한 「해방기」가 시작됐다. 첫날인 22일 오후 다소 무질서하게 진행되던 대중집회는 극단 광대, 들불야학 등의 조직이 주축이 돼 23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한다. 이들 조직이 만든 가두방송팀은 항쟁지도부로부터 내용 등 문안을 받아 방송활동을 폈다. 그러나 영향력 측면에서는 자체 조직된 팀, 특히 전옥주·차명숙 씨와 5,6명의 젊은 남자들이 속해 있었던 팀이 더 눈부신 선전활동을 해냈다. 27일의 도청 앞 방송을 한 박영순씨, 군인들 앞에서 선무방송을 해 눈길을 끌었던 홍금숙씨, 20일 오후 3시 한국은행 쪽에서 시작한 이재의씨, 이경희씨 등도 인상적인 방송요원들로 알려졌다.
「이대로 외치다 죽어도 좋다」
5·18기념재단 정수만 이사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 시기 차명숙씨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5월19일 차씨는 자신이 다니던 국제양재학원에 갔는데 학원 문이 닫혀 있어 시내 거리로 나갔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됐다.
전옥주씨는 5월19일 밤 9시쯤 새마을호편으로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막내이모 명승희(明承姬·52)씨가 회장으로 있던 대한무궁화중앙회의 전국지회 결성문제로 마산에서 강릉을 거쳐 서울의 명씨에게 들렀다가 광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전씨와 차씨, 몇몇 남학생들은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앰프와 마이크를 구하러 나섰다. 일행은 학운동 동사무소로 몰려갔다. 직원과 승강이를 벌이던 이들은 결국 옥상의 앰프와 스피커를 빌렸다. 처음에는 도청까지 걸어가면서 방송을 했고, 이어 소형 트럭에 옮겨 타고 다녔다. 방송은 주로 전씨가 했고, 차씨와 남학생들도 교대로 방송했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광주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한 공수부대 하사관은 자신의 수기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에서 당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전씨를 사살하라는 특명을 받았었다고 고백했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밤하늘의 시민들에게는 슬픔과 울분, 분노 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목소리 또한 얼마나 고운지 처음에는 불에 탄 문화방송국의 아나운서가 화가 나서 선무방송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그 여자를 저격해 사살하려고 집요하게 추적했으나 시위대에 둘러싸여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전에는 저격할 수 없었다』
20일 오전 이들은 광주일고 앞에서 가슴이 드러난 채 대검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여학생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이 말은 시민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들의 방송차 뒤에는 늘 시위대들이 따라다녔다.
『열흘 동안의 광주항쟁 기간 중 절정을 이룬 20일 밤의 시위에서 성난 군중들의 대오를 지휘하며 내 머릿속에 꽉 찬 한 가지 생각은 이대로 외치다 죽어도 좋다는 것, 내 목숨 역시 몇 시간 전 내 손으로 리어카에 담아 옮긴 저 참혹한 몇 구의 시신들처럼 이미 아무렇지 않게 죽은 목숨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폭력과 참상, 거대한 불의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과 분노가 솟구쳐 나를 어떤 지점으로 끝없이 휘몰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전옥주)
21일 피투성이가 된 여학생의 시신이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지고, 시위학생을 태워준 택시 운전사를 계엄군이 대검으로 찌르는 걸 목격한 시위대는 더욱 강렬한 투쟁의지로 불타 올랐다. 이날 저녁 8시 온 몸을 던져 공격하는 시민군들의 공격으로 계엄군은 광주시 전역에서 물러났다. 계엄군이 물러난 이유는 쌍방의 희생을 줄이고 광주시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시키며, 시위대 내부를 교란시키려는 것이었다.
『저 여자들 간첩이다』
계엄군이 물러난 다음날인 22일 날이 밝자 시민들은 속속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시민군은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일의 순서와 윤곽을 잡아나갔다. 차량에 임무를 부여하는 등록업무도 이뤄졌다. 전씨와 차씨는 오전중에 방송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군중 속에서 『저 여자들 간첩이다』면서 신체 건장한 40대 남자 몇 사람이 뛰쳐나와 그들을 끌고 갔다. 나머지 시민들은 엉거주춤 서 있었다고 한다.
정수만 이사에 따르면 차명숙 씨는 22일까지 가두방송을 하다가 도청 앞에서 시민들에게 전춘심씨와 함께 간첩으로 몰려 체포됐다. 2시간 뒤 차씨는 기독병원에서 계엄군에게 넘겨졌다. 이후 31사단 보안대에 끌려간 뒤 2일간 조사받은 뒤 30일 가량 불법구금돼 가혹한 구타와 물고문을 겪었다.
그러나 전옥주씨의 활동은 계속된다.
『22일 「기물을 파괴하지 말고 질서를 지킵시다」는 내용의 방송을 마치고 도청으로 돌아오던 중 시민 몇 사람이 나를 간첩으로 지목했다. 이때 나는 도청으로 끌려가 꽁꽁 묶였다. 시민들은 화정동 우리 집으로 가서 신원을 확인한 뒤 나를 풀어줬다. 나는 다시 방송을 재개하면서 널부러져 있는 시신을 수습하기도 했다. 26일 도청 근처에서 몇 사람이 나를 독침사건(25일 오전 8시 발생: 시민군 와해 위한 계엄군의 조작사건)의 가해자라고 지목해 수사관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중앙정보부 광주분실로 끌려갔다』
27일 새벽 항쟁지도부 소속 홍보부원 박영순(당시 전문대 학생)씨가 마지막 가두방송을 하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나 계엄군의 마지막 진압작전(충정작전)으로 YWCA와 도청은 순식간에 함락됐다. 『시민들은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방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자에 흰 띠를 두른 계엄군이 거리를 소독했다.
잡혀간 전옥주·차명숙 씨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전씨는 「이북 모란봉에서 2년간 교육받고 남파된 간첩」으로, 차씨 역시 「간첩 20만명을 동원해 2백명을 사살하게 한 장본인」으로 몰렸다.
전씨와 차씨는 9월19일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0월27일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전씨는 81년 4월3일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고, 차씨는 12월24일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전씨는 『함께 고생한 동지를 두고 나올 때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만큼이나 가슴이 아팠다』고 술회했다.
광주의 고통 잊고 살고 싶다
이렇게 얽힌 두 사람의 사연을 현재 시점에서 더듬어보기 위해 차명숙씨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러나 차씨는 끝까지 인터뷰를 마다했다. 결국 기자는 4월6일 차씨의 안동 집으로 찾아갔다.
차씨는 이전까지 자신이 어떻게 평가돼 왔건 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5·18 당시 자신이 한 행동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을 먼저 수기나 책으로 정리해낸 다음에야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신의 얘기가 왜곡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지방에 묻혀 사는 자신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인터뷰 이후에 외부 사람들이 보일 반응 등이 싫다고 했다.
어느 새 5·18을 잊고 있는 이들, 자신을 포함해서 그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 모두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게 아니냐고 종용하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상황이든 어렵지 않게 사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가 중요한 거죠. 버릴 것은 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중요해요. 광주…』
그녀는 광주란 단어를 길게 빼며 발음했다. 자신의 삶의 궤적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그곳, 광주를 생각하며 그녀는 잠시 회한에 잠기는 듯했다.
『상무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일들, 독방에서 극도의 외로움과 싸워야 했던 일들 모두 이제 생각해보면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는 더 벼려진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나마 스스로 아픔이나 상처에 빠져 있는 성격이 아니어서 재빨리 털고 일어선 거죠』
차씨의 얼굴엔 어느덧 주름살도 하나둘 생겼지만 처녀 적 광주에서 그녀를 만났던 이들은 그녀가 상당히 예뻤다고 회고했다.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아주 강단있어 보였다. 뚜렷한 발음과 고음의 날카로운 음색, 그 음색이 5·18 그날의 하늘에 어떻게 울려퍼졌을지 짐작이 갔다.
『신앙 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묻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두봉 신부님, 함세웅 신부님, 유강하 신부님 같은 분들이 저를 곁에서 돌봐주셨어요.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했고, 그 뒤엔 지극히 평범하게, 큰 어려움 없이 살았어요』
30여 평의 아파트는 잘 정돈돼 있었다. 가지런한 책장 속엔 주로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많았다. 성경책과 종교서적,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다큐멘터리 비디오 수십여 편 등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을 무척 배려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어떤 계기로 5·18에 뛰어들었던가.
『누구든 그때 광주에 있었다면 나섰을 거예요.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지는 못했을 거예요. 시위대를 위해 밥을 짓건 물을 길어나르건 그렇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언론이 입다물고 있던 상황에서 광주를 살리기 위해선 누군가가 참혹한 그 상황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어요. 변혁운동을 했던 것도 아니고 조직활동을 했던 것도 아니에요. 단지 그 이유뿐이었죠』
「검은 리본 사건」으로 다시 끌려가
차명숙씨는 9살 되던 해까지 외가가 있던 담양에서 자랐다. 보수적인 집안의 2남3녀 중 셋째딸인 차씨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셌다고 한다. 『딸자식은 공부해선 안 되고 조신하게 있다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차씨는 유달리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아 독서와 그림 그리기에 취미를 붙였다.
배움을 중단하고 광주로 간 그녀는 이종오빠들의 정신적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다 국제양재학원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한 지 8개월째 5·18이 일어났다. 성당에 다니면서 사회를 제대로 보는 눈이 트였다고 한다.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배울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만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땐 너무 자신만만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질 것을 염려했던 것일까요』
1년 6개월간의 수감 생활 동안에도 차씨는 부정적 생각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암흑같은 상황속에서도 자신이 이뤄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으로 책도 읽고, 버터를 비닐 종이에 발라 만든 글쓰는 도구를 이용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끄적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81년 12월 출감은 했지만 5공 정권하에서 차씨의 움직임은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대상이었다. 얼마 후 당시 광주의 비극을 기리는 검은 리본 달기가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이때 차씨도 검은 리본을 달았는데 그것이 빌미가 돼 안기부 요원에게 추궁을 받게 됐다. 차씨는 검은 리본의 출처로 이명자(李明子·전남도의원)씨를 지목했으나 이의원은 위협을 느껴 차씨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이의원은 남편인 정동년씨가 당시 예비검속돼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수괴로 몰린 상황이여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안면몰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때 차씨가 안기부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어요. 그 험하고 무서운 시기에 갔으니 죽었겠다는 생각도 했죠. 자책도 많이 했어요. 5·18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뤄졌을 때도 나타나지 않자 정말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염려했어요. 그러다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어찌나 반갑던지…』
96년 이의원은 우연히 차씨의 소식을 듣고 강신석 목사 등과 함께 안동의 차씨집을 방문했다. 차씨가 좋은 남자와 만나 잘 살고 있음을 확인한 이의원은 비로소 안심했다고 한다.
『차씨의 남편이 무척 신실해 보여 좋았어요. 두 아들은 성당의 복사(服事)를 맡을 만큼 독실한 신앙가족이더군요. 차씨는 자신이 언론에 나서면 괜히 남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조용히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살았다고 하더군요』
이의원은 차씨를 『강한 여자』라면서 『수사관들로부터 간첩으로 몰리며 상부선을 추궁당할 때도 차씨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으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차씨는 이렇게 말했다.
『수사관들 앞에서도 가명을 쓰고 저의 신분을 속였어요. 함께 가두방송했던 남학생이 그렇게 해야 자신과 다른 이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사실대로 얘기하면 한 사람씩 더 묶여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함께 활동했던 한두 명을 상무대에서 봤지만 그들을 지목하지 않았어요. 이젠 당시 함께 움직였던 이들이 정말 보고 싶어요. 그때는 뭘 하던 사람인지,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물어 가는 상처 덧나게 하는 현실
「5·18의 꽃」으로 불렸던 전옥주씨는 1949년 12월 보성경찰서 사택에서 전직 지서장의 딸로 태어났다. 예능적 기질이 있었던 그는 6세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고, 창과 웅변을 배웠다. 고교 시절 계속 무용을 해 원광대 체육학과에 진학, 무용을 전공했다. 그러다 4학년 때 학내 데모에 가담했다가, 제적당했다.
제적당한 뒤 서울 전주 등지에서 무용학원 강사로 지내다 5·18에 가담하게 됐다. 구속된 뒤 간첩으로 몰리면서 당한 고문으로 그는 몸이 망가져 지금도 제대로 다리를 굽히고 앉아 있지를 못한다. 쇠파이프로 맞아 척추뼈 두 개가 내려앉았고, 궂은 날이면 손발의 마디마디가 뒤틀리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출소 뒤 그녀는 오빠집에서 몸조리를 하다가 83년 무작정 상경했다. 취직하는 곳마다 안기부 요원이 쫓아다니며 방해를 하는 바람에 그는 번번이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 무렵 고려대를 다니다가 강제징집당했던 이모씨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이씨는 금고 판매업을 했고, 전씨는 잡일들을 해나갔다. 낮에는 술집 여자들의 옷을 빨고, 밤에는 포장마차를 했다. 이후에도 갖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93년 마침내 이들은 6월12일 광주 향교에서 김상현 의원의 축사로 전통혼례를 가졌다.
88년 2월 전씨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民和委)에 나가 2시간 30분 동안 5·18 관련 증언을 했고, 그 며칠 뒤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 3명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그 남자들은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면 교통사고나 강도로 위장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해 11월18일 국회 청문회 광주특위에서 증언한 뒤엔 시댁으로부터 「폭도」로 몰려 고통받았다. 최근까지도 전씨는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더 마음 아픈 것은 『아물어가는 상처를 덧나게 하고 고통스런 생채기를 보태는 현실』이라고 한다.
광주의 극단 토박이의 대표작 『모란꽃』(93년 초연)은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여주인공이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오랜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렸는데, 이 여주인공의 모델이 전옥주씨다. 여기에 27일 계엄군의 도청진압 때까지 시민군의 빨래와 밥을 하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하던 여성들의 사례를 모아 재구성한 심리치료극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지도부 홍보부장을 지냈고, 들불야학 활동을 함께 하던 윤상원, 박관현씨 등의 동료를 잃은 아픔을 가진 박효선(44)씨가 이 극을 쓰고 연출을 맡아왔다. 박씨는 5·18 이후 줄곧 「5월 광주」 얘기를 연극으로 다뤄오고 있는데 『광주항쟁을 너무 사회적이고 역사적 사건으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피해자 개인에게 남긴 상흔을 짚어보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술로 한차원 승화해 광주의 실체와 진실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피해자 개인의 상처 치유해야
「광주민중항쟁의 심리적 충격」 등 15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광주에 대해 꾸준히 심리학적 접근을 해온 전남대 심리학과 오수성 교수는 『많은 광주시민들이 재해 등 외상을 입은 뒤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정상이 아닌 심적 반응인 외상성 스트레스 요소를 갖고 있다』면서 『그 치유책으로 박효선씨와 함께 심리치료극 「모란꽃」을 준비했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개인의 심리적 피해에 대한 배상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즉 일률적인 금전 보상책으로 광주의 상처를 덮기에 급급할 게 아니라 그에 앞서 상처 입은 개인에 대한 체계적인 치료책과 사회의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피해자들 가운데 보상을 받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3차 보상을 준비중이다. 보상 내용은 5월1일까지 개별 통보해줄 예정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망자는 7천만원, 부상자는 부상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눠 3천만∼5천만원씩 가족들에게 생활지원금으로 지급된다.
이번 보상신청자 중엔 차명숙씨도 들어 있다. 1,2차 보상 때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야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금전적 보상이 과연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정신적 고통까지 보상해줄 수 있을까. 이제껏 5·18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액수는 그들이 받은 고통에 비하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돈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통을 뒤늦게나마 덜어주는 일은 결국 우리 사회의 몫이다. 그에 앞서 정부의 깊은 배려가 필요하다.
차명숙씨는 5월17일 광주에서 전옥주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가 다시 번복했다. 그녀는 아직 과거의 아픔을 완전히 털어버리지는 못한 것일까. 망설이고 있는 그녀의 마음에 올해도 어김없이 5월 그날은 돌아오고 있다.
정현상 기자
첫댓글 진심으로 80년 5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지요. 북한 인권을 들먹이면서 마치 인권주의자 행세를 하는 숭미,친일주의자들은,80년대에 짓밟혀온 우리나라의 인권문제에 대하여는 그동안 왜 그렇게 침묵과 동조를 했는지 반성하는 것부터 선행되어야 하는데...... 광주의 외침을 대신 부르짖고 다니신 두분이
하루빨리 오해를 접고 진실로서 서로 부둥켜주는 날이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가해자들은 버젓히 활개치고 사는데, 피해자들을 영원히 피해자로 남게 해서는 안되지요. 아울러 당신들의 지난 고통들을 온국민들이 감싸안아 줄수 있는 날이 꼭 올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