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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내산(天明乃散)
날이 새면 헤어진다는 뜻으로, 신고식 문화로 조선 초부터 유래되어 왔고, 신참례가 과하여 사회문제가 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天 : 하늘 천(大/1)
明 : 밝을 명(日/4)
乃 : 이어 내(丿/1)
散 : 흩을 산(攵/8)
출전 :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卷之四
과거에 합격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 였지만 합격한 뒤 여러가지 고비가 있었다. '허참례(예비 신고식)'와 '면신례(진짜 신고식)'이다. 이것은 갓 들어온 신참 관리가 선배들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하면서 인사를 하는 일종의 신고식인데 이때 선배들이 지독한 장난을 쳤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신고식이 두려워 관직을 포기했다고도 한다.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울고 웃기, 흙탕물에서 구르기, 얼굴에 똥칠하기와 같은 짖궃은 장난을 참아야 했고 뒷짐을 지고 서서 머리를 숙이고 머리에 쓴 사모를 쳐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직속 상관의 이름과 직책을 외우는 어려운 게임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벌이 내려졌다 한다.
관청마다 면신례와 허참례는 조금씩 달랐다. 예문관(각종 문서를 기록하는 곳)이 짖궃기로 유명했고 선전관청(왕명을 전달하고 왕의 호위를 맡는 청;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은 잡상이름 외우기, 악귀를 물리치는 주문을 틀리지 않고 말하기와 같은 놀이도 해 각 관청마다 많이 달랐다고 한다. 이런 것을 제대로 못하면 청에 발도 못 들이게 했다고 한다.
면신례를 하면서 사고가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불이 난 적도 있었고 신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떄리기도 하여 몇몇 신참들은 기절하거나 죽기도 했다고 한다.
면신례를 거부한 용감한 신참도 있었는데 신참 시절 율곡 이이는 면신례를 거부하여 쫓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이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며 병조판서 때는 병조에서 만큼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조선전기 학자 성현(成俔)이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의 민간 풍속, 문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등 문화 전반을 다룬 잡록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제4권에 나오는 말이다.
新及第入三館者, 先生侵勞困辱之, 一以示尊卑之序, 一以折驕慢之氣, 藝文館尤甚.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新來初拜職設宴, 曰許參; 過五十日設宴, 曰免新; 於其中間設宴, 曰中日宴.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每宴徵盛饌於新來, 或於其家, 或於他處, 必乘昏乃至.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請春秋館及諸兼官, 例設宴慰之, 至夜半諸賓散去, 更邀先生設席, 用油蜜果尤極盛辦.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上官長曲坐, 奉敎以下與諸先生間坐, 人挾一妓, 上官長則擁雙妓, 名曰左右補處.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自下而上, 各以次行酒, 以次起舞, 獨舞則罰以酒.
아래로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至曉, 上官長乃起於酒, 衆人皆拍手搖舞, 唱翰林別曲, 乃於淸歌蟬咽之間, 雜以蛙沸之聲, 天明乃散.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 조선시대판 신고식 문화, 신참례(新參禮)
요즈음에도 대학가에서의 과도한 신입생 환영회나, 군대의 신고식 문화의 폐단이 종종 언론에 오르내리곤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신고식 문화, 즉 신참례(新參禮)가 있었다. 조선 건국 초부터 꾸준히 유래되어 왔고, 어느 시기에서나 신참례가 과하여 사회문제가 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조선중기의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李珥)는 특히 신참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九度) 장원공(壯元公)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고 모범적인 생활태도를 보였던 인물이었던 만큼 신참례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선배들의 생리가 누구보다 싫었을 것이다.
이이는 갓을 부수고, 옷을 찢으며 흙탕물에 구르게 하는 등의 신참례 폐단을 지적한 후에, 신참례의 연원에 대해 '고려 말년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고, 과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로 입에 젖내 나는 것들이 많아, 그때 사람들이 분홍방(粉紅榜; 아직 얼굴이 앳되게 보여 화장을 한 사람들이 붙은 방)이라 지목하고 분격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고 하여,
신참례가 고려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이들의 버릇을 고쳐주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원래의 신참례는 부정한 권력으로 관직에 오른 함량미달의 인물들에게 국가의 관직은 함부로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기 위해 시도되었지만, 이이(李珥)가 살아간 시대에 이미 신참례는 원래의 좋은 취지는 잊혀진 채 그저 하급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의 상황을 담은 '태조실록(태조 1년 11월 25일)'에 도평의사사에서 감찰, 삼관(三館; 예문관, 성균관, 교서관), 내시, 다방(茶房) 등의 관직에서 신참에게 번잡한 의식을 하는 폐단을 없앨 것을 청한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신참례가 조선 초기에도 상당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5세기에 성현(成俔)이 편찬한 '용재총화(慵齋叢話)' 중에서도 신참례에 관한 몇 건의 기록이 있다. 아래에서 그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新及第入三館者, 先生侵勞困辱之, 一以示尊卑之序, 一以折驕慢之氣, 藝文館尤甚.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新來初拜職設宴, 曰許參; 過五十日設宴, 曰免新; 於其中間設宴, 曰中日宴.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每宴徵盛饌於新來, 或於其家, 或於他處, 必乘昏乃至.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請春秋館及諸兼官, 例設宴慰之, 至夜半諸賓散去, 更邀先生設席, 用油蜜果尤極盛辦.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上官長曲坐, 奉敎以下與諸先生間坐, 人挾一妓, 上官長則擁雙妓, 名曰左右補處.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自下而上, 各以次行酒, 以次起舞, 獨舞則罰以酒.
아래로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至曉, 上官長乃起於酒, 衆人皆拍手搖舞, 唱翰林別曲, 乃於淸歌蟬咽之間, 雜以蛙沸之聲, 天明乃散.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
(용재총화 권4)
(나)
三館風俗, 南行員尊其首爲上官長, 敬謹奉之, 新及第分屬者, 謂之新來, 侵辱困苦之, 又徵酒食無藝, 所以屈折驕氣也.
삼관(三館) 풍속에는 남행원(南行員; 조상의 덕으로 하던 벼슬아치)이 그 두목을 상관장(上官長)으로 삼아 공경해서 받들었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된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욕을 주어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요구하되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始仕曰許參, 終禮曰免新, 然後與舊官連坐, 開筵設酌.
처음으로 출사(出仕)하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예(禮)를 끝내면 신면(新免)이라 하여 신면을 하여야만 비로소 구관(舊官)과 더불어 연좌(連坐)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則末官以左手執女, 右手執大鍾, 先呼上官長者三, 又細聲呼者三, 上官長微應呼亞官, 則亞官亦大聲呼之.
말관(末官)이 왼손으로 여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큰 종을 잡아 먼저 상관장을 세 번 부르고, 또 작은 소리로 세 번 불러서, 상관장이 조금 응하여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부른다.
下官不勝則有罰, 上官不勝則無罰.
하관(下官)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있었으나, 상관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없었다.
雖位高大臣, 不得坐上官長之上, 與三官間坐呼.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상관장의 위에는 앉지 못하고, 세 관원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부르되,
正一品五大字, 一品四大字, 二品三大字, 三品堂上二大字, 堂下官只呼大先生.
정일품에는 오대자(五大字), 종일품에는 사대자(四大字), 이품에는 삼대자(三大字), 삼품 당상관에는 이대자(二大字), 당하관은 다만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고,
四品以下泛呼先生, 各擧姓而稱之, 呼畢, 又呼新來者三, 又呼黑新來者三, 黑者女色也.
사품 이하는 다만 선생이라 부르되, 각각 성(姓)을 들어 이를 칭하였고, 부르고 난 뒤에는 또 신래자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자(黑新來者)를 세 번 부르는데, 흑(黑)은 여색(女色)이다.
新來倒着紗帽, 以兩手負背低首至就先生前, 以兩手圍紗帽而上下之, 名曰禮數.
신래자는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을 하며 머리를 숙여 선생 앞에 나아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 하였다.
誦職名, 自上而下則順銜; 自下而上則逆銜; 又令作喜形曰喜色, 作怒形曰悖色; 言其別名, 使爲其狀曰三千三百, 其侵辱多端, 不可勝言.
직명(職名)을 외우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순함(順銜)이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역함(逆銜)이며, 또 기뻐하는 모양을 짓게 하여 희색(喜色)이라 하고, 성내는 모양을 짓게 하여 패색(悖色)이라 하였으며, 그 별명(別名)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내게 함을 '3천 3백'이라 하였으니 욕을 보이는 방식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放榜慶賀之日, 必邀三館, 然後設筵行禮; 若有新恩不恭, 得罪於三館, 則三館不往, 新恩亦不得遊街.
방(榜)을 내걸고 경하(慶賀)하는 날에는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이한 뒤에 연석(筵席)을 베풀고 예를 행하였는데, 만약 신은(新恩)이 불공하여 삼관에게 죄를 지으면, 삼관은 가지 아니하고 신은도 또한 유가(遊街; 급제자가 풍악을 앞세우고 웃어른이나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하지 못하였다.
三館初到門, 一員擊鼓唱佳官好爵, 諸吏齊聲應之, 以手擎奉, 新恩下上之曰慶賀.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러 한 사람이 북을 치면서 '가관호작(佳官好爵)'이라고 부르면, 아전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응하고 손으로 신은을 떠받쳐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를 경하(慶賀)라 하였고,
又慶父母族親曰生光, 最後又奉女人, 而慶之曰乳母.
또 부모와 친척에게 경하하는 것을 생광(生光)이라 하였으며, 또 최후에 여인(女人)을 받들어 경하하는 것을 유모(乳母)라 하였다.
又新恩聯榜, 拜謁于議政府, 禮曹, 承政院, 司憲府, 司諫院, 成均館, 藝文館, 校書, 弘文館, 承文院, 諸司先生多徵布物, 以爲飮宴之需.
또 신은(新恩)은 방(榜)이 나는 대로 의정부, 예조,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성균관, 예문관, 교서관, 홍문관, 승문원 등 여러 관사의 선배를 배알하고, 포물(布物)을 많이 걷어 이것으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春時校書館先行之, 曰紅桃飮; 初夏藝文館行之, 曰薔薇飮; 夏時成均館行之, 曰碧松飮.
봄에는 교서관이 먼저 행하되 홍도음(紅桃飮)이라 하고, 초여름에는 예문관이 행하되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에는 성균관이 행하되, 이를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乙酉夏, 藝文館聚三館飮于三淸洞, 學諭金根泥醉還家, 檢詳李克基路遇之, 問交友從何來, 何醉之至此. 根答曰食薔薇而去. 人有聞者皆齒冷.
을유년 여름에는 예문관이 삼관(三館)을 모아 삼청동(三淸洞)에서 술을 마셨는데, 학유(學諭) 김근(金根)이 몹시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상(檢詳) 이극기(李克基)를 길에서 만났는데, "교우(交友)는 어디서 오는 길이길래 이렇게 취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미(薔薇)를 먹고 온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냉소(冷笑)하였다.
(용재총화 권2)
신참례의 폐단을 막아보고자 조선시대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에는 "신래를 침학(侵虐; 심하게 괴롭히고 학대함)하는 자는 장(杖) 60에 처한다"는 규정을 명문화했지만 암암리에 관습화되어 나간 신참례의 습속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후기에 널리 유행한 고전소설 '배비장전'의 중심 소재가 신참례인 것에서도 신참례의 풍습이 관인 사회 저변에 강하게 정착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 신참례의 시속을 거부함
初朴泰漢與李光佐崔昌大, 相約吾輩登第, 勿應新來.
처음에 박태한이 이광좌, 최창대와 함께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가 급제하거든 신래(新來)에 응하지 말자"고 하였었다.
甲戌別試, 三人同榜.
갑술년(1694, 숙종20) 별시(別試)에 세 사람이 동시에 급제하였다.
儕友知泰漢執決, 無應俗之理, 初無往呼新來者.
동료들은 박태한이 자신이 결단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 결코 시속(時俗)에 응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애당초 찾아가 신래불림[呼新來]을 요구하는 자가 없었다.
光佐則南相九萬以座主來呼, 亦終不應, 曰: 大監以大臣, 爲先生敎新進, 不以正己事君之道, 使爲紅紛榜餘習耶. 九萬笑而許之.
이광좌는 좌주(座主)인 정승 남구만(南九萬)이 와서 신래불림을 하라고 하였으나 그 역시 끝끝내 응하지 않고는 "대감께서 대신(大臣)으로서 선생이 되어 신진(新進)을 가르치면서 자신을 바로잡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 하지 않고, 홍분방(紅粉榜)의 유풍을 하게 하십니까?"고 하였는데 남구만이 웃으며 이를 허용하였다.
昌大則以親命不許, 不得已從俗.
최창대는 그 아버지의 명령이 허락지 않아 부득이 시속을 좇았다.
- 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권10, 관직전고(官職典故)
(解)
윗글에 나오는 박태한(朴泰漢), 이광좌(李光佐), 최창대(崔昌大) 세 사람은 1694년(숙종20)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벗들입니다. 박태한은 1664년생, 이광좌는 1674년생, 최창대는 1669년생이니, 당시 과제에 급제했을 때의 나이가 31세, 21세, 26세인 풋풋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신래(新來)의 폐해에 공감하여 급제하면 이를 거부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신래(新來)'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나 선비로 있다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를 일컫는 말로, 오늘날의 신입, 신참의 의미입니다. 당시에 이들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 회자(回刺) 등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허참례란 그 관사에 새로 나온 관원이 고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인사를 드리고 처음으로 그 세계에 참여를 허락받는 의식이고, 이로부터 얼마 뒤에 다시 좀 더 거하게 대접하는 면신례를 베풀어야 비로소 신래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근무처에 배속되면 자신의 신상을 적은 명함[刺紙]을 가지고 그 부서의 고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하는 회자 또한 무척 고된 일이었습니다.
신래가 치러내야 할 이러한 절차들은 고려 말에 불공정하게 과거에 합격한 권문세족의 나이 어린 자제들이 교만하고 뻣뻣하게 구는 것을 꺾기 위해 기존 관원들이 고안해 낸 '신참길들이기' 의식에서 유래하였답니다. 윗글에서 말한 홍분방(紅粉榜)은 바로 고려말에 과거에 합격한 연소자들을 젖내 나고 분홍색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비꼬던 말입니다.
그런데 신참을 골려주려던 장난스런 일들이 조선에 와서 점차 변질되어 축하연 자리에 어김없이 기생들이 등장하고 신참에게 벌주(罰酒)를 마시게 하고 춤을 추게 하는가 하면 한겨울에 물에 집어넣기도 하고 한여름에 볕을 쬐게 하여 이 때문에 병을 얻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토지나 노비를 파는 것은 물론이고 부잣집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자가 있을 정도로 부담스런 절차가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자신들만은 이런 시속(時俗)을 따르지 않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급제 이후에 나타난 세 사람의 삶의 궤적은 좀 달랐습니다.
박태한은 윤증(尹拯)의 제자로, 평소에 한번 결단한 일에 대해서는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결코 시속에 응할 리 없을 거라고 판단한 동료들은 그에게 아예 이런 의식을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는 평소의 처신 덕에 벗들과의 약속을 힘들이지 않고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박태한은 시속을 따라 처신하는 것이란 마치 겨우 움집을 짓는 것이나 같아서 아무리 공을 들이고 일을 잘하려 해도 결국엔 그 규모가 협소하고 남루할 수밖에 없게 되니 명당(明堂)을 짓는 것처럼 웅대한 기상을 가지려면 도학(道學)을 따라 처신해야 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광좌는 어떤가요? 그는 스승처럼 떠받들어야 할 자신의 시관(試官)에게 큰소리를 치면서 신래가 으레 해 오던 의식을 거부하였으니, 얼핏보면 그가 셋 중에 가장 대단한 기개를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허나 그의 이러한 기고만장한 행태를 웃음으로 받아준 남구만(南九萬)의 아량이 없었다면 아마 이광좌의 관로(官路)는 막혔을 지도 모릅니다.
남구만은 면신례란 의관을 입은 선비들의 수치이고 더러운 습속이니 일체 금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청할 정도로 면신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광좌가 남구만을 시관으로 만나게 된 것은 참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광좌가 시속을 거부하고도 무사히 영전(榮轉)에 영전을 거듭하며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개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난 행운 즉, 시운(時運)을 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창대는 벗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부친의 뜻을 좇아 시속을 따랐습니다. 그의 부친 최석정(崔錫鼎)은 정자(程子)도 의리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은 시속을 따라도 괜찮다고 하였고, 공자(孔子)도 사냥에서 잡은 짐승의 수량으로 내기하는 엽각(獵較)을 하였다는 등의 말로 아들과 아들의 친구인 이광좌까지 타일렀습니다. "선비의 책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자질구레한 일은 우선 풍속에 순응하라"고 말입니다.
불합리한 시속을 고쳐보자던 젊고 두려울 것 없던 세 청년은 이 일화 이후에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박태한은 과거에 급제한 지 4년 만에 병사(病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대의 시속의 폐해를 바꾸기 어렵다는 것에 낙담하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광좌와 최창대 모두 박태한에 대한 유사(遺事)를 남긴 것으로 봐서 짧은 생을 살다간 그를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최창대는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마음의 빚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후일담을 적었습니다.
余回刺罷後, 書報朴兄云, 鬼行旣不免强就, 而至於嘲詼褻謔, 亦多隨人同波者, 眞悔不與吾兄同去就也. 朴兄答以短札, 有曰天下事, 每因隨人壞了. 余復悚然.
내가 회자(回刺)가 끝난 뒤 박형에게 서찰을 보내 "도깨비 같은 짓을 억지로 할 수 밖에 없었으나 신래를 조롱하고 함부로 대하는 행태까지도 남들을 따라 같이 하였으니, 진정으로 형님과 거취를 같이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고 하였다. 박형이 짤막한 편지로 답하였다. "천하의 일은 매번 남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서 무너졌네." 나는 다시 부끄러웠다.
살아가면서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사람 중에 어떤 이는 불의(不義)가 고쳐지지 않는 것에 낙담하여 병(病)이 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도 모르게 시운(時運)을 타서 성공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예전에 그렇게 결정한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의심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 天(하늘 천)은 ❶회의문자로 사람이 서 있는 모양(大)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一)의 뜻을 합(合)한 글자로 하늘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天자는 '하늘'이나 '하느님', '천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天자는 大(큰 대)자와 一(한 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天자를 보면 大자 위로 동그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 위에 하늘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天자는 사람의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 '하늘'을 뜻했었지만 소전에서는 단순히 획을 하나 그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天(천)은 (1)하늘 (2)범 인도(印度)에서 모든 신을 통들어 이르는 말. 천지 만물을 주재 하는 사람, 곧 조물주(造物主)나 상제(上帝) 등 (3)인간세계보다 훨씬 나은 과보(果報)를 받는 좋은 곳. 곧 욕계친(欲界責), 색계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등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늘 ②하느님 ③임금, 제왕(帝王), 천자(天子) ④자연(自然) ⑤천체(天體), 천체(天體)의 운행(運行) ⑥성질(性質), 타고난 천성(天性) ⑦운명(運命) ⑧의지(意志) ⑨아버지, 남편(男便) ⑩형벌(刑罰)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하늘 건(乾), 하늘 민(旻), 하늘 호(昊), 하늘 궁(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흙 토(土), 땅 지(地), 땅 곤(坤), 흙덩이 양(壤)이다. 용례로는 타고난 수명을 천수(天壽), 하늘과 땅 또는 온 세상이나 대단히 많음을 천지(天地), 타고난 수명 또는 하늘의 명령을 천명(天命),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를 천연(天然),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이 곧 황제나 하느님의 아들을 천자(天子), 우주에 존재하는 물체의 총칭을 천체(天體), 부자나 형제 사이의 마땅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천륜(天倫), 타고난 성품을 천성(天性), 하늘 아래의 온 세상을 천하(天下), 천체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을 천문(天文), 하늘과 땅을 천양(天壤),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재주를 천재(天才), 하늘에 나타난 조짐을 천기(天氣), 하늘이 정한 운수를 천운(天運), 자연 현상으로 일어나는 재난을 천재(天災),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이 썩 좋은 절기임을 일컫는 말을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를 일컫는 말을 천양지차(天壤之差),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성격이나 언동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을 일컫는 말을 천의무봉(天衣無縫), 세상에 뛰어난 미인을 일컫는 말을 천하일색(天下一色),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르는 말을 천붕지통(天崩之痛), 온 세상이 태평함 또는 근심 걱정이 없거나 성질이 느긋하여 세상 근심을 모르고 편안함 또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을 천하태평(天下泰平), 하늘과 땅 사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을 이르는 말을 천지지간(天地之間), 하늘 방향이 어디이고 땅의 축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뜻으로 너무 바빠서 두서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 또는 어리석은 사람이 갈 바를 몰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일컫는 말을 천방지축(天方地軸),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오래 계속됨을 이르는 말을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사람이 함께 분노한다는 뜻으로 누구나 분노할 만큼 증오스러움 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음의 비유를 이르는 말을 천인공노(天人共怒), 하늘에서 정해 준 연분을 일컫는 말을 천생연분(天生緣分), 하늘이 날아가고 땅이 뒤집힌다는 뜻으로 천지에 큰 이변이 일어남을 이르는 말을 천번지복(天翻地覆), 하늘에서 궂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화평한 나라와 태평한 시대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천무음우(天無淫雨),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길이라는 뜻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떳떳한 이치를 일컫는 말을 천경지위(天經地緯), 천장을 모른다는 뜻으로 물건의 값 따위가 자꾸 오르기만 함을 이르는 말을 천정부지(天井不知),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열린다는 뜻으로 이 세상의 시작을 이르는 말을 천지개벽(天地開闢), 하늘은 그 끝이 없고 바다는 매우 넓다는 뜻으로 도량이 넓고 그 기상이 웅대함을 이르는 말을 천공해활(天空海闊), 하늘에 두 개의 해는 없다는 뜻으로 한 나라에 통치자는 오직 한 사람 뿐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천무이일(天無二日), 멀리 떨어진 낯선 고장에서 혼자 쓸슬히 지낸다는 뜻으로 의지할 곳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천애고독(天涯孤獨), 천진함이 넘친다는 뜻으로 조금도 꾸밈없이 아주 순진하고 참됨을 일컫는 말을 천진난만(天眞爛漫) 등에 쓰인다.
▶️ 明(밝을 명)은 ❶회의문자로 날 일(日; 해)部와 月(월; 달)의 합해져서 밝다는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明자는 '밝다'나 '나타나다', '명료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明자는 日(날 일)자와 月(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낮을 밝히는 태양(日)과 밤을 밝히는 달(月)을 함께 그린 것이니 글자생성의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밝은 빛이 있는 곳에서는 사물의 실체가 잘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明자는 '밝다'라는 뜻 외에도 '명료하게 드러나다'나 '하얗다', '똑똑하다'와 같은 뜻까지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明(명)은 (1)번뇌(煩惱)의 어둠을 없앤다는 뜻에서 지혜 (2)진언(眞言)의 딴 이름 (3)사물의 이치를 판별하는 지력(智力)으로 이치가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 (4)성(姓)의 하나 (5)중국 원(元)나라에 뒤이어 세워진 왕조(王朝)로 태조(太祖)는 주원장(朱元璋) 등의 뜻으로 ①밝다 ②밝히다 ③날새다 ④나타나다, 명료하게 드러나다 ⑤똑똑하다 ⑥깨끗하다, 결백하다 ⑦희다, 하얗다 ⑧질서가 서다 ⑨갖추어지다 ⑩높이다, 숭상하다, 존중하다 ⑪맹세하다 ⑫밝게, 환하게, 확실하게 ⑬이승, 현세(現世) ⑭나라의 이름 ⑮왕조(王朝)의 이름 ⑯낮, 주간(晝間) ⑰빛, 광채(光彩) ⑱밝은 곳, 양지(陽地) ⑲밝고 환한 모양 ⑳성(盛)한 모양 ㉑밝음 ㉒새벽 ㉓해, 달, 별 ㉔신령(神靈) ㉕시력(視力) ㉖밖, 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밝을 금(昑), 밝을 돈(旽), 밝을 방(昉), 밝을 오(旿), 밝을 소(昭), 밝을 앙(昻), 밝을 성(晟), 밝을 준(晙), 밝을 호(晧), 밝을 석(晳), 밝을 탁(晫), 밝을 장(暲), 밝을 료(瞭), 밝힐 천(闡),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꺼질 멸(滅), 어두울 혼(昏), 어두울 암(暗)이다. 용례로는 명백하고 확실함을 명확(明確), 밝고 맑고 낙천적인 성미 또는 모습을 명랑(明朗), 분명히 드러내 보이거나 가리킴을 명시(明示), 분명하고 자세한 내용을 명세(明細), 밝고 말끔함을 명쾌(明快), 밝음과 어두움을 명암(明暗), 명백하게 되어 있는 문구 또는 조문을 명문(明文), 밝은 달을 명월(明月), 분명하고 똑똑함을 명석(明晳), 세태나 사리에 밝음을 명철(明哲), 똑똑히 밝히어 적음을 명기(明記), 일정한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풀어 밝힘 또는 그 말을 설명(說明), 자세히 캐고 따져 사실을 밝힘을 규명(糾明), 사실이나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서 밝힘을 천명(闡明), 날씨가 맑고 밝음을 청명(淸明), 흐리지 않고 속까지 환히 트여 밝음을 투명(透明), 틀림없이 또는 확실하게를 분명(分明), 마음이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을 현명(賢明), 어떤 잘못에 대하여 구실을 그 까닭을 밝힘을 변명(辨明), 의심나는 곳을 잘 설명하여 분명히 함을 해명(解明), 의심할 것 없이 아주 뚜렷하고 환함을 명백(明白), 어떤 사실이나 문제에서 취하는 입장과 태도 등을 여러 사람에게 밝혀서 말함을 성명(聲明), 불을 보는 것 같이 밝게 보인다는 뜻으로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는 말을 명약관화(明若觀火),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이라는 뜻으로 사념이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명경지수(明鏡止水), 새를 잡는 데 구슬을 쓴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명주탄작(明珠彈雀), 아주 명백함이나 아주 똑똑하게 나타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명명백백(明明白白), 맑은 눈동자와 흰 이라는 말을 명모호치(明眸皓齒) 등에 쓰인다.
▶️ 乃(이에 내, 노 젓는 소리 애)는 ❶지사문자로 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고 막히는 상태(狀態)를 나타낸다. 빌어 위의 글을 받아 밑의 글을 일으키는 조사(助詞)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乃자는 '이에'나 '곧', '비로소'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乃자의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乃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새끼줄이 구부러진 것과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乃자에 '노 젓는 소리'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를 휘두르는 모습을 표현했던 것으로는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과는 관계없이 乃자는 일찍부터 '이에'나 '곧'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참고로 乃자는 한때 '너'나 '당신'의 다른 말로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乃(내, 애)는 성(姓)의 하나로 ①이에, 곧 ②그래서 ③더구나 ④도리어 ⑤비로소 ⑥의외로, 뜻밖에 ⑦또 ⑧다만 ⑨만일(萬一) ⑩겨우 ⑪어찌 ⑫이전에 ⑬너, 당신(當身), 그대 ⑭이와 같다, 그리고 ⓐ노 젓는 소리(애) ⓑ노 저으며 내는 소리(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에 원(爰)이다. 용례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아비 또는 이 아비라는 뜻으로 자기를 가리켜 일컫는 말을 내부(乃父),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아비 또는 이 아비라는 뜻으로 자기를 가리켜 일컫는 말을 내옹(乃翁), 어머니가 자녀에게 네 어미 또는 이 어미라는 뜻으로 자기를 가리켜 일컫는 말을 내모(乃母),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네할아비 또는 이 할아비라는 뜻으로 자기 자신을 일컫는 말을 내조(乃祖), 임금이 신하에게 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를 일컫는 말을 내공(乃公), 수량을 나타내는 말들 사이에 쓰이어 얼마에서 얼마까지의 뜻을 나타냄을 내지(乃至), 그이의 아들을 내자(乃子), 그이의 딸을 내녀(乃女), 그이의 손자를 내손(乃孫), 그이의 처를 내처(乃妻), 그이의 언니를 내형(乃兄), 나중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를 내종(乃終), 필경에나 마침내를 종내(終乃), 문무를 아울러 갖춘다는 뜻으로 임금의 덕을 높이고 기림을 일컫는 말을 내무내문(乃武乃文), 틀림없이 꼭 망하고야 만다 또는 패멸을 면할 길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필망내이(必亡乃已) 등에 쓰인다.
▶️ 散(흩을 산)은 ❶회의문자로 㪔(산; 산산히 흩다, 분산시키다)과 月(월; 肉, 고기)을 더하여 토막고기, 나중에 흩어지다, 흩어지게 하다의 뜻에도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散자는 '흩어지다'나 '헤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散자는 㪔(흩어지다 산)자와 ⺼(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㪔자는 몽둥이로 '마'를 두드려 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흩어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래 '흩어지다'라는 뜻은 㪔자가 먼저 쓰였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肉자가 더해진 散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기를 두드려 연하게 만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제사 때 올리는 산적(散炙)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散자는 이렇게 고기를 다지는 모습에서 '흩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지만 흩어진다는 것은 헤어짐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후에 '헤어지다'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散(산)은 ①흩다(한데 모였던 것을 따로따로 떨어지게 하다), 흩뜨리다 ②한가(閑暇)롭다, 볼일이 없다 ③흩어지다, 헤어지다 ④내치다, 풀어 놓다 ⑤달아나다, 도망가다 ⑥절룩거리다 ⑦비틀거리다, 절룩거리다 ⑧나누어 주다, 부여(附與)하다 ⑨나누어지다, 분파(分派)하다 ⑩뒤범벅되다, 뒤섞여 혼잡하다 ⑪쓸모 없다 ⑫천(賤)하다, 속되다 ⑬어둡다, 밝지 아니하다 ⑭엉성하다, 소략하다 ⑮겨를, 여가(餘暇) ⑯산문 ⑰가루약 ⑱거문고 가락 ⑲문체(文體)의 이름 ⑳술잔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흩어질 만(漫), 풀 해(解),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거둘 렴(斂), 모일 회(會), 모을 취(聚), 모을 집(集)이다. 용례로는 글자의 수나 운율의 제한이 없이 자유롭게 기술하는 보통의 문장을 산문(散文), 바람을 쐬기 위하여 이리저리 거닒을 산보(散步), 가벼운 기분으로 바람을 쐬며 이리저리 거닒을 산책(散策),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을 산재(散在), 흩어져 어지러움을 산란(散亂), 어수선하여 걷잡을 수 없음을 산만(散漫), 모여 있지 않고 여럿으로 흩어짐을 산개(散開), 때때로 여기저기서 일어남을 산발(散發), 머리를 풀어 엉클어 뜨림 또는 그 머리 모양을 산발(散髮), 흩어져 없어짐을 산일(散佚), 흩어져서 따로 떨어짐을 산락(散落), 퍼져 흩어짐으로 어떤 물질 속에 다른 물질이 점차 섞여 들어가는 현상을 확산(擴散), 안개가 걷힘으로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흔적없이 사라짐을 무산(霧散), 따로따로 흩어짐이나 흩어지게 함을 분산(分散), 일이 없어 한가함을 한산(閑散), 떨어져 흩어짐이나 헤어짐을 이산(離散), 밖으로 퍼져서 흩어짐을 발산(發散), 모음과 흩어지게 함 또는 모여듦과 흩어짐을 집산(集散), 증발하여 흩어져 없어짐을 증산(蒸散), 놀라서 마음이 어수선 함을 경산(驚散), 탐탁지 않게 여기어 헤어짐을 소산(疏散),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자연 속에서 한가하게 즐긴다는 말을 산려소요(散慮逍遙),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를 이르는 말을 산재각처(散在各處), 바람이 불어 우박이 이리 저리 흩어진다는 뜻으로 엉망으로 깨어져 흩어져 버린다를 이르는 말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넋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지다라는 뜻으로 몹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를 이르는 말을 혼비백산(魂飛魄散), 이리저리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다를 이르는 말을 지리분산(支離分散), 구름이나 안개가 걷힐 때처럼 산산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됨을 이르는 말을 운소무산(雲消霧散), 헤어졌다가 모였다가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이합집산(離合集散),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흩어진다는 뜻으로 별안간 많은 것이 모이고 흩어진다를 이르는 말을 운집무산(雲集霧散)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