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스물 일곱 번째로 서울 연산군묘(燕山君墓)를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서울 연산군묘
연산군묘(燕山君墓)
위치 :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
조성 연도 : 1454년(단종 2), 1512년(중종 7), 1537년(중종 32)
묘의 형식 : 묘역
▷ 연산군묘(燕山君墓) 이야기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이다. 연산군묘는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분의 형식으로,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연산군, 오른쪽(동쪽)이 거창군부인의 묘이다. 연산군은 1506년(중종 1)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묘가 조성되었다가, 1512년(중종 7) 거창군부인이 중종에게 연산군묘 이장을 요청하여 양주 해촌(현 도봉구 방학동)인 지금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이후 1537년(중종 32) 거창군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묘 옆에 묘가 조성되었다. 묘에는 문석인 2쌍,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표석을 배치하였고, 묘 근처에는 재실을 두었다.
▷ 연산군묘역(燕山君墓域) 이야기
이곳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묘가 같이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는데, 임영대군은 세종의 명으로 자식이 없던 태조의 후궁 성비 원씨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를 모셨다. 1454년(단종 2) 의정궁주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땅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맡았다. 이후 임영대군의 첫째 아들 오산군이 맡았고, 오산군의 묘 역시 이 근처에 조성되어 오산군파에서 묘를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1512년(중종 7)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이 강화 교동에 있던 연산군묘를 자신의 외할아버지 땅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달라고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이로 인해 원래 있던 의정궁주묘 위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묘가 조성되었고, 의정궁주묘 아래에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묘가 조성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 연산군(燕山君) 이야기
연산군(재세 : 1476년 음력 11월 7일 ~ 1506년 음력 11월 6일, 재위 : 1494년 음력 12월 29일 ~ 1506년 음력 9월 2일)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연산군은 1479년(성종 10)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손에서 자랐고, 실제로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랐다. 1483년(성종 1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성종의 능지문(陵誌文, 왕과 왕후의 생애와 행적을 쓴 글)을 읽다가 자신이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았고 윤씨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연산군은 즉위 초 빈민을 구제하고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 제조에 힘을 썼고, 종묘에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는 등 왕으로서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김일손 등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사화 이후에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경연(經筵)을 폐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잔혹한 형벌을 시행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결국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의 훈구세력들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유배지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이야기
거창군부인 신씨(재세 : 1476년 음력 11월 29일 ~ 1537년 음력 4월 8일)는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씨(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딸)의 딸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488년(성종 19)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궁 밖 정청궁(貞淸宮)에서 생활하였다. 1537년(중종 32)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이야기
의정궁주 조씨(재세 : ? ~ 1454년 음력 2월 8일)는 본관이 한양인 조뇌의 딸로 태어났다. 1422년(세종 4) 상왕 태종의 후궁으로 정해져 입궁하려고 하였으나, 곧바로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이후 세종은 특별히 의정궁주라는 호칭을 내렸으며, 1454년(단종 2)에 세상을 떠났다.
▷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이야기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구문경과 혼인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공주의 칭호를 없앴다.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 이씨(세종의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연산군 7) 휘순공주와 혼인하여 능양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관직이 취소되었다. 반정 이후 아버지 구수영이 중종에게 휘순공주와의 이혼을 요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첫댓글 폭군이라고 표석도 엉망이네..ㅋ
사람들이 묘에 해꼬지를 계속 한답니다...
불운의 아이콘 연산군..
요즘의 누가 연상되곤 합니다
@베라루빈 전 연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