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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집회 48,1-4.9-11
복 음 : 마태 17,10-13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순교 영성
-희망과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순교는 신자들이 숨 쉬는 공기다”
(martyrdom is the air that Christians breathe)
교황님 강론 중 한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나름대로 믿는 이들 모두가 순교적 어려움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의 순교영성은 믿는 이들의 일상처럼 생각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자작 좌우명시 마지막 연이 일상화된 순교영성을 보여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그러나 우리의 순교영성은 어둡고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고 믿음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을 따르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여 우리는 하루하루 부정적 비관의 고해인생이 아니라 긍정적 낙관의 축제인생을 살아갑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제가 성인 축일에는 반드시 확인하는 생몰生沒 연대에 제 나이와의 비교입니다.
성인은 만49세를 사셨고, 말 그대로 가난과 고통의 파란만장한 순교적 삶이셨습니다.
가르멜 수도회 개혁에 반대하던 완화 가르멜 수도자들게 납치되어
9개월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고,
1590년 수도회 분쟁이 재현되어 1591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지만
병에 걸려 그해 9월말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긴 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2월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 바로 오늘 12월14일 선종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천상탄일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란 명칭에서 보다 시피 평생 십자가를 진 순교적 삶에 충실한 성인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이자 시인으로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참 깊고 그윽한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사랑의 산 불꽃’같은 불멸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희망은 신자들이 숨 쉬는 공기와 같다”
역시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희망과 기쁨 중에 자발적 순교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순교적 삶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 역시 ‘기쁨의 사도’라 칭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움 중에도 희망과 기쁨의 순교적 삶을 산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을,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삽니다.
바로 승천한 전설적 인물,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 졌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집회서의 말씀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한 우리의 엘리야에 대한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제공하는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바로 이런 엘리야의 재림을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의 재림으로 믿었습니다.
바로 그 근거는 오늘 집회서에 근거합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48,10).
바로 이런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인데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는
다음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회개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하여 메시아 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배척을 당했고, 메시아인 예수님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봐도 참으로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남북한의 분단도 아픔이지만 국가브랜드에서 나타난 우리나라의 현실도 아픔입니다.
함께 평화 통일하여 나아가도 부족할 터인데 얼마나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분열, 남남분열의 적나라란 현실인지요.
-국가 브랜드 조사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 50개국을 대상으로
상품신뢰도, 정부신뢰도, 문화력, 국민친근감, 관광선호도, 이주-투자 매력등
6개 카테고리를 기반으로 평가한 결과 순위는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캐나다, 순이었고 우리나라는 27위로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나라입니다.
남북의 분단도 뼈아픈 현실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북한 주민들은 한국인 보다 12-13살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고,
북한의 인구는 한국의 절반 수준, 북한의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한국의 1.9%, 1인당 국민 총소득은 한국의 3.9%, 북한의 대외 무역 총액은 한국의 0.2%,
참으로 언젠가는 함께 통일하여 가야할 형제 나라인데 작금의 남북관계의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러나 절망, 원망, 실망은 금물입니다.
철저한 회개와 반성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대림시기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고 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의 재림인 세례자 요한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또 우리를 찾아오시는 대림의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의 순교적 삶에 충실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결코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무지로 인해 세례자 요한 같은 이들을,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하는 악순환의 반복이 있어선 안 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각자 주어진 순교적 삶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저희를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의 어느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질문은 이것이었지요.
“성장하는 동안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수감자들의 90%가 공통으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너 같은 녀석은 결국 교도소에 갈 거야.”라는 소리였습니다.
말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래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점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의 저자인 괴테의 말에서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대로 대접하면 결국 그보다 못한 사람을 만들지만,
잠재력대로 대접하면 그보다 더 큰 사람이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멈추지 말고, 그 이면까지 바라보고 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은 늘 겉모습에서 멈추고 맙니다.
이렇게 닫혀 있는 시선으로 변화도 만들 수 없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만 멈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또 놀라운 기적을 행하셔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 것이라며 평가절하하면서
예수님을 제거할 마음만 품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미리 온다는 것을 예언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요.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이 왔고, 그 후에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우리 곁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을까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만 벗어나지 못한다면
절대로 주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을 열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도’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게 되어 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 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도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명료화 교육은 계속됩니다.
당시 유다인들이 메시아 오심과 관련해서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믿음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반드시 그분이 오심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 준비시키는
전령이요 선구자로서 엘리야를 먼저 보내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믿음은 말라키 예언서 마지막 부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키 3장 23-24절)
대림 특강 시즌을 맞아 본당으로 강의를 가면, 나름 작은 절차가 있더군요.
본당 교육 분과장님께서 먼저 마이크를 잡으십니다. 그리고 강사를 소개하고 강론대로 모십니다.
소개도 안했는데 불쑥 제가 나가서 강의를 시작하면 좀 쌩뚱맞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몇 년 전 한 본당 교육분과장님께서 저를 소개하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 교육분과장님이 개그콘서트를 자주 보시는 분 같았습니다.
“오늘 강의해주실 분은 살레시오회 양상국 스테파노 신부님이십니다^^”
사실 이름이 엘리야는 아니었지만 엘리야와 똑같은 역할을 하신 분이 예수님에 앞서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에 군중들에게
‘저분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라고 소개하신 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름만 달랐지 엘리야 예언자의 화신이자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러
이 땅에 온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몰라본 유다인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유다인,
결국 그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 유다인들을 크게 질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오 복음 17장 12절)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동급 인물인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키며,
당신께도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언하십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7잘 12절)
세례자 요한의 무고한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헤로데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방조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과 백성들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에 대한 외침에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역시 세례자 요한의 운명과 동일한 길을 걷게 됩니다.
두 분은 동일한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결코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사악한 헤로데의 경솔한 행동이나 헤로디아의 증오로 인한 희생물이었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은 물론 생애 전체, 죽음까지도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만든 그릇의 용도와 크기만큼 채우며 산다.
전삼용 요셉 신부
1491년, 한 스페인 함장이 지구의 굴레를 계산하던 중 숫자를 몇 개 틀렸습니다.
지구 둘레는 대략 40,000킬로미터이지만, 그는 약 24,000킬로미터로 계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 계산은 틀렸다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계산을 확신했습니다.
분명 거꾸로 돌아도 중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앞섰기에 지구를 실제보다 작게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사벨라 여왕도 그가 틀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손해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3척을 내어줍니다.
콜럼버스는 계속 착각 속에 자신의 계산상 자신이 발견한 대륙은 인도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난 주민들을 인디언이라 불렀고 그 제도를 인도 제도라 칭했습니다.
그의 거대한 실수 때문에 발견된 신대륙 덕분으로
스페인 정부는 그 후로 200년 이상을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참조: ‘세계를 바꾼 49가지 실수; 결과가 좋았던 실수’, 빌 포셋, 생각정거장]
콜럼부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못한 발견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에 대한 그릇이 작았던 것입니다.
반면 이사벨라 여왕은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에 대한 그릇크기가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신 나갔다고 손가락질 받는 콜럼부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이 잘 살 수 있는 축복의 그릇을 누구보다 크게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 만드는 자기 자신의 크기만큼 채워주십니다.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재산 차이를 조사해보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부자들이 돈을 덥석덥석 잘 받았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아, 이렇게 나에게 돈이 굴러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 사람이 뭔 꿍꿍이속으로 나에게 돈을 줘?’라며 생각했습니다.
부자들은 돈이 채워질 그릇이 이미 컸던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작은 그릇이 채워져 있기에
더 이상 채워질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어떤 그릇을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타볼산에서의 변모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모하신 이유는 당신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을 보고 제자들이 엘리야에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메시아가 오시기 이전의 엘리야의 필요성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무엇을 바로잡는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는 하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의 부와 자주독립을 이뤄줄 분으로 여겼습니다.
잘못된 그릇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담기기 때문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이 들어갈 벽난로를 불에 타는 재료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아를 세속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여기는 이들은 다 이처럼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저도 세속적인 성공을 바랄 때는 사제가 되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제를 담을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되려면 먼저 그 무엇을 담을 그릇부터 만들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야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우리 존재 이유는 성전이 되기 위함이지 돈주머니나 권력주머니가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담기 위해 크고 작은 각자의 그릇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든 그릇만큼만 내 안에 그것이 담깁니다. 그릇의 용도는 다 다릅니다.
영원한 그릇이 되고 싶다면 영원한 것을 담을 재료로 그릇을 만들어야합니다.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최효경 수녀
이미 전해진 주님의 메시지를 귀담아 듣지 못하고
헛헛하게 대림 1주, 2주 촛불의 불을 밝히고 있는 것 같은 요즘이다.
불을 밝히고는 있는데...
성탄 구유는 어떻게 꾸밀까? 성탄 선물은 무엇을 준비할까?
성탄 성야미사 전례에 빠진 것은 없나?
여러 가지로 분주한 마음 안에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
그것 때문에 불안하다.
별을 보고 동방에서 경배하러 온 박사들보다
더 가까이, 더 많이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 성서학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아기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이미 시작된 구원의 메시지를 알아듣고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해마다 차려지는 구유에 아기예수님 없이
산타할아버지의 선물과 캐롤만이
성탄 밤을 채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