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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함께하는 고통/고찬근 신부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비우고 낮추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짧은 인생을 고통 속에 마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사랑했던 인간과의 사랑도 잠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군중들이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믿음이 아닌 이기심과 배신으로 점철된 인간 세상의 쓴맛을 보셨습니다.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그만큼 누구보다 고통이 더 크셨을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주실 줄 알았던 그 예수님이 고통 속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苦海), 예수님도 바다를 없앨 수는 없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고통의 바다에 푹 잠겨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고통스런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어 위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힘들다면 고통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누리게 되는 기쁨을 주려하셨으나, 세상에 만연한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그것이 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통이란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제철에 나오는 음식을 잘 먹는 것이고, 신토불이 즉 제 땅에서 난 음식을 먹는 일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이론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 특별한 약을 먹는다거나, 먼 곳으로 요양 가는 것이 아니라, 병을 얻은 원인에서 병을 치유하는 방법도 함께 찾으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지요. 그렇습니다. 고통은 인생의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욕심 때문에 고통받고, 어떤 사람은 옳은 일을 하려다 고통받고, 또한 거의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고통 속에 인생을 살아갑니다. 고통의 이유야 어쨌든 고통받는 사람은 자기 옆에 함께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때 위로를 받습니다. 고통이 고통을 치유해주는 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과 함께 고통받으심으로 고통받는 인간을 위로하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고통받는 모든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도록, 누구보다도 더 순수하고, 누구보다 더 억울하고, 누구보다 더 가엾은 고통의 길을 가셨습니다. 죄 하나 없이, 오직 사랑 때문에, 가장 고독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모든 고통은 위로받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면 우리의 고통은 견딜만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고통 속에 우리의 고통은 녹아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나만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삶의 포기라는 문턱까지 가야 했을 때라도, 나보다 먼저, 나보다 더 큰 고통의 길을, 나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돌아서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도 나의 고통으로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함께하는 고통’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산] 반대자를 부끄럽게 하는 그리스도의 승리/하춘수 신부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반어적으로, 이곳은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의 도시입니다. 그리스도교, 회교, 유대교의 성지가 공존하면서 오묘한 긴장감이 맴도는 도시요, 온통 검은 옷과 검은 모자, 수염 기른 이들이 배회하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무엇인가 인간적이고 정겨운 풍경이라든가, 화사함 더구나 평화로움이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이웃에 별 관심이 없고, 권위적인 모습 일색입니다.
예수님 시대도 오늘날 이 도시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위적인 바리사이들과 대사제들, 나라의 권력자들과 로마의 통치자들 사이에 오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둥지를 틀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주님께서 들어가십니다. 헛된 권위와 욕망으로 점철된 도시로 주님께서 정면으로 관통하시는 순간에, 군중은 온통 환호하며 그분을 맞이합니다. 그분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 가십니다.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 도시의 높은 건물과 권위적인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우스광스럽기까지 합니다. 바위를 향해 던진 달걀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미리 아시면서도 굳이 그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으로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사양하고 싶으셨지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이 끝이 아니었고,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승리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승리주의 혹은 성공주의에 빠져 살아 갑니다.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남을 꺾고 내가 올라가고자 하는 이런 생각은 적어도 복음적이지는 않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우들도 이 성공주의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건강하고 출세하고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십니다. 십자가 지긋지긋한 고통을 통해서 승리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자들이 부끄럽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불편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그토록 회피하고 싶어 하는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지평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과 승리만 기억하고,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교우들에게도 많은 유혹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향해 살려다 보니 어려움도 많습니다. 조금 더 편히 살고 낙관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지 기억합시다. 바위같은 세속권력에 희생되신 주님의 어리석어 보이는 순종을 우리도 실천합시다.
세상이 참 어지럽습니다. 그리스도 정신, 잊지 마소서!
[전주]사랑의 절정 십자가/성태수 이나시오 신부
사순시기의 절정인 성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전례시기입니다. 우리는 이 한 주간 동안
파스카 신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의 공생활이 바로 이 성주간에 기념하는 극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완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 곁에 머무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한 베드로,
세상 권력의 상징인 빌라도 총독,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하고
환호하였으나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친 군중들,
예수님을 조롱했던 군사들,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키레네 사람 시몬,
로마의 백인대장, 십자가 곁에 있었던 여인들, 아리 마테아 출신의 요셉 등 어쩌면
우리도 이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길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다봅니다.
온 몸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그 고통스러운 수난을 겪어내시는 예수님,
그 길이 사랑이고 생명이고 구원이시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이 십자가를 알아듣지 못하면 아직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머릿속에서 따르는 길이 아니라 가슴에서 온 몸으로 보듬고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극복하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그 고통을 이겨내어 인간 승리를
보여주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고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시고
겪어내십니다. 고통을 어떠한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그 답을 보게 됩니다.
저의 작은 체험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약 2년 전 건강 검진에서 콩팥에 종양이 있다는 판정을 받고 서울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수술이 얼마나 위험한 수술인지 몰랐지만 수술 시간이
임박하면서 생사의 갈림길에 제가 서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본당
신부님이 오셔서 병자성사를 주셨습니다. 간호사의 마지막 기도를 받고 수술실에 들어갔고,
깨어났을 때는 중증 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입원해 있으면서 머릿속에서 맴돌던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옴을 느꼈습니다. 이때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던 때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건강을 조심하며 살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온몸으로 십자가를 보듬고 기쁘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우리 죄 때문에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뿐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바칠 희생 제사의 의미를 앞당겨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성주간에 우리의 묵상주제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셨습니다.
공생활 동안에 보여주신 사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은혜로운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산] 부활의 희망으로/백성환 신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며, 오늘부터 우리는 사순 시기의 절정인 거룩한 성주간을 지내게 됩니다. 성지 주일은 예수님께서 당신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성지가지 축성과 행렬을 통하여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미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뜻에 완전히 순명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길이 바로 인간과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의 표지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의 예수님, 완전한 실패자의 모습. 그렇게 사랑과 기적을 베풀어 주었건만, 그 인간들로부터 철저히 버림 받으십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직접 가르쳐 주었던 제자들과 백성들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오.”라는 말을 듣고 있는 예수님의 고통과 좌절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실패와 같은 현실 속에서도 당신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거룩한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실패가 아닌 구원을 향한 희생이었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도 부활의 희망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수난 복음은 군중의 상반된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주님을 열렬히 환호하던 모습에서 그분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내모는데 동참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도 예수님을 외면한 체 십자가에 대못을 박고 있거나, 제자들처럼 결정적일 때 배반을 하거나, 자신의 이익이나 편의에 따라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실패와 좌절, 고통이나 어려움 보다는 항상 승리나 영광 등을 바라는 것이 우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마음도 십자가의 길보다는 부활의 영광만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길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그 영광은, 죽음을 이기는 승리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승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이웃을 향한 숭고한 십자가 사랑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주간을 맞으면서 주님 수난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당신 뒤에 있는 구세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구세주 뒤에 있는 당신 자신의 십자가와 함께 가는 것’이라는 말처럼 내 앞을 이끌어 주시는 구세주를 바라보며 부활의 희망으로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인천] 언제나 하느님을 1등으로/송준회 신부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에 우리는 가장 긴 주일 복음으로 수난복음을 읽습니다. 그러나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위해 일생을 사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삶은 세상적인 눈으로 철저하게 실패한 인생, 수난의 일생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인간의 역사를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던진 분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세상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무모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짧지만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년 1월에 세상을 떠나신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잘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세 번이나 넘어지는 좌절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패배는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와 함께, 특별히 삶의 좌절과 삶의 크나큰 무게에 눌려 쓰러져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삶의 고통 속에 숨 가쁜 이 순간이 나 혼자만 고통 받는 시간이 아닌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간이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사는 시간이 될 것 입니다. 지금 나를 넘어뜨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가장 삶이 고통스럽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당해낼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네 삶의 고통 중에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참으로 작은 고통에도 쉽게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내 자녀가 공부를 못하면 어떻게 하나,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잘 안 풀리면 어떻게 하나, 이러다 건강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등등 수없이 많은 걱정들이 우리를 시시각각 죄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죽음까지 각오하고 세상을 맞선다면 우리는 이런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목숨을 내어놓아도 아깝지 않는 일들이 몇 가지나 있습니까?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은 딱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하느님보다 내 자녀를 더 사랑합니다. 내 가족을, 내 건강을, 내 출세를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세상에 묶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묶인 우리들에게 해방을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군종] 한결같은 신앙/김혁민 신부
찬미 예수님!
제가 신학생 때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 되면 좀 더 멋진 나무 가지를 얻기 위해 나무 가지를 모아 놓은 상자를 철없이 이리저리 휘저으며 고르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어린 마음에도 참 이상하다고 여겨진 것은 바로 같은 주일 예절인데도 미사 전에 행렬을 할 때는 길에 겉옷을 깔고 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이하다가 조금 뒤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무섭게 외치고 있는 군중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도 극단적인 이러한 양면성의 모습. 이 모습을 성주간을 시작하는 우리들 모두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좋을 땐 그렇게도 환호하며 기뻐하다가도 조금이라도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수님을 외면하고 심지어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체험합니다. 또 성당 안에서는 오랜 시간 앉아 기도하면서도 성당 밖에만 나가면 어쩔 수 없는 나의 성향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습관을 포장하고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자주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의 언행에 쉽게 좌우되는 ‘인간의 신앙’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앙이란 곧 우리에 보여 주신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한결같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정성되이 함께 기도드립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도다.”
[춘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박우성 신부
오늘부터 사순시기의 정점인 거룩한 주간,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성지가지를 들었던 손들과 “호산나!”라고 환호하던 입들이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몰아갑니다. 환영하던 군중이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모습이 무섭고 두렵습니다. 지금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으로의 행렬을 하고 계십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으로 몰리어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군중들 가운데에는 예전에 예수님께 치유받고 구원받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군중심리에 이끌려 우리 구세주께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우리는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 당신 이외에 우리가 머물러 쉴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인성 안에서 고통을 받으셨고, 고통 받기를 원하셨는지를 바라볼 것입니다. 커다란 존경심과 경외심을 지니고, 누구의 죄가 그분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는지 헤아려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셨고, 모욕과 조롱과 배반을 감수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고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이 모든 고통을 받으셨다는 새로운 체험에 이르러서는 전율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새롭게 구세주 그리스도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자신이 그토록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고 당황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골똘히 묵상해 봅니다.
적어도 이 거룩한 성주간만은 구세주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체의 행위를 삼갑시다. 한 주간 만이라도 온갖 죄로 유인하는 헛된 생각이나 세속적인 오락을 멀리 합시다. 죽음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부활하시는 주님을 진심으로 찬미합시다!
“어두움을 가르는 광명이여, 오라!”
[부산] 마태 26,14-27,66./서공석 신부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지금 들은 것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수난사였습니다. 모든 복음서들이 수난사를 보도합니다. 하나의 수난이었지만,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사실을 겪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전하는 과정에 공동체들의 신앙 배경과 의도에 따라 이야기들은 약간 다르게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사는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예수님이 침묵 지켰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 복음서는 이사야 예언서가 말하는 학대당하는 의인(義人)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마태오복음서는 이 학대당하는 의인을 연상하면서 수난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고 이사야서가 예언한 그 의인을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 안에 보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나타냅니다. 사형을 언도하고 형을 집행한 사람은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일차적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라고 전했다는 일화와 빌라도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 복음서는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빌라도는 말합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이 말에 유대인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라고 답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제부터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 민족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가졌다는 말과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기도,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은 구약성서 시편(22,1.18)에서 가져 왔습니다. 그 시편은 온갖 역경을 딛고 하느님을 가르치던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적시어’ 예수님의 목을 축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시편(69,21)에서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의인이 역경에서 하느님에게 부르짖는 기도 시편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구약성서를 이렇게 인용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성서가 이미 예고한 의인의 죽음이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당신은 목숨을 잃은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 특히 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분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의미를 구약성서에서 찾아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면서 인간 생명의 의미를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사실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서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10,10).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을 위한 요건을 채워서 그 대가를 얻어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 안에서 행동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순리(順理)입니다. 예수님은 인과응보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병들고, 불행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이 벌주신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인과응보의 원리에 준해서 우리의 불행을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불행의 원인을 하느님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용서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믿음과 가르침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고,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그분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강자들 앞에서도 스스로를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존이 위협 당할 때도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우리를 고치고 살리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생명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또 “아버지의 뜻이...이루어지게”(마태 6,10)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일을 실천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같이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자녀 되어 사는 길에 몰두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 실천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곳에 우리의 허세와 우리의 욕심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우리가 그 자비를 실천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의 욕심을 접고, 베풀어서 이웃을 섬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생명이 회복되고 활력을 되찾는 곳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사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 지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로마 군인 백인대장 및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교의 세상에 지각 변동과 같은 이변을 일으켰고, 이교도인 백인대장과 다른 이들은 예수님 안에 과연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교였고, 그분의 죽음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예수님이 수난 가운데 지니셨던 자세와 마음을 우리 안에 심어주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본문 앞 단락은 어떤 여인이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을 알아보고, 그분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매우 값진 향유를 그분 머리에 부은 이야기입니다. (6 – 13절)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 이스카리옷이 은돈 서른 닢으로 스승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14 – 16절)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난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이 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수난 중에 보이신 자세를 묵상하는 것은 수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난 전에 먼저 성찬례를 제정하십니다. (17 – 35절) 예수님의 수난이 무엇인지 관상하려면 이 성찬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단락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파스카 준비 (17 – 19절), 배반 선포(20 – 25절), 파스카 식사 (26 – 30절), 베드로의 부정으로 시작되는 제자들의 부인 (31 – 35절). 예수님의 행위와 관련된 동사들은 그분의 삶을 요약합니다. “팔아넘겨지다” (21.23.24절),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시다”(26절), “제자들에게 주시다” (26.27절),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시다”(27절).
이 지상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세상의 빛’ 이신 예수님은 제자들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의 어둠과 죄 안으로 들어와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십니다. 그분은 아시면서도 당신이 제자에 의해 ‘팔아넘겨지도록’ 두십니다. (21절) 예수님은 빵과 잔을 들고 먼저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십니다. 이 행위는, 그분이 겪으셔야 할 수난이 그분 편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라기보다는, 하느님 편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선물에 대한 감사의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는 당신 전부를 주시고, 이제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그분을 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이 사랑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데리고 겟세마니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36 – 46절) 이 본문에서 우리는 수난 앞에 예수님이 지니셨던 내적 자세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과의 마지막 밤을 잠에 소비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밤을 온전히 기도에 바칩니다. 그분은 세 차례에 걸친 기도를 통해 ‘근심과 번민’ 에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인간적인 고통에서 아들의 신뢰로 넘어갑니다. 히브 5, 7 – 10은 이 밤에 예수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 5, 7 – 8)
공생활 시작인 세례 때에, 그리고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후에 있었던 영광스런 변모 장면에서 아버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마태 3, 17; 17, 5)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공생활의 절정인 수난의 순간에 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 를 부르며 자신을 철저히 넘겨드립니다. (마태 26, 39. 42 참조) 이 밤에 예수님은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을 하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넘기는 첫 번째이자 가장 완전한 본보기가 되십니다. 그 고통스런 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복된 밤이었습니다. 이 밤의 기도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욕과 조롱을 받으며 사랑하는 아버지께 자신을 넘기면서 숨을 거두십니다. (26, 47 – 27, 66)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합니다. 인간의 판단과 어떤 조롱과 모욕도 그분이 성경에 예고된 당신의 길, 사랑받는 아들로서 고통 받는 종의 길을 가시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속한 분,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수난 중에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이사 50, 6) 예수님이 수난 당하시는 모습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는데, 바오로는 서로 갈라져 있는 필리피 공동체에 일치를 위해 예수님의 이런 자세를 지니도록 권고합니다. (필리 2, 5 – 11)
묵상 (Meditatio)
주님, 수난 복음 안에서 당신을 배반하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죽음에 처하게 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인간적인 지혜로는 당신의 수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의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주십시오. 당신이 수난 때에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 우리의 수난을 겪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기도 (Oratio)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 2, 5)
임숙희(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성서영성 신학박사 과정)
[인천]우리는 손에 무엇을 들고 있나? / 이재석 토마스 데 아퀴나스 신부
[묵상 1]
봄을 맞는 꽃나무들이 활짝 피어나 봄의 싱그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때이다. 활짝 핀 꽃잎들과 나무들이 그 곁을 지나가는 이들을 이천년 전 예루살렘 시민들이 했던 것처럼 환영하는 모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꽃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큰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인가? 봄 바람이 일면 꽃잎들이 길에 떨어져 신랑신부의 앞길을 축복해 주는 꽃가루인양 지나가는 이들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 준다.
이들 봄 꽃나무들이 두 팔을 벌려 지나가는 이들을 환영하듯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나무가지를 꺾어 환영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무엇으로 오시는 주님을 마중해야 할까? 오늘 수난복음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손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며 우리가 무엇을 챙겨들고 마중나가야 할 지 생각하게 되었다.
대사제들 - 예수님의 몸값 은전 서른 닢을 들고 있었다.
예수님 - 마지막 만찬 상에서 축복의 빵을 들고 들고 계셨다.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 -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 중 하나(요한 복음엔 베드로) - 칼을 지님(대사제의 종의 귀를 짜름)
유다스 - 빈손, 예수님의 몸값 은전 서른 닢을 성소에 내동댕이 침,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목 매달아 죽을 튼튼한 줄)
빌라도 - 물 한 대야(군중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인증할 물)
예수님의 오른 손 - 강제로 들리게 한 갈대
병사들 -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때림
키레네 사람 시몬 -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 짐
병사들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 옷가지들을 나누기 위해 주사위를 던짐
십자가 곁에 있던 사람 중 하나 -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께 드림
아리마태아 사람 부자 요셉 - 예수의 시신을 염할 고운 베, 향료
위의 수난복음 내용에서 주님과 주님 곁에 있던 많은 이들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묵상하면서 이웃에게 기쁨이나 축복을 나누기 위해 들고 있는 물건들과 해를 끼치기 위해 들고 있는 물건들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음을 묵상해 보게 되었다. 이천년 전 나무가지를 들고 주님을 환영했던 이들의 마음과 주님께 고난을 선물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물건들을 들고 있던 이들의 마음은 서로 많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오늘 어떤 것들을 손에 들고 주님을 마중하고 있나 묵상해 보자. 그리고 이웃을 위한 축복의 손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해 보자.
[묵상 2]
요즈음의 우리들은 누군가 다가올 때 그 옛날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환영할 만한 분이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아마도 우리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환영을 받았던 분은 1984년에 한국을 방문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셨을 것이다. 여의도 광장을 가득 메운 신자들이 그분을 충심으로 환영했었으니까. 가끔은 오늘 기억해드리는 예수님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치유해 주실 분이 나타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램을 갖게 된다. 나의 다가감에 대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환영하는 편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묵상 3]
오늘 수난복음을 묵상하며 정치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정치의 속성으로
첫째, 야합을 들 수 있다. 헤로데와 빌라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서로 가깝지 않았던 이들이 선이 아닌 일에 손을 마주 잡게 된 것이었다.
둘째, 타인을 배제함 - 예수님이 왕이시라면 지위가 흔들릴 사람들 많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
하려 했다.
셋째, 여론에 민감하다. 요즈음 정치인들 선거철을 앞두고 여론의 향배에 대해 관심이 많이 있다.
[묵상 4]
수난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몇 가지 묵상주제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악인이나 선인이나 함께 취급 당한다 - 죄수 두 사람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둘째, 의인의 용서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셋째, 이익의 공동분배 - 주사위를 던져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넷째, 홍보매체를 이용함 - 십자가에 죄목을 적어 자기들이 처형하는 일에 정당성을 홍보하였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선을 향한 지혜와 악을 나누기 위한 지식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는 이야기임을 묵상하며, 참된 지혜를 주님께 청해보는 주님 수난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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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강론을 모아주셔서 저희들이 편하게 한자리에서 읽을수가 있어 감사드립니다.
우아^-^
감사드림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