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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바꾼 스승의 가르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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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23년(1492) 8월 19일, 고향 밀양으로 낙향하여 지내던 점필재 김종직이 삶을 마쳤다. 소식을 전해들은 성종은 철조(輟朝)하고 사부(賜賻)ㆍ사제(賜祭)하며 시대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던 한 인간에 대한 예를 표했다. 봉상시(奉常寺)에서도 제자 이원(李黿, ?~1504)이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정하는 게 좋겠다는 시의(諡議)를 올렸고, 그렇게 정해졌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正心之學]’으로 자기와 같은 후진들을 이끌어 주었다는 최고의 의미를 담은 시호였다. 그런데 김종직의 「졸기(卒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달려 있다.
무슨 곡절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김종직이 죽고 난 뒤, 성종 23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신(大臣)과 대간(大諫) 사이에서 ‘문충’이란 시호를 둘러싼 논쟁이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쪽은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이끌고 있던 의정부였다. 봉상시에서 올린 시의(諡議)를 보면, 김종직을 공자와 같은 성인(聖人)에 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文)이란 글자도 도덕박문(道德博聞)으로 풀었는데 정주(程朱)처럼 도통(道統)을 전한 자가 아니라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안침(安琛)ㆍ홍귀달(洪貴達)ㆍ남세주(南世周) 등이 예전에도 문충의 의미를 도덕박문으로 해석한 적이 있고, 한번 내린 시호를 바꾸는 것이 타당치 않다는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호는 결국 ‘문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김종직의 시호 문제가 발발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성종 23년 12월 14일이었다. 공교롭다고 한 것은, 바로 그날 무관치 않아 보이는 두 개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는 앞서 말한 김종직의 시호 논란이 불거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성균관 생원 이목(李穆, 1471~1498)이 방면된 것이다. 오전엔 김종직의 제자 이목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했더니 오후엔 이목의 스승 김종직의 문제가 일어났다. 그건 우연이었을까, 우연이 아니었을까?
성종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는 어린 유생이 감히 원로대신을 능욕했다는 것을 문제 삼아 의금부로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의금부에 잡혀 온 이목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우의정 허종(許琮)을 비롯하여 이조 판서 홍귀달 등등이 나서서 언로가 막혀서는 안 되니 젊은 선비의 광견(狂狷)으로 보아 너그럽게 용서해 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그리하여 열흘 만인 12월 14일 방면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간귀’라는 치욕적인 비난을 받은 윤필상은 물론 유자광과 같은 대신들은 앙앙불락(怏怏不樂)하여 쉽사리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신조차 능욕하며 날뛰고 있는 젊은 사류의 기세를 꺾어 놓기 위해 다른 길을 택했다. 바로 그들이 시대의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는 김종직의 시호를 트집잡고 나섰던 것이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고 벼르던 이목을 놓치고 난, 바로 그날 오후에!
마침내 그들의 의도대로 시호는 ‘문간’으로 깎아내려지고, ‘문충’이란 시호를 올린 이원은 파직되는 수난을 겪었다. 하지만 윤필상의 분노와 보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오사화 때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필상은 기어코 이목을 난언절해(亂言切害)의 죄로 몰아 참형에 처하고, 이원은 붕당(朋黨)의 죄로 몰아 곤장 80대에 원방부처(遠方付處)하게 만들었다. 또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에 벌어진 살육의 피바람은 겨우 살아남은 김종직의 제자들에게까지 미쳤는데, 유배지에서 끌려온 이원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실록에서는 저녁 무렵 잡아들여 초경(初更)에 바로 참형에 처했다고 전한다. 이원이 죽기 직전, 아마 유배되어 있다 끌려온 아비를 보러 자식이 찾아왔던가 보다. 아들을 본 이원은 이런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즐겁도다. 우리 아들 왔느냐? 보고 싶었다.[樂哉! 吾子來乎? 欲見.]”
살벌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달게 받아들였던 젊은 그들. 이원과 이목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正心之學]을 가르쳐준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자 하는 굳은 다짐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젊은 제자들이 죽임을 당한 뒤,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역사는 제자들이 굳게 믿고 지키고자 했던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숙종 34년(1708) 7월 22일, 숙종은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복시(復諡)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무려 215년 만의 일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잘못된 역사는 그렇게 바로 잡히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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