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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자신의 사주를 감명하다.
나는 기사년(1569, 선조2)(己巳年) 병자월(丙子月) 임신일(壬申日)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 사주(四柱)를 보고 운명을 점치는 사람)가 하는 말이,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지 않겠으며,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늘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하여 왔으나, 벼슬길에 나온지 17~8년 이래 전패(顚沛)와
총욕(寵辱)의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일찍이 보건대, 한퇴지(韓退之 퇴지는 한유(韓愈)의 자)는 마갈(磨蝎)로 신궁(身宮)을 하였고,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 또한 마갈로 명궁(命宮)을 하였는데, 갈(蝎)은 곧 묘(卯)이다.
아, 나 역시 묘시에 출생한 사람으로 그 문장과 기절(氣節)은 진실로 두 분에 미치지 못하나,
참소와 시기를 당하여 시대에 현달하지 못하고 억눌리며 버림받은 자취는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
부절(符節)을 맞추듯이 다름이 없으니, 아, 괴이한 일이다.
마침내 운명을 해명하는 글을 지어 스스로 풀어 보았다.
癸 壬 丙 己
卯 申 子 巳
내가 태어나던 해 / 我生之歲兮
금과 목이 상극하였지 / 金木相攻
다행히 수가 중간에서 구원하나 / 賴水中救兮
신수는 또 공을 맞았네 / 身數又空
생시 또한 범했구나 / 生時且犯兮
저 마갈의 궁을 / 磨蝎之宮
아, 하늘이 준 것이라 옮기기 어려워 / 嗟天賦兮難移
참으로 나의 운명 곤궁하도다 / 信我命兮厄窮
금이 목을 치려 하니 / 金欲攻木兮
몸이 항상 허약하고 / 身常弱羸
신수가 텅 비었어라 / 數之空兮
꾀하는 일마다 이루지 못하네 / 謀事而常不克遂
말을 함부로 하여 남들과 저촉하니 / 恣口業兮觸人
이 또한 마갈이 빌미가 되었구나 / 亦磨蝎兮爲祟
아, 하늘도 날 돌보지 않아라 / 嗟呼天不弔兮
어려운 액운 만나 죽게 생겼네 / 當艱厄以至死
깊은 밤 안상(案上)에 기대어 / 夜據枯梧兮
눈물 흘리며 생각하였네 / 涕泣以思
꿈에 만난 한 도인(道人) / 夢一羽人兮
헌걸차고 풍채 좋아라 / 晢而頎長
내 방에 들어와서 / 來入我室兮
명아주 평상 걸터앉아 하는 말이 / 踞我藜床
그대는 왜 운명을 원망하나 / 君奚怨命兮
그대의 수명 매우 길단다 / 君壽之孔長
일러주노니 하늘을 원망 마오 / 謂居勿怨天兮
하늘이 그대에게 문장을 주었잖나 / 天賦君以文章
육기(陸機)의 풍부함과 사영운(謝靈運)의 화려함에다 / 陸多謝麗兮
송옥(宋玉)의 염미함과 반고(班固)의 향기로움일세 / 宋艶班香
비단무늬 휘황찬란하듯 / 綺組煥爗兮
생황이며 종소리 성대히 울리듯하니 / 笙鏞鏗鏘
이것이면 족히 일세에 우뚝하거늘 / 特此足以高一世
고관 대작이 이를 어찌 당하랴 / 豈軒冕之敢當
저 큰 갓 쓰고 호령하는 이들 / 彼峨弁而呵呼
그 속 마음은 더럽기 그지 없다네 / 揆其中則糞穢
비록 저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혔지만 / 縱衣彼以斧藻兮
토우(土偶)를 싣고 종[奴]으로 우익하였도다 / 輿土梗而翼以徒隷
부귀만을 누리고 마멸되어 흔적 없으니 / 富貴而磨滅無紀兮
이 또한 그대 원치 않는 것이리 / 亦君之所不愒
내 이제 진재에게 아뢰어 볼까 / 今吾將告眞宰兮
그대의 태어난 해 바꿔달라고 / 易君之生歲
그래서 그대의 재주 빼앗고 / 奪君之才兮
그대의 총명 어둡게 하고는 / 闇君之慧
그대에게 높은 벼슬 내리고 / 高其爵位兮
총애와 권세 후히 내리면 어쩌겠나 / 厚其寵權
그러나 초목과 함께 성하곤 썩곤 하는 것은 / 薾然與草木而同腐兮
그대 반드시 원하지 않으리라 / 君必不願爲焉
아 군자란 / 嗟之君子兮
다만 하늘에 맡긴다오 / 只任之天
굳이 재주와 총록을 다 함께 얻으려면 / 固使才而得其寵祿兮
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이 앞서 얻었고 / 彼瞽史與腐令兮幾得乎先
저 창려의 유로와 / 唯昌黎之儒老兮
미산의 소선은 / 與眉山之蘇仙
출생한 때가 모두 마갈궁을 만나 / 時並丁乎磨蝎兮
다같이 고상한 문장 전파하였네 / 總高文之播傳
두 사람은 늘 고단한 운명을 원망했지만 / 蓋二子常怨其命隻兮
후세에 이름 전하는 데는 거리낌 없었다네 / 終不害夫千年
조양으로 쫓겨나고 / 潮陽之貶兮
무창으로 좌천된 것은 / 武昌之遷
출생한 시(時)가 좋지 않아서일 뿐 / 適妨之辰兮
운명이 험난한 건 아니라오 / 非命之邅
이제 그대의 이름은 / 今君之名兮
이 두 분과 등등하느니 / 肩於二子
원망하여 허물하지 말게나 / 莫怨以咎兮
평탄하면 가고 팬 곳엔 정지한다오 / 流行坎止
우유자적하게 인간 세월 보내고 / 優哉游哉卒歲兮
나중에 선계(仙界)로 날 찾아오소 / 終妨我於丹丘
푸른 난새 타고 / 駕靑鸞兮
붉은 규룡 몰고서 / 驂赤虯
오색 구름 찬란한 누각 / 吾與躋兮
나와 함께 올라보세 / 五城之樓
이 말 마치고 사라지니 / 言訖不見兮
나는 잠이 깨어 일어났네 / 我寤以起
쓸쓸히 생각하노니 / 悄然而思兮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구려 / 言猶在耳
도인은 진정 날 속이지 않으리니 / 信羽人之不我欺兮
내 마음 상쾌하기 그지없네 / 心愉然而怡怡
우리 옥황상제 뜻을 따라 내 스스로 우유자적하리라 / 從吾皇兮自適其適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얼 의심하랴 / 樂夫天命乎奚疑
※ 허균 (許筠, 1569(선조2년)~1618(광해군 10년 戊午年)50세의 나이에 사망)
癸 壬 丙 己
卯 申 子 巳
辛壬癸甲乙
未申酉戌亥
조선 중기 때의 문신. 허균이 속했던 집안은 당대 최고 명가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엽(曄)이며,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 김씨(江陵金氏)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며,
봉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 형조시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 ·
사복시정(司僕寺正)올 역임하였으며, 이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쫒겨났다. 그 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 · 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比)에 참여하였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가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 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 거리에서 광해군 10년 戊午年(1618)에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주고 있다.
허균을 둘러싼 이같은 의혹에 대해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이 옥사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광해군 10년 8월 24일 인정전 문에서의 국문은,
허균이 자신이 비록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국문을 끝으로 생을 마감한다.
첫댓글 時 日 月 年
癸 壬 丙 己
卯 申 子 巳
75 65 55 45 35 25 15 5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울해대운
12 庚辰 1580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계유대운
26 甲午 159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29 丁酉 1597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34 壬寅 1602 사예(司藝) · 사복시정(司僕寺正)올 역임하였으며
임신대운
36 甲辰 1604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
38 丙午 1606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
41 己酉 1609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
42 庚戌 1610 전시(殿試)의 시관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
신미대운
49 丁巳 1617 좌참찬이 되었으며
50 戊午 1618 戊午年(1618)에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時日 月 年
0 庚 壬 戊
0 辰 戌 午
양인용관격으로 재관이 함께 있어서 식상운도 소통할 수 있으니
안정된 명식이군요.
또 정관용신이 건재하는 한 비겁운에도 탈재의 우려가 없죠.
다만 양인이 회국하여 동해 있고 겁재까지 투출하여 최신왕한데
천간 인성운은 용신인 정관을 도기하면서 생신하여 더욱 신왕세를 초래하니 불리해집니다.
망사주인 신미대운은 병신합으로 재성을 잃고, 묘미합으로 정관용신이 손상되는군요.
무오년 무계합으로 칠살까지 합거되고,
임술월에 오술 재성 회국이 겁재 壬에 의해 해소되어 탈재가 일어나고,
경진일진이 겁재 壬을 생조하여 탈재를 심화시키는군요.
상신과 용신인 재관을 모두 잃어, 처참한 종말을 당한 결과가 되나 보네요.
겨울에 수왕하여 화토용 ... 사중무가 용인데 지지에 박혀 있으며, 운로가 또한 바쳐주지 않으므로 희비가 반반이라 ... 병신 기반될때 임기 탁수로 흉함을 당하는 ... 신자에 오 .. 합중충에 난리가 나는 ...
명조의 핵심은 년상 기토가 되고 + 병화는 깨졌다 붙었다 하는 기토 호위체계 입니다.
// 갑을목이 운에 개고생 .. 부친사망
// 기토의 뿌리가 사화인데 부실하니 ,
계유 임신 대운 관직이 되었다 망하고 되었다 망하고
// 신미대운 ...
병신합수 기토를 호위하던 병화를 없애버리고 + 묘미목 상관 을목이 동하여 기토를 치니까 ... 용신 파괴